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그리스인에게는 국민적 춤이 하나 있다. 즉 Zorbas Dance이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축제가 있을 때 이 Zorbas Dance가 꼭 등장한다. 그만큼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춤이 되었다. 어디서나 Flash Mob 할 수 있는 이러한 국민적 춤이 있는 것이 좀 부럽기도 하다.
https://youtu.be/152biXG-H7g?si=iGy405UrROO1KWhV
ZORBAS FLASH MOB-.mov (Birmingham City in England)
2. 그리스 조르바 댄스의 소개
그런데 이 조르바 춤은 어깨동무를 하고 원을 그려 가며 춤을 춘다. 서양에서 보기 어려운 춤 동작이다. 우리말에도 '어깨동무'라는 말은 있지만, 국악에서 어깨 동무하고 추는 춤은 보지 못했다. 단지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한다는 것 등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조르바 춤에 대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 보았다.
Zorbas Dance는 'Zorba the Greek(그리스인 조르바)'이라는 1964년 헐리우드 영화로 인해 크게 알려졌다. 이 영화는, 그리스의 크레타섬 출신인 Nikos Kazantzakis가 1942년 펴낸 소설 "Alexis Zorbas"를 모태로 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인 Zorbas를 묘사했다고 한다. 영화의 주연배우인 안소니퀸이 빠른 동작의 춤을 잘 추지 못해 느린 동작을 집어 넣었다는 말도 있다. Zorbas Dance는 그리스말로 Sirtaki, 또는 Hassapikos 등이 원래 춤의 이름이라 한다. 그러면서 이 춤은 비잔틴제국의 Butchers' Guild에서 비롯되었다는 위키피디아 설명이다.
아래는 그리스에서 정통으로 추는 Zorbas Dance를 보자. 고대 그리스 유적에서 추는 이 비디오는 어깨동무와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리고 발을 좌우로 돌리는 동작,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 발놀림의 동작 등이 보인다. 그러나 장소가 그래서 그런지 회전 동작, 즉 호선무 동작은 보이지 않는다. 음악연주는 그리스 전통악기 부추키(맨돌린과 유사)로 하고 있다.
https://youtu.be/kG12C1oX5Eo?si=WORPIegKobKo2b2k
ZORBAS EMMETRON
아래는 보다 프로패셔널한 춤을 추는 모습이다. Dance school 제공이다. 처음에는 느린 동작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빨라진다. 위에서 본 Flash Mob 비디오처럼 큰 원을 그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움직이는 동작이 주를 이루며,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발을 차며 내미는 동작, 발을 들어 손에 닿는 동작, 끝에서는 몸을 돌리는 호선무의 동작 등이 있다.
https://youtu.be/f16cwfdSuOQ?si=cuPE8gu4qidcjHxh
"Zorba the Greek" ShakallisDance2019/Just Dance
Shakallis Dance School - OFFICIAL
https://youtu.be/6Onu9YcDho0?si=1PS0D4i4KDOXrxqF
Συρτάκι (syrtaki) André Rieu Zorbas dance
상기 비디오는 Andre Rieu가 지휘하는 그룹의 Sirtaki, Zorbas Dance인데, 어깨동무 대신 팔을 들어 올려 손을 잡고 추는 춤동작이다.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몸을 팽이처럼 돌리는 호선무 동작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깨동무 대신, 팔을 들어 올려 손을 잡고 원을 그리는 동작이 있으며, 한그룹과 다른 그룹이 서로 사이를 지나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도 있다. 이러한 동작은 바스크지역의 전통춤에서 같은 동작을 보인다.
3. 조르바 댄스의 기원은 Sword Dance이다?
Britannica 자료는 이 Sirtaki, Hassapikos 춤이 Sword Dance가 원형이라 설명한다. butchers' guild가 시현한 칼로 추는 전투행위 춤이라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The hassapikos, or butchers’ dance, of Turkey and ancient and modern Greece—now a communal social dance—was in the Middle Ages a battle mime with swords performed by the butchers’ guild, which adopted it from the military."
