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스크랩] 훈족은 고구려 과하말을 타고 고구려의 맥궁을 쏘았다!

Chung Park 2013. 6. 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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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뿔을 사용하여 작고 튼튼하면서 장거리용으로 사용되었던 고구려 맥궁(각궁)


백제연방(가야.왜) 정벌을 단행한 광개토태왕의 남정이후 백제.신라.가야.왜의 투구와 갑옷은 모두 고구려 양식을 따르게 되었다. 광개토태왕 이후 20년 후에 유럽에 나타난 훈족은 게르만족을 밀어 내어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 때 훈족이 타고 다닌 말이 고구려 과하마였고, 훈족이 사용한 활이 고구려의 맥궁이였다.

훈족,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로부터 사용한 과하마는 한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민족의 말이다. 제주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는 과하마는 온순하며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맥궁인 각궁을 처음 개발한 민족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고구려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한나라와 오나라 황제 등에게 고구려가 각궁인 맥궁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하고, 각궁인 맥궁의 기본 재료인 물소뿔을 얻기가 북방인 초원보다는 고구려가 훨씬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각궁인 맥궁을 고구려에서 발명할 수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훈족이 사용한 화살 중에서 철화살촉 외에 로마군과 야만족인 고트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화살이 명적이다. 훈족이 사용한 여러 가지 화살촉 중 명적이 정확하게 어떤 화살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날아가면서 소리를 내는 명적의 형태는 고구려벽화에 그려진 기마인물상의 활에 장전한 명적과 흡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명적(鳴鏑: 울 명鳴, 우는살 적鏑, 효시, 울고도리, 우는살, 소리 화살)은 우리말로 울고도리라고 부르며 원통에 구멍을 5-6개 뚫어 화살 앞에 달아 화살이 날아가면서 공기가 구멍을 통하여 나가면서 소리가 나는 원리를 적용해 만들었다. 명적은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민과 고구려에서 사용했고, 위 무용총 벽화 사냥도에 보이는 화살도 명적이다. 명적이 신라 백제 지역에서도 출토가 된 사실은 명적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으로 이주한 아시아 유목세력인 훈족이 사용한 맥궁이 만주의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활이였듯이. 중동이나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로 이주한 동방의 코리아족은 모두 편두을 했다. 그런데, 청나라 황실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편두풍습이 만주족의 전통 풍습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수렵-유목세력의 선조는 모두 한반도와 만주의 수렵지역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자료] 훈족은 고구려 과하말을 타고 고구려의 맥궁을 쏘았다!


 

로마 경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야만족으로 무시한 로마인들이 훈족에 대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훈족은 말 위에서 활동이 많아 땅 위에서는 비틀거리며 잘 걷지 못한다. 훈족의 사내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사를 만들기 위해 코를 납작하게 눌러 투구를 쓸 때 코가 장애가 되지 않게 기른다. 훈족의 남자 아이는 다섯 살이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

 

로마의 수의사가 남긴 훈족의 말에 관한 기록을 보면 훈족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잘라 말안장 밑에 넣고 다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칼로 잘라 생고기를 먹는다. 또한 훈족의 말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가 커 괴물과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로마인의 눈에 비친 훈족은 쭉 찢어진 눈에 납작한 코, 편두를 한 사람들이 생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악귀로 보였고, 작달막한 체구에 머리가 큰 말도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훈족의 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훈족의 말은 온순해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고, 무거운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고 하루에 100km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을 가진 강인한 말로 추위에도 강했다. 쇠로 된 말발굽을 박아줄 필요도 없었고, 먹이를 사람이 따로 준비하는 노력도 필요치 않았다. 훈족의 말들은 겨울에도 앞발을 이용해 눈을 헤치고 먹이를 찾아 먹어 로마의 말들과는 달리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말이었다.

