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고려

왕건의 해상세력은 누구인가?

Chung Park 2024. 1. 10. 14:42

 

왕건의 해상세력은 그 아버지 왕륜부터 해상무역을 통한 세력으로 부를 쌓은 세력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한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 참조)

 

"왕건의 먼 조상은 패서 지역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2][3] 서긍이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왕건의 조상이 고려[4]의 대족(大族)[5]이었다고 한다.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은 고(구)려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 사건 이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가 거의 200여년 영토로 경영했던,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을 합친 군이다.

정황상 고구려 유민이 많이 참여한 평로치청번진, 즉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와도 일정 부분 무역을 통한 관계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훗날 왕건을 고려 왕으로 책봉하는 후당 황제의 조서에서는 왕건을 '장회 무족'이라고 일컫고 있다. '무족'은 대단히 명성이 높은 명문귀족이란 뜻이며, '장회'란 말은 다름아닌 이정기의 평로치청번진이 자리한 일대를 일컫는 용어다..........

 

송악의 호족인 왕건의 가문은 대대로 돈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강충은 집에 1,000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왕건의 선대에 대해 고구려 유민[16]으로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 세력가였다고 추정한다.[17] "

(자료 : 고려 태조/생애,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려)

 

그리고 왕건의 아버지 왕륜은 궁예에게 ‘조선, 숙신, 변한’지역을 원한다면 왕건을 데려가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거지 송악을 근거지로 제공했다.(아래 자료 참조)

 

"때문에 송악군이 속해 있는 패서 지역의 호족은 거의 모두 고구려계였으며, 평산(평주)[6] 호족인 박직윤[7]은 스스로 '대모달'(大毛達)이라 칭했다.[8]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에게 '조선', '숙신', 변한의 땅을 차지하려면 왕건을 중용하라는 말을 전했다.[9] "

(자료 : 고려 태조/생애,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려)

 

필자는 왕건의 아버지 왕륜이 언급한 ‘조선, 숙신, 변한’지역이 왕건의 해상세력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주요 키가 된다고 판단한다.

 

1. 조선, 숙신, 변한의 지역

 

 

그럼 왕건의 해상세력의 활동 주요 무대였던 ‘조선, 숙신, 변한’은 어디일까?

 

산해경에 조선은 ‘북해지우, 동해지내’에 있다고 하였다. 즉 북해의 모퉁이, 동해의 안에 있다고 했다. 이는 당시 고대 중국에서 본 고대 조선의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 지역이 발틱해의 동쪽이 아닌가 추정했다.  즉 핀란드, 발틱3국, 서부 러시아지역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흉노의 고향 약수가 스웨덴의 Dalalven 강이라 추정했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813

 

약수(弱水)는 북유럽에 있었다

I. 머리말 지난 번 글에서 약수가 아시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리적 요건을 근거로 추정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면 실제 약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실질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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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는 부여와 읍루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약수의 위치를 설명하는 중국기록에 부여(夫餘)와 읍루(挹婁)에 대한 문구가 있어 우리 민족의 강역을 밝히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와 <진서 사이전>에 “읍루국 동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또한 <호위우공추지(胡渭禹贡锥指)에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고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자료 : 약수 남쪽에 자리 잡았던 부여와 읍루,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조선)

 

 

그리고 단군조선은 서쪽인 이 지역에 와서 고유와 금철을 채취하였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단군조선은 이 약수의 우측지역인 핀란드쪽에 있다는 것으로 추리된다.

 

"5세 대음단군 10년(B.C 1652, 기축) 기록에 “단제께서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帝西幸弱手命臣智禹粟採金鐵及膏油)”는 기록에서 약수는 단군이 다스리던 땅이었으며 조선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인용출처: 필자의 티스토리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조선)

 

 

그 다음 숙신지역은 어디인가? 읍루가 숙신의 후예라 했다. (아래 자료 참조)

 

"고대 중국의 북동방면에 거주한 이민족().

고조선 시대에 만주 북동방면에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숙신이라는 호칭은 중국의 《국어()》 《사어()》 및 그 밖의 고전에서 볼 수 있고, 특히 《국어》의 숙신공시()는 전설로도 유명하여 성천자()의 출현과 그들의 입조공헌()을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의 사기》에는 식신()·직신()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서천왕(西) 때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398년(광개토대왕 8)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일어난 읍루()·말갈() 종족이 숙신의 후예로 추측되기도 한다."

(자료: 숙신, 두산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숙신/읍루)

 

필자는 숙신이 삭슨족이 아닌가 했으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확신이 없다. 단지 여기서는 스웨덴의 약수(Dalalven river) 아래 읍루지역이나 삭슨족의 활동지역인 덴마크, 네델란드, 영국 등의 지역을 고려하고자 한다.

 

그 다음 ‘변한’지역은 어디인가?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 마한, 진한, 변한(=변진)의 언급이 있는데, 이를 참고하고자 한다.(아래 자료 참조)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한(韓)에는 3종(種)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國)이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낙랑(樂浪)과,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고, 그 북쪽으로는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으로 역시 왜와 접한다. 

.............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絜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변진(弁辰)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과 의복이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8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장대(長大)하며, 머리털이 아름답고, 의복이 청결하다. 형벌과 법이 엄준(嚴峻)하다. 그 나라는 왜(倭)와 가까운 까닭에 가끔 문신한 자들이 있다."

 

왕륜이 말하는 시기는 기원후 9-10세기이므로 당시의 중국사서의 기록이 더 일치할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환단고기의 삼한, 삼조선(마한, 진한, 번한)과는 별개의 위치로 판단한다. 즉 변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 진한의 남쪽에 있는 위치이다. 필자는 지중해의 동쪽에 있는 발칸반도 남부를 말하지 않나 추정한다.

 

 

2. 발해의 바다 북쪽 영토였던 부여, 옥저, 변한, 조선

 

상기 왕륜이 말하는 지역, 즉 조선, 숙신, 변한의 지역은 고려 이전에  이미 발해의 지역인가에 대해 알아 보자.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발해는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신당서』에는 전성기 때 발해의 영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땅은 사방 5천 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라고 했다."

