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일본 아베정부가 메모리 반도체에 쓰이는 불화수소를 수출규제한다고 하여 한일간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경제를 악용하는 사례의 하나이다.
문제의 발단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제시 강제 노동문제의 보상과 관련하여 한국에 있는 일본 기업의 자산 압류 가능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또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경제관계를 악화시킨 사례이다.
근래에 들어 정치적인 목적으로 경제를 교란시키는 행동은 민주국가에서는 미국 트럼트정부가 특별하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무차별적인 무역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비즈니맨 출신 대통령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행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그만큼 미국의 군사적인 위상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미국의 고립주의 먼로주의가 되살아 난 느낌이다. 즉 단기적인 면에서 미국의 경제에는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과거의 팩스아메리카나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에 대한 미국의 불이익은 앞으로 세월이 흘러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베가 이를 본받아 행동하고 있다. 즉 중국의 경제발전이 미국의 미래를 위협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전쟁이 발동 된 것같이, 한국의 경제발전이 일본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베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일본과의 경제협력으로 성장한 한국경제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상당한 변화를 한국경제에 초래할 것이다.
아베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한국 경제를 견제 하려는 본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이하게 수출규제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단기적인 감정적인 대응보다 냉철한 마음으로 장기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지금은 일본경제와 어느 정도 수평적인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다해도 주요 부픔에서 일본경제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에는 십년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것이 우선적인 조치이지만 그것도 2-3년을 잡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지혜스럽게 대처해야 한다.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자금으로 포항제철을 일으킨 것으로 기억한다. 따라서 포항제철은 일제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에 일조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 등도 모두 회수해서 일제의 강제 노동 피해자들을 보상하는데 써야 한다. 스위스은행에 있었다는 자금 등을 철저히 회수해서 피해 보상에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일제시의 만행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적인 보상 보다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외교정책이 더 지혜롭게 보인다. 그리고 그동안의 일본경제와의 협력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일본의 아베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면 계속 도발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남북경제가 통합되는 한국경제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계속 방해할 것이고, 미국의 강경파를 계속 충동할 것이다. 심사숙고하여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조선 멸망후 한반도와 중국대륙 또는 다른 어디의 조선인에 대한 착취와 만행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알겠지만 현재의 일본 열도의 일본이 그 일부 잔존세력인 것은 틀립없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만행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만행에 의한 역사왜곡 등을 밝혀내고 원래의 위치로 돌이켜 놓아야 하며, 그들의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것이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왜’에 대한 반감으로 현 일본을 대하는 것은 나는 반대한다. 왜내하면 역사적 ‘왜’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역사적 ‘왜’에 대해 현 일본과 동일시 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적 왜곡에 우리가 동참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재야 사학계가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이 현 중공땅에서 있었다는 주장, 임진왜란이 현재 미국 본토에서 있었다는 주장 등이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둘 모두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난 오히려 스페인, 포루투갈, 네델란드 등 구교세력이 연합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미주 중앙 J블로그 글, ‘임진왜란이 북미에서 있었는가?’ 참조) 그러나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을 당한 조선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명의 위치도 또한 그렇다.
현 중공땅의 동남해안에서 왜가 침입했다고 한다면, 스페인, 포루투갈, 네델란드 등의 세력이 동남아시아까지 크게 진출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식민지 진출세력으로 이러한 300척이상의 대 전단을 그것도 다국적 선단이 공격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유럽의 세력이 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다.
현재의 북아메리카 땅에서 있었다는 주장도 이러한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당시 유럽이 소빙하기라 먹을 것이 없어 해적들이 북아메리카로 습격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항해술로 이러한 먼 거리를 와서 공격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 임진왜란 발생해인 1592년보다 4년전인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까지 항해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그보다 훨씬 먼 거리인 북아메리카까지 와서 공격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동아시아도 아니고 북아메리카도 아니라면 스페인 네델란드 등의 구교세력이 침략할 수 있었던 지역은 지중해를 건너 서아시아가 될 수 있다. 당시 서아시아에는 오스만제국(1299-1922)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이 지역에서의 가능성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스페인에서는 60-70만명이 죽는 1차 페스트 전염병 (1596-1602)이 창궐했다. 따라서 많은 농민이 죽었다면 농사가 안되어 먹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고 이는 필히 해적질과 약탈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유명한 레판토해전은 스페인의 필립2세를 위시한 구교세력과 오스만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1571년에 있었다. 페스트가 창궐하기 전의 시기이다. 공교롭게도 오스만제국은 1566-1683년 사이의 시기를 Revolts, reversals, and revivals의 시기로 간주된다. 당시 임진왜란의‘왜’는 조선을 넘어 ‘명’과 인도까지 진출하려는 포부를 가졌다 한다. (한부울 님의 세계삼한역사 블로그 참조). 오스만제국의 오른쪽에는 ‘명’으로 판단되는 티무르제국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인도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스페인 필리페 2세의 구교세력에 의한 전쟁이라는 생각은 아래에 열거한 다음과 같은 사항에 기반한다.
1. 임진왜란시 왜군에 의해 조총이 사용되었다. 조총은 네델란드 (화란)에 의해 제공되었다 한다.