(source : Sword Dance, Britannic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역사자료 카테고리)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그림사진을 제시한다.
Sword Dance of the Cutters' guild artist (source : Britannica, Sword Dance)
4. Sword Dance의 소개
그러나 긴 칼을 들고 추는 춤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깨동무하고 원을 그리거나 호선무를 추는 춤은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실제 Sword dance 비디오를 찾아 보았다. 하나는 스코틀랜드에서 전통적으로 추는 느린 동작의 Sword Dance가 있고, 다른 비디오는 코작크인들의 그야말로 칼춤을 보여 준다.
https://youtu.be/m5TzrJuLZ8M?si=_PqMrvUYMHwfbjKg
Scottish Sword Dance competition at the world famous Braemar Gathering Highland Games in Scotland
https://youtu.be/bLkjBMPAP2g?si=p92O1oOr0jsLbgGq
Cossack & Caucaus Sword Dance
코카서스지방의 Cossack Sword Dance는 그야말로 칼춤이다. 특히 여인이 양손에 긴 칼을 들고 추는 칼춤은, 과거 우리 역사 이야기에 나오는 칼춤을 추던 무희가 암살을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날 정도로 리얼하다. 발해의 여인으로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홍라희를 연상해서 만들었다는 우리 국악의 아래 칼춤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https://youtu.be/RYHWu3vr1Oc?si=uJ8sMxnANKUcKvvh
[KBS전주] 콘서트나빌레라 국악한마당// 충남예술고등학교 - '비화 - 칼의 꽃'
이 '비화-칼의 꽃'이라는 춤을 보면, 우선 몸을 돌리는 호선무가 있고, 무리가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있으며, 한 그룹과 다른 그룹이 서로 사이를 지나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있다. 위의 조르바 댄스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이다.
5. 고구려춤과 호선무
필자는 고구려춤이 몸을 팽이처럼 돌리는 호선무춤과 발을 교차하여 움직이는 춤을 추었으며, 서역에서 전래한 춤이라는 것을 아래 글을 통해 밝혔다. 또한 신라의 원효대사가 서역의 춤을 참작하며, 발을 들어 올리는 춤을 고안해 불교전파의 수단으로 사당패의 춤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았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019882161
상기 자료 중에 고구려춤에 대한 설명을 아래 다시 옮겨 본다. 소아시아,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방면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중국 돈황 막고굴(220굴) 벽화중의 무용도 6~7세기의 고구려 춤은 4~5세기의 고구려 춤에서 볼 수 있는자연 순박한 면모를 떠나서 관객을 의식한 ‘볼만한 것으로서의 춤’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무대예술에 접근한 하나의 새로운 경지로 들어갔다.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그 당시에 풍미했던 서역(西域)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독창적이고도 주체적인 역량으로 소화시켜 고구려의 춤과 음악으로 훌륭히 이룩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이라 함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 방면까지를 일컫는 말로 중국의 수(隋)·당(唐)시대에 걸쳐 문화의 교류 등 동서 교통(실크 로드)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채용한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말기인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무악(舞樂)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출처: 동양일보, 2006년 1월26일자, 박재희 글, 6-7세기 고구려 춤)
이러한 조상들의 춤들이 Zorbas Dance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Butchers' Guild가 추었다는 Sirtaki, Hassapikos에 대한 설명과 연관은 찾기 힘들었다.
