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북제, 북주 시기의 프랑크 역사와 남북조, 한민족, 돌궐 역사

Chung Park 2022. 10. 21. 11:10

지난 글, '돌궐은 북해지역의 Saxons족인가?'에서 돌궐의 대강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즉 Saxons족의 활동지역인 독일 북부, 현재 네델란드 주위의 Saxons족과 영국의 Saxons족 진출지역이 돌궐의  활동지역 가능성을 보였었다.

 

그러나 프랑스 북부 Normandy지역은 바이킹들이 9세기 이후 Norse인들이 진출한 지역이다. 그래서 노르만디란 이름을 가졌다. 그전에는 이 지역은 영국에 있는 Saxons족, Alans족 등 여러 부족의 약탈지역이 되곤 했다. 

 

프랑스 북부 해안을 약탈한 역할은 같지만, 영국지역에서 넘어온 Saxons족의 약탈과 Norse 지역에서 건너 온 세력들의 약탈은 구분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프랑크 역사자료를 보면서 구분해 보고자 한다. 이는 돌궐의 정체 파악에 대해 도움을 줄 것이다.

 

Saxons족은 숙신, 물길, 여진 등으로 불리는 숙신족으로 판단되며, 반면 Norse족은 바이킹족의 선조로서 다소 다르다. 돌궐은 흉노의 별종이라 했는데, 숙신, 물길, 여진의 풍습에서 흉노의 특징은 없어 보인다. 바이킹족의 문화는 이미 쓴 글로 언급되었지만, 우리 마한의 문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흉노의 별종이 돌궐이라면, 오히려 바이킹의 선조가 돌궐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프랑크왕족의 역사를 통해 돌궐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한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돌궐의 위치를 프랑크왕국의 역사 속에서 관련 자료를 검토하며 직접 돌궐의 위치를 찾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 번 인용하지 않았던 돌궐의 역사 자료를 언급하면서 비교 검토하며 분석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중국의 역사가 요수인 론강과 패수인 라인강의 서쪽 지역, 즉 프랑스지역의 역사로 추정한 바 있다. 따라서 프랑크 역사와 비교하는 가운데, 중국사와 관련된 한민족사도 검토될 것이다.

 

I. 북제(550-577), 북주(577-581) 의 역사와 돌궐

중국사에서 돌궐은 주로 북제, 북주의 시기를 거쳐, 수나라, 당나라의 역사에서 나타난다. 이중에서 먼저 북제, 북주 시기의 중국사를 먼저 살피고자 한다. 

 

1. 북제(550-577)의 역사와 둘궐

 

"북제(北齊, 550년 ~ 577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386년 ~ 589년) 중에 강태공의 후예로 알려진 강성(姜姓) 고씨(高氏)에 의해 건국된 왕조이다. 국호는 (齊)이지만 남조의 남제(南齊, 479년 ~ 502년)와 구별하기 위해 북제라고 불리었다.

 

창시자인 고환은 북위 6진의 난에 가담하여 선비족의 부족중 해(奚)족의 족장 이주영(爾朱榮)에게 귀순하여 커다란 명성을 날렸다. 이주영이 국정을 농단하다 효장제(孝莊帝) 원자유(元子攸)에게 살해당하자 자립하여 이주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효무제(孝武帝) 원수(元脩)를 옹립하고 승상이 되어 북위의 실권을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다.

 

후에 효무제는 그를 피해 서쪽의 군벌 선비족 우문태(宇文泰)를 의지했다. 이윽고 고환은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을 옹립하고 수도를 (鄴)으로 옮겨 동위를 건국하여 서위와 다투었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그 직후 하남의 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나라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후경의 모반을 꺾어버린 고징이었으나, 주벽에 의한 포악한 행동으로 550년 양나라로부터 투항한 난경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징의 동생 고양이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550년 이후) 돌궐의 공격에 의해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

 

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북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번 격퇴하였다.

 

고씨 가문은 주벽, 기행이 많아 피를 부르는 사건이 많은 반면, 대부분 우수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 났기에 사천성을 병합하여 경제력을 강화한 북주에 대해 항상 군사적 우위를 지켰으나, 후주 고위(高緯)는 소인배를 신임하여 그들의 참언으로 인해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률광, 난릉왕 등의 명장들을 처형하는 등의 실정을 거듭하다가, 577년 북주에게 멸망당했다.

 

신라와의 관계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1][2] 565년,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신라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3]

(자료 : 북제,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조)

 

북제는 북위가 6진의 난에 의해 멸망한 후, 6진이 난에 가담했던 고환이 업(鄴)을 중심으로 동위(東魏)를 건설하고, 이후 제(齊)나라를 세웠다. 남조의 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제라 하였다. 즉 중국의 동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재야 사학자는 북제가 고구려의 속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조, 신완순씨의 공유글 참조). 고씨이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제나라는 그 위치상으로 중국의 동쪽에 있는 지역의 나라이름으로 추정된다. 후에 이정기의 후손들도 제나라를 세웠는데, 역시 중국의 동쪽지역이다. 필자는 북위도 고구려와 관련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북제는 돌궐의 침입을 받아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된다. 또한 북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돌궐과 연합하여 거란을 제압하고 서쪽의 북주군을 여러 번 물리쳤다고 기록된다. 이모두가 550-577년 기간 즉 27년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다음과 같은 항목이 검토 대상이다. 

 

1) 프랑크왕국 역사에서 550-577년 사이에, 북제의 위치로 추정되는 북동쪽에 있는 Austrasia가 우측에 있는 거란(Allemannia)세력이 있는 지역과 전쟁이 있었는지 살필 일이다. 그것도 550년이후 돌궐이라 추정되는 세력과 연합하여 전쟁이 있었는지가 관심 대상이다. 

 

2) 북제의 위치의 Austrasia가 돌궐로 추정되는 세력과 연합하여 서쪽의 북주의 위치인 Neustria와 전쟁을 하여 여러 번 이겼는지도 검토할 일이다.

 

3) 프랑스 북쪽에서 돌궐 추정세력이 북동쪽(북제지역) Austrasia와 북서쪽(북주지역), Neustria에 공격한 일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 

 

4) 북제는 또한 낙랑군지역에 있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기록을 보인다. 따라서 북제지역의 Austrasia가 이태리 북부의 Lombardy(진흥왕시 신라지역)와 협력관계가 있는지 살필 일이다. 

 

5) 북제가 고구려의 속국이란 주장이 있다. 또한 고씨의 왕국 북제이다. 따라서 고구려로 판단되는 고트족과  프랑크왕국의 Austrasia(북제지역)가 어떤 인척관련이 있는지 살펴 볼 일이다. 

 

2. 북주(557-581)의 역사와 돌궐

 

"북주(北周, 557년 ~ 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때 선비족 우문씨가 건국한 국가이다. 국호는 주지만 고대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북주라고 부른다.

 

실질적인 창시자 선비족 우문태는 북위의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하발악이 죽자 그가 가지고 있던 기반을 계승한 뒤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효무제가 북위의 재상 고환으로부터 도망쳐 그에게로 왔다. 그 후 고환이 동위를 건국하자 우문태도 사이가 나빠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니 이것이 서위가 되었다. 그 후, 우문태는 서위의 승상으로까지 승진했다.

 

우문태 사후 승상을 물려받은 우문각은 557년에 서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으나,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였던 우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초대 효민제부터 3대 무제까지 세우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제가 우문호를 주살하고, 577년에 고씨가 세운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 했다. 또한 무제는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을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부른다.

 

또한 서방에서 돌궐의 지속적인 칩입을 받아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게 된다.