 

훈족의 말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훈족의 말은 고구려의 과하마와 같은 종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말은 과하마를 개종한 중형의 말과 과하마 두 종류의 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려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말은 과하마다. 과하마는 키가 작아 산악지대에서 전쟁이나 사냥에서 큰 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 사냥도 배사장면>

 

훈족의 배사 장면과 같은 고구려벽화 무용총 사냥도중 배사 장면에서 보이는 기마인물의 배사 장면은 왼손잡이 무사라는 추측도 있으나, 바로 이 장면 밑에 그림에서 활쏘는 기마인물 장면과 그림의 구도를 맞추기 위해 왼손으로 활을 쏘는 장면을 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을 타고 배사 할 수 있는 기마술은 훈족이나 고구려만 가진 전유물이 아니다. 북방 유목민이면 다 함께 공유한 기마술인 배사 장면이 벽화에 그려진 사실은 고구려에 북방 유목민이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고구려가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이민족들이 등장한 그림들은 고구려는 이미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북방민족인 흉노가 고구려 영내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는 집집마다 병기를 갖추고 있다는 기록은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한 방책으로 전 국민이 국가 위기시에 일시에 무장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며, 북방 민족 못지않게 말을 잘 다루며, 또 이용했을 것이라고 쉽게 유추 할 수가 있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위에 세워진 신라의 지배층이 흉노였다는 근거 중의 하나로 필자는 신라 8대왕인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泥師今)의 이름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달라 신라 8대왕의 이름은 유럽을 침공해 로마제국과 대항해 대제국을 건설한 훈족의 대왕 아틸라와 같은 이름이라고 추측 할 수 있는 이유는 아틸라라는 이름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터키와 훈족의 본거지가 있었던 헝가리에서는 흔한 남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라의 지배층은 우랄 알타이어를 사용한 흉노족이며, 중국인들이 워싱톤을 화성돈(華盛頓)으로 표기한 것과 같이 한자에서 음을 차용해 아틸라를 아달라로 표기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계나 아니냐에 대한 연구결과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여러 학자들 중, 핀란드 태생의 람스테트에 이어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연관계를 한층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는 포페(N.Poppe)이다. 포페(1960)의 [알타이제어 비교 문법]은 음운론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어의 낱말 82개가 비교 대상인데, 이 작업은 람스테트에서 보다 훨씬 정밀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의 관계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어에 적어도 알타이어 기층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Poppe 1960:6)."라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어의 위치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한국어는 알타이제어와 친연관계가 있을 수 있다.

(2) 원시 한국어는 알타이 통일체가 존재하기 전에 분열했을지 모른다.(즉 분열 연대가 대단히 이르다).

(3) 한국어에는 알타이어 기층밖에는 없다. 즉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비알타이어인데 이것이 기층언어인 고대 알타이어를 흡수했던가 혹은 기층언어인 알타이어 위에 얹혔을지도 모른다.

 

이 진술은 한국어의 계통 추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필자는 한국어에 대한 포페의 연구에서 보듯, 신라지배층과 함께 이주한 북방유목민이 사용한 알타이어가 고대 한국 기층언어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고 본다.


훈족,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로부터 사용한 과하마는 한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민족의 말이다. 제주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는 과하마는 온순하며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 아래 그림은 말을 그리는 화가가 많지 않은 한국에서 과하마와 말을 주제로 그리는 馬화가 류정실이 그린 [과하마 군무]다.


 

 

 

과하마의 군무도를 볼 때마다 용솟음처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하는 8마리 과하마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서, 유럽을 침공한 훈족의 용맹을, 우리의 선조인 고구려, 신라, 백제인들이 외침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투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나는 과하마 군무도에 빠져 들어가 한 마리의 백마를 잡아타고 북쪽으로 달려 올라가 고구려의 옜영토인 만주벌을 지나 서쪽 유럽으로 훈족이 지나간 길을 달려가는 환상에 빠져든다.




 

4세기 세계 최강 <맥궁>

훈족이 한반도에서 유럽으로 서진했다는 고증의 하나로 들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 하나가 훈족이 사용한 활이다. 유럽으로 이동한 훈족의 활은 고구려의 맥궁과 같은 복합궁이고, 또한 만궁이며 화살의 종류도 몇 가지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훈족이 사용한 활이 고구려의 맥궁과 같았다면 활의 역사도 같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활의 역사는 중국기록에 고조선에서 사용한 활을  단궁(檀弓)이라고 기록했다. 단군조선에서 만들고 사용한 활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중국사서에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다. 단궁(檀弓)의 실체는 합성궁인 각궁(角弓)인지 아니면 박달나무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선 활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사용한 활중에 동물의 뼈로 만든 활이 발굴되었고, 또 고구려 고분에서 소갈비뼈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활이 출토된 적도 있다. 합성 만궁인 맥궁은 고구려의 소수맥(小水貊)에서 생산한 활이라는 기록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고, 중국에서  맥궁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합성궁인 맥궁은 만궁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한반도 남단까지 널리 사용했다.




