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부 부여 의려왕이 바다 건너 정복한 왜(倭)는 지중해 Sardinia 섬인가 ?

Chung Park 2021. 12. 16. 08:41

부제 1 : 백제 책계왕의 죽음은 서진(西晉)과 연나부부여 의라왕의 연합공격 결과인가? 

부제 2 : 5세기에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반달왕국은 고구려의 왜국 정벌인가?

 

 

성현식님의 글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중에서 '서부여(西夫餘)'가 언급된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성현식 님에 의해 알려지게 되어, 필자는 이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6) 서부여(西夫餘)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의려국(依慮國)의 왕인 의라가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에게 쫓기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倭人)을 평정하고 왕이 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을 연나부부여의 후손으로 보기도 한다."

 

(자료 : 성현식,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 스카이데일리,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의려국왕인 의라가 선비족 모용외에게 쫓기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나부 부여의 후손으로 본다고 했다. 필자는 앞글에서 연나부 부여의 위치를 연나라와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사보이 지방의 Kingdom of the Burgundians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411년이후 이 지역으로 왔다. 그 전에는 동쪽의 독일 Bavaria지역인 Worms(Frankfurt 남서쪽 60km)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아래 자료 참조)

 

"During the disorders of 411–413 AD, Roman usurper Jovinus established himself in Borbetomagus as a puppet-emperor with the help of King Gunther of the Burgundians, who had settled in the area between the Rhine and Moselle some years before. The city became the capital of the Burgundian kingdom under Gunther (also known as Gundicar). Few remains of this early Burgundian kingdom survive, because in 436, it was all but destroyed by a combined army of Romans (led by Aëtius) and Huns (led by Attila); a belt clasp found at Worms-Abenheim is a museum treasure. Provoked by Burgundian raids against Roman settlements, the combined Romano-Hunnic army destroyed the Burgundian army at the Battle of Worms (436), killing King Gunther. About 20,000 are said to have been killed. The Romans led the survivors southwards to the Roman district of Sapaudia (modern-day Savoy). "

(source : Worm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Burgundians, 펌글 참조)

 

 

선비족 모용외는  생몰 269-333시기의 인물로서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의려국의 왕인 의려는 3-4세기에 한창 선비족에게 몰릴 때의 부여족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들이 Alemannia에 공격을 받은 Burgundians이라고 추정하였다. (본 블로그 글, '반달족인 Burgundians은 북부여, 동부여인가?' 참조  https://blog.daum.net/lainfos/1535

 

 

반면 이들이  연나부 부여의 후손이라는 글귀는 다음에서 연유한다. 즉 서기 22년 동부여왕 대소의 종제가 만여명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하니, 고구려 대무신열제는 그를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연나부 낙씨 부여라 한다. (참고 자료 : 해천, '[홍익인간 326] 고구려 연나부 낙씨 부여 연대기') 이들은 이후 후한과 대립하다가 또한 후한과 우호를 맺다가를 반복하다가, 서기 120년경 개원의 서북으로부터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연나라 땅 가까운 곳에 이르러,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이룬 것으로 서술된다. 고구려와 후한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하며, 독립을 유지하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후한이 이때 준비한 부여의 옥갑 이야기가 등장한다. 

 

의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치고 왕이 되었다는 내용을 보다 자세히 아래 살펴 보자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에는 부여는 현도태수 왕흔에게 군량을 공급하여 주었다. 이때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먹어 이들  계부의 부자를 이때의 부여왕 간위거(재위 : 190년경-250년경)가 죽였다 한다. 간위거가 죽자 모든 가(加)들이 간위거의 첩의 아들인 마여(麻余)(재위 : 250년경 - 300년경)를 즉위 시켰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 (재위 300년경 - 342년)를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겨우 6세였다. 

 

서기 342년에 선비족의 모용외가 부여를 치니, 부여왕 의려는 은밀하게 아들 의라에게 나라를 맡기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이었으며, 이에 바다를 건너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살았다 한다. 

