부제 : 낙랑군 동부도위의 낙랑군은 발칸반도 트라키아(동예)의 좌측에 있었다.
부제 : 동예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다.
그동안 낙랑을 알아 보기 위해 다키언에서 출발해서 키메리언, 마사게태까지 분석해 보았다. 그래서 얻은 지식에 근거하여 숙고해보니, 동예는 흑해, 에게해에 접한 트라키아로 판단된다. 즉 스키타이, 사카의 일원인 우리 개념으로는 예맥족인 Thraco-Cimmerians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을 거듭하여 아나톨리아를 거쳐 발칸반도, 더 나아가 중부유럽, 이태리 북부 알프스지역, 북유럽의 Jutland(조나국, Cimbri), 프랑스의 Gaul족 (켈트족)의 후예인 Franks (Sicambri)까지 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에서 터어키 아나툴리아에 있는 Sakarya river 이름도 사카족의 강이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I), (II)'의 글에서 동예에 대해 분석하며, 발칸반도 동쪽에 위치함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트라키아라고 단정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 단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발칸반도의 트라키아가 동예라 단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동예는 긴 창을 써서 보병에 능했다. 트라키아도 수렵을 하며 긴 창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트라키언의 긴창 모습 (자료 : 위키피디아)
2) 동예는 호신사상이 있다 했다.
트라키아 자료에서 호신사상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같은 스키타인인 동유럽의 다키언과 관계 있다는 중앙아시아의 Dahae, Hyrcania는 늑대 상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같은 스키타인, 키메리언으로서 낙랑조선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본 블로그 글, 'Massagetae, Dahae는 누구인가' 시리즈 참조). 그런데 Hyrcania는 Hycanian Tiger 즉 호랑이와 연관되어 유명하다. 즉 같은 Thraco-Cimmerians의 스키타인으로서 가진 호신사상이 공통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군의 곰과 호랑이 신화도 호신사상과 연관된다 판단한다. 따라서 트라키아도 호신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창해(지중해) 3국 중의 하나인 동예는 지중해의 일부인 에게해에 접해 있다. 이는 본 블로그 글,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I), (II)에서 이미 분석했다.
그런데 이런 추정 즉 동예가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라는 것은 또한 많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아래 동예에 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를 잠시 인용하자.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무렵 동예는 북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 남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로는 낙랑군(樂浪郡)과 접했다고 전한다. 인구는 2만여 호(戶)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인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예지역은 처음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한나라가 원산·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동예의 북부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전 82년 임둔군이 폐해졌고,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이 고구려족의 저항에 의해 요동으로 물러나게 됨에 따라, 옥저와 동예지역 7개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동부도위는 동예의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이어 30년 동부도위가 폐해짐에 따라 낙랑군에 귀속되었다. 낙랑군은 동예 각 읍락의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삼았다. 곧 재래 읍락의 족장들에게 읍락 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하게 하고, 낙랑군에서 통괄해 간접지배를 행하였다. 현후인 각 족장은 낙랑군 지배시기의 관리 명칭을 사용해 휘하의 사람들을 공조(功曹)·주부(注簿) 등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하였다. 삼로는 한 대(漢代)에 향촌에서 풍속을 관장하던 장로(長老)에게 주어졌던 존칭이다. 그 뒤 읍락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낙랑군의 세력이 후퇴함에 따라 한군현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던 칭호들이 모두 소멸되었으나, 불내예(不耐濊)의 경우는 3세기 전반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대체로 2세기 후반 경에 동예의 읍락들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동예지역 읍락에 대한 지배는 옥저의 그것과 동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읍락 내의 일은 족장으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영위하게 하고, 족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예는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245년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 등이 동예를 공략하였다. 이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군(魏軍)에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위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는 피해를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
그 뒤 진(晉)나라의 쇠퇴와 함께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 예(濊)는 5세기 전반까지도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종족단위로서 존재하였다. 그 뒤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영역 내의 지역 간 교류가 증진되는 등의 정세진전에 따라 동예인은 고구려나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어 점차 융합되었다. 이에 하나의 종족적 단위로서의 존재는 소멸되어갔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 동예의 사회상을 보면, 산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해 생구(生口), 즉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보상하게 했는데, 이를 일컬어 ‘책화(責禍)’라 하였다.