6. 백인인 백정과 광대
그런데 최근 재야사학자 문무님의 글에서 필자는 힌트를 얻은 느낌이다. 문무님은 백정(白丁), 즉 가축을 도살하는 사람(=Butcher)을 일컫는 이 말이 서방사람, 백인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고서 자료를 통해 말한다. (아래 자료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801
그래서 백정이란 말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백정(白丁)은 오늘날 도살업에 종사하는 사람, 곧 도살자를 이르는 명칭이나, 역사적으로 볼 때 시기마다 그 뜻하는 바가 달랐다. 장인 또는 백장이라고도 한다.[1]
고려의 백정
백정은 고려 때에 토지를 직접 경작하던 일반 농민이다. 백정은 특정한 직역(職役)이 없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급(分給)받지 못하는 특수한 농민층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호(軍戶)에도 편입시켰고, 또 역정(驛丁)에도 보충하여 이들에 대해서만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정호(丁戶)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공전이건 사전이건 간에 그들에게 맡겨진 토지를 경작하여 조(租)를 바치고 남은 수확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전호(佃戶)였다. 또 신간지(新墾地)를 개척하거나 족친(族親)이라는 혈연을 유대로 하는 의부관계(依附關係 : 더부살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
조선의 백정
조선의 백정은 사천(私賤)의 하나로서, 일명 재우군(宰牛軍)이라 불렀다.
호적(戶籍)에서 제외된 천민계급으로 가축류의 도살을 주업으로 하는 한편 부업으로 고리를 제작하였다. 백정이란 명칭은 원래 수(隨)나라에서는 백성을 일컫던 말로서 고려에 전래되었을 당시는 그대로 백성을 가리키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는 백정에 대하여 일정한 직업도, 일정한 토지도 주지 않았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호(軍戶)에도 편입시켰고, 또 역정(驛丁)에도 보충하여 이들에 대해서만은 일정한 토지를 주기도 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천인이라 하더라도 가장 우대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고려 사회에는 북방 민족의 귀화인으로서 일반 민중과 융합되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며 특수 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족속이 있어서 이들은 양수척(陽水尺)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였는데, 이들 양수척은 왜구를 가장하고 민가 및 관청에 침입하여 노략질해 가는 일이 많아 일반 민중의 원성이 높았다.
조선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매우 엄격히 감독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 대부분이 도살업(屠殺業)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고, 기타 광대·고리 제조 등을 하며 살아갔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해 주기 위하여 백정에 편입시켰고, 일반 민중은 이들은 신백정(新白丁)이라 하였으나 종래 평민 중에서 약간 천인 축에 있던 백정보다는 양수척으로 백정에 편입된 신백정이 사회적으로 폐단이 될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이후 백정이란 명칭은 신백정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그동안 백정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무질서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매해 그 실태를 조사하여 이들을 서울과 각 지방에 골고루 배치하여 그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생활을 엄격히 감독케 하였다 한다. 이들은 천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여러 가지 부담이 없었으므로 평민 가운데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들어가는 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백정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자료 : 백정, 위키백과,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즉 백정은 고려시대부터 군호에 편입시키기도 하고, 역정에도 보충하였으며, 일정한 토지도 주었다. 그러나 북방민족의 귀화인으로서 일반민중과 융합되지 못하고 특수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족속이 있어 양수척 또는 화척이라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엄격히 관리하여 대부분 도살업을 생업으로 하고 살아으며, 기타 광대 고리제조 등을 하고 살았다 한다. 평민가운데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들어가는 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정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무질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요약하면, 북방민족의 귀화인, 도살업, 광대, 자유로운 생활 등으로, 사당패나 집시인 Romany people을 연상케한다.
7. Romany people과 이집트
Gypsy(집시)는 Egyptians이라는 말이라고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하는데, 왜 그러한지 아직 모르겠다. 최근에 이집트에서 불상이 조각된 것을 발견하였다 뉴스에 나왔는데(아래 자료 참조), 비잔틴제국의 영역이었던 이집트에서 원효의 무애희가 출발했나 하는 상상도 해본다. Romany people (Gypsy의 다른 말)은 Dark haired, Dark skinned 라면서, 이집트의 여인 클레오파트라 역을 백인여자인 리즈테일러가 맡은 것은 잘못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는 또한 Romany people 즉 집시가 이집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필자는 Romany people이 한민족과 관계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춤으로 본 조상들의 활동영역'이란 글에서 했는데, 이것과 궤를 같이 한다.
