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임나 가라는 지중해에 있다
최근에 본 블로그에 올린 글 ‘탐라국은 인도양의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이다’란 글을 쓰면서, ‘왜’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풀 수가 없었다. 탐라국은 백제, 신라외에도 ‘왜’와도 밀접한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왜’는 백제, 신라의 허락을 받고 교역을 하고 있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교역을 하는 왜인들을 백제는 바다에 집어 던졌다고 했다. 신라의 탐라 점령이후에는 탐라국에 표류한 ‘왜’의 사신들을 구하기 위해 접촉하는데, ‘왜’는 신라에 도움을 먼저 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탐라국과 가까운 듯하며 많은 교역을 하는 ‘왜’의 존재와 위치가 궁금하였다.
‘왜’는 백제의 역사에서 속국으로서 또는 동맹국으로서 많이 등장하고, 신라역사에서는 피해를 많이 주는 나라로서 황룡사 9층탑에 있을 만큼 우리 역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왜에 대한 주장은, 1) 현재의 일본열도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2)자바섬을 비록한 동남아시아의 섬들이라는 주장, 3) 또 백제가 현 지나대륙에 강국으로 있을 때 양자강 이남지역에 거했다는 주장, 4) 그리고 섬에 거주하는 ‘도이’라는 주장, 5) 가장 가까운 현대사에서 조선의 ‘임진왜란’시의 ‘왜’는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미국 등의 유럽 서양인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런 만큼 ‘왜’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을 하기 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대한 강역 위치 산정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사계의 주장들을 받아 들이기에 앞서, 흔들리지 않는 증거인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왜’에 대해서 먼저 파악하고자 한다.
난 본블로그에 올린 글, “우리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 (1) & (2)”, “백이 숙제의 고죽국은 볼가강가에 있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등에서 고구려는 다뉴브강 윗쪽 (훈족의 유럽진출시)부터 흑해연안 북쪽, 코카서스산맥 북쪽, 카스피해 북쪽,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강의 북쪽, 그리고 타림분지지역을 포함한 아시아의 북쪽에 걸치는 흉노족, 스키타이족의 활동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는 사카족의 지역인 쿠샨왕조의 중앙아시아지역과 그 좌측에 있는 이란 이라크에 걸쳐있는 사산왕조 페르시아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는 지중해연안의 로마지역, 비잔틴제국지역으로 라틴계 유럽, 발칸반도의 동유럽, 그리스, 터어키지역, 그리고 이집트 등을 포함한 북아프리카지역, 그리고 아직 전체가 파악되지 못한 22담로 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과 관련이 깊은 ‘왜’의 지역은 의외로 넓게 퍼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 지역을 살펴 봄으로서 ‘왜’의 정체성과 실체의 일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난 본 블로그에 올린 글,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에서 유럽을 뒤흔든 훈족의 활동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활동 그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훈족과 함께 이동한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의 활동이 고구려와 연합한 동일세력일 수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의 훈족의 활동지역을 그린 아래의 지도에서 반달족이 공격한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카르타고의 튀니지아지역을 거쳐, 지중해의 섬들에 이르는 공략루트가 고구려 광개토태왕 이후의 그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왜의 임나가라가 이 지역일 수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훈족의 로마 침입 당시의 공략 루트 (source : Huns, Wikipedia)
광개토태왕의 비문에서 보이는 지역이름들은 뜻의 의미보다 음가를 차용한 만주식의 한자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개토태왕은 비문에서 보듯이, 마한의 56개성을 공략했는데, 그 가운데 ‘고리성’이 있으며, 지금도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젠의 ‘Gori’지역에 성이 있어 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공략한 왜의 임나 가라성 지역을 찾기 위해, 당시 훈족과 같이 로마 경략에 활동한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이 진출한 지중해 섬 중에서, 임나, 가라와 유사한 음운을 갖는 지역이 있나 살펴 보고, 그에 합당한 군사적 중요성을 갖는 성곽 존재 여부를 검토했다
고트족과 반달족이 진출한 지중해 섬들은 상기 지도에서 어림잡아, 시실리섬 (서고트족, 반달족), 펠로폰네소스지역(서고트족, 반달족), 샤르데냐섬(반달족), 코르시카섬 (반달족)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연구된 결과를 모아 놓은 Wikipedia 자료를 살펴 보았다. 그래서 다행히도 임나와 가라의 음차에 해당하는 지역과 군사요충지의 성곽을 찾았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바, 임나와 가라지역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참조했다.