(자료: (발해의) 건국과 수군활동, 윤명철, 한국해양사,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발해)

 

변한도 옥저도 바다 북쪽에 위치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부여와 조선은 발틱해에 접한 곳인데, 옥저와 변한도 동일한 바다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옥저는 중부 유럽 또는 흑해의 좌측에 있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라 판단하고, 변한도 지중해 동쪽으로 판단하였는데, 다소 의문이 생긴다. 한편 당시 발칸반도는 비잔틴제국으로 신라로 판단되는데,  옥저와 변한이 신라가 아닌 발해지역으로 거론되는 점을 보면, 차후 재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3. 발해와 고려의 영역

 

우리는 잠시 발해와 고려의 영역에 대해 살펴 보자. 우리가 추정하는 왕건의 해상세력 지역이 발해와 고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에서 발해는 숙신을 병합했다고 기록된다. 부여가 동부여 등으로 중부유럽으로 이동한 점을 감안하면, 숙신도 부근이 아닐까 한다. 거란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거란 부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필자는 거란은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지역에 있는 Alemanni로 판단한다. 실위가 거란의 별종이라 하므로 거란의 영역이 북유럽으로 더 올라갈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요나라에 대해 더 연구가 있어야 알 것 같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었으나 스스로 발해국(渤海國)이라 칭하고 부여(扶餘)와 숙신(肅愼) 등 10여 개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문자와 예악(禮樂), 관부제도(官府制度)가 있으며 5경(京)·15부(府)·62주(州)에 땅이 사방 5,000여 리이고 무리가 수십만이나 되었는데 거란주(契丹主)가 좌우 신하들에게, “조상 대대의 원수를 아직도 갚지 못했으니 어찌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대군을 동원해 발해의 대인선(발해의 마지막 왕)을 공격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했다. 대인선이 패배하여 항복하기를 청함으로 드디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이에 그 나라(渤海:발해) 사람들 중 고려에게로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 오는 자들이 줄을 지었다." 《고려사, 태조 8년 9월 10일》|

 

아래 자료에서는 고려 왕건이 흑수, 달고, 철륵 등 여러 제후국을 거느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흑수는 흑수말갈이 있는 지역, 달고는 말갈부족으로 후백제와 일리천에서 싸울 때 고려편에 서서 싸운 민족, 철륵은 정령, 고차의 후신으로 귀방(주나라시기)이라 불리는 튀르크계 흉노의 일종이다.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발해의 철리부) 등 제번(諸蕃: 여러 제후국)의 정예 기병(勁騎)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고려사, 태조 19년 9월 8일》|

 

또한 왜, 탐부 (탐라국?), 환어라, 철륵 등 동이의 나라들이 고려에 속국이 되었다. 왜, 탐부, 환어라, 철륵을 동이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발해의 철리부)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 18, 고려조》.

 

요수와 패수를 진정 시키고, 진한(秦韓)의 옛땅을 얻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한다.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 패수는 라인강으로 추정하며, 진한(秦韓)의 옛땅은 이태리반도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아래 자료 참조)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 고조선 때 요동의 경계)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 신라)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해가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자 그 나라(渤海:발해) 세자인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가 의(義)로써 흥기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수만 호의 땅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이처럼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능히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와서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아래 동여진의 대상이 항복했다는 기록인데, 필자는 동여진이 독일과 폴란드의 중간으로 추정한다.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쾌발(噲拔)이 자기의 족속 300여 호를 인솔하여 내투(來投: 몸으로 와서 항복)해 왔으므로, 발해(渤海)의 옛 성터를 하사하고 그곳에 살게 하였다." 《고려사, 현종 20년 8월 9일》|

 

요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웠다 했다. 흑해위의 Kiev(태봉국의 철원)에서 시작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북쪽으로는 용천 (발해 상경용천부)은 Novgorod 부근이 아닌가 추정하며, 서쪽의 압연(鴨緣)은 압록강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압록강은 요수이며, 필자는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한다.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 발해 상경 용천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아래 자료의 옛날 숙신의 봉강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73, 세종 18년 윤 6월 19일》   

 

이상의 기록을 보건데, 고려는 프랑스의 론강지역에서부터 서부 러시아의 북쪽에서 남부 흑해지역까지, 남으로는 지중해 이태리반도, 발칸반도,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왜의 지역인 북아프리카까지 그리고 북으로는 북유럽까지 지배한 것이 아닌가 한다. 

 

4. 고구려지역인 Goroar 지역?

 

상기 나무위키 자료에서 왕건의 해상세력은 고구려 유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유민들은 돌궐과 말갈지역으로 많이 이동했다고 했다. (아래 자료 참조)

<구당서.고려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옛 호(戶)들 중 안동(安東)에 기재된 자들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각각 돌궐과 말갈에 나누어 갔다." <구당서.돌궐전>에는 개원연간, 돌궐부에서 중용된 고구려의 망명귀족으로 고문간(高文簡), 고공의(高拱毅)등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돌궐지역이 노르웨이 등의 바이킹활동지역이라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688

 

돌궐은 북유럽의 누구인가?

I. 머리말 필자는 그동안 돌궐의 정체와 위치에 대해 계속 연구해 왔다. 지난 3개의 글, "돌궐은 북해의 Saxons족인가?", " 바이킹은 한민족과 연관이 있는가?", "바이킹의 활동지역과 한민족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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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흑수말갈은 흑수인 모스크바강의 지역에서 출발하여 후에 흑해위 지역으로 이동한 후 항가리지역에 정착한 마자르족이 아닌가 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642

 

흑해 위 Magyar족은 흑수말갈인가?

I. 흑해 위의 Magyar족 지난 글, 견훤과 시메온 왕과의 비교에서 살펴 보았듯이, 당시 흑해 위에 있던 마자르족은 비잔틴제국과의 연합으로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아래 지도에서 오른쪽 상부에 MA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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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거란의 별종인 실위의 좌측에는 돌궐이 있고, 우측에는 흑수말갈이 있다는 사서 내용 그대로이다. (아래 자료 참조)

 

<신당서, 북적, 실위편>

 

"동(東)은 흑수말갈이고, 서(西)는 돌궐이며, 남(南)은 거란이고, 북(北)은 빈해(瀕海)이다."