"Braunmuller discusses how, in the play she is insulted by Philo by being called a "gypsy" which is a derivative of the word "Egyptian" but also evokes imagery of "Romany people, dark-haired, dark-skinned" which would be in line with a much more racialized version of Cleopatra.[34] The other notable insult used towards Cleopatra in the play is when Philo calls her "tawny". Braunmuller notes that "tawny" is "hard to define historically" but that it "seems to have meant some brownish color, and Shakespeare elsewhere uses it to describe suntanned or sunburnt skin, which Elizabethan Canons of beauty regarded as undesirable."[34]
(자료 : 위키피디아, Anthony and Cleopatra, 인용출처: 필자의 티스토리블로그(lainfos)).
8. 이집트와 불교
그러므로 필자의 상상, 즉 원효가 이집트에서 무애희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아래는 최근에 이집트에서 불상이 발견되었다는 뉴스이다.
https://story.kakao.com/_5CgqB7/gKv3YCWO7aA
고대 이집트 베레니스 항구도시 유적지에서 발굴된 불상. [사진출처 = 연합뉴스]
(자료 : 위 기사 자료)
9.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와 무애희
원효(생몰 617-686)가 무애희를 만든 시기는 686년 이전이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이며, 문무왕(재위: 661-681)의 시기이다. (아래 자료 참조)
"무애희(無㝵戱)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향악정재로서, 무애(無㝵)를 놀리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은 그 도구에 주목해 무애로 부르거나, 무애지희(無㝵之戱)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순조(純祖) 때 간행된《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에서는 이 춤을 무애무라고 기록했으며, 이후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무애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에서 무애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하여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우인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했다. 원효가 그 형상대로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生死)를 벗어난다”란 글귀를 따서 이 도구를 무애라고 부르면서,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교화․음영하고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불타(佛陀)의 호(號)를 알게 하여,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㝵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즉 신라 승려 원효(元曉, 617-686)가 우인(優人)이 놀리던 큰 박을 본떠서 연희 도구를 만든 후 무애라고 이름 짓고,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교화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무애희는 전문적 연희자인 우인들의 연희 도구를 활용해서 만든 무애를 사용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던 연희이다.
무애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고려 말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파한집》권하(下)에서 고려시대의 무애희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옛날 원효 스님이 미천한 사람들 속에 섞이어 놀았다. 일찍이 목이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하고 이를 무애(無㝵)라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호사자(好事者)가 금방울을 박의 위에 매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하여 두드리며 진퇴하니 모두 음절에 맞았다. 이에 불경에 있는 게송을 적취(摘取)하여 무애가라 하니, 밭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다. 무애지국(無㝵智國)이 일찍이 제(題)하여 이르기를 “이 물건은 오래도록 무용(無用)을 가지고 사용했고, 옛 사람은 도리어 불명(不名)으로써 이름이 났도다” 했다. 근래 산인 관휴(山人 貫休)가 게(偈)를 지어 이르기를, “양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二障)을 끊은 까닭이요,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三界)를 초월한 까닭이다” 했으니, 모두 진리로써 이를 비유한 것이다. 나도 또한 그 춤을 보고 찬(讚)을 지으니, 그 찬에 이르되 ‘배는 가을 매미처럼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처럼 꼬부라졌도다. 그 굽힌 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요, 빈 것은 물건을 용납할 만하도다. 밀석(密石)에 막히는 것을 볼 수 없고, 규호(葵壺)에 비웃음 받지 않도다. 한상(韓湘)은 이와 같이 세계에 숨었고, 장자(莊子)는 이와 같이 강호(江湖)에 떠다녔도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고? 그는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요. 누가 찬(讚)을 지었는고? 농서(隴西)의 타이(駝李, 이인로)로다.(昔元曉大聖 混迹屠沽中. 嘗撫玩曲項葫蘆 歌舞於市 名之曰無㝵. 是後好事者 綴金鈴於上 垂彩帛於下以爲飾 擊進退皆中音節. 乃摘取經論偈頌 號曰無㝵歌 至於田翁亦效之以爲戱. 無㝵智國嘗題云 此物久將無用用 昔人還以不名名. 近有山人貫休作偈云 揮雙袖所以斷二障 三擧足所以越三界 皆以眞理比之. 僕亦見其舞作讚 復若秋蟬 頸如夏鼈 其曲可以從人 其虛可以容物. 不見窒於密石 勿見笑於葵壺. 韓湘以之藏世界 莊叟以之泛江湖. 孰爲之名 小性居士. 孰爲之讚 隴西駝李)