서기 343년 의려의 아들 의라가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모용외를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

(자료 : 해천(조홍근), '[홍익인간 326] 고구려 연나부 낙씨 부여 연대기', 원출처 : 데일리전북)

 

상기 해천님의 자료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나오는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바다를 건너간 부여왕이 태백일사에서는 '의라'라 했는데, 해천님의 자료에서는 의려국왕 '의려'라 언급하고, '의려'왕의 아들 '의라'는 옥저로 도망갔다가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했다고 했다. 

 

모용외의 연대도 약간 차이가 난다. 342-343년도는 모용외(생몰 269-333)가 아닌 모용황 시기로 판단된다. 여하튼 이러한 자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나부 부여의 일부가 선비족 모용부의 압박으로 바다를 건너가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에는 일치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직접 인용한 '홍익인간'님의 아래 내용을 보자 

 

"대소왕의 종제가 고구려에 투항하여 연나부 왕에 임명됨 : 연나부부여(서부여,낙씨부여)

이해 가을 7월에 대소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일러 말하기를

“ 우리 선왕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고 갈사국은 한쪽에 치우쳐 있어 안락하기는 하나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도다. 나 또한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여 살기를 도모하자” 라고 하였다.

드디어 옛 도읍의 백성 1만여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에서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살게 하였다. 또 그의 등에 띠같은 무늬가 있어 낙씨 성을 내려주었다.

그후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에서 *백랑산 계곡으로 옮겨갔는데 연나라와 가까운 곳이었다.


연나부 부여의 멸망 : 494년
고구려 21세 문자열제 명치 갑술년(CE 494)에 이르러 나라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연나부의 낙씨는 마침내 망했다.

출처 :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번역 가섭원부여기 799p~ 801p"

[출처] 대소왕 이후 부여의 역사|작성자 홍익인간

 

"연나부 부여 (CE 22~ 494) 왕과 행적

1세 대소의 종제 : 백성들과 고구려에 투항. 고구려는 왕으로 삼아 연나부에 살게함, 낙씨성을 하사 받음.


6세 의려 : 개원에서 연나라와 가까운 백랑산으로 옮김, 선비 모용씨에게 패한뒤 아들 의라에게 양위하고 바다를 건너가 왜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움

7세 의라 : 모용씨가 재차 침략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됨


잔존 세력은 고구려 21세 문자열제에게 나라를 바침. 그 일부가 부여 북쪽으로 옮겨가 두막루를 세움.

의려 or 의라왕이 왜국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는 의려 혹은 의려의 아들 의라가 왜국으로 건너간 사실을 전하고 있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의려국 왕이 선비 모용외에게 패한뒤 핍박당할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때 문득 "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의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의 부명에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 의려왕은 선비족에게 패하자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이 북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다. 이뒤 모용외가 또다시 침략하여 아국사람들을 약탈하였다.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 출처 :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1207p"

[출처] 대소왕 이후 부여의 역사|작성자 홍익인간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부여, 공유글 참조)

 

이러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연나부 부여가 남으로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 한국사와 중공지역 한국사를 주장하는 분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중공의 요하 남쪽을 주장해도 여기서 가까운 지역에 왜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가 주장하는 고구려가 있었다는 산서성의 서쪽에 연나부 부여, 서부여가 있었다면, 그 남쪽에 바다가 있는가? 다시 추정해야 한다. 

 

둘째, 필자가 주장하는 동부여의 지역 (411년까지 독일 남부 지역)에서는 지중해에 가깝다. 즉 론강을 타고 내려와 지중해 해구(서안평)인 마르세이유 근처에 도착하면 바다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코르시카섬이나 사르데냐섬이 있으며, 더 멀리는 카르타고가 있다.  과거 고구려 유리왕 시절의 협보가 내려와 '구사한국'(Corse, 코르시카)을 세운 경로와 유사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왜가 있었다거나 부여의 일부 세력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면 상기 기록을 증빙하는 자료가 된다. 

 

이들 연나부 부여는 선비족 모용부에 밀려 3-4세기 큰 고초를 겪다가, 41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정복되어 부용국으로 있다가, 결국 493년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필자는 앞의 글에서 이러한 연나부 부여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Savoy지방에 정착하다가(서부여, 고구려의 서쪽),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하고 멸망한 Kingdom of the Burgundians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하니, 이시기에 바다를 건너 즉 지중해로 가서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된 사례가 있나 살펴 보자.