 

제4대 황제인 선제는 온갖 포악무도한 짓을 자행했기 때문에,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에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수국공 양견의 힘이 강해졌으며 선제가 죽자 양견은 아예 외척이라는 명목으로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실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581년에 제5대 황제인 정제는 양견에게 선양하니 수나라가 세워지고, 북주는 멸망하게 되었다.

 

정치 체계

 

북주는 주례에 기초해서 관제와 부병제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대총재, 대사도, 대종백, 대사마, 대사구, 대사공의 6관의 관제는 3성 6부라고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유교 경전에 있는 주례에 기초한 관제를 사용하고, 옛 주나라의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군사 체계

 

북주는 군의 요직으로 8주국 -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 선비족 출신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밑에 24개부를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원래 성씨가 보육연이며 선비족이던 수나라 양씨가 12대장군이었고 당나라 이씨가 선비족 관롱집단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선비족 지배 계층이 지배하고 한족이 피지배 계층인 국가 체제는 수나라, 당나라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자료 : 북주,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조)

 

북주는, 북제와 유사한 시기에, 화북지방 서쪽에 있는, 북위의 6진의 난후, 관중지방에 있던 서위에 이은 나라이다.  577년에 동쪽의 북제를 멸망시키고 오직 4년동안 화북을 통일한 국가이다. 이후 수나라로 넘어간다.  북주 역시 서쪽으로부터 (?) 돌궐의 침입을 계속 받아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쳤다 한다. 다음과 같은 항목의 검토가 필요하다. 

 

가) 577년 프랑크왕국의 Neustria(북주지역)가 동쪽의 Austrasia(북제지역)를 4년동안 잠시나마 합병했는지 살필 일이다.

 

나) 581년 북주에서 수나라로 넘어 가는 혼란이, 프랑크왕국에서 Austrasia를 통합한 Neustria가 4년후 수나라 같은 통합된 나라로 변경되는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다) 프랑크왕국의 북주지역, Neustria가 돌궐 추정세력의 침입을 계속 받아 공물을 바쳤는지 살필 일이다.

 

라) 북제, 북주가 계속 서로 싸웠듯이, 프랑크왕국의 Austrasia(북제지역)와 Neustria(북주지역)가 557-577기간동안 계속 전쟁을 했는지도 살필 일이다. 

 

 

II. 북제(550-577), 북주(557-581) 시기의 프랑크왕국 역사와 돌궐

 

Expansion of Frankish Empire (481-555) (source : Wikipedi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onquests_of_Clovis.png#/media/File:Conquests_of_Clovis.png)

1. Theudebald I (r 548-555, Austrasia) 시기의 프랑크왕국 역사와 돌궐

Theudebald I은 Metz, Rheims등 Austrasia지방의 왕이었다. 상기 지도에서 프랑스의 북동쪽 방향이다. 그러므로 중국사의 북제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Theudebald or Theodebald (in modern English, Theobald; in French, Thibaut or Théodebald; in German, Theudowald) (c. 535–555), son of Theudebert I and Deuteria, was the king of MetzRheims, or Austrasia—as it is variously called—from 547 or 548 to 555.

 

He was only thirteen years of age when he succeeded and of ill health. However, the loyalty of the nobility to his father's memory preserved the peace during his minority. He married Waldrada, daughter of the Lombard king Wacho and his step-aunt (a sister of his father's second wife). This marriage fortified the alliance between Austrasia and Lombardy.

 

Austrasia지역의 Theudebald I왕은 Lombardy왕의 딸, Waldrada와 결혼하며 동맹관계를 강화했다고 위에서 기술된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북제는 낙랑군지역에 있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기록을 보았다. 이는 프랑크의 Austrasia가 이태리 북부에 있는 Lombardy와 협력관계가 있는지 살필 일이다라고 했는데, 기막히게 딱 들어 맞는 역사가 프랑크 Austrasia역사에서 나타난다. 

 

당시 신라는 진흥왕 시기로서 백제의 성왕과 함께 이태리 지역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 시기(489년 신라의 호명성 등 7개성을 함락하고 미질부까지 진격)부터 이태리지역(상기 지도의 동고트왕국지역)은 고구려가 점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연합하여 이들 지역을 수복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에서는 한강유역 회복역사로 기술된다.  아래 기록에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 가 552년, 프랑크왕국이 점령했던 이태리 북부지역, Lombardy을  빼앗은 것으로 기록된다. 이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에게 이들 지역을 빼앗기고 이태리 남부지역만 차지한다. 이것이 비잔틴제국 Justinian I 원정의 결과이다. 당시 백제 성왕은 고구려의 평양까지 진격하고 싶었으나, 신라 진흥왕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흥왕은 백제의 고토 한성지역을 점하였다고 일본 서기는 기술하였다. 백제의 고토 한성지역이 상기 지도의 Burgundy지역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프랑스의 Clermont-Ferrand(클레르몽-페랑)지역이 백제 한성이 아닌가 추정했다. 이 지역이 위 지도의 Burgundy지역이다. 

 

프랑크 역사에서 Burgundy는 고트족의 동맹이라 했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협상을 하여 평양진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백제 고토지역인 한성을 점하였다고 했다. 당시 평양은 필자는 스위스의 쥬리히로 추정한다. 따라서 고구려인 고트족과 부르군디가 동맹인 것은 부르군디가 신라 진흥왕이 차지한 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협을 느낀 또는 기존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구려계일 수 있는 북제로 추정되는 Austrasia가 신라인 Lombardy왕의 딸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Nevertheless, Theudebald could not hold on to the conquests of his father in the north of Italia. The Byzantine Emperor Justinian I sent an army under the command of Narses in 552. The Franks who did not perish of want or plague in Apulia were defeated at Casilinum.[1] "

 

(source : Theudebald (r 548-555),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555))

 

위의 북주 역사에서 보듯이,  북제, 북주가 계속 서로 싸웠다. 때문에 프랑크왕국의 Austrasia(북제지역)와 Neustria(북주지역)가 557-577기간동안 계속 전쟁을 했는지도 살필 일이다라고 분석했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Neustria(북주)와 Austrasia(북제)는 567년부터 613년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기록한다. 그리고 부르군디가 중재 역할을 하였다고 기술된다. 즉 북제와 북주의 역사가 이들지역에서 있었다는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Tours의 카톨릭 수도사 Gregory가 쓴 Gregory of Tours 기록에 기초하여 작성된 프랑크역사에서는 Clovis I의 네 아들간 형제 집안싸움으로 묘사되며 (589년까지), 기독교 전파의 목적을 가진 수도승에 의해 작성되었다. 따라서 정사가 기록되는 역사가의 시각이 있는지 의심된다. 프랑크 역사는 이후에도 계속 형제의 난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민족이 다투며, 이합집산하는 남북조시대와 수, 당나라의 과정을 오로지 형제의 난으로 묘사하여, 프랑크왕국의 역사가 프랑스의 현재 영토의 나라 역사임을 주장하기 위해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프랑스 지역 사람들은 형제간에 골육상쟁을 몇백년간 지속하는 저급한 민족으로 묘사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필자는 이 당시의 기독교 역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품는다. 중국의 사가들도 춘추필법으로 남북조의 역사를 막장의 역사로 왜곡했지만, 이정도로 왜곡하지는 않았다. 

 

"From 567 to the death of Sigebert II in 613, Neustria and Austrasia fought each other almost constantly, with Burgundy playing the peacemaker between them."