(인용출처: 길공구, 실위와 거란의 언어/몽골실위 관련 중국 정사 발번역,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실위/거란 공유 자료) 

 

필자는 실위가 북유럽에 있는 Schleswig지역 북쪽이라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506

 

북만주의 두막루와 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부여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다 한다. 그러나 역사속에 나타나는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북만주 탁리국(또는 색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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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lostcorea.tistory.com/1703

 

거란의 별종인 황두실위와 몽골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부제 : 파사이사금의 신라와 임진왜란때의 파사산성은 페르시아에 있었다. '의문의 한 중 일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VIII. 파사이사금의 신라와 임진왜란때의 파사산성은 페르시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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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실위는 핀란드지역이 될 것이고 황두실위는 스웨덴지역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서부 러시아지역이 옛 고구려지역인가? 상기 고구려유민이 이동한 흑수말갈 지역 중의 하나인데, 이 지역은 스웨덴 등의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바이킹 그룹인 Varangian지역인데, 스웨덴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Garoariki지역이라 했다. (아래 자료 참조) 그리고 그 수도가 Novgorod (Holmsgardre)였다고 그들의 Sagas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말한다 한다. 

 

Map showing Varangian or Kievan Rus' settlement (in red) and location of Slavic tribes (in green), mid-9th century Khazar influence indicated with blue outline

 

"Garðaríki (anglicized Gardariki or Gardarike)[1] or Garðaveldi is the Old Norse term used in medieval times for the states of Kievan Rus'.[a]

As the Varangians dealt mainly with Northern Kievan Rus' lands, their sagas regard the city of Holmsgardr (HolmgarðrVeliky Novgorod) as the capital of Garðaríki.[3][4][5][6] Other local towns mentioned in the sagas are Aldeigjuborg (Old Ladoga), Pallteskja (Polotsk), Smaleskja (Smolensk), Súrsdalar (Suzdal), Móramar (Murom), and Ráðstofa (Rostov).[7][8]

 

Three of the Varangian runestones, G 114, Sö 338, and U 209, refer to Scandinavian men who had been in Garðar.[2]

(자료: Garoariki,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Rus' Khaganate)

 

고구려, 즉 고려는 Gori, Gauri 등으로 불렸다 한다. 인도 동부의 보드가야(Bodh Gaya)지역에서는 사찰에서 3개의 숭배하는 것이 있는데, Mangla-Gauri, Lama-Shila가 그 중 둘이다. 파키스탄의 Mangla지역에는 고구려 성곽모습의 Mangla Fort가 있다. (아래 그림 참조)

 

Mangla Fort in Pakistan

 

즉 Gauri인 고구려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한다. 필자는 인도서북부의 집시의 춤이 고구려의 호선무를 닮은 것을 기반으로 하여 집시들이 한국사의 후손들이 아닌가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034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제목 :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의 역사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로마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훈족의 유럽진출 역사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그것으로 추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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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상기 Goroar가 Gauri, Gori 등으로 불렸던 고려(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의 주요 무역거점이었던 Novgorod는 New Gorod의 뜻이다. 즉 새로운 고려의 지역이라는 것이 된다. 필자는 Novgorod가 왕건의 아버지 왕륜이 궁예에게 내 준 송악이 아닌가 한다. Varangians의 Sagas에서도 Novgorod가 Garoariki의 수도였다고 전해진다.  (상기 인용 자료 참조)

 

즉 서부 러시아지역이 고구려의 옛 영토지역이라는 추정이다. 이러한 추정은 아래에서 논하는 여러 다른 점에서도 일치한다.

 

5. 장수왕 시기에 점령한 지두우 지역

 

필자는 고구려 장수왕 시기, 유연와 함께 점령한 지두우 지역이 이 지역 근처 타타르 지역이라는 것으로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이 지역은 볼가 불가리아가 있던 지역으로 훈족의 후예라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발해로 보이는 카자르칸국의 일부가 되었어도 그들의 언어를 보존한 것으로 기록된다. 

 

https://lostcorea.tistory.com/1585

 

고구려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도모한 지두우는 어디인가?(수정본)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역사의 무대가 유럽과 페르시아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는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도모한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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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서부 러시아지역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스키타이의 활동지역이었다.

 

필자는 흉노의 고향 약수가 스웨덴에 있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산해경에서 말하는 '북해지우 동해지내'의 위치에 있는 조선이 핀란드지역이 아닌가 한다. 아래 지도에서 그래서 빗살무늬토기 지역인 Comb Ceramic Culture지역이 주목되는 지역이다. 그 아래 Dnieper-Don Culture 지역(흑해 위 지역)도 구막한국 지역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European Middle Neolithic periode (BC 4200 - BC 2200 ) (source : Wikipedia)

 

흑해 위의 지역은 스키타이의 고향이라 한다. 스키타이의 일원인 키메리언(기원전 7-5세기)도 본 고향은 흑해위 지역이라 한다. (아래 글 참조)

 

https://lainfos.tistory.com/74

 

스키타이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

지난 글 중앙아시아의 Massagetae에 대한 분석에 이어, 같은 스키타인이면서도 중앙아시아가 아닌 흑해주변, 코카서스산맥, 아나톨리아 및 유럽에서 활동한 Cimmerians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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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경에도 스키타이의 지역으로 묘사된다 (아래 지도 참조)

 

Scythia  in BC 100 (source : Wikipedia)

 

 

6.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 루트의 하나인 조선, 부여 방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여러 방향으로 공격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북쪽의 조선, 부여지역으로 가는 루트였다. 필자는 이 조선, 부여지역 루트가, 북유럽에 있는 부여(약수의 남쪽)와 그 동쪽에 있는 조선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필자는 스웨덴 남부에 홀본, 홀본천이 있다고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832

 

홀본부여와 송양의 비류국은 어디 있었는가?

I. 머리말 필자는 송양의 비류국이 프랑스의 Vienne지방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아래 청회수님의 비디오(7분 06초 화면)에서 삼국사기에 송양의 비류국이 바다 한쪽에 있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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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us' people의 어원

 

Rus' people의 Rus의 어원은 배를 젓는 노를 의미한다. 즉 Rus' people은 노를 젓는 사람들, 즉 해상세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건의 해상세력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스웨덴이나 핀란드쪽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name Rus' remains not only in names such as Russia and Belarus, but it is also preserved in many place names in the Novgorod and Pskov districts, and it is the origin of the Greek Rōs.[2] Rus' is generally considered to be a borrowing from Finnic Ruotsi ("Sweden").[2][3][4] There are two theories behind the origin of Rus'/Ruotsi, which are not mutually exclusive. It is either derived more directly from OEN rōþer (OWN róðr[5]), which referred to rowing, the fleet levy, etc."