또 같은 성(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하면 곧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옮겨갔다. 또 호랑이를 섬겨 신으로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성이란 곧 씨족을 뜻하는 것으로, 족외혼(族外婚)주 01)의 풍속을 말한다. 살인자는 죽였고, 도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는데, 이 축제를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동예인들은 긴 창을 만들어 사용했으므로 보병전에 능하였다.
동예사회는 생활상은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 지역 내의 경작지는 읍락구성원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을지라도 산림과 풀밭·하천 등은 읍락 공동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동예인은 농사를 주업으로 했으며,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견하는 등 그들 나름의 경험에 의한 농사관리를 도모하였다. 직물로는 마포(麻布)가 있었고, 누에를 길러 풀솜을 사용하였다. 반어피(班魚皮)·표범가죽·과하마(果下馬)·단궁(檀弓) 등이 유명했다.
이렇듯 동예사회가 농업을 주요한 산업으로 하고, 직조기술이 있는 등 상당한 정도의 생산력을 가졌고, 중국문물의 영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분화에 큰 진전이 없었던 것은 위만조선과 한군현, 고구려 등 주변의 강대한 세력들에 의한 잇따른 지배와 수탈이 주요 원인의 하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부여나 고구려의 제의(祭儀) 형태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통합된 모습을 보이지만, 동예와 삼한은 각각 천신(天神)과 호신(虎神), 또는 국읍의 천신과 별읍의 귀신(鬼神)으로 제사대상이 구분된다.
이를 동예에 적용시키면 불내예후와 같은 소연맹국의 지배자는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고, 읍락단위에서는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온 호신숭배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호신신앙은 단순한 읍락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무천(舞天)과 같은 의례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자료 : 동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 블로그, 카테고리 낙랑 부여 옥저 동예, 펌글 참조)
이 자료가 의미하는 다른 많은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위만조선은 동예를 포함했다
2) 위만조선을 멸한 한나라는 임둔군을 설치했는데, 동예의 북부지역이 속했다. (BC 108)
3) 임둔군이 폐지(BC 82)된 후,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다 (BC 75).
4) 2세기후반 고구려에 속했다가, 3세기 중반 위의 관구검, 낙랑태수, 대방태수 침략시 위에 항복했다.
5) 3세기 중반이후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아래 속하게 되었다.
6) 3세기 전반시에는 동예는 북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 남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로는 낙랑군(樂浪郡)과 접했다
7)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AD 313)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8)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영역 내의 지역 간 교류가 증진되는 등의 정세진전에 따라 동예인은 고구려나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어 점차 융합되었다.
즉 3세기 중반까지 낙랑군 (낙랑군 동부도위)은 동예의 왼쪽에 있었다. 즉 낙랑군은 아래 지도의 발칸반도 중앙, 다키언 지역, Dardania (대방군 지역?)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의 발칸반도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기원후 4세기의 로마 발칸반도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그리고 위만조선이 동예(트라키아)를 포함하였다 하니, 아래 지도(BC 150)에서 로마 공화국은 마한과 진한의 일부 (또는 마한)를 포함한 것이다.
기원전 150년경 발칸반도 지도
BC 6년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 낙랑군 (낙랑태수)의 서쪽에 있는 온조왕 시기 초기 백제는 Illyria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동예 북부지역에 임둔군을 설치했으니, 이 발칸반도 지역에 한나라의 한(漢)이 들어간 지명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한수, 한산, 한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수는 다뉴브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만 조선의 끝인 동해는 동예가 접한 흑해, 에게해가 될 수 있다. 광개토태왕 시 '동해고'는 흑해, 에게해를 말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백제 초기의 위례성과 한산의 위치를, 로마사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해 보자.
로마사 자료에서 위례성의 가능성이 있는 Illyria, Dalmatia지역에서는 바로 앞의 글에서 언급한 Sirmium 이외에 보다 남쪽 아드리아해에 가까운 Salona가 있다.
우리는 백제의 건국5설 중에 진번지간 설이 있는데, 그 설명에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산지 10년만에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고 기록되었다 한다. 따라서 바닷가에 가까운 Salona에 대해 알아 보자.