이를 통해, 원효에 의해 생겨난 무애희가 고려 후기에도 연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삼국유사》에는 원효의 무애가 대호(大瓠)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곡항호로(曲項葫蘆) 즉 호로박으로 되어 있다. 또한 무애는 호사자에 의해 금방울을 박의 위에 매달고 채색 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한 형태로 개작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을 흔들면 방울 소리가 울리고, 채색 비단이 휘날릴 것이다. 그리고 무애희의 내용 중에는 무애를 두드리며 진퇴하는가 하면, 양 소매를 휘두르기도 하고, 다리를 세 번 들기도 하는 동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二障), 즉 번뇌장(煩惱障, 도(道)에 장애가 되는 모든 번뇌)과 소지장(所知障, 도에 장애가 되는 지식과 견해)을 끊는 것을 의미하고,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三界, 欲界․色界․無色界)를 초월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무애희에 대하여《고려사》악지 속악(俗樂) 무애(無㝵)조에 “무애희는 서역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가사가 불가(佛家)의 말을 많이 사용하고 또한 방언이 섞여 있어 싣기 어렵다. 우선 절주(節奏)만 남겨 이로써 당시에 사용하던 음악을 갖추어 둔다.(無㝵之戱出自西域 其歌詞多用佛家語 且雜以方言 難於編錄 姑存節奏 以備當時所用之樂)”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무애희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애희가 아니라 무애지희(無㝵之戱)라 기록된 것을 볼 때, 무애희가 민간의 연희나 춤으로서 궁중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무애희는 서역 전래의 연희로서 전문적 연희자들이 연행하던 것을 원효가 개작하여 불교 포교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료: 무애희, 한국전통연희사전,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Romany people)
10. 이집트, 비잔틴제국과 신라
필자는 우마이야왕조의 무아위아가 문무왕(재위: 661-681)이 아닌가 추정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1620876463
그 당시 무아위아가 점령한 지역에 이집트가 포함되어 있다. (아래 지도 참조) 그리스가 포함된 비잔틴제국은 백제였으며, 이를 흡수한 신라였으므로, 문무왕 시기의 신라에 포함되었었다.
우마이야왕조의 무아위아 지배지역 (녹색은 기존지역, 분홍색지역은 추가확보지역)
(자료: 위키피디아)
https://lostcorea.tistory.com/617
https://lostcorea.tistory.com/604
11. Romany people의 보수적 가치관
Romany people인 이들은 그러나 매우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가족 중심주의, 집안어른의 위치, 혼전 순결유지, 한때 유행했던 조혼 풍습, 신부 부모에게 예물을 주는 관습, 집안에서의 아녀자의 역할, 등을 언급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이들의 가치관이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유람하는 한민족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기 무애희 자료에서는 무애희가 고려, 조선을 거쳐, 조선후기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The traditional Romanies place a high value on the extended family. Virginity is essential in unmarried women. Both men and women often marry young; there has been controversy in several countries over the Romani practice of child marriage. Romani law establishes that the man's family must pay a bride price to the bride's parents, but only traditional families still follow this rule.
Once married, the woman joins the husband's family, where her main job is to tend to her husband's and her children's needs, as well as to take care of her in-laws. The power structure in the traditional Romani household has at its top the oldest man or grandfather, and men in general have more authority than women. Women gain respect and authority as they get older. Young wives begin gaining authority once they have children."