 

Burgundians은 반달족의 일원이고, 반달족은 월지족으로 판단되는데, 이들은 중부 유럽에서 서진을 계속해  이베리아 반도까지 갔다가, 선비족인 Suebi족에 밀려 아프리카로 건너 간다. 그리하여 북아프리카에 반달왕국을 세운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나 이는 428년의 일로 상기 285년, 342년 사건과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3-4세기의 부여족의 이동을 살펴 보아야 한다. 

 

 

Sardinia는 BC 1500년부터 역사가 있으며, BC 227년까지 Punic War의 역사가 존재하나, 그 이후로는 456년 반달족이 점령한 역사로 껑충 뛰어 존재한다. 즉 BC 227- AD 456년까지의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BC 1500년부터 존재하는 역사로서는 매우 특이하다.  중간의 역사를 일부러 감추는 느낌이 든다. 이 빈 중간기간에 협보의 구사한국 역사가 있고, 연나부부여의 왜국 정벌의 역사가 있다. 

 

Corse (코르시카) 역사도, BC 238년 Punic War 역사이후는 5세기 Vandals족과 동고트족에 의한 침입의 역사로 건너 띈다. Sardinia와 유사한 역사 기록이다. 

 

로마와 Punic War에서 싸웠던 카르타고에 대해서도 유사한 역사 기록을 보인다. 3차 Punic War까지는 기록이 존재하나,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 로마의 제2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반달족의 침입한 456년까지 이렇다할 역사 기록이 없다. 단지 308년 Domitius Alexander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의심스러운 기록뿐이다. 아프리카에 있던 Domitius Alexander에게 로마 황제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한다. 전후 사정 이야기는 없다. Domitius Alexander는 거절하고 황제를 칭했다 한다. 그래서 311년까지 usurper로 존재했다는 기록이다. Domitius는 오늘날의 알제리아, 튀니지아, 리비아 서부, 그리고 Sardinia까지 통치했다고 한다. 당시 3두체제의 황제의 하나인 Constantine I과도 동맹을 맺은 것을 보면 상당히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세력 또는 일부 Sardinia는 285년 의려의 연나부부여가 이동해 간 세력일 수 있다고 본다. 로마사에서는 외침이 있을 경우 흔히 반란의 역사로 둔갑시키곤 한다. 

 

"Apart from the provinces in north Africa (today's Algeria, Tunisia and western Libya), Domitius Alexander also controlled Sardinia. At the time of his accession, he was already at an advanced age. There is evidence in an inscription (CIL viii, 22183) that Alexander and Constantine I allied themselves in opposition to Maxentius." 

(source : Domitius Alexand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arthage, 펌글 참조)

 

Domitius Alexander는 Phrygia태생으로 추측된다. Punic War의 주인공 Hannibal도 Phrygia 출신이다. 이솝우화의 이솝도 프리기아 출신이다. Punic War는 Phenician과 관련된 표현이다. 흔히 지중해의 섬들을 장악한 Phenicians은 Levant지역, 즉 이스라엘, 레바논 지역의 Canaaite라 하지만, 소아시아의 Phrygia지역을 포함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들이 sea peoples라 칭해지는 세력인데,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를 비롯해, 크레타섬, Rhodes island, Cyprus 섬, 그리스 남부 펠레폰네소스지역, 그리고 스페인 서부의 Baleares islands, 그리고 Sardinia, Corse, 이태리 남부의 시칠리아 섬이 이들의 관할 구역이었다. 필자는 이들이 도이(島夷)인 왜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왜의 임나, 가라가 시칠리섬의 Enna castle(임나성), 그리고 샤르데냐섬의 Caralis castle 또는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로마를 포위한 후, 남으로 내려가 시칠리아에는 직접 들르고, 태자인 Ataulf가 카르타고에 갔다 왔다고 했다. 위키자료는 이들이 왜 이 곳에 갔는지 모른다고 서술했다. 단지 카르타고에 간 것은 식량을 구하러 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즉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섬 등이 왜의 세력인 것으로 판단된다. 스페인의 동쪽에 있는 Balearia 제도(주산군도?)도 이들의 세력권에 있는데, 페니키아인들이 오기 전까지는 원주민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가죽옷을 입었고 하의를 입지 않고 있었다 한다. 즉 고대 역사서에서 표현되는 왜인의 복장인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반달족과 Alans족이 5세기에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카르타고에 세운 반달왕국이 이러한 모든 섬들을 정벌하고 통치한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장보고의 청해진이 시실리섬과 사르데냐섬에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백제의 멸망 시기에 터어키의 웅진백제는 백강 하구 기벌포 해전에서 패하자 의자왕의 아들인 왕자(풍)가 시칠리아 섬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 당시 백제와 왜가 한편이 되어 당나라와 신라에 대항하여 전투를 했다. 즉 시칠리아섬이 백제의 동맹국인 왜의 세력이 아닌가 한다.