(source : Rus' People,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Kievan Rus')

 

 

8. 해상무역 거점인 Novgorod, Ladoga

 

이 지역은 Route from Varangian to Greek의 핵심 거점지역으로 많은 유럽국가들이 여기에 무역거점을 설치했다. 

 

882년 이전에 이미 이 Novgorod land는 Rurik Gorodishche에 의해 커다란 주거지가 되었으며, 이는 고고학자들의 데이타로 증명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 지역을 Garoariki의 영토라고 불렀다 한다. 전통에 의하면, Novgorod land는 Kievan Rus'의 주요 지역 중의 하나였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Archaeologically[4] and through the study of toponymy,[5] the presence of migratory so–called Nostratic communities is supposed here, replaced by Indo–European groups (future Balts and Slavs) who came from the south–west and ancestors of the Baltic–Finnish peoples who came from the eas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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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est period (before 882)

 

Archeological data shows that in the 9th century Novgorod was already a large settlement (or rather a chain of settlements from the sources of Volkhov and Rurik Gorodishche[10][14] up to Kholopiy Town,[15] opposite of Krechevitsy). Other settlements included Ladoga,[8] Izborsk and possibly Beloozero. Slavic and Finnic tribes inhabited the territory and by the 9th century Scandinavians were also present.[16] The Scandinavians probably called this territory Garðaríki.[17]

 

According to tradition, Novgorod Land was one of the centers of formation of Kyivan Rus'. The Primary Chronicle calls it "a great and abundant land" and records the legend of the Invitation of the Varangians (traditionally dated to 862): its inhabitants wanted to "seek a prince who may rule over us and judge us according to law" and therefore invited Rurik (founder of the Rurikovich dynasty), Sineus and Truvor, to rule over them.[18]   

 

(source: Novgorod land,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Kievan Rus')

 

 

또한 바랑기언들의 전설의 도시 Holmgard가 Rurik가 수도로 정한 Rurikovo Gorodische 남쪽 2km에 있는데, Novgorod지역이 되는 것이다. 882년 Rurik은 Oleg에게 이양하는데, 필자는 이 Oleg가 궁예라 추정했다. Oleg는 이후 Kiev를 확보하고 Kievan Rus'를 건국한다. Novgorod는 제2의 도시로서 계속 유지되었으며, 많은 바이킹 왕들이 망명한 곳이기도 하다.  Gotland의 Visby는 한자동맹이 있기 전부터 발틱해의 최고 무역거점이 되었었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벽란도를 섬으로 해석한다면, Gotland의 Visby를 일컫지 않나 생각한다. 13세기 전반에 독일 북쪽의 상인들은 Novgorod에 무역거점을 마련하였다. 

 

"The Varangian name of the city Holmgård or Holmgard (Holmgarðr or Holmgarðir) is mentioned in Norse Sagas as existing at a yet earlier stage, but the correlation of this reference with the actual city is uncertain.[17] Originally, Holmgård referred to the stronghold, now only 2 km (1.2 miles) to the south of the center of the present-day city, Rurikovo Gorodische (named in comparatively modern times after the Varangian chieftain Rurik, who supposedly made it his "capital" around 860).........

In 882, Rurik's successor, Oleg of Novgorod, conquered Kiev and founded the state of Kievan Rus'. Novgorod's size as well as its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influence made it the second most important city in Kievan Rus'. According to a custom, the elder son and heir of the ruling Kievan monarch was sent to rule Novgorod even as a minor. ...........

 

In Norse sagas the city is mentioned as the capital of Gardariki.[19] Many Viking kings and yarls came to Novgorod seeking refuge or employment, including Olaf I of Norway, Olaf II of Norway, Magnus I of Norway, and Harald Hardrada.[20]

......................

 

The Gotland town of Visby functioned as the leading trading center in the Baltic before the Hansa League. At Novgorod in 1080, Visby merchants established a trading post which they named Gutagard (also known as Gotenhof).[21] Later, in the first half of the 13th century, merchants from northern Germany also established their own trading station in Novgorod, known as Peterhof.[22] At about the same time, in 1229, German merchants at Novgorod were granted certain privileges, which made their position more secure.[23] "

(source : Novgorod,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Rus' Khaganate)

 

 

 

Trade Route from Varangians to Greek (source : Wikipedia)

 

필자는 Volkhov 강이 예성강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바다에 접한 Ladoga 항구가 벽란도가 아닌가 한다. (벽란도를 항구로 해석하는 경우). 벽란도를 섬으로 해석하는 경우 발틱해의 Gotland의 Visby가 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서해는 발틱해가 된다. 발틱해는 중국지역인 프랑스지역에서 보면 동해가 된다. 그래서 중국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했을 것이다. 

 

Volkhov river (source : Wikipedia)

 

9. 동비홀, 부소갑지역

 

왕건이 해양세력이 활동했던 지역을 동비홀, 부소갑지역이라 한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 참조)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은 고(구)려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 사건 이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가 거의 200여년 영토로 경영했던,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을 합친 군이다."

(자료 : 고려 태조/생애,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려)

 

부소갑지역은 바닷가에 접한 갑(곶)의 지역이다. 따라서 발틱해나 그 동쪽의 Lodago지역 근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부소갑의 갑자를 산허리 갑으로 해석하거나, 부소갑을 부소압으로 하여 송악산 주위의 지역으로 해석하는 바도 있다. (아래 자료 참조)

"고대 개성은 청목령(靑木嶺)으로 불렸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에는 부소압(扶蘇押)과 동비홀(東匪忽)이라고 하는 두 행정 단위가 있었다. 그 뒤 신라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부소압은 송악군(松岳郡)으로, 동비홀은 개성군(開城郡)으로 개편되었다. 개성은 과거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이듬해인 919년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겼다. 이때 송악군과 개성군이 합쳐져 개주(開州)로 바뀐다. 개성은 본디 송악이었는데 고려 광종 이후 ‘서울을 열었다’는 의미의 개경(開京)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개경은 고려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고려의 수도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자료: 개성과 동래의 지명, 우리 역사넷)

 

동비홀은 겨울동 자를 쓰는데, 이지역은 겨울에 어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표현이 있는 지역이 아닌가 했는데, 아래 자료를 보면 이두문자라 한다. 