본 블로그의 글,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에 있는 시실리아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을 보면, 신라가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훈족의 유럽 로마 정벌은 광개토태왕의 백제와 왜에 대한 경략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따라서 서고트족, 반달족에 의한 시실리섬, 펠로폰네소스지역, 샤르데냐섬, 코르시카섬 등에 대한 공격은 왜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서고트족에 의한 시실리섬, 펠로폰네소스지역, 반달족에 의한 사르데냐섬, 시실리섬 공격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런 역사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Wikipedia에 없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역사가 있는 것이다. 두 섬의 지역이름에서 가라와 임나와 유사한 지명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곽이 있었다. 두 섬 모두 당연히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다.
1) 임나성은 시실리아섬의 중앙에 있는 Enna(latin : Henna)에 있는 Lombardy castle이다.
훈족의 로마제국 정벌시 시실리아섬에 고트족의 Alaric I (411)과 반달족이 침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Alaric's forces made their way down to Athens and along the Adriatic coast, where he sought to force a new peace upon the Romans.[27] His march in 396 included passing through Thermopylae further into Greece, during which his troops plundered for the next year or so as far south as the mountainous Peloponnese peninsula....
Not only had Rome's sack been a significant blow to the Roman people's morale, they had also endured two years' worth of trauma brought about by fear, hunger (consequent the blockades), and illness.[80] However, the Goths were not long in the city of Rome, as only three days after the sack, Alaric marched his men south to Campania, from where he intended to sail to Sicily—probably to obtain grain and other supplies—when a storm destroyed his fleet.[81] During the early months of 411, while on his northward return journey through Italy, Alaric took ill and died at Consentia in Bruttium.[81] His cause of death was likely fever,.....
(source : Alaric I, Wikipedia)
"Germanic rule (469–535)
The Western Roman Empire began falling apart after the great invasion of Vandals, Alans, and Sueves across the Rhine on the last day of 406:
this event would affect Sicily after the migration of the Vandals to North Africa in 429. The Franks moved south from Belgium. The Visigoths moved west and were eventually settled in Aquitaine in 418; the Burgundians were settled Savoy in 443.
The four tribes harried Roman France almost three years, entered and Spain and Portugal in late 409.
The four tribes were decimated by the Visigoths in 417 on Roman orders. the Vandals and Sueves were able to re-assert themselves in Iberia until their departure. The Sueves remained in Galicia until 439. After taking Carthage in 439 the Vandals laid siege to Palermo in 440 as the opening act in an attempt to wrest the island from Roman rule personally led by Gaiseric, king of the Vandals. The Vandals made another attempt to take the island one year after the sake of Rome in 455, at Agrigento, but were defeated decisively by Ricimir in a naval victory off Corsica in 456. The island remained under Roman rule until 469. The possession of the island was lost 8 years later in 477 to another East Germanic tribe Ostrogoths who were in control of Italy and Dalmatia. In that year the island was returned for payment of tribute to Odoacer, king of the Ostrogoths, who ruled Italy from 476-91 in the name of the Byzantine (Eastern Roman) Emperor. The Vandals kept a toehold in Lilybaeum, a port on the west coast which they lost in 491 after making one last attempt to conquer the island from this port as their base.
The Ostrogothic conquest of Sicily (and Italy as a whole) under Theodoric the Great began in 488. He had been appointed viceroy of the emperor to rule in Italy. The Goths were Germanic, but Theodoric was supportive of Roman culture and government and allowed freedom of religion."
(source : Sicily, Wikipedia)
시실리아 섬은 역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8개성의 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시실리섬 중앙에 있는 해발 931미터인 Enna (Latin : Henna) 지역에 Lombardy Castle이 있다.
"Enna (Italian pronunciation: [ˈɛnna]; Sicilian: Castrugiuvanni; Ancient Greek: Ἔννα; Latin: Henna, less frequently Haenna) is a city and comune located roughly at the center of Sicily, southern Italy, in the province of Enna, towering above the surrounding countryside. It has earned the nicknames belvedere (panoramic viewpoint) and ombelico (navel) of Sicily.
At 931 m (3,054 ft) above sea level, Enna is the highest Italian provincial capital. Until 1926 the town was known as Castrogiovanni."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Enna - Sicily|작성자 죽엽
Lombardy Castle은 아래 글에서 보듯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The Castello di Lombardia ("Lombardy Castle") is a castle in Enna, Sicily. It is one of the largest and most ancient edifices in Italy, with an area of some 26,000 m2 (280,000 sq ft)
View of the castle's principle surviing tower from the exterior. (source : Wikipedia)
History
The castle's origins are related to a fortress erected in the 1st millennium BC by the Sicani on the foundation of the ancient Henna, on a hill 970 m above sea level. It remained a key possession in the subsequent history of the island, and the Romans were able to conquer it only by passing through its sewer network.