 

반달족을 필자는 월지족으로 판단하며, Burgundians은 반달족 (Vandals)의 일원이다. 즉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반달족이 Burgundians 즉 부여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상기 연나부 부여의 바다 건너 왜국에의 진출이 그 전부터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부여족의 후손은 고구려 보다 백제에 가깝다고 하는 논리가 이와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반달족의 Gaiseric은 훈족의 아틸라가 북프랑스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위키 기록이 있었다. Burgundians이 부여족이라면 이미 고구려의 부용국이 된 부여가 고구려의 공격에 함께한 것일 수 있다. 즉 훈족인 고구려와 Gaiseric의 아프리카 진출이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Gaiseric 관련 서술에서 Goth족이 함께 한 것을 얼핏 내비치고 있다. 즉 아프리카로 건너갈 때 고트족이 함께 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Gaiseric은 아프리카에서 고트족, 반달족, Alans족 모두를 주도하고 있었다고 기술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Goth족이 고구려라고 추정한 바 있다. (본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참조)

 

"Crossing at the Straits of Gibraltar, Gaiseric led not only his Vandal brethren and army, but was likely accompanied by a contingent of Alans and Goths.[12] Once there, he won many battles over the weak and divided Roman defenders and quickly overran the territory now comprising modern Morocco and northern Algeria. His Vandal army laid siege to the city of Hippo Regius (where Augustine had recently been bishop and who died during the siege),[13] taking it after 14 months of bitter fighting. Gaiseric and his forces then began subduing the interior of Numidia.[14] A peace between Gaiseric and the Roman Emperor Valentinian III was concluded in 435,[15].......

 

In a surprise move on 19 October 439, Gaiseric captured Carthage, striking a devastating blow at imperial power, taking advantage of the fact that Aetius remained preoccupied with affairs in Gaul.[17] Classical scholar Stewart Oost observed, "Thus he undoubtedly achieved what had been his purpose since he first crossed to Africa."[18] Historian Chris Wickham argues that Gaiseric's conquest of Carthage presaged Rome's later collapse.[19] The Romans were caught unaware, and Gaiseric captured a large part of the western Roman navy docked in the port of Carthage. .....

 

Despite the blow to the imperial coffers caused by Gaiseric's seizure of African revenue and the corresponding grain supply, the Vandal king had no intention of depriving Italy of Africa's grain, but instead wished to sell it to the emperor for profit.[20] Meanwhile, his new status was that of Proconsularis and as such, Gaiseric made Carthage his new residence.[21] Inheriting an already economically efficient and effective state, the tax revenues from his new lands enabled the Vandal conqueror to construct a large fleet that challenged imperial control over the Mediterranean.[21] Gaiseric presided over a mixture of Vandals, Alans, Goths and Romans in Africa, relying on an ad-hoc administration under auspices of the imperial government to legitimize his rule.[22] Latin literary culture even flourished in Carthage.[23] 

 