 

"『향토대백과』에 의하면, 개성의 지명 유래는 고구려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 개성지역은 동비홀과 부소갑으로 불리었는데, ‘동비홀’은 개성을, ‘부소갑’은 송악산을 의미했다. 동비홀의 어원은 도비구루(두비구루)인데, 도비(두비)는 “열다”, 구루는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열린 성”“열려진 곳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자료: 개성시의 지명 유래, 이종겸, 통일뉴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려)

 

다른 자료에서는 동비홀의 동비의 어원 두비에 대해 두비(도비)는 둥글다는 뜻이라 하고 홀은 성을 의미하므로 둥근 성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고구려시기 개성군의 옛이름. 동비는 ‘도비/두비’라는 말로서 둥글다는 뜻이고 홀은 성, 고을을 의미하고 있다. 후에 개성군으로 개칭되었다."

(자료 : 동비홀, 조선향토대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려)

 

즉 도비구루(두비구루)가 동비홀의 어원인데, 도비(두비)는 열다 또는 둥글다, 구루는 성을 의미하여 열린(또는 둥근) 성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구루가 성을 의미한다는 이 기록은 아래 Garor가 성(wall or fortification)을 의미한다는 것과 정확히 똑같다. 필자도 놀라게 된다. 즉 Novgorod는 새로운 성(New Castle)이란 뜻이다. 

 

"Etymology

The meaning of the word Garðaríki is usually interpreted as Garðar[b] + ríki: "the kingdom of cities", or "the realm of towns",[10] which probably referred to a chain of forts along the Volkhov River, starting with Lyubsha and Ladoga (see Evolution of the word Gord). These forts had to assert themselves especially against the Khazar Khaganate until the end of the 9th century and therefore they developed the first East Slavic state which is known as Kievan Rus'.

The related Old Norse word garðr contains the same root as Proto-Slavic *gȏrdъ ("fortification, town"[11]) and Old English ġeard. Garðr refers to a wall[12] or fortification[13] but came to primarily mean what it contained. For the etymology of the latter element, see the article on Reich and the archaic English term rike.

 

Notes

  1. ^ The original designation of Kievan Rus' (or its northern part) in Swedish, Norwegian and Icelandic sources, including runic inscriptions, poetry of skalds and sagas, was the toponym Garðar. First seen in Hallfred's Vis of the Hard Skald (996). The toponym is based on the root garð- with a wide range of meanings.[2]
  2. ^ Garðar could be a collective name for Rus' towns.[9]

(source: Garoariki,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Rus Khaganate)

위의  위키기록에서 주석란에 garoar가 Rus' towns에 대한 전체적 이름일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즉 Garoar가 고려라는 이름일 수 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Novgorod (source : Wikipedia)

 

10. 발해 무왕의 당나라 등주 공격시 고구려 해상세력 이용

 

발해 무왕이 당나라 등주를 공격할 때, 고구려의 해상세력 장문휴를 이용했다 한다. 필자는 이 고구려 해상세력의 잔존 세력이 서부 러시아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해상세력이 아닌가 한다.

 

https://lostcorea.tistory.com/1770

 

발해가 공격한 당의 등주는 프랑크왕국의 Bordeaux인가?

I. 머리말 지난 글에서는 당나라와 신라, 발해, 돌궐, 거란, 토번의 관계를 살펴 보며, 발해의 당나라 등주공격(732년)의 배경을 분석하고, 또한 733년 신라와 당의 반격의 실패, 그리고 당의 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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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발해 내에서 흑수국(흑수말갈, 모스크바 지역), 보로국 (볼가 불가리아)등으로 남아서 발해내에 있으면서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646

 

볼가 불가리아는 고구려와 발해, 고려의 영역인가?

볼가강 유역에 있었던 Volga Bulgaria(7c-1240)는 자료에 따라 조그만 지역으로 묘사하는 지도도 있고, 카스피해 위에서 극지방까지 지역을 차지한 지도도 있다. (아래 지도 참조) 추후에 살펴 보는 Ki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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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발해 후기 신라인 비잔틴제국과 가까이 지내므로 발해 무왕이 무력으로 공격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카자르 칸국이 발해의 일부라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693

 

흑해주변의 카자르칸국은 발해의 일부인가?

발해의 일부라 판단되는 Khazar Kaganate(650/660 - 969/1050)는 여러가지로 발해의 특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검토는 후일 발해에 관한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하고, 여기서는 Pechenegs지역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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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송악의 조건

 

송악은 왕건의 아버지 왕륜의 근거지로서 궁예에게 넘겨 주며, 왕건을 부탁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Rus Khaganate의 Rurik가 왕륜으로 판단되며, Novgorod를 넘겨 받은 Oleg가 궁예, 그리고 Rurik의 아들이며, Oleg이후 Rurik Dynasty를 이어간 Kievan Rus의 Igor가 왕건으로 판단된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paulcgpark.tistory.com/91

 

궁예와 왕건의 모습이 보이는 키예프 루스

2024년 새해 첫날에 월척을 한 기분이다. 2023년을 마무리 하려고, 지난 4월에 시작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한 한탄강과 철원의 위치 추정을 위한 자료를 보다가, 궁예의 모습과 왕건의 아버지 왕륜과

paulcgpark.tistory.com

 

 

그리고 Novgorod 아래 Smolensk에는 소나무, Pine tree가 많으며, Upland지역이기도 하다. (아래 지도 및 자료 참조) 

Smolensk는 주위 7개의 언덕으로 싸여 있으며, 이 부근의 최고 높이는 314m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여기는 Dnieper, Desna, Moskva 강들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송악현에 해당하는 지역이 아닌가 한다.

 

Novgorod는 개성현이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고려는 개성현과 송악현을 합해 개주로 하였으며, 후일 이것이 개경이 된다. (아래 개경 자료 참조)

 

 

 Range of Pinus sylvestris, the Scots pine (UK), Scotch pine (US) or Baltic pine

(source : Baltic Pine (Scots Pine), wikipedia)

 

Smolensk Upland (source: Wikipedia)

 

"The Smolensk Upland (RussianСмоленская возвышенность) is the Western part of the Smolensk–Moscow Upland at the East European Plain, which is located mainly in Smolensk Oblast of Russia, with small parts lying in Moscow and Kaluga Oblasts[1] of Russia and in Vitebsk Region of Belarus. The highest point, located close to the city of Vyazma, is 314 metres (1,030 ft).[2]

 

The Smolensk Upland is divided between the drainage basins of the Volga (east) and the Dnieper (west). A number of big rivers have their sources in the upland. These include the Dnieper, the Desna, the Vazuza, and the Moskva."