(source : Austrasia (511-751),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Division of Gaul on Clovis's death (in 511), showing Theuderic's kingdom beside his brothers' (source : Wikipedia)

 

"Theuderic I[a] (c. 485 – 533/4) was the Merovingian king of Metz, Rheims, or Austrasia—as it is variously called—from 511 to 533 or 534.

 

He was the son of Clovis I and one of his earlier wives or concubines (possibly a Franco-Rhenish Princess, Evochildis of Cologne).[1] In accordance with Salian tradition, the kingdom was divided between Clovis's four surviving sons: Childebert I in ParisChlodomer in Orléans, and Chlothar I in Soissons. Theuderic inherited Metz in 511 at his father's death. Early in his reign, he sent his son Theudebert to kill the Scandinavian King Chlochilaich (Hygelac of Beowulf fame) who had invaded his realm.[2]

(source : Theuderic I (r 511-534),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위의 첫번째 지도에서 Clovis I은 프랑스 북부지역과 Aquitaine지역을 점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위의 위키자료에서, Clovis I의 네아들은 Paris, Orleans, Soissons, Metz등의 프랑스 북부지역만을 나누어 가졌다. Aquitaine지역은 이들의 대상이 아니었다. 즉 Clovis I이 죽었을 때, 이 Aquitaine지역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주목하여 볼 점이다. 

 

Theuderic I왕은 Austrasia지역 왕으로 511-534년 기간동안 재위했다. 그런데 그의 초기 재임시기에, 아들 Theudebert를 보내 그들 왕국을 침범한 스칸디나비아 왕 Chlochilaich를 죽이라고 보냈다고 위에 기술되었다. 

즉 이런 기록은 스칸디나비아왕 (Danish King or King of Goth, or King of Geats (Getae))의 세력이 라인강 하류지역인 Frisian지역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이 551년 신성과 백암성에서 있었는데, 이 지역은 라인강을 타고 내려오는 침입로를 이용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즉 위의 스칸디나비아 세력이 돌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돌궐은 북유럽의 누구인가?'라는 글을 썼는데, 이를 증명한 바 있다. 

 

돌궐이 흉노의 별종이라고 하는 것을 새기면, 고트족과 관련 있는 위의 세력이 오히려 돌궐의 정체에 숙신인 Saxons족보다 더 가깝지 않나 판단된다. 8세기에 등장하는 바이킹의 해상 경로는 그 전의 북해, 발틱해 해안가 침입세력과 유사하다. 그리고 고구려사에서 Saxons족의 침입이라면 숙신으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구태여 돌궐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즉 Saxons족의 해안 침입을 돌궐족의 프랑스 북부 침입으로 단정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러나 롬바르드 왕국의 역사에서 삭슨족과 같이 움직이는 역사가 나타나니, 좀 더 연구한 후 판단한 일이다.

 

 

"Theuderic got involved in the war between the Thuringian King Hermanfrid and his brother Baderic. Theuderic was promised half of Thuringia for his help; Baderic was defeated, but the land promised was not given up. In 531, Theuderic invaded Thuringia with the support of Chlothar. Hermanfrid was killed in the invasion and his kingdom was annexed.[1]

 

(번역) Theuderic (Metz지역)은 Thuringian 왕 Hermanfrid과 그의 동생 Baderic사이의 전쟁에 참여했다. Theuderic은 그 도움의 대가로 Thuringia영토의 반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Baderic이 패배했음에도, 약속된 땅은 받지 못했다. 531년 Theuderic(Metz)은 그의 형제 Chlothar(Soissons)의 도움을 받아 Thuringia를 침범했다. Thuringia왕 Hermanfrid는 전쟁에서 전사했고, Thuringia왕국은 부용국이 되었다. 

 

The four sons of Clovis then all fought the Burgundian kings Sigismund and Godomar; Godomar fled and Sigismund was taken prisoner by Chlodomer. Theuderic married Sigismund's daughter Suavegotha. Godomar rallied the Burgundian army and won back his kingdom. Chlodomer, aided by Theuderic, defeated Godomar, but died in the fighting at Vézeronce.

 

(번역) Clovis의 네아들은 모두 연합하여 Burgundian 왕 Sigismund와 Godomar와 싸웠다. Godomar은 도주했고 Sigismund는 Chlodomer(Orleans)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Theuderic은 Sigismund의 딸 Suavegotha와 결혼하였다. Godomar는 Burugundian군사를 규합하여 전쟁하여 그의 왕국을 다시 찾았다. Chlodomer(Orleans)은 Theuderic(Metz)의 도움을 받아 Godomar를 패배시켰으나, Vezeronce전투에서 죽었다. 

 

이 당시의 Burgundian왕국은 남조의 후량으로 보인다. 한성으로 보이는 Clermont Ferrand 지역을 475년이후 고구려가 점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량은 고구려의 지역으로 보인다. 위의 기록에서 Godomar는 부루군디왕국을 유지한 것으로 기록된다. 다음 왕조인 진나라(577)가 들어 설 때까지 후량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량은 고구려라는 결론이 된다.

 

Theuderic then, with his brother Chlothar and his son, attacked Thuringia to avenge himself on Hermanfrid. With the assistance of the Saxons under Duke Hadugato, Thuringia was conquered, and Chlothar received Radegund, daughter of King Berthar (Hermanfrid's late brother). After making a treaty with his brother Childebert, Theuderic died in 534. Upon his death the throne of Metz, passed (without hindrance, unexpectedly) to his son Theudebert. Theuderic also left a daughter Theodechild (by his wife Suavegotha, daughter of the defeated Sigismund of Burgundy). Theodechild founded the Abbey of St-Pierre le Vif at Sens.[3]

(번역) Theuderic(Metz)은 그의 동생 Chlothar(Soissons)과 그의 아들(Theudebert)과 함께 Hermanfrid에 복수하기 위해 Thuringia를 공격했다. Hadugato공작의 Saxons족의 도움으로 Thuringia는 정복되었다. Chlothar는 Hermanfrid의 죽은 동생인 Berthar왕의 딸 Radegund를 얻었다.  Theuderic은 그의 동생 Childebert(Paris)와 평화조약을 맺은 후 534년 죽었다. Theuderic 죽음이후, Metz의 왕좌는 그의 아들 Theudebert에 넘겨졌다. (아무 방해 없이, 예상외로). Theuderic은 딸 Theodechild(패배한 Burgundy의 Sigismund의 딸인 그의 아내 Suavegotha의 딸)을 남겼다. Theodechild는 Sens에 St Pierre le Vif Abbey를 설립했다. 

(source : Theuderic I (r 511-534),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2. Clothar I ( r 555-561)시기의 프랑크왕국 역사와 돌궐

 

The expansion of Clothar's territorries, shown in brown (source : Wikipedia)

 

"Thuringian conquest

 

In 531, Hermanafrid, king of the Thuringians, promised to give Chlothar's half-brother, Theuderic, part of the Kingdom of Thuringia if he would help to depose Baderic, Hermanafrid's rival and brother. Theuderic accepted. However, having been injured after a victory, he appealed to Chlothar to continue the war. Hermanafrid died around this time, and the goal became simply to conquer Thuringia.

The alliance, along with the aid of his nephew Theudebert I, conquered Thuringia, and it became a part of the Frankish domain. During the division of the spoils, Chlothar and Theuderic argued fiercely over the hand of Princess Radegund, but eventually Chlothar won the dispute on the grounds that it had been his men who had captured her.[7]

 

(번역) Thuringia 정벌

 

531년, Thuringians의 Hermanafrid 왕은 그의 라이벌이자 형제인 Baderic을 물러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Therungia왕국의 일부를 Chlothat의 이복형제인 Theuderic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Theuderic은 동의했다. 그러나 승리후 부상당한 후, Chlothar에게 전쟁을 계속할 것을 호소했다.  Hermanafrid는 이때쯤 죽었으며, 목표는 Thuringia를 정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카 Theudebert I의 도움과 함께 연합군은 Thuringia를 정복했고, Frankish 영역의 일부로 되었다. 전리품을 분배하는 동안, Chlothar와 Theuderic은 Radegund 공주를 취하는데 있어 심하게 다투었으나, 결국 Chlothar가 그녀를 잡은 사람이 그의 부하라는 점으로 논쟁에서 이겼다. 