Gaiseric besieged Panormus (Palermo, Sicily) in 440 AD but was repulsed.[24] Hunnic invasions into the lower Danube forced Constantinople to withdraw forces from Sicily to the benefit of Gaiseric. In a 442 treaty with Rome, the Vandals were recognized as the independent rulers of Byzacena and part of Numidia.[25] In 455, Gaiseric seized the Balearic IslandsSardiniaCorsica, and Malta, and his fleet soon came to control much of the western Mediterranean. During 455, the Roman emperor Valentinian III was murdered on orders of Petronius Maximus, who usurped the throne. Petronius Maximus also married Valentinian's widow, Licinia Eudoxia, and likewise wedded the imperial couple's daughter Eudocia to his own son; the latter had formerly been promised to Gaiseric's son, Huneric, which contributed a possible casus belli that was exploited by the Vandal king.[26] Gaiseric was of the opinion that these acts voided his 442 peace treaty with Valentinian, and on 31 May, he and his men landed on Italian soil.[27] 

(source : Gaiseric,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Burgundians, 펌글 참조 )

 

훈족, 고트족, 반달족의 유럽, 로마제국, 아프리카 침입 경로 (source : Wikipedia)

 

아울러 Corse, Malta 등에 동고트족이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고트족은 고구려로 필자는 추정한다. 그래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섬에 진출한 반달족의 그것이 고구려와 연관되지 않았나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후 이들 지역은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에 의해 모두 회복된다고 했다. 즉 Gaiseric의 반달족은 백제나 백제와 가까운 왜의 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평가하기를 Gaiseric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마제국의 붕괴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한다. (상기 자료 참조)  그래서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의 진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광개토태왕의 임나 가라, 왜의 정복에 이은, 장수왕의 2차 왜 정복이라 할 수 있으며, 한성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원대한 사전 작전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Corsica was frequented by migrant peoples and corsairs, notably Vandals, who plundered and ravaged at will until the coastal settlements fell into decline and the population occupied the slopes of the mountains. Rampant malaria in the coastal marshes reinforced this decision. Due largely to competition for the island from Ostrogoths Foederati who had settled on the Riviera, the Vandals never penetrated much beyond the coast, and their stay in Corsica was relatively short-lived, just long enough to prejudice the Corsicans against foreign adventurers on Corsican soil.

750 AD

 

In 534, the armies of Justinian recovered the island for the empire, but the Byzantines were not able to effectively defend the island from continuing raids by the Ostrogoths, the Lombards, and the Saracens. The Lombards, who had made themselves masters of the war- and famine-shattered Italian Peninsula, conquered the island in c. 725.

 

The Lombard supremacy on the island was short lived. In 774, the Frankish king Charlemagne conquered Corsica as he moved to subdue the Lombards and restore the Western Empire. For the next century and a half, the thus established Holy Roman Empire continually warred with the Saracens for control of the island. In 807, Charlemagne's constable Burchard defeated an invading force from Al Andalus.[3] In c. 930, Berengar II, king of Italy, invaded and subdued the imperial forces. Otto I vanquished Berengar and restored Corsica to imperial control in 965."

(source : History of Corsic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ea peoples, 펌글 참조)

 

 

"Malta remained part of the Roman Empire until the early 6th century AD.[7] The Vandals and later the Ostrogoths might have briefly occupied the islands in the 5th century,[11] but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to support this.[12] "

 

(source : History of Malt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ea peoples, 펌글 참조)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백제를 점령(475년)할 때, 부하들이 끝까지 추적하자 했으나, 장수왕은 백제의 뒤에는 왜의 야마토정권이 있다고 하며 계속된 추적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은 일제의 역사 왜곡의 잔재인지 모르지만, 야마토정권이 시실리, 북아프리카, 지중해 섬들에 있던 왜를 언급한 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 가서, 3세기의 연나부 부여의 의려왕이 바다를 건너 왜를 정복한 지역이 Sardinia지역일 수 있는 점이 한가지 더 있다. 3세기의 연나부 부여 즉 Burgundians은 독일 Frankfurt의 남서쪽 40마일 거리의 Worms에 수도를 두었었다. 그런데 이들 독일 남부 지역은 오스트리아, 이태리를 포함하여 Bavaria 지역이라 일컬어진다.