위의 지도에서 우리는 Salona가 Dalmatia지역의 아드리아 해변가, Jadro강의 하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BC 3c에 그리스인에 의해서 상업 중심지로 건설되었다 한다. BC 33년, Augustus에 의해 정복되고, Illyria와 Dalmatia의 수도로 정해졌다 한다. 그전에 로마 공화국에 의해 BC 78년 정복되었다 한다. 즉 마한이 BC 78년에 정복한 땅을 온조가 인수한 정황이다. 몇년후, 아우구스투스는 다뉴브강부터 아드리아해안에 이르는 전 지역을 장복하는데, Illyria지방으로 알려지고 수도는 Salona로 했다고 한다. 그후 지역이 넓어져 두 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Dalmatia와 Illyria로 나누었는데, 수도는 Salona로 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Salona was an ancient city located at the estuary of the river Jadro in present-day Solin, a suburb of Split on the Adriatic coast of Croatia. It became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Dalmatia in 9 CE. Before the Romans Salona was a settlement of the Dalmatean, an Illyrian people who lived on the shore of the Adriatic. During the 3rd century BCE, Greek colonists from the island of Issa founded an emporium (trade centre) on the coast north of Salona and another one to the south. In 117 BCE the Roman general Metellus Macedonicus invaded Salona and finally in 78 BCE it was permanently conquered. About 33 BCE, during Augustus' reign, Salona became a Roman colony.
A few years later, Augustus conquered the entire region from the Danube to the Adriatic coast. This newly conquered area came to be known as the province of Illyria with Salona as its capital. however, the province was too big and too challenging to be managed by a single governor and, therefore, Augustus decided to split Illyria in two: the southwestern half being named Dalmatia with Salona remaining as its capital. During this time the city flourished and acquired all the characteristics of an important Roman city: defensive walls, a theatre, an amphitheatre for 15,500 spectators and a forum. In 170 CE, during the time of Marcus Aurelius, a new wall enclosing all three sections of the city was built and the population is estimated as around 50,000. "
(source : Salona,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Balkhans, 펌글 팜조)
온조왕 시기에 AD 13년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는 기록이 있다. Augustus의 Illyria, Dalmatia 지역, 남북으로 나누기와 같은 현상이다. 또한 Augustus는 이 도시를 성곽화하여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공중 목욕탕, Amphitheatre, 등 로마의 특징을 갖추어 나갔다. (아래 자료 참조). 이 Salona 도시 위로 Jadro river가 있는데, 여기서 도시로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한 수로 공사를 Augustus때 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흔적이 아래 그림이다.
Salona의 수로 유적 (source : Wikipedia)
"After the conquest by the Romans, Salona became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Dalmatia[5] because it sided with the future Roman Dictator Gaius Julius Caesar in the civil war against Pompeius and Marcus Licinius Crassus of the First Triumvirate. Martia Iulia Valeria Salona Felix (the full name of the ancient city) was founded probably after the Roman civil wars under Julius Caesar. The early Roman city encompassed the area around the Forum and Theatre, with an entrance, the Porta Caesarea, on the north-east side. The walls were fortified with towers during the reign of Augustus.[6] The early trapezoidal shape of the city was transformed by the eastern and western expansion of the city. The city quickly acquired Roman characteristics: walls; a forum; a theatre; an amphitheatre – the most conspicuous above-ground remains today; public baths; and an aqueduct.[7] "
(source : Salona,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Illyrians, 펌글 참조)
AD 170년에 Marcus Aurelius황제때, 도시를 두르는 새로운 성벽이 세워져, 약 5만명을 수용할 정도였다 한다. 성벽은 길이가 4km로 두께는 1.9-2.5미터에 달했다 한다. 적어도 90개의 Towers가 있었다 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 기록은 없다.