 

활의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북쪽 유목민이 맨 처음 합성궁인 각궁을 개발을 했다는 설과 고조선 유민인 맥족이 먼저 개발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합성궁이며 맥궁인 각궁을 처음 개발한 민족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고구려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한나라와 오나라 황제 등에게 고구려가 각궁인 맥궁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하고, 각궁인 맥궁의 기본 재료인 물소뿔을 얻기가 북방인 초원보다는 고구려가 훨씬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각궁인 맥궁을 고구려에서 발명할 수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1세기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만궁'과 관련한 기록이 등장한다. 모본왕은 포악한 군주로 악명이 높았는데,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만궁으로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 '臣有諫者,彎弓射之.') 모본왕이 사용한 만궁이 합성궁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3세기의 고구려 활은 합성궁인 만궁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합성궁인 맥궁(貊弓)의 재료는 물소뿔, 산뽕나무, 소힘줄, 부례풀, 참나무, 대나무, 화피, 자작나무 껍질이다. 각궁인 맥궁은 만궁(彎弓)으로 그 위력은 대단했다. 유럽에 남은 기록에서 보면 훈족이 사용한 각궁의 사거리는 300m 이상으로 국궁의 사거리와 같고, 150m 사거리에서 적을 죽일 수 있었다는 기록은 훈족이 사용한 활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훈족의 활은 말 탄 궁기병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아랫부분이 윗부분 보다 짧다. 달리는 말에서 화살을 화살통에서 빼내 활에 장전하고 활을 쏘기에 편리하도록 아래쪽이 위쪽보다 짧게 만든 활을 사용한 훈족과 대치한 적병이 훈족의 궁기병을 향해서 활을 쏘려고 준비하는 사이 훈족은 마상에서 재빠르게 적병을 향해서 활을 쏘아 적병을 죽일 수 있는 훈족활의 디자인이 훈족활의 장점이다. 훈족이 몇 종류의 활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고증된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헝가리에서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 훈족의 만궁

헝가리 인들은 훈족의 활을 개량해서 아래위 길이가 같은 활로 개량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훈족이 사용한 합성궁인 만궁을 재현하면서 물소뿔과 다른 각궁의 재료를 정확하게 사용해서 제작한 활인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안악3호 고분 벽화에 훈족의 활과 비슷한 그림이 있다.


 


<고구려 안악3호 고분 벽화 행렬도>

왼쪽 그림은 안악3호분 행렬도 중의 보병 궁노수의 모습이다. 수레를 호위하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궁노수 활이 훈족의 활과 같이 활의 가운데 붉은 줌통에서 뒤쪽과 앞쪽이 길이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활의 아래위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벽화를 그릴 때 원근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차이가 있게 그렸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활의 원래 형태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유추 할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합성궁인 맥궁의 다른 모양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의 맥궁은 북한남포 쌍용총 고분의 마상인물도와 무용총 사냥도에서 볼 수 있다.


 


<무용총 사냥도>

고구려 무용총 벽화 사냥도의 활은 네 곳의 마디로 인해 다섯 군데로 나누어져 있고, 형태상으로 만궁이고, 길이는 단궁(短弓)임을 알 수 있다.
활에 올려져있는 화살은 촉이 굵고 앞부분이 둥글게 묘사되어 있어 명적(울고도리)임을 아래 그림에서 쉽게 식별 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기마인물도>

활의 가운데 줌통 주변이 둥글게 굽어 있어서 무용총의 사냥장면에 등장하는 활과는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만궁이고, 단궁이다. 줌통 부분에 검은색 선이 가운데에 보이므로 역시 합성궁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기마 인물도>

북한남포 쌍용총  기마인물도의 활통에 반쯤 나와 있는 활은 외관상으로 역시 만궁임을 알 수 있다. 무용총의 활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활로 보인다. 검은 칠을 한 활을 특별히 노궁이라고 부르는데, 이 쌍영총의 활은 외관이 검은색이어서 검은 칠을 한 노궁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각궁인 맥궁은 시대에 따라 모양이 변해 조선조까지 내려 왔으나 현재의 국궁과 원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어궁인 각궁>

고종황제의 어궁인 각궁의 전체 길이는 124㎝, 오금나비는 3㎝이다. 