(source : Romany people, Wikipedia)
12. Butchers' Guild와 무애희의 연관성
고려의 백정은 도살업자이면서, 군호에 편입하기도 했으며, 북방민족의 귀화인으로서 일반 민중과 잘 섞이지 못해 특수부락을 이루며 살았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북방민족의 귀화인이라면, 발해가 망하고 들어온 유민들일 수 있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이 일부 도살업에 종사하는 백정으로, 광대 등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광대는 사당패 등을 의미하며, 원효가 춤을 만들어 가르쳤다는 그 집단이다. 여기에 비잔틴시대의 Butchers' Guild와 연관이 있다. 백제의 비잔틴제국을 신라가 흡수했고, 고려는 이를 다시 흡수했다. 즉 고려의 백정은 비잔틴제국의 Butcher가 될 수 있다. (필자는 비잔틴제국을 백제로 추정했다).
그리고 광대노릇도 하는 이들은 고구려의 춤과 발을 들어 올리는 원효의 춤을 출 수 있다. 필자는 Romany people, 즉 집시들의 춤이 이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춤으로 본 조상들의 활동영역'이란 글에서 밝혔다.
또한 백정은 백인 장정이란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조르바춤, Sirtaki, Hassapikos는 Butchers' Guild (백정의 길드집단)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은 군역을 담당하는 군인의 신분이기도 했으며, 이들이 춘 춤이 고구려의 춤과 원효가 만든 춤동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호선무의 동작, 여럿이 함께 춤을 추는 동작, 한 그룹과 다른 그룹이 서로 교차하며 앞뒤로 이동하는 동작 등은 이러한 춤과 연관이 있는데, 우리는 위의 비디오에서 Sirtaki, Hassapikos, Zorbas Dance에서 이러한 특징을 발견했다.
13. 그리스문명과 하나라 문명
필자는 그리스에 대한 의문이 아직 많다. 필자가 고주몽이라 추정하는 Julius Caesar는 그리스말에 능했다고 위키피디아 자료에 나온다. 난 로마사를 미화하는 풀타크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했다. 그러나 그리스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하인 하나라가 있지 않았나 하는 글을 최근에 쓰면서, 그리스 문명에 대해 더 관심이 가는 상황이다. 우리들의 생활에 깊이 녹아 있는 이솝 우화의 이솝도 이 지역출신이다.
https://lostcorea.tistory.com/1719
철학자 플라톤은 이집트를 방문해서 고승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아틀란티스 문명을 이야기했으며, 이들이 그리스인들의 조상일 수 있다는 언급을 했다고 한다.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의 Garamantes문명은 관개수로를 뜻하는 단어도 있다. 이집트의 신들 이름이 일부 이지역에서 왔다고 한다. 더구나 이 근처 부근에 아틀란티스의 유적이 있다 한다. 그래서 아틀란티스문명이 하나라 문명이 아닌가 추측한다.
14. 그리스와 고구려
하나라, 월나라는 흉노족의 조상들이라 한다. 따라서 그리스가 하나라 문명과 관련 있다면 그리스는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 흉노족의 후예가 고구려이다. 훈족은 흉노족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으로 보이는 고트족의 왕, Alaric I은 그리스지역에 4년을 머물렀다 한다. 그리스 지역에는 Ko 이름이 들어가는 성이 유난히 많다.
Castle Kos in Kos island in Greece
모두 고구려식 성곽모습이다. 고구려식 성곽은 고조선의 성곽모습과 같다고 한다. 하나라는 고조선 제후국이다. 크레타섬에서는 BC 2000년경부터의 미노스문명이 있었다. 즉 그리스가 하나라 문명, 고조선 문명, 흉노족, 이들의 후손인 고구려와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주몽으로 추정되는 Julius Caesar가 그리스 말을 잘 했다는 기록이 이해가 간다.
15. 결 론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인의 자유로운 영혼이 표출되는 Zorbas Dance는 고구려 춤과 연관되지 않나 판단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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