"The construction of the Salonitan city walls took several centuries. The earliest part of the city was surrounded by walls as early as the second century BC. During the Pax Romana the city expanded to both east and west.[2] During the reign of Emperor Marcus Aurelius around 170 A.D., under the constant threat of Germanic tribes, the east and west suburbs were included in the walls, which were fortified with at least 90 towers. Some parts of existing buildings were used in the extensions to the walls, thus making them integral. The total circumference of the elliptical shape of the walls was approximately 4 km (2.5 mi), with varying width from 1.9 to 2.5 meters (6.2 to 8.2 ft).[2]"
(source : Salona,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Illyrians, 펌글 참조)
City wall in Salona, Croatia (source : Wikipedia)
단 백제에서는 책계왕 시절 (AD 286-298) 위례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공교롭게 책계왕 시기와 유사한 재임기간의 로마 Diocletian황제(286-305, East)는 Salona에서 태어났다 하며, 은퇴후 이곳에 궁전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은퇴후 궁전을 지었다는 것은 수긍하기가 힘들고, 그전에 있던 왕궁이 아닌가 한다. 위례성으로 수도를 삼았을 온조왕 당시 지은 궁궐인지도 모른다. (아래 그림 참조)
책계왕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AD 286) (삼국사기, 자료 : 책계왕, 나무위키)
"It was the birthplace of Emperor Diocletian. ....Salona had a mint that was connected with the mint in Sirmium and silver mines in the Dinaric Alps through Via Argentaria. When the Roman Emperor Diocletian retired, he erected a monumental palace nearby. This massive structure, known as Diocletian's Palace, became the core of the modern city of Split."
(source : Salona,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Illyrians, 펌글 참조)
Amphitheatre 유적 (Salona) (source ;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Diocletian Palace reconstruction (source : Wikipedia)
이상으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Salona가 위례성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바닷가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진번지간 건국설의 내용에 부합한다.
그리고 온조왕 이후 책계왕 시 유일하게 위례성 수리 언급이 있는데, 당시 동로마황제 Diocletian가 Salona에 태어나서 여기에 궁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Augutus황제시 이곳에 성벽을 쌓고, Salona 도시에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해 수로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수도로서 기능을 하였다고 하는 만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Augutus는 주변 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지역이 넓어져, Illyria와 Dalmatia의 두개 남북지역으로 나누었으며, 수도는 Salona로 했다고 했다. 온조왕 시기 AD 13년에 민가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이와 매칭된다.
그리고 Salona위로는 Jadro강이 존재한다. 즉 하남위례성이 Salona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난 글에서 알아 본 Sirmium은 온조왕 시기에 옮긴 한산일까?
여기서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살펴 보자.
"Syrmia (Serbian Cyrillic: Срем, romanized: Srem; Croatian: Srijem) is a region of the southern Pannonian Plain, which lies between the Danube and Sava rivers. It is divided between Serbia and Croatia. Most of the region is flat, with the exception of the low Fruška gora mountain stretching along the Danube in its northern part."
(source : Syrmi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칸유럽, 첨글 참조)
즉 Syrmia 주변은 모두 평지인데, 단 낮은 산인 북쪽 다뉴브강에 따라 뻗어 있는 Fruska Gora를 제외하고이다. (Fruska Gora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본 블로그, 카테고리, Illyrians, 펌글 참조)
Fruska Gora (source : Wikipedia)(By Jovancavic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9154955)
최고 높이 539미터의 낮은 산이다. 사람들이 용이하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Fruska Gora인데 Gora는 Mountains이라는 뜻이라 한다. Fruska는 Frankish라 하는데, 이후 Frank족이 여기를 남쪽 경계로 하기 때문이었다는 위키의 해석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부아악의 이름을 떠올린다. 악은 산맥을 의미하므로 '부아'와 매칭되면 된다. F는 ㅂ과 통한다. R은 흔히 사이에 들어가는 발음이다. 즉 Fuska는 부스카 -> 부카 -> 붘아 ->부아가 될 수 있지 않나 한다. 또한 부아악의 악은 산맥을 의미한다. 실제 이 높지 않은 산은 그러나 산맥을 이루고 있다. (아래 그림 참조)
Fruska Gora의 위성사진 (자료 :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472596)
온조왕 시기에 10명의 신하들은 한산에 있는 부아악에 올라가 주위 지형을 살폈다 한다. 즉 한산이 언급된다. 따라서 Sirmium은 한산에 가까운 도시이다. 따라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옮긴 수도이며, 여기서 근초고왕때 371년 (북)한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376년을 왕성으로 지낸 곳이라 판단한다.