[출처] <펌> Lombardy Castle in Enna, Sicily-Wikipedia |작성자 죽엽
View of the castle from the north-east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Lombardy Castle in Enna, Sicily
즉 시실리아섬의 중앙에 있는 Enna (latin : Henna)에 있는 성(현재 Lombardy castle)이 임나성으로 판단된다.
2) 가라성은 사르데냐섬의 남부 항구도시 Caralis(latin) (Cagliari)에 있는 성곽이다.
코르시카섬 남쪽에 있는 Sardinia Island에 대한 훈족의 로마정벌시 반달족에 의한 경략은 Wikipedia에 아래와 같이 단 3줄의 기록에 불과하다.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Cagliari fell, together with the rest of Sardinia, into the hands of the Vandals, but appears to have retained its importance throughout the Middle Ages. " (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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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데나섬 중에서도 남부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Cagliari (Latin : Caralis)가 사르데냐섬의 중심도시이다. Cagliari라는 이름 자체가 Castle(성곽)이라는 사르디니아 말이라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요새와 같은 성곽이 있다.
사실 사르데냐섬은 82개의 성이 있을 정도로 지중해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왜의 가라(Caralis) 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Cagliari (/kælˈjɑːri/,
also
UK: /ˌkæliˈɑːri, <wbr />ˈkæljəri/, US: /ˈkɑːljəri/,[4][5][6][7]
Italian:
[ˈkaʎʎari] (listen); Sardinian: Casteddu [kasˈteɖːu];[a] Latin: Caralis) is an Italian municipality and the capital of the island of Sardinia, an autonomous region of Italy. Cagliari's Sardinian name Casteddu literally means castle. It has about 155,000 inhabitants, while its metropolitan city (including Cagliari and 16 other nearby municipalities) has more than 431,000 inhabitants. According to Eurostat, the population of the Functional urban area, the commuting zone of Cagliari, rises to 476,975. Cagliari is the 26th largest city in Italy and the largest city on the island of Sardinia. "
(source : Wikipedia)
"Karaly (Punic: ????, KRLY) was established around the 8th/7th century BC as one of a string of Phoenician colonies in Sardinia, including Tharros. Its founding is linked to its position along communication routes with Africa as well as to its excellent port. The Phoenician settlement was located in the Stagno di Santa Gilla, west of the present centre of Cagliari. This was also the site of the Roman Portus Scipio, and when Arab pirates raided the area in the 8th century it became the refuge for people fleeing from the city. Other Phoenician settlements have been found at Cape Sant'Elia.
In the late 6th century BC Carthage took control of part of Sardinia, and Cagliari grew substantially under their domination, as testified by the large Tuvixeddu necropolis and other remains. Cagliari was a fortified settlement in what is now the modern Marina quarter, with an annexed holy area in the modern Stampace.
Sardinia and Cagliari came under Roman rule in 238 BC, shortly after the First Punic War, when the Romans defeated the Carthaginians. No mention of it is found on the occasion of the Roman conquest of the island but, during the Second Punic War, Caralis was the headquarters of the praetor, Titus Manlius Torquatus, from whence he conducted his operations against Hampsicora and the Carthaginians. At other times it was also the Romans' chief naval station on the island and the residence of its praetor.
The Romans built a new settlement east of the old Punic city, the vicus munitus Caralis (i.e. the fortified community of Caralis) mentioned by Varro Atacinus. The two urban agglomerations merged gradually during the second century BC; to this process is perhaps attributable the plural name Carales.
Florus calls it the urbs urbinum or capital of Sardinia. He represents it as taken and severely punished by Gracchus, but this statement is wholly at variance with Livy's account of the wars of Gracchus, in Sardinia, according to which the cities were faithful to Rome, and the revolt was confined to the mountain tribes. In the Civil War between Caesar and Pompey, the citizens of Caralis were the first to declare in favor of the former, an example soon followed by the other cities of Sardinia; and Caesar himself touched there with his fleet on his return from Africa. A few years later, when Sardinia fell into the hands of Menas, the lieutenant of Sextus Pompeius, Caralis was the only city which offered any resistance, but was taken after a short siege.
Cagliari continued to be regarded as the capital of the island under the Roman Empire, and though it did not become a colony, obtained the status of Municipium.