(source: Smolensk upland,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Kievan Rus')

 

 

"Etymology

 

The name of the city is derived from the name of the Smolnya River. Smolnya river flows through Karelian and Murmansk areas of north-western Russia.[10] The origin of the river's name is less clear. One possibility is the old Slavic word смоль (smol) for black soil, which might have colored the waters of the Smolnya. An alternative origin could be the Russian word смола (smola), which means resin, tar, or pitch. Pine trees grow in the area, and the city was once a center of resin processing and trade. The Byzantine emperor Constantine VII (r. 913–959) recorded its name as Μιλινισκα (Miliniska).[11]

 

Geography

 

The city is located in European Russia on the banks of the upper Dnieper River, which crosses the city within the Smolensk Upland, which is the western part of the Smolensk–Moscow Upland. The Dnieper River flows through the city from east to west and divides it into two parts: the northern (Zadneprove) and southern (center). Within the city and its surroundings the river takes in several small tributaries.

 

In the valleys are stretched streets, high ridges, hills, and headlands form the mountain. Smolensk is situated on seven hills (mountains). The old part of the city occupies the high, rugged left (south) bank of the Dnieper River. The area features undulating terrain, with a large number of tributaries, creeks and ravines."

(source: Smolensk,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Kievan Rus')

 

여기서 우리는 Smolensky District에 있는 Gnezdovo지역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세기에 주요 무역 거점으로 활동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키릴문자로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горушна (gorušna, 고루스나)로 적혀 있다 한다.  11세기이후로는 무역의 거점이 Smolensk로 옮겨졌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개성부 지역이 될 수도 있다. 

 

"Gnezdovo or Gnyozdovo (Russian: Гнёздово) is an archeological site located near the village of Gnyozdovo in Smolensky DistrictSmolensk OblastRussia. The site contains extensive remains of a Slavic-Varangian settlement that flourished in the 10th century as a major trade station on the trade route from the Varangians to the Greeks.......

 

The archaeological site comprises a "citadel" (gorodishche) (Russian: Городище), formerly situated at the confluence of the Rivers Dnieper and Svinets, and a ring of ancient rural settlements (selitba) which occupy an area of 17.5 hectares, of which roughly 5,000 square metres (54,000 sq ft) had been excavated by the end of the 20th century. This makes the site one of the largest survivals of the Viking Age in Europe: ..........

 

There is some disagreement among scholars as to which ethnic element predominated at Gnyozdovo. Although a Varangian presence is pronounced, nineteen mounds out of twenty contain ordinary burials of Krivichs and Baltic men and women.[3][dubious  discuss] The burial rite is mostly cremation. The most numerous finds are household utensils and pottery. As a general observation, the Gnyozdovo tumuli have parallels with the "druzhina kurgans" of Chernigov, such as the Black Grave.[4]

 

Finds

 

Seven hoards of Byzantine and Arabic coins (more than 1,100 of the latter[5]) and a Byzantine dish bearing an image of Simargl have shown that the local community carried on a prosperous trade along the Dnieper. The metal objects represented include hauberks (not typical for Scandinavian sites), helmets, battle-axes, Carolingian swords, and arrows. Among the more surprising discoveries were an early folding razor with a copper handle and a pivoted scissors, probably the earliest found in Eastern Europe.[citation needed]

 

The most unexpected discovery at Gnyozdovo was a Kerch amphora with the earliest inscription attested in the Old East Slavic. The excavator has inferred that the word горушна (gorušna), inscribed on the pot in Cyrillic letters, designates mustard that was kept there.[6] This explanation has not been universally accepted and the inscription seems to be open to different interpretations.[7] The dating of the inscription to the mid-10th century[a] suggests a hitherto unsuspected popularity of the Cyrillic script in pre-Christian Rus.[b]

 

 

Historical background

 

As Tatiana Jackson has observed, Norse sagas contain more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Western Dvina (Norse: Dyna) than about any other river of Eastern Europe.[8] This fact highlights a great importance attached to the Dvina trade route by the Vikings.

 

Gnyozdovo is situated downstream from the Dvina–Dnieper portages, at a point where the Svinets and several small waterways empty into the Dnieper. Like Smolensk at a later period, Gnyozdovo flourished through trade along the Dnieper going south to Constantinople and north over portages to the Dvina and the Lovat, two rivers allowing access to the Baltic Sea.[c] At the time of its establishment, the local citadel served a defensive function against possible attacks on the portages, where the Norse traders would be at their most vulnerable.[9] After internal tensions within Kievan Rus settled down, the site of Gnyozdovo "formed the critical exchange centre and refitting base on the route from the Baltic to the Black Sea".[10]

 

The settlement declined in the early years of the 11th century, simultaneously with other Varangian trade stations in Eastern Europe. By the end of the century, Gnyozdovo's importance as a trade centre had been completely supplanted by nearby Smolensk.

 

Gnyozdovo and Smolensk

 

Scholars are not in agreement as to how Gnyozdovo is related to Smolensk (Norse: Smaleskja), situated at the confluence of the Dnieper and the Smolnya Rivers.

According to one point of view, Gnyozdovo was the functional and economic predecessor of modern Smolensk. Soviet archaeologists established that the earliest settlement on the site of Smolensk goes back to the early 11th century.[11] In other words, the emergence of Smolensk coincides with the decline of Gnyozdovo. The regional centre could have been moved from Gnyozdovo to Smolensk at some point following the Christianisation of Rus by Vladimir the Great.[12]

 

(source: Gnezdovo,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Rus' Khaganate)

 

12. Towns of Garoariki

 

최근의 update된 Garoariki에 대한 위키자료를 보면, Garoariki를 Garoar Kingdom or Empire of Garoar로 해석하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상기 고려의 영토를 점검해 본 바와 같이, 필자가 판단 하기에 고려는 거대한 지역을 지배한 제국이라 본다. 그 중 일부가 여기 Garoar Empire (고려제국)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번성한 도시들을 아래 지도가 보여 주고 있다.  즉 강을 이용한 활발한 무역활동지역으로 보인다. 고려의 해상세력 주요 도시들이 아닌가 한다. 