 

Princess Radegund

Radegund is brought before Chlothar

 

In 538, Radegund was brought to Soissons to marry Chlothar, as "not illegitimate but legitimate queen," who could help consolidate his dominance over Thuringia.

 

While her title and status were necessary for Chlothar to attain authority over Thuringia, Radegund remained in simple clothing and was not treated in the customary manner of a queen. This was largely due to her Christian faith; she did not want to appear luxurious.

 

Radegund did not eat to excess. She insisted that much of her food be given to the poor. She spent most of her time praying and singing psalms but spent very little time with the king. Her allegiance was to God first and to Chlothar second. Chlothar became irritated and had many disputes with her.[8]

 

She retired to a convent and went on to found the abbey in Poitiers St. Croix, the first nunnery in Europe. She was canonized Saint Radegund.[9]

 

Thuringia의 Radegund 공주는 538년 Chlothar와 결혼하기위해 Soissons에 데려왔다. Thuringia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정식 왕비의 형태의 결혼이었다. 때문에 정식왕비로 대우를 받지 못했고, Radegund공주도 이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신앙생활만 한 것으로 기술되나, 억지 결혼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결국 Chlothar왕과 자주 다투게 되고, 결국 수녀원으로 은퇴하게 되고, Poitiers에 있는 St. Croix 수녀원을 유럽최초로 설립했다.   

 

Thuringian은 여자의 경우 편두를 한 부족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일원인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기록을 보면, Thuringian을 정벌했음에도, 그의 공주를 서로 데려 가려고 싸우는 모습은 Thuringain Kingdom과 연계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상황을 의미한다. 즉 531-538년 이시기는 서위와 동위의 시기이다. 고구려는 동위와의 교류가 많이 있었다. 따라서 Thuringians의 점령은 프랑크왕국의 확장 (481-555) 지도의 위치를 볼 때, 거란의 오른쪽에 있는 고구려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이시기에 고구려는 서고트지역에서도 서위 동위와 충돌이 있었으며, 여기서는 동위와의 충돌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Chlothar(Soissons)와 Theuderic(Metz, Rheims)이 서로 자기편으로 삼아, 주변과의 외교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는 동위와 계속적인 교류를 유지했다.

 

Acquisition of the kingdom of Orléans

 

Chlothar was the chief instigator in the murder of his brother Chlodomer's children in 524, and his share of the spoils consisted of the cities of Tours and Poitiers. Chlothar's brother, Chlodomer was killed on 25 June 524 during an expedition against the Burgundians at the Battle of Vezeronce. Upon Chlodomer's death, his three sons, Theodebald, Gunther, and Clodoald, were entrusted to care of their grandmother, hence the young princes were raised in Paris by Chlodomer's mother, Chlotilde.

 

(번역)  Orleans왕국의 획득

 

Chlothar는 그의 형제 Chlodomer의 자녀들을 524년 죽이는데 주요 선동자였으며, 그의 전리품 몫은 Tours시와 Poitiers시였다. Chlothar의 형제 Chlodomer는 Burgundians과의 전쟁, Vezeronce전투에서  524년 6월25일 사망했다. Chlodomer가 죽자 그의 세아들, Theudebald, Gunther, Clodobald들은 그들의 할머니를 돌보라고 맡겨졌으나, 여기서 이들 젊은 왕자들은 Chlodomer의 모친 Chlotilde에 의해 Paris에서 키워졌다. 

 

 

To prevent the kingdom of Orleans from returning to his nephews, Chlothar joined with his brother Childebert in 532 to threaten the young heirs with death unless they agreed to join a monastery. They sent Arcadius, grandson of Sidonius Apollinaris, to their mother, Clotilde, with a pair of scissors and a sword. He gave the queen an ultimatum: the boys could either live as monks or die.

 

(번역) Orleans왕국이 조카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Chlothar는 그의 형제 Chilebert와 함께 532년 젊은 상속자들을 수도원에 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Chlothar와 Childebert는 Sidonius Apollinaris의 손자, Arcadius를 그들의 어머니, Clotilde에게 가위와 칼을 함께 보냈다. 그는 여왕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 소년들은 수도승으로 살든지 아니면 죽는다고.

 

Germanic traditions gave Queen Clotilde, as the mother, the right as head of her household. However, among kings the lineage passed to younger brothers before it passed to the next generation. Due to tribal politics, shearing of the boys' hair could lead to a civil war; long hair was a symbol of Frankish royalty, and to remove it was considered a grave insult. But Theodebald, Gunthar, and Clodoald could someday lay claim to the throne, and it was Chlothar and Childebert's duty to pass authority on to them. Clotilde was disgusted and shocked at the demands relayed by Arcadius and stated that she would rather see her grandsons dead than see their hair shorn.[10]

 

(번역) 게르만 전통은 Clotilde여왕에게, 어머니로서 그의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왕들중에는 혈통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전에 보다 어린 형제들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부족 전통때문에, 소년들의 왕위 상속을 막는 것은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긴 머리는 프랑크왕통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를 제거하는 것은 심한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Theodebald, Gunthar, Clodoald는 언젠가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리고 Chlothar와 Childebert 가 이들에게 권위를 물려주는 것이 의무였다. Clotilde는 Arcadius의 의해 전해진 요구에 충격을 받고 역겨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차라리 내 손자들이 머리를 깎느니 죽는 것을 보겠다고. 

 

 

Assassination of Thibaut and Gunthar

 

The two uncles went through with their plan to murder the children. Chlothar stabbed Theodebald in the armpit. Gunthar threw himself at the feet of Childebert, who began to cry and almost gave in to the pleas of his nephew. Chlothar, however, demanded that Childebert carry through with the murder, stating that it was the only way to consolidate power. Childebert gave Gunthar up to Chlothar, who stabbed him.[11] Theodebald and Gunthar were ten and seven years old respectively.

(번역) 두 uncles은 어린이들을 죽이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Chlothar는 Theodebald의 겨드랑이를 칼로 찔렀다. Gunthar는 Childebert의 발밑에 엎드렸고, Childebert은 울기 시작하면서 조카의 간청에 거의 포기했다. 그러나 Chlothar는 Childebert에게 이것이 권력을 확고히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살인 실행계획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Childebert는 Gunthar를 Chlothar에 넘겼고, Chlothar는 Gunthar를 칼로 찔렀다. Theodebald와  Gunthar는 당시 각각 10살, 7살 이었다. 

 

Clodoald remained alive by managing to escape, hidden by loyal supporters. He renounced all claims and chose a monastic life. Childebert and Chlothar could then freely share their acquired territory. Meanwhile, Theuderic captured a parcel consisting of AuxerroisBerry and Sens.

 

(번역) Clodoald는 어떻게 살아 도망쳐서, 지역내 지지자에 의해 숨겨졌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승 생활을 선택했다. Childebert와 Chlothar는 그들이 얻은 영토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Theuderic은 Auxerrois, Berry, Sens지역을 확보했다. 