Bavaria의 어원에 대해 위키피디아 자료는 켈트족의 Boii(보헤미아지역)족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Barbarian에 대한 어원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말을 하지 못하는 중부 게르만족,  로마제국에 이르러서도 게르만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Bavarian은 역시 중부 게르만족 (Celtic Boii, Goths, Alemanni, Quadi, Marcomanni, Thuringians, Scirians, Heruli, Rugians)을 일컫는 말이었다. 즉 Bavaria 어원이 Barbarian 어원과 같은 것이다. 

 

 

"The history of Bavaria includes its earliest settlement by Iron Age Celtic tribes, followed by the conquests of the Roman Empire in the 1st century BC, when the territory was incorporated into the provinces of Raetia and Noricum. It became a stem duchy in the 6th century AD following the collaps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It was later incorporated into the Holy Roman Empire, became an independent kingdom after 1806, joined the Prussian-led German Empire in 1871 while retaining its title of kingdom, and finally became a state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in 1949.[5] .......

 

Contemporary Bavaria also includes parts of the historical regions of Franconia and Swabia.  ......

 

The Bavarians emerged in a region north of the Alps, previously inhabited by Celts, which had been part of the Roman provinces of Raetia and Noricum. The Bavarians spoke a Germanic dialect which developed into Old High German during the early Middle Ages, but, unlike other Germanic groups, they probably did not migrate from elsewhere. Rather, they seem to have coalesced out of other groups left behind by the Roman withdrawal late in the 5th century. 

These peoples may have included the Celtic Boii, some remaining Romans, Marcomanni, Allemanni, Quadi, Thuringians, Goths, Scirians, 

Rugians, Heruli. The name "Bavarian" ("Baiuvarii") means "Men of Baia" which may indicate Bohemia, the homeland of the Celtic Boii and later of the Marcomanni. They first appear in written sources circa 520."

 

(source : Bavari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German, 펌글 참조)

 

 

그런데 Sardinia 섬의 내륙지역에는 Barbarians이 살고 있었다고 위키 자료는 말한다. 즉 이들이 독일 남부 지역에 있던 연나부부여가 이동하여 바다를 건너 왜를 정복하고 세운 의려왕 세력이 아닌가 한다. 로마 황제 Diocletian은 292년 Corsica, Sardinia, Sicily, Malta 등을 정복했다고 기술된다. 그런데 Diocletian은 백제의 책계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298년 책계왕의 전사는 이러한 왜의 지역의 반격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며, 이들 왜 지역에 진출한 연나부 부여 세력의 반격일 수 있다고 본다. (아래 책계왕 관련 기록 참조)

 

The provinces of Corsica and Sardinia were incorporated into the Diocese of Italy by Diocletian in 292 AD, along with Sicily and Malta.......

 

Throughout this rule, Rome maintained an objective relationship with the province. The coastal regions of both islands were settled by Romans and adopted the Latin language and culture; however, the interior areas of Sardinia and Corsica resisted the Romans.[2] A variety of revolts and uprisings occurred: however, since the interior areas were densely forested, the Romans avoided them and set them aside as the “land of the barbarians”.[7] 

(source : Sardinia and Corsica,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ea peoples, 펌글 참조)

 

4세기에 다시 선비족 모용부의 재침에 의해 의라왕까지도 바다 건너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의려왕과 판박이 기록이다. 즉 이미 확보된 의려왕 세력에 의라왕이 합류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Barbarians이 Sardinia 섬의 내륙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Bavaria의 남쪽 해안이 아드리아 해안이므로, 이들 지역을 내려가 왜국을 정벌했다면, 그리스 남부 펠레폰네소스 지역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지역도 Dorians 즉 왜인 도이(島夷)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역시 다른 도이(島夷)지역의 역사 처럼, 기원전의 고대사는 상세하지만, 그 이후 모두 5세기로 건너 뛴다. 지중해의 모든 섬들이 같은 식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에 대한 언급이 조금 언급된다. 반달왕국이 5세기에 여기까지 진출했다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도 없다. 즉 의도적 역사 감추기가 아닌가 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연나부 부여의 이 지역 진출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없으니 단지 가능성의 추측으로만 언급한다. 