 

훈족이 사용한 화살은 자료를 구할 수 없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구려의 맥궁과 같은 합성궁을 사용한 훈족의 화살도 명적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화살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출토된 고구려 화살이다.


 


<출토된 고구려 화살>

제일 왼쪽의 사진은 북한 자강도 자성군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제일 오른쪽의 사진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으로 청동에 도금을 했다. 제일 왼쪽에서부터 첫째 화살촉이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도끼 부斧, 날 인刃) 화살촉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른바 끌형(착형: 끌 착鑿) 화살촉이다. 가운데 사진의 화살촉은 화살을 쉽게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비늘(역자)이 달려 있다. 오른쪽 사진의 도금 화살촉은 유엽형 화살촉이다. 실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화살촉은 일반적인 화살촉과는 모양이 다른 특이한 화살촉이 많고 화살촉의 자루가 아주 긴 것도 있다.


<재현한 고구려 화살>

재현한 고구려 화살로 위 사진의 화살 5개는 북한의 자강도 연풍리와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위에서 두번째는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화살촉) 화살촉이다. 나머지는 도끼날형 화살촉 혹은 끌형(착형) 화살촉이다. 위에서 세번째의 화살촉은 화살을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낚시처럼 생겼다. 아래사진 중  화살 3개는 각각 북한 장성리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가운데에 있는 화살은 명적(울고도리)이며, 제일 아래의 화살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로 청동에 금을 입혔다. 이 청동에 금을 입힌 화살은 의식용으로 사용한 화살이거나 국왕 내지 최고위급 귀족이 사용한 화살로 추정된다.


 

(위 두사진의 화살과 활의 설명은 신재호님의 디펜스 코리아에서 옮겨왔음을 독자님들께 알립니다)

훈족의 활인 각궁인 만궁이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훈족이 사용한 철제 화살촉에 있다. 미국에서 제작한 다큐를 보면, 훈족이 정확하게 몇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다는 설명 대신, 여러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훈족의 철제 화살촉은 로마군이 사용하는 어떤 갑옷이라도 관통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훈족이 사용한 활과 화살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는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에 방영했던 고구려철제 화살촉의 시험에서 유추할 수 있다. 시험에 사용된 고구려  화살촉은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을 만든 철의 강도와 같은 재료를 사용했으며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무사의 철갑주를 모방해 만든 철판을 관통한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근거리에서만 행한 시험이라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훈족이 사용한 화살 중에서 철화살촉 외에 로마군과 야만족인 고트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화살이 명적이다. 훈족이 사용한 여러 가지 화살촉 중 명적이 정확하게 어떤 화살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날아가면서 소리를 내는 명적의 형태는 고구려벽화에 그려진 기마인물상의 활에 장전한 명적과 흡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명적(鳴鏑: 울 명鳴, 우는살 적鏑, 효시, 울고도리, 우는살, 소리 화살)은 우리말로 울고도리라고 부르며 원통에 구멍을 5-6개 뚫어 화살 앞에 달아 화살이 날아가면서 공기가 구멍을 통하여 나가면서 소리가 나는 원리를 적용해 만들었다. 명적은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민과 고구려에서 사용했고, 위 무용총 벽화 사냥도에 보이는 화살도 명적이다. 명적이 신라 백제 지역에서도 출토가 된 사실은 명적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적의 크로스업 사진>

위 실물에서 보듯 화살앞 쪽에 달려있는 구멍 뚫린 원통 앞에 있는 화살촉은 작살의 모양으로 화살이 날아갈 때 중심을 잡아주는 날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화살이 날아가며  쉬~익 우는 소리를 낸다. 고려가 여진족을 토벌할 때 여진족은 명적의 우는 소리를 귀신의 소리라고 표현했다. 명적은 "울고도리", 즉 날아가면서 운다는 이름과도 일치한다.

500 여명의 경무장한 훈족의 궁기병이 적진을 향해 돌진하면서 일제히 명적을 사격했을 때 바람을 가르며 로마군 적진을 향해서 날아가며 내는 명적의 울음소리는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았다는 기록은 명적의 용도는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용과 적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합성궁인 각궁을 생산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음과 동시에 고구려의 맥궁을 극찬한 기록이 있는 이유는 맥궁의 품질이 더 좋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코리아 대칸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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