2. 임진왜란시 포루투갈 신부가 동행했다는 말이 있다. 즉 카톨릭계통의 스페인 포루투갈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3. 임진왜란시 왜장들의 선교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티칸의 예수회가 관련될 수도 있다.
4. 최근의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왜군은 16만명이 아니라 100만명에 이른다 한다. 즉 거대한 세력들의 공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은 확실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5. 그리고 이러한 공격은 유럽사에 어떤 흔적이 있을 것이다.
6. 이러한 대군을 유럽에서 동원하고 준비하기에는 아시아지역은 너무 멀고, 그만한 군대를 동원할 세력이 아시아 주위에 없다. 서유럽에서 북미로 가는 것도 너무 멀다.
7. 임진왜란이 1592-1598 기간에 있었다 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토요토미히데요시가 1598년에 죽었다 했다. 이런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스페인의 필리페2세가 포루투갈, 이태리, 프랑스, 등을 지배하고 네델란드 병합하려 노력하고 영국을 점령하려 했다. 그 와중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8. 토요테미 히데요시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스페인의 필리페 2세이다. 당시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했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에서 팽창정책을 쓰는 유일한 사람이 스페인의 필리페 2세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두사람이 죽은 연대가 모두 1598년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9월 18일 죽고, 필리페2세는 1598년 9월 13일 죽었다 나온다.
9.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암으로 죽었다 하는데, 필리페 2세도 위암으로 죽었다 한다.
10. 당시 스페인은 지상전에서 강하고 해상에서는 약해서 일단 상륙해서 점령하는 목표를 세웠다 한다. 실제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지상전에서 매우 강했다고 하고, 조선의 신립장군이 충주에서 패한후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밀린다.
11. 무적함대 전쟁에서 스페인군(네델란드와 같은 편)은 조총을 사용하고 영국군은 활을 사용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은 조총을 사용하고 조선군은 활을 사용했다.
12. 이미 올린 유투브 전쟁사 자료에 의하면, 스페인에 비해 영국은 대포에서 더 우수하고 사거리에서 더 우위에 있었다 한다. 조선군이 왜군에 비해 더 우수한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13. 해적이며 영국군의 제독이었던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사람으로 나온다.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식의 전법도 소개한다. 드래곤(용)의 명칭도 가지고 있는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1596년 1월 27일 죽었다 한다. 이순신장군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며 전쟁을 계속한 것을 보면 1598년이전에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14. 영국에서도 이순신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해군제독으로 흠모한다고 했다. 그들이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의아하다.
15. 이미 올린 유튜브 (스페인 무적함대)에서는 오히려 스페인군이 학익진을 펼쳤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영국 스페인군이 서로 놀라서 싸움을 안했다고 설명하는데 이해가 안간다. 뭔가 조작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 전후설명을 보면 스페인수군이 그렇게 강한 군대가 아닌데 전략적인 학익진을 펼쳤다 하고 있다.
16. 무적함대와의 싸움에서 영국군은 화선(Fire Ship)을 이용하여 스페인 수군진에 돌격하였다고 하였다.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을 연상하게 한다. 화선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은 궁색하다.
17. 이순신장군의 수염이 붉은 색이었다고 한다. 바이킹계 사람들이 수염이 붉은데, 이순신 장군이 유럽출신일 수 있다. 켈트족의 영국이 이들과 가깝다.
18. 스페인 군대는 당시 교황이 지원했다 한다. 선교목적의 십자군이라는 말도 있다.
19. 스페인 수군은 영국을 위로 돌아서 스페인으로 귀국했는데 거의 다 죽어 소수만 살아 갔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시 왜군의 살아 돌아간 수가 적었다는 기록과 비슷하다.
20.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당시 상관 하워드제독과 문제가 있어 잠시 부제독의 지위를 잃었다 했다. 그리고 다시 참여하였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원균과의 관계 등으로 잠시 쉬었다는 설정이 유사하다.
21. 재정적인 사정으로 16만명의 병력이 맞을 수도 있다. 100만명은 보급병까지 합한 수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임진왜란이 한반도에서 일어 났다고 볼 수 없다. 당시 신교세력인 영국이 조선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포루투갈, 이태리, 프랑스, 네델란드 등의 구교세력과 전쟁을 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현 일본을 임진왜란의 ‘왜’로 생각하고 대응하는 것은 역사왜곡을 합리화 시켜 준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으로 싸워 이긴 것은 가상하고 기적적이지마는 그러한 상황을 만든 조선은 부끄러움도 함께 노출한 것이 된다. 문대통령이 자주 인용하는 12척이 아직 남아 있다는 언급은 그래서 좀 그렇다. 임진왜란이 한반도에서 일어 난 것이 아니고 그리고 현재의 일본이 임진왜란의‘왜’라는 당사자도 아닌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요이상의 감정적 대응과 역사왜곡의 합리화에 도움만 준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나부 부여 의려왕이 바다 건너 정복한 왜(倭)는 지중해 Sardinia 섬인가 ? (0) | 2021.12.16 |
---|---|
광개토대왕이 경략한 임나, 가라에 대한 위치비정 II (0) | 2019.08.03 |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 가라는 지중해에 있다. (수정본) (0) | 2019.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