 

"After the partition of the Empire in 395, the Peloponnese became a part of the East Roman or Byzantine Empire. The devastation of Alaric's raid in 396–397 led to the construction of the Hexamilion wall across the Isthmus of Corinth.[1] Through most of late antiquity, the peninsula retained its urbanized character: in the 6th century, Hierocles counted 26 cities in his Synecdemus. By the latter part of that century, however, building activity seems to have stopped virtually everywhere except Constantinople, Thessalonica, Corinth, and Athens. This has traditionally been attributed to calamities such as plague, earthquakes and Slavic invasions.[2] However, more recent analysis suggests that urban decline was closely linked with the collapse of long-distance and regional commercial networks that underpinned and supported late antique urbanism in Greece,[3] as well as with the generalized withdrawal of imperial troops and administration from the Balkans.[4] "

(source : Peloponnese,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그리스, 펌글 참조)

 

 

상기 연나부 부여의 기록에서 의라는 진(晉)나라의 도윰으로 나라를 회복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 밝혀주는 유사한 기록이 백제 책계왕 사망기록에서 언급된다.  아래 기록에서 백제의 장인국인 대방군을 지원한 책계왕이 한(漢)과 맥(貊)의 침입에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나무위키에서는 국내 사학자들이 한(漢)을 낙랑군으로 해석하고 맥(貊)을 동예로 판단한다 하였다. 그러나 대방군을 도운 백제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간다. 한(漢)은 당시 서진(西晉)이라 했다. 맥(貊)은 연나부 부여가 아닌가 한다. 즉 연나부 부여의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찾았다 하는 기록과 매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대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책계왕 기록에는 298년인데, 상기 연나부 부여 기록은 342년이다. 그러나 모용외는 333년까지 존재한 기록을 고려하면, 342년 모용외의 침략에 의한 기록 연대는 착오일 수 있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책계왕 본인이 친히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당했다.

위 기록에서 한군은 중국, 즉 당시 서진 제국을 말하는데, 중앙정부 차원에서 백제를 침공했다기보다는 낙랑군 태수의 판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맥인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지만 이 시대 한사군이 고구려를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예로 해석하는 편이다."

 

(자료 : 책계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펌글 참조)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연나부 부여는 독일 남부지역에 있다가, 프랑스의 Savoy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독일 남부지역, 오스트리아, 이태리지역을 포함한 Bavaria지역 일부에 연나부 부여가 411년까지 있었지 않았나 추정된다. 

 

따라서 3-4세기 연나부 부여왕 의려, 의라 등의 왜국에의 진출은 지중해에 있는 왜의 세력으로의 진출로 추정된다. 지중해의 'sea peoples'에 대한 여러 자료에서 이들은 도이(島夷)에 해당하는 왜인으로 추정된다. 이후 5-6세기 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이나, 9세기 장보고의 청해진, 등을 고려할 때, 이들 지역은 왜의 세력권으로 판단된다. 

 

연나부 부여와 의려, 또는 의라가 이동한 지역은 Sardinia섬 또는 그리스 남부 펠레폰네소스 반도일 수 있으며, 백제 책계왕시의 한(漢)과 맥(貊)의 백제 침입은, 연나부 부여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찾은 전쟁일 수 있다고 본다. 로마 황제 Diocletian (백제 책계왕 추정)이 Sardinia, Corsica, Malta, Sicily 등을 292년 정벌했다고 하는 기록은, 이후 책계왕이 298년 연나부 부여와 서진의 반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다. 

 

지중해의 왜 세력에 대한 역사가 기원전 3세기의 Punic War 이후 기원후 5세기의 반달왕국의 침입때까지 공통적으로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이러한 추정의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로마사의  Domitius Alexander의 반란사 등이 연나부 부여의 왜국 정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고트족의 반달왕국 건설에의 참여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임나 가라 정벌에 이어, 2차로 왜국 정벌을 하여, 한성백제의 붕괴를 위한 사전 포석의 전략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