온조왕이 BC 5년 이곳에 옮기기 전년도인 BC 6년에 호랑이가 궁에 들어 오고 왕의 모후인 소서노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로마 자료에 의하면 BC 6년, Sirmium에서 지역 토착민의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 온조가 이곳으로 옮기기 전에 지역민의 저항으로 여겨진다. 특히 호랑이가 언급되는 것은 동예 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한산의 수도는 Sirmium으로 판단되며, 위례성은 Salona로 판단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자료는 책계왕 시기에 아차성, 사성(蛇城)의 구축 기록이다. 대방을 지원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친 백제는 이후 고구려와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북쪽에 아차성, 사성을 구축했다 한다. 사성에 뱀사자가 들어간다. Sava river (Saos river)가 사천, 즉 사수라 추정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위례성이 사천이라 했지마는, 북쪽지역의 사성은 Sirmium에 가까운 성이란 판단이다. 즉 Sava river에 있는 사성이란 것이다. 상기 지도에서도 이 북쪽 지역은 패수 즉 다뉴브강과 인접하고 Goths족이 있는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고구려가 북쪽에 있는 것이다.
그럼 책계왕 때 수축한 사성(蛇城)은 어디 있을까? Sava (Saos) River를 사천, 즉 사수로 추정되니, 사성은 이 강 어디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성이 Sava river에 있는 Siscia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지도에서 Sisca는 아드리아해에 가까운 Sava river에 위치한다.
"Siscia is described by Roman writers as a great town in the south of Upper Pannonia, on the southern bank of the Savus, on an island formed by that river and two others, the Colapis and Odra, a canal dug by Tiberius completing the island.[6] It was on the great road from Aemona to Sirmium.[7] According to Pliny the name Segestica belonged only to the island, and the town was called Siscia; while Strabo says that Siscia was a fort in the neighbourhood of Segestica;[8] but if this was so, it must be supposed that subsequently the fort and town became united as one place.
Siscia was from the first a strongly fortified town; and after its capture by Tiberius, in the reign of Augustus,[9] it became one of the most important places of Pannonia; for being on two navigable rivers, it not only carried on considerable commerce,[10] but became the central point from which Augustus and Tiberius carried on their undertakings against the Pannonians and Illyrians.
Tiberius did much to enlarge and embellish the town, which as early as that time seems to have been made a colonia, for Pliny mentions it as such: in the time of Septimius Severus it received fresh colonists, whence in inscriptions it is called Col. Septimia Siscia.
The town contained an imperial mint, which produced coins under a series of emperors between 262 and 383 AD.[11] .....
Siscia maintained its importance until Sirmium began to rise, for in proportion as Sirmium rose, Siscia sank and declined.[6]
(source : Sisci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발칸유럽, 펌글 참조)
위의 자료를 보면 Siscia는 Kupa river, Sava river, Odra river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배로 항해할 수 있는 강들이라서 요충지이며, 다리를 놓아 Sirmium까지 가는 길을 만들었다 한다. 즉 Siscia는 섬에 있는 것을 연결했다고 한다. 즉 Siscia는 섬에 있는 성이란 것이다. 그리고 262-383년사이의 로마황제가 발행한 동전에서 나타난다 한다. 책계왕 시기인 Diocletian 재위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Diocletian의 이 도시에서의 기독교 탄압이 언급된다. 즉 첵계왕 시기의 사성 수축을 함축한다고 판단된다.
Roman Ruins of Siscia (source : Wikipedia)
Fortress in Siscia (source : Wikipedia)
Old Bridge in Siscia (source : Wikipedia)
그런데 위 자료의 끝에 묘한 뉴앙스의 언급이 있다. 즉 Siscia는 Sirmium이 일어 나면서 쇠퇴한다는 것이다. Siscia는 Salona에서 결여된 사천, 즉 사수와 접한 곳이다. 삼국유사의 사천과 위례성 언급이 존중된다면 Siscia가 위례성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에 성곽이 있는 섬이란 점에서 사성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그동안 위에서 살펴 본 Sirmium은 한산이란 수도로 보이며, 바닷가에 가까이 있는 Dalmatia의 Salona가 수도로서 역할을 했으므로, 위례성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Salona에는 책계왕에 해당하는 Diocletian 황제의 궁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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