Remains of Roman public buildings were found to the west of Marina in Piazza del Carmine. There was an area of ordinary housing near the modern Via Roma, and richer houses on the slopes of the Marina distinct. The amphitheatre is located to the west of the Castello.
A Christian community is attested in Cagliari at least as early as the 3rd century, and by the end of that century the city had a Christian bishop. In the middle decades of the 4th century bishop Lucifer of Cagliari was exiled because of his opposition to the sentence against Athanasius of Alexandria at the Synod of Milan. He was banished to the desert of Thebais by the emperor Constantius II.
Claudian describes the ancient city of Karalis as extending to a considerable length towards the promontory or headland, the projection of which sheltered its port. The port affords good anchorage for large vessels, but besides this, which is only a well-sheltered standby, there is a large salt-water lake or lagoon, called the Stagno di Cagliari, adjoining the city and communicating by a narrow channel with the bay, which appears from Claudian to have been used in ancient times as an inner harbor or basin.
The promontory adjoining the city is evidently that noticed by Ptolemy (Κάραλις πόλις καὶ ἄκρα), but the Caralitanum Promontorium of Pliny can be no other than the headland, now called Capo Carbonara, which forms the eastern boundary of the Gulf of Cagliari and the southeast point of the whole island. Immediately off it lay the little island of Ficaria, now called the Isola dei Cavoli ("Cabbage Island" in Italian, Isula de is Càvurus "Crab Island" in Sardinian).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Cagliari fell, together with the rest of Sardinia, into the hands of the Vandals, but appears to have retained its importance throughout the Middle Ages.
The old medieval town (called Castello in Italian, Casteddu de susu in Sardinian, "the upper castle") lies on top of a hill with a view of the Gulf of Cagliari (also known as Angels' Gulf). Most of its city walls are intact and include two early 14th-century white limestone towers, the Torre di San Pancrazio and the Torre dell'Elefante, typical examples of Pisan military architecture. The local white limestone was also used to build the walls of the city and many other buildings, besides the towers. The exact period of construction of a fortress on this hill is unknown at present, due to the superposition of layers of buildings along the history. Some scholars have suggested a first urbanization of the quarter in the Punic era on the basis of similarity of the planimetry with the contemporary Carthaginian fortress of Monte Sirai. Recently, archaeological excavations have identified Punic and Roman buildings under the ramparts of the fortress. Already the Roman poet Varro called the city "Vicus munitus", a fortified city, and sixteenth-century authors describe a Roman acropolis perhaps still visible in their day.
D. H. Lawrence, in his memoir of a voyage to Sardinia, Sea and Sardinia, that he undertook in January 1921, described the effect of warm Mediterranean sunlight on the white limestone city and compared Cagliari to a "white Jerusalem".
Necropolis of Tuvixeddu (source : Wikipedia)
Eastern walls of Castello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Cagliari (Caralis in Latin) - southern Port of Sardinia|작성자 죽엽
3) 에필로그
결과적으로 광개토태왕의 비문해석은 기존의 해석인 임나가라의 종발성이라는 해석과 달리, “임나와 가라지역을 쫒아가(종), 성을 공격하니 (발성), 그성들이 항복했다”는 해석으로 풀이가 된다. 즉 ‘종발성’은 성곽의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어느 블로거가 ‘종발성’ 해석에서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성을 공격했다라는 행동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읽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또한 왜의 위치에 대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르데냐섬은 이미 BC 7-8세기때부터 페니키아인들의 왕래가 있었으며, BC 6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관할하고 있었다고 설명되고 있다. 비록 BC 238년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이후 로마관할로 변했지만, 사르데냐섬은 북아프리카, 로마와 관련성이 매우 크다. 특히 카르타고와 같은 강국과의 연관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임나성, 가라성은 광개토태왕시 왜의 주둔지일 수도 있지만, 같은 동맹국인 백제의 관할인지도 모른다.
"Sea Peoples"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르데냐섬에 이들의 흔적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이 대해서 서양학계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라져 있다. 왜인지 신라인인지 무어인인지 앞으로의 연구결과에 따라 왜의 정체가 더 잘 나타나리라 생각한다.
통일신라가 백제의 지역을 훕수하면서 650년이후의 비잔틴제국은 신라로 판단되는데,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북아프리카의 세력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본 블로그의 글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샤르데냐섬, 시실리섬에 있었다' 참조) 그래서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의 1층에 제일 먼저 '왜'가 언급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또한 광개토태왕시기 및 그이후의 정복이 지중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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