 

 

Orleans지역을 동쪽의 Chlothar(Soissons)와 서쪽의 Childebert(Paris)가 나누어 갖는 스토리이다. (위 지도 511년 경 프랑크왕국의 분리 모습 지도 참조) Orleans은 Loire강에 있는 도시로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Loire강이 중국의 황허강, 또는 한수(漢水)로 추정된다. 따라서 Orleans왕국의 취득은 Poitiers까지 차지하는 것이 된다. 이 지역은 서위지역, 후에 북주지역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서위는 이후 더 남으로 진격하여, Toulouse를 차지하는데, 필자는 Toulouse를 장안으로 추정한다.

 

Second Burgundian war

 

In 532, Childebert and Chlothar seized Autun. They hunted for Godomar III, brother of Sigismund, with the help of his father and ally, the king of the Ostrogoths Theoderic the Great.

 

The death of Athalaric, the grandson and successor of Theodoric the Great, in 534, generated a succession crisis in the Ostrogothic kingdom, the Burgundian ally. Chlothar, Theudebert, and Childebert took the opportunity to invade the Burgundian kingdom, now devoid of Ostrogothic protection. The Burgundian kingdom was overtaken and divided between the three Frankish rulers. Chlothar received GrenobleDie and many of the neighbouring cities.[12]

 

(번역) 2차 Burgundian War

 

532년 Childebert와 Chlothar는 Auturn을 점령했다. 그들은 Sigismund의 동생, Godomar III를 사냥했는데,  그의 아바지의 도움과  동맹인 동고트왕국 Theoderic the Great의 도움을 얻었다. 

 

534년 Theoderic the Great의 후계자이며 손자인 Athalaric의 죽음은 Burgundian의 동맹인 동고트왕국의 왕위계승의 위기를 낳았다. Chlothar, Theudebert, Childebert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고트왕국의 보호가 없는 Burgundiian왕국을 침범하였다. 부르군디언왕국은 점령되었고, 3명의 프랑크 rulers에 의해 나뉘어졌다. Chlothar는 Grenoble, Die, 그리고 많은 주변도시들을 가지게 되었다. 

 

 

부르군디지역은 남조의 지역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동시대의 양(후량)나라(502-557)의 자료를 보자.

 

"양(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의 3번째 왕조이다.

 

남제 말기에 황제였던 동혼후는 폭정을 해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를 살해했다.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인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 뒤 동혼후를 살해한 뒤 화제를 옹립했다. 502년에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무제이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기간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했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무제의 맏아들인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다.

 

그러나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사신(捨身)을 행하는 무모한 짓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르나 재임 도중에 황제를 잃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548년 동위의 무장이었던 후경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했다. 다음해 건강이 함락됐고 무제는 사로잡힌 뒤 쇠약해져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 않아 무제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에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은 즉위한 뒤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기니 그가 바로 원제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에 있던 무릉왕 소기와 원제의 대립을 틈타 촉을 점령했다. 또한 양양을 가지고 투항해온 소찰을 이용하여 554년 강릉을 공함한 뒤 원제를 죽였고 그곳의 거민들을 관중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후경의 난 평정 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의 압력에 정양후 소연명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 진패선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정양후를 퇴위하게 한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 소방지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경제이다. 557년에 경제는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니 양나라는 멸망하였고 진패선의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자료 : 양(남조), 위키백과,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남조)

 

Burgundians지역은 남조의 남제, 후량, 진(陳)나라 지역으로 보인다.

 

위의 양나라 기록에서 548년 동위의 후경이 투항해 들어와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했다. 551년 왕위에 오른 후경은 그러나 향주자사 소역에 의해 제거되고, 소역이 왕(원제)에 오르며 수도를 강릉으로 옮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서위가 남정에 나서 원제와 갈등을 하는 무릉왕 소기의 촉(蜀)을 점령한다. 또한 양양을 가지고 투항해온 소찰을 이용하여 554년 강릉을 공함한 뒤 원제를 죽였고 그곳의 거민들을 관중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즉 동위(548년)와 서위(551-554)의 공격으로 양나라는 수도였던 건강과 강릉이 파괴되어 남조의 귀족들은 치명타를 입었다 한다.

 

이곳이 부르군디언 지역으로 판단된다. 위의 1,2차 부르군디언 전쟁과는 시간상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현상으로 판단된다. 위의 양나라 기록에서 촉나라가 언급된다. 촉나라는 산악지형에 있는 것으로 안다. 즉 프랑스 동부의 Jura mountains지역이 촉나라의 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 지역도 부르군디언 지역이다.

 

또한 부르군디언지역은 동고트왕국과 동맹이라 했다. 동고트왕국이 왕권계승전쟁으로 바쁜 사이에, 부르군디언왕국이 방어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프랑크군이 공격했다. 즉 이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량은 고구려의 속국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위 후량에서 언급되는 강릉, 양양이란 지명을 한반도 강원도에 이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은 한성으로 보이는 Clermont Ferrand이 있는 지역이다. 고구려가 475년 한성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을 차지했을 것이므로, 그 이후 이지역을 점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양나라 이후의 진나라는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의 영토였던 이곳(한성지역)을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서위의 자료를 보아도 같은 내용을 보인다. 함곡관 서쪽 지역인 관중지방을 서위라 하고, 함곡관의 우측의 중원지역을 동위라 했다 한다. 함곡관은 프랑스의 Central Massif과 르와르강이 만나는 어느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서쪽이 관중지방이라는 것이고 이 우측이 중원지역이라는 뜻이다. 서위가 동위와 더불어 피레네 산맥 가까이 있는 서고트왕국을 공격한 것을 보면, 이들의 위치가 가늠된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화북 지방에 건국되었던 왕조로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위(北魏, 386~534)가 2개의 나라로 분리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북위 왕조가 이어진 것으로 위(魏)라는 국호를 계속해서 사용하였으나, 동서(東西) 2개의 나라로 나뉘어 함곡관(函谷關) 서쪽 관중(關中) 지방을 통치했으므로 후대의 사가들이 서위(西魏)라는 명칭으로 이전의 북위와 구분하였다.

 

북위는 523년에 일어난 육진(六鎭)의 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고환(高歡)은 절민제(節閔帝, 재위 531~532)을 폐위하고 효무제(孝武帝, 531~534)를 세웠으나, 효무제는 낙양(洛陽)을 탈출해 장안(長安)의 우문태(宇文泰)에게 도망쳤다. 그러자 고환은 534년 효정제(孝靜帝, 재위 534~550)를 옹립하고 수도를 업성(鄴城)으로 옮겼다. 그해 우문태도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 재위 535~551)를 즉위시켜 북위는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하여 우문태가 통치했던 나라를 서위(西魏), 고환이 업성을 도읍으로 하여 함곡관 동쪽의 중원(中原) 지방을 통치했던 나라를 동위(東魏)라고 부른다. 북위는 원위(元魏)라고도 한다.

 

서위는 문제(文帝), 폐제(廢帝, 재위 551~554), 공제(恭帝, 554~556) 3대에 걸쳐 존속되었지만, 실권은 선비족 출신의 태사(太師) 우문태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소작(蘇綽, 498~546) 등 한인(漢人) 유학자를 중용하여 계장법(計帳法), 호적법(戶籍法) 등을 제정했으며, 《주례(周禮)》에 기초하여 관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조세 수입을 안정시키기 위해 균전제(均田制)를 부활시키고 농업의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는 뒷날 부병제(府兵制)의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 정비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553년에는 남조(南朝)의 양(梁) 나라가 후경(後景)의 난으로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사천[四川] 지방으로 영토를 넓혔다. 또한 강릉(江陵)을 점령해 양 나라의 원제(元帝)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찬(蕭餐)을 왕으로 세우기도 했다.