 

 

Towns of Garðaríki mentioned in Old Scandinavian sources, according to T. Jackson,[1] E. Melnikova,[2][3] K. Müllenhoff,[4] V. Thomsen,[5] and A. Bugge.[6]

(By Alexschneider250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0123821)

 

"Garðaríki (anglicized Gardariki or Gardarike)[7][8] or Garðaveldi was the Old Norse term used in the Middle Ages for the lands of Rus'.[9][10][11][12][13][note 1] According to Göngu-Hrólfs saga, the name Hólmgarðaríki (also used as a name for Novgorodian Rus')[20][21] was synonymous with Garðaríki, and these names were used interchangeably in several other Old Norse stories.[22]

 

As the Varangians dealt mainly with the northern lands of Rus',[23][24][25] their sagas regard the city of Hólmgarðr/Hólmgarðaborg (usually identified with Novgorod)[note 2][43][44][45][46] as the capital of Garðaríki.[note 3][58][59][60][61] Other important places of Garðaríki mentioned in the sagas that have generally been identified with well known historical towns are Aldeigja/Aldeigjuborg (Ladoga),[62][63][64][65] Kœnugarðr/Kænugarðr (Kiev),[66][67] Pallteskja/Pallteskia (Polotsk),[68][69][70] Smaleskja/Smaleskia (Smolensk),[71][72] Súrdalar (Suzdal),[73] Móramar (Murom),[74] and Rostofa (Rostov).[3][1][75][76][77][78]

 

At least seven of the Varangian runestonesG 114,[79] N 62,[80] Sö 148,[81] Sö 338,[82] U 209,[83] U 636,[84] and Öl 28,[85] refer to Scandinavian men who had been in Garðar.[86][87][88][89]

Etymology

Etymology of Garðaríki according to R. Cleasby & G. Vigfússon,[11][90] R. Derksen,[91] J. de Vries,[92] P. Durkin,[93] T. Jackson,[94][95] M. L. Jøndal,[96] J. T. Koch,[97] G. Kroonen,[98][99][100] J. P. Mallory & D. Q. Adams,[101][102][103][104] E. Melnikova,[105] E. Nosov,[106] V. Orel,[107][108][109] O. Pritsak,[16] H. Rix & M. Kümmel,[110][111] F. Wachler,[112] and G. Zoëga.[113]

 

The word Garðaríki, which first appeared in Icelandic sagas in the twelfth century,[114] could stem from the words Garðar[115] and ríki (an empire, realm, kingdom)[92][90][note 4] according to the common Scandinavian pattern for state formations X+ríki.[117] Garða is the genitive form of Garðar,[105][112] therefore the compound Garðaríki could be translated into English as "the kingdom of Garðar" or "the empire of Garðar".[113][11][106] The name Garðar itself was used in skaldic poems, runic inscriptions and early sagas up to the twelfth century to refer to the lands to the east of Scandinavia populated by the Rus' people,[118][119][120] primarily to Novgorodian Rus'.[16]

 

Garðaris a plural form of the Old Norse word garðr which referred to 1) a fence; 2) a fortification; 3) a yard; 4) a court; 5) a farm; 6) a village house  farm,[121][122][94][note 5] while the related Old Russian word городъ[note 6] referred to 1) a fence; 2) a fortification; 3) a field defensive work; 4) a settlement.[95][128] Since there is an overlapping meaning among the ones these related words once had ("a fence, a fortified place"), both garðr and городъ could mean the same at one time in the past.[129] Thus, some researches interpreted Garðar as a collective name for Old Rus' towns[130][131] encountered by Scandinavians on their way from Lyubsha and Ladoga down the Volkhov River into other Slavonic lands.[132] 

 

(source: Garoariki,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Kievan Rus')

 

13. 결론

 

이상으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송악현과 개성현을 합한 개주는 Smolensk지역과 Novgorod를 합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Kiev는 철원(흑양)으로 판단되는데, 개경과 철원에 대해서는 추후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더 확실히 밝히고자 한다. 왜내하면 이에는 몇가지 의문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Igor가 Oleg의 권력을 이양받아 Rurik dynasty를 이어 갔지만, Kiev에서 Novgorod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조로 판단되는 Boleslaw I이 Kiev로 권력다툼의 와중에 왔다는 것이다. 이는 Kiev가 개경일 수도 있다는 것이 되나, Kiev주위의 철산지 등을 고려할 때, Kiev는 철원으로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여하튼 왕건의 해상세력은 Novgorod, Smolensk 주위가 개성현과 송악현으로 판단되는 바, 이 지역이 왕건의 해상세력의 본거지인 패서의 송악이 아닌가 한다. 

 

------- 개경에 대한 참고 자료 -------

 

한국사에서는 송악현과 개성현이 합해 개주가 되었다가 개경이 되었다 한다, (아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자료 참조)

 

"개경(開京)은 송도(松都) 혹은 송경(松京)이라고도 한다. 태조 왕건이 도읍한 이래 37년 10개월의 강도(江都)주1 시기를 제외하면 436년 8개월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거란(요), 몽골홍건적에게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고려인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는 개경과 서경(평양)의 양경제, 개경 · 서경 · 동경(경주)의 삼경제, 개경 · 서경 · 동경 · 남경(한양)의 사경제를 운영했다. 이 중의 어느 경우에도 몽골과 항쟁한 강화도 시기를 제외하면 개경은 수도로서 경성(京城), 경도(京都), 경사(京師), 상경(上京), 상도(上都)라 불렸다.

 

광종이 개경을 황도(皇都)라 칭하면서 황도로도 불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開城)’이라 불렸다.

 

연원 및 변천

 

개경의 모체는 태조 왕건의 고향인 송악현(송악군)이었다. 신라말 혼란기에 궁예가 용건과 왕건 부자의 귀부를 받고 이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고려’를 건국했다. 하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이라 바꾸어 철원으로 돌아가더니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왕건은 국호 ‘고려’를 회복하고 919년(태조 2)에 송악현과 개성현 일부를 통합해 ‘개주(開州)'주2라 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이리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이 탄생했다.