 

556년 우문태가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계승한 우문각(宇文覺, 542~557)은 서위의 공제(恭帝)에게 선양(禪讓)을 받아 스스로 황제가 되어 북주(北周)를 건국했다. 동위에서도 550년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 529~559)이 효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북제(北齊)를 세웠다."

 

(자료 : 서위, 두산백과,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북조)

 

First Visigoth war

Imagined Bust of Chlothar on coin minted by Louis XVIII

 

Over the years, the Spanish Visigoths had made many incursions into Frankish territories and had taken lands. Clovis had retrieved them and even made further conquests of Gothic territories. Chlothar sent his eldest sons to reclaim lost territories. Although there was some success, for some unknown reason Gunthar, his second eldest, ended his campaign and returned home. Theudebert, the eldest, continued the war and took the strongholds of Dio-et-Valquières and Cabrières. Most of the lost Frankish lands were recovered.[13]

(번역) 1차 서고트왕국과의 전쟁

 

여러해에 걸쳐, 스페인의 서고트족은 여러번 프랑크땅에 침입하여  영토를 취하곤 했다. Clovis가 그 영토를 회복하고, 심지어 고트족 땅을 더 정복했다. Chlothar는 장자를 잃어버린 영토를 요구하기 위해 보내졌다.  일부 성공은 있었으나, 알지 못한 이유로 차남인 Gunthar는 진군을 멈추고 돌아 왔다. 장자인 Theudebert은 전쟁을 지속하여Dio-et-Valquieres 와 Cabrieres의 요새를 공취했다. 잃어버린 프랑크땅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Civil war

 

Chlothar attempted to take advantage of Theuderic's illness during this time, trying to attain his kingdom with the help of Childebert. However Theudebert, who was busy securing Arles, rushed back to his father Theuderic's aid. Theuderic died a few days later. And Theudebert, supported by his vassals, managed to keep his kingdom and restrained his uncles from taking over.

 

(번역) 내전

 

Chlothar는 Theuderic이 병중인 것을 이용하여, Childebert의 도움으로 Theuderic왕국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Arles를 확보하려 바쁜 Theudebert는 Theuderic아버지를 도우려 급히 되돌아왓다. Theuderic은 며칠 후 죽었다. Theudebert는 그의 속국들의 도움으로 그의 왕국을 지킬 수 있었고, 그의 uncle들이 침략하는 것을 막았다. 

 

Childebert and Theudebert joined forces and declared war on Chlothar. They initially defeated him, forcing him to take refuge in a forest for protection against the alliance. While Chlothar was besieged, a storm ravaged equipment, roads, and horses and disorganized the allied army. Childebert and Theudebert were forced to abandon the siege and make peace with Chlothar.[14]

 

(번역) Childebert와 Theudebert는 연합하여 Chlotharㅇ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초기에 Chlothar를 패퇴시키고, Chlothar가 숲속으로 피신하게 했다. Chlothar가 포위되었을때, 폭풍이 일어 도로, 말들, 장비들을 철저히 손상케하고, 연합군을 혼란하게 했다. Childebert와 Theudebert는 포위를 초기하고 Chlothar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Ceding of Provence

 

In 537, a conflict broke out between the Eastern Roman Empire and the Ostrogothic kingdom. To ensure Frankish neutrality in the conflict, King Vitiges offered Provence, which the Frankish Kings shared between them, along with the northern Alps with sovereignty over the Alemanni, by grabbing the upper Rhine valley, Main, and high Danube.[15] When the Ostrogoths ceded Provence to the Franks, he received the cities of OrangeCarpentras, and Gap.

 

(번역) 프로방스 지역의 양도

 

537년 동로마제국과 동고트왕국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이 다툼에서 프랑크의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 동고트왕국 Vitiges왕은 프로방스지역을 제시했는데, 이 지역은, Upper Rhine valley, Main, 그리고 high Daunube를 확보함으로써 Alemanni를 지배하고 있는 북쪽 알프스와 함께 프랑크왕과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동고트가 프로방스를 프랑크에 양도했을 때, Chlothar는 Orange, carpentras, Gap 도시들을 취했다. 

 

Second Visigoth war

 

In spring 542, Childebert and Chlothar, accompanied by three of his sons, led an army into Visigoth Hispania. They seized Pamplona and Zaragoza but were finally forced to abandon after conquering most of the country. Since most of the king's army was still with Theudis and there was still enough power to be shown, they were ceded some major lands beyond the Pyrénées, although not as much as they had occupied.[13]

 

(번역) 2차 서고트 전쟁

 

542년 봄, Childebert와 Chlothar는 그들의 세아들과 함께, 스페인의 서고트왕국을 공격했다. Pamplona와 Zaragoza를 취했으나, 결국에는 대부분의 나라를 정복한 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왕의 대부분의 군대가 Theudis와 함께 있었고, 아직 보여줄 충분한 힘이 있었으나, 그들은 피레네산맥 건너 주요 땅을 양도했다. 그들이 점령한 땅만큼은 아니지만.

 

 

1,2차 서고트전쟁은 고구려와의 싸움인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서고트왕국이 고구려라 추정했다. 그래서 고구려의 기록을 살펴 보았다. 1차 서고트전쟁인 534년 즈음에 535-536년 고구려에서는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고, 지진이 발생하고, 병충해가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를 이야기 하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삼국사기에서는 이러한 자연재해로서 전쟁 등 국가의 큰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동위에 많은 조공을 하고 있다. 537년 동고트왕국이 프로방스지역을 양도한 것도 아래 기록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고 기록된다. 이어서 동위에 조공한다. 2차 서고트전쟁인 542년에도 유사한 현상이 있다. 542년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동위에 조공을 계속 한다. 즉 동위로 판단되는 Chlothar와 Childebert세력이 서고트지역의 고구려와 싸운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안원왕 본기 (531-545)

一年夏五月 안원왕이 즉위하다 (531)

二年春三月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532)

二年夏四月 양에 조공하다 (532)

二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532)

二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532)

三年春一月 왕자 평성이 태자가 되었다 (533)

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533)

四年 동위가 왕을 책봉하다 (534)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534)

五年春二月 양에 조공하다 (535)

五年夏五月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다 (535)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535)

五年冬十二月 큰 전염병이 돌다 (535)

六年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을 구제하다 (536)

六年秋八月 병충해가 발생하다 (536)

六年秋八月 동위에 조공하다 (536)

七年春三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537)

七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537)

538년 : 공백

九年夏五月 동위에 조공하다 (539)

十年秋九月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다 (540)

十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온난하다 (540)

十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540)

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541)

十二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다 (542)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542)

十二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542)

十三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543)

十四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544)

十五年春三月 안원왕이 죽다 (545)

(자료 : 안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본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역사 I)

 

 

Tuscan tribute

 

The murder of Amalasuntha, the daughter of Theodoric the Great, and of Audofleda, sister of Clovis I, at the hands of King Theodahad of Tuscany caused Chlothar to threaten invasion if he did not receive a payment. The agreement that averted the war was for the Tuscan king to offer gold and land. However, Childebert and Theudebert cheated Chlothar, Childebert taking the money and Theudebert the land that Theodahad's successor, Vitiges turned over.[16] Chlothar's treasury was still much larger than either Childebert's or Theudebert's.

 

(번역) Tuscan 공물

 

Theodoric the Great 와 Clovis I의 누이인 Audofleda의 딸인 Amalasuntha가 Tuscany의 왕 Theodahad에 의해 죽었는데, 이에 Chlothar는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Tuscan왕은 금과 영토를 제공하는 것으로 동의되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Childebert와 Theudebert는 Chlothar를 속이고, Childebert는 재물을 취하고 Theudebert는 Theidahad의 계승자 Vitiges가 건네준 땅을 가졌다. Chlothar의 보화는 그러나 아직 Childebert나 Theudebert것보다 훨씬 많았다. 

 

 

Tuscany지역은 이태리북부 피렌체에 있는 지역으로, 이 지역까지 프랑크가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가 이 시기에 이 지역에서 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51년이후 이 지역은 나제동맹에 의해 빼앗기며, 후에 롬바르드왕국으로 신라 진흥왕의 차지가 된다.

 

Death of Clotilde

 
 

 

On 3 June 548, Clotilde, Chlothar's mother, died in the city of Tours. Chlothar and his brother Childebert transported her body by funeral procession to the Basilica of St. Apostles to be buried alongside her husband, Clovis I, and St. Genevieve.

 

Acquisition of Metz

 

Theudebald, Chlothar's great-nephew and the grandson of the late Theuderic, died childless in 555. So Chlothar immediately went to Metz to take possession of the kingdom from his late nephew, but under Salic Law he had to share it with his brother. So he married Vuldetrade, Theudebald's widow and the daughter of the Lombard king Wacho. This ensured the smooth succession to the kingdom of Metz, as well as an alliance with the Lombards, established since the reign of Theudebert. But the bishops condemned this incestuous marriage and forced Chlothar to divorce her. They gave her in marriage to the Bavarian Duke Garibald. To compensate for the breakdown of the marriage with Vuldetrade (Waldrada), Chlothar gave Chlothsind, his daughter, to the Lombard prince and future king, Alboin. Condat the Domesticus, great administrator of the palace of King Theudebald, retained his position after the annexation of the kingdom of Metz.[17]

 

(번역) Metz의 획득

 

Chlothar의 조카이며 고 Theuderic의 손자인 Theudebald는 555년 자식이 없이 죽었다. 그래서 Chlothar는 바로 Metz로 가서 그 왕국을 소유하려 했다. 그러나 Salic Law에서는 그는 그의 형제들과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Theudebald의 과부이며, 롬바르드 왕 Wacho의 딸인  Vuldetrade와 결혼했다. 이것은 Metz왕국을 순조롭게 이어가게 하고, 또한 Theudebert통치시기부터 확립된 롬바르드와의 동맹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교는 이러한 근친상간의 결혼을 비난했으며, Chlothar가 이혼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그녀를 Bavarian 공작 Garibald에게 결혼하게 했다. Vuldetrade와의 결혼이 무산된 것에 보상하기 위해, Chlothar는 롬바르드 왕자이며 미래 왕인 Alboin에게 그의 딸 Chlothsind를 주었다. Theudebald왕궁의 행정관 Condat the Domesticus는 Metz왕국이 부용국으로 된 후도 그의 자리를 지켰다. 

 

상기 내용은 북제로 넘어가면서 확장되는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제는 또한 낙랑군지역에 있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기록을 보인다. 따라서 북제지역의 Austrasia가 이태리 북부의 Lombardy(진흥왕시 신라지역)와 협력관계가 있는지 살필 일이다라고 앞에서 우리는 요약했었다.

 

롬바르드 왕국과의 관계가 주의를 끈다. 이 당시의 롬바르드왕국은 진흥왕이 진격한 곳으로 판단되며 (필자의 글, '신라는 이태리반도에 있었다' 참조), 따라서 Soissons, Metz지역을 점한 Chlothar는 북제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진흥왕은 북제로부터 낙랑군공이라는 직책을 받았다. 그만큼 북제와 신라 진흥왕의 사이가 돈독했다는 것이다. 위의 Chlothar와 Alboin의 관계가 북제와 신라 진흥왕의 관계로 판단된다.

 

 

Saxon war

 

In 555, Chlothar attacked and conquered the Saxons, who had revolted, in the upper valley of the WeserElbe, and the coast of the North Sea. As a submission, Chlothar required them to pay a substantial annual tribute and for some time exacted from the Saxons an annual tribute of 500 cows.[18]

 

Between 555 and 556, the Saxons revolted again, perhaps instigated by Childebert. Faced with the Saxon revolt and threat of a massacre, Chlothar preferred peace talks. He offered to forego battle if they would accept his demand to continue to pay him tribute, despite a previous rejection. But his men, aggressive, eager for battle, contested the decision. Talks were cut short when the soldiers forced him, with insults and death threats, to take on the Saxons. After an incredibly bloody battle, the Saxons and Franks made peace.[19]

 

(번역) Saxons족과의 전쟁

555년 Chlothar는 upper  Weser valley, Elbe강, 북해 해변에서 봉기를 일으킨 삭슨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복속됨으로, Chlothar는 매년 실질적인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얼마간 삭슨족은 매년 500마리의 소를 공물로 바쳤다.

 

555년과 556년 사이, 삭슨족은 다시 봉기했는데, 아마도 Childebert에 의해 부추켜졌을 것이다. 삭슨족의 봉기와 대학살의 위협에 직면하여, Chlothar는 평화회담을 선호했다. 그는 이미 거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물을 바치면 전쟁을 그만두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군부의 모욕과 살인 위협에 삭슨과의 대화는 중지되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피터지게 싸운 후, 삭슨족과 프랑크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상기 기록은 삭슨족의 침입에 의해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이 맺은 것을 말도 안되는 미화수법으로 변형한 것으로 해석된다. 돌궐의 침입으로 북제가 공물을 바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삭슨족도 돌궐세력의 일부라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프랑스 북쪽에서 돌궐 추정세력이 북동쪽(북제지역) Austrasia와 북서쪽(북주지역), Neustria에 공격한 일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라고 했는데, 이와 유사한 상황을 보여 준다.

 

Frankish Kingdom in 556-560 (source : Wikipedia)

 

Submission of Auvergne

 

Auvergne, a once prosperous Roman province, which had resisted the Visigoths and Franks, had hoped they could avoid destruction by offering their loyalty. Theuderic had devastated much of the land, and Theudebert pacified the land by marrying a Gallo-Roman woman of Senatorial descent. In anticipation of the death of Theodebald, Chlothar sent his son Chram to take possession of the area. In time, Chram came to control a larger area and desired to break away from his father entirely. To achieve this, he joined politically with Childebert who encouraged his dissent. In time his influence was expanded over PoitiersToursLimogesClermontBourgesLe PuyJavolsRodezCahorsAlbi, and Toulouse.[20]

 

(번역) Auvergne의 복속  Auvergne는 로마시대 한때 번창했던 도시인 바, 서고트와 프랑크에 저항해왔으나, 충성을 약속함으로써 파괴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Theuderic은 많은 영토를 유린했고, Theudebert는 로마 원로원 자손인 갈로-로만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왔다. Theodebald가 죽으리라 예상한 Chlothar는 그의 아들 Chram을 보내 그 지역을 점령하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Chram은 보다 넓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완전히 관계를 끊기를 원했다. 이 목표를 위해, 그는 충동질한  Childebert와 정치적으로 연합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Chram의 영향은 Poitiers, Tours, Limoges, Clemont, Bourges, Le Puy, Javols, Rodez, Cahors, Albi, Toulouse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남부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힌 것을 보면 상당한 지역을 포함하였는데, 점령했다는 표현 대신 영향력이 커졌다고 했다. 즉 일시적인 Raids의 성격이 진하다. Chram은 외부의 침입을 Chlothar의 아들로 둔갑시킨 것으로 보인다. Chram의 행동은 북주와 정치적으로 연합하고, 북제와 인연을 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Burgundy지역과 Aquitaine지역을 침략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앞에서 프랑크왕국의 북주지역, Neustria가 Saxons족(돌궐)의 침입을 계속 받아 공물을 바쳤는지 살필 일이다라 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War with Chram 