 

개주는 성종 때 개성부(開城府)로 개칭되어 왕경과 경기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현종 때 왕경은 중앙정부 직속이 되고, 경기는 개성현령과 장단현령이 관장했다.

 

문종 때 개성부가 설치되어 경기를 담당했다. 원간섭기인 1308년(충렬왕 34)에는 개성부가 도성 안을, 개성현이 성외 즉 경기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바라볼 때 ‘개경’과 ‘개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용

 

1.궁궐

 

개경은 국왕이 순행이나 피난이 아니면 상주했기 때문에 수도였고, 왕의 거주처로 궁궐이 건립되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대내(대궐) 즉 본궐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건립되었는데, 궁성(宮城)과 그 바깥의 황성(皇城)으로 구성되었다.

 

궁성은 초기에는 정전인 천덕전[天德殿, 건덕전(乾德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현종 때 거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재건하면서 새로운 정전인 회경전[會慶殿, 선경전(宣慶殿)]이 건립되면서 회경전과 건덕전[대관전(大觀殿)], 두 개의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주요 기능을 들면, 회경전(선경전)은 대장경도량․인양도량 개최와 송 사절 영접, 건덕전(대관전)은 시조(視朝), 선정전[宣政殿, 선인전(宣仁殿)]은 시사(視事), 중광전[重光殿, 강안전(康安殿)]은 연등회, 신봉문루[神鳳門樓, 의봉문루(儀鳳門樓)]와 구정(毬庭)은 팔관회, 경령전(景靈殿)은 태조와 사조(四祖) 봉안의 공간이었다.

 

궁성에는 사나내원(舍那內院), 내제석원, 내천왕사 등의 내불당이 운영되었다. 황성 안에는 동지(東池), 법왕사삼성(三省)추밀원어사대 등이 존재했다. 궁성의 정문은 남문인 승평문(昇平門)이었고, 황성의 정문은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었으며, 광화문 밖에 6부가 자리했다.

 

개경 일대의 별궁 내지 이궁(離宮)으로는 수창궁(壽昌宮)연경궁(延慶宮), 대명궁(大明宮), 장원정(長源亭) 등이 유명했다. 나들이를 좋아한 의종은 도성 안팎에 다양한 별궁을 건립해 유희를 즐기다가 무신정변을 초래했다.

 

고려시대는 후비(后妃)와 왕자, 공주도 궁을 소유했다. 몽골과의 전쟁을 겪은 후의 고려말기에는 황성이 기능을 상실하고 본궐이 강안전 중심으로 복구되어 주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고 수녕궁, 연경궁, 수창궁 등 이궁이 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 성곽

개경의 성곽을 살펴보면, 태조 왕건은 송악산과 그 남쪽을 감싸는 발어참성(勃禦槧城)으로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 대내는 발어참성의 하단부에 조영되었다. 현종 때 거란군의 침략으로 개경이 불타면서 개경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외성인 나성(羅城)을 건설했고 이로써 발어참성은 내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외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고려말~조선초에 외성과 발어참성 사이에 내성을 건설했다. 현종 때 개경 나성의 건설은 새로운 도성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 나성은 23㎞로 우리나라 도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문의 개수는 무려 25개로 우리나라 도성은 물론 중국 도성보다도 많았는데 편리와 소통을 추구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정서문으로서 예성강의 벽란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송 사절이 내왕하는 선의문(宣義門)이었다.

  1. 도성

개경성의 도심은 북남대로와 서동대로가 만나는 십자가(十字街)에 형성되었다. 개경성에서 대내는 북서쪽에 위치해 황성의 정문을 중국처럼 남쪽 주작문에 두었다면 도심이 서쪽으로 치우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황성의 정문을 동쪽 광화문에 두고 이 문에서 남쪽으로 남대가(南大街)를 달리게 함으로써 도심이 도성의 중앙에 형성될 수 있었다. 광화문과 십자가 사이의 남대가에는 시전(市廛)이 조성되었고, 도성 중앙을 가로지르는 오천(烏川)을 따라 각종 시(市)가 번성했다.

 

도성 안에는 외교 사절이 머무는 객관들이 자리했는데 특히 송 사절이 머무는 순천관(順天館)은 대명궁을 개조한 것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도성 안에는 또한 송상 등 외국상인들이 머무는 숙소가 운영되었고, 개경의 관문인 벽란도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개경의 행정구역은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 중부의 5부(部), 안정방 · 덕산방 · 법왕방 · 흥국방 · 앵계방 등의 35방(坊), 그리고 344개의 리(里)로 이루어졌다. 개경의 인구는 최우정권이 강화로 천도할 때 10만 호(戶)였던 것으로 보아 대략 30~5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 종교 시설

고려는 불교중심 국가여서 개경성 안팎에 수많은 불교사원이 건립되었으니 유교 지상주의 국가 조선의 수도 한양과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태조 왕건 때 법왕사(法王寺),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내원, 대선원(보제사), 개국사 등이, 광종 때 봉은사(奉恩寺)귀법사 등이, 목종 때 진관사, 숭교사 등이, 현종 때 유가종(법상종) 현화사(玄化寺) 등이 건립되었다.

 

문종은 엄청난 규모의 화엄 흥왕사(興王寺)를 건립했다. 숙종 때 천태종의 중심도량인 국청사(國淸寺)가 창건되었고, 예종 때 안화선원이 안화사(安和寺)로 확대 중창되었다. 황성 안에 자리한 법왕사는 팔관회 때 왕이 행차해 분향한 곳이었고, 봉은사는 태조 진전(眞殿)이 위치해 왕이 연등회와 태조 기일 때 이곳에 행차해 분향했다.

 

유교적인 시설로 개경에 성종 때 원구(圓丘)[환구(圜丘)], 태묘(太廟)[대묘(大廟)], 사직(社稷), 국자감, 문묘(文廟) 등이 건립되었다. 태묘는 중국과 달리 도성 동벽의 바깥에 자리했는데, 여기에는 종산인 오관산과 주산인 송악산의 접점을 고려한 음양풍수설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교적 시설로는 태조 때 구요당(九曜堂)이, 예종 때 복원궁(福源宮)이 건립되었는데, 특히 복원궁의 조영은 도교 교단의 탄생을 가져왔다. 성균관국자감의 개칭)은 공민왕 때 숭문관(崇文館, 순천관의 개편) 자리로 옮겨 재건되었다."

(자료: 개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