 

Chlothar again engaged in war with the Saxons. He sent his sons Charibert and Guntram to lead an army against Chram. They marched to Auvergne and Limoges and finally found Chram in Saint-Georges-Nigremont. Their armies met at the foot of a "black mountain" where they demanded that Chram relinquish land belonging to their father. He refused, but a storm prevented the battle. Chram sent a messenger to his half-brothers, falsely informing them of the death of Chlothar at the hand of the Saxons. Charibert and Guntram immediately marched to Burgundy. The rumor that Chlothar had died in Saxony spread throughout Gaul, even reaching the ears of Childebert. It is possible that Childebert was behind the rumor as well. Chram then took the opportunity to extend his influence to Chalon-sur-Saône. He besieged the city and won. Chram married Chalda, daughter of Wiliachaire (Willacharius), Count of Orléans, which was under Childebert's authority.[21]

 

(번역) Chram과의 전쟁 

 

Chlothar는 다시 삭슨족과 전쟁을 했다. Chlothar는 그의 아들 Charibert와 Guntram을 보내 Chram과 싸우는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들은 Auvergne와 Limoges로 진군하여 Saint George Nigremont에서 Chram을 맞닥트렸다. 그들은 Black mountain의 아래에서 마주쳤는데, 그들은 Chram에게 아버지에게 속한 땅을 모두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Chram은 거절했고, 폭풍우가 전투를 막았다. Chram은 그의 이복동생들에게 메신저를 보내, 그들의 아버지 Chlothar가 Saxons족에 의해 죽었다고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다. Charibert와 Guntram은 즉시 Burgundy로 진격했다. Chlothar가 Saxony에서 죽었다는 소문은 Gaul지역 전체에 퍼졌고, Childebert귀에도 들어 갔다. Childebert 역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Chram은 그의 영향력을 Chalon-sur-Saone까지 넓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시를 포위하고 승리했다. Chram은 Childebert의 영향하에 있는 Orleans Count Wiliachaire(Willacharius)의 딸과 결혼했다.  

 

즉 Chram은 Saxons족의 도움을 받아 Childebert(북주지역)와 연합하여 북제지역의 Chlothar와 싸운 것이다. 그리고 남부 Burgundy지역과 Aquitaine지역에 침략한 것으로 풀이된다. Chram은 Saxons세력이 아닌가 한다. 즉 Saxons의 세력으로 보이는 돌궐이 북주를 도와 북제와 싸우며, Burgundy지역과 Aquitaine지역을 공략한 것으로 보인다. Aquitaine지역은 토번지역이므로 돌궐의 도움을 받아 북주가 토번을 점령하거나, 토번의 공격을 물리친 것으로 보이며, 또한 북주가 Burgundy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해석된다. Burgundians은 원래 부여인데, 이 시기에 남조의 진(陳)나라가 아닐까 한다. 남조의 진나라는 신라 진흥왕시기에 신라와 매우 가까이 지냈다. 부르군디 우측의 롬바르드가 신라 진흥왕시기의 신라지역으로 판단되는데, 진나라 지역이 진흥왕이 취한 한성(Clermont Ferrand)이 있는 지역이므로, 신라 진흥왕이 취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Unification of all Francia

The Death of Chramn, in a 16th-century miniature

 

On 23 December 558, Childebert died childless after a long illness. This allowed Chlothar to reunite the Greater Frankish Kingdom, as his father Clovis had done, and seize the treasure of his brother.[22]

 

The news of Childebert's death had caused many kingdoms to unify under Chlothar. Paris, which had fought against him, submitted to his rule. Chram therefore called on the Bretons to allow him refuge. He had made such an agreement with his father-in-law Willacharius, Count of Orléans, although he was currently taking refuge himself in the Basilica of St. Martin of Tours. He[who?] was caught and subsequently burned "for the sins of the people and the scandals that were perpetrated by Wiliachaire and his wife." Chlothar then restored the Basilica.[22]

 

(번역)  Francia의 통일

 

558년 12월 23일 Childebert은 자손이 없이 지병 끝에 죽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Chlothar가 프랑크왕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그의 동생의 보물을 취했다. Childebert가 죽었다는 소식은 많은 왕국들이 Chlothar아래 통일되게 원인을 제공했다. 그와 싸운 파리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 Chram은 Bretons에 피난처를 구했다.  Chram은 그의 장인 Willacharius, Count of Orleans과 이에 합의했지만, 실제로는  St Martin of Tours Basilica(성당)에 피신하였다. Chram은 붙잡혀서 화형을 당했다. 부족에 대한 죄와 Wiliachaire와 그의 부인에 의해 저질러진 스캔들 때문에. Chlothar는 Basilica(성당)을 부활시켰다. 

 

558년 Childebert(북주 지역)가 죽으면서, 북제지역의 Chlothar가 프랑스를 통일하는 계기가 된다. 이 상황에서 Chram은 Bretons에 피난을 가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붙잡혀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Chram을 삭슨족과 연계된 돌궐이라면, 돌궐의 약탈이 끝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북주지역의 Childebert의 죽음은 Chram등의 돌궐세력과의 전쟁에서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Childebert와 Chlothar는 매우 원수지간으로 지냈는데, 단순히 죽었다고 저절로 Chlothar에게 통합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다. 아니면 Chlothar가 북주지역을 통합하는 전쟁을 해서 이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위와 같이 다르게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즉 북주지역의 Childebert세력과 Chram의 삭슨계 세력과의 전쟁으로 양자가 모두 피해를 보았고, 그 와중에  Chlothar가 어부지리를 취해 북주지역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Orleans의 Count인 Wilachaire가 죽은 것도 Chlothar와의 전투에서 졌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Between 1 September and 31 August 559, with the help of the Bretons, Chram plundered and destroyed a large number of places belonging to his father. Chlothar, accompanied by his son Chilperic, advanced to Domnonée and arrived there in November or December of 560. During the battle, located near the coast, Conomor was defeated and killed when he attempted to flee. Conomor owned land on both sides of the Channel, and Chram perhaps intended to flee from Chlothar to take refuge in England with the support of Conomor. Chram fled for the sea, but first attempted to rescue his wife and daughters. He was then captured and immediately sentenced to death. He and his wife and daughters were locked in a shack and were strangled and burned.[23] Overwhelmed with remorse, Clothar went to Tours to implore forgiveness at the tomb of St Martin and died shortly afterwards at the royal palace at Compiègne."

 

(번역) 9월 1일과 559년 8월말 사이에, Chram은 Bretons의 도움으로 아버지에 속한 많은 곳을 유린하고 파괴했다. Chlothar는 그의 아들 Chilperic를 데리고 Domnonee로 진격해 560년 11월-12월에 도착했다. 해변 가까운 곳의 전투에서 Conomor는 패배하고 도주하려했으나 살해되었다. Conomor는 영국해협 양쪽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Chram은 아마도 Conomor의 지원으로 England로 도망치려 했었다. Chram은 바다로 도주했으나, 먼저 그의 부인과 딸들을 구하려 시도했다. 그래서 붙잡히고 사형선고를 바로 받았다. 그와 부인, 딸들은 판잣집에 가두어져 목졸라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다. Chlothar는 회한에 사무쳐 St Martin 무덤에 가서 용서를 빌러 Tours에 갔고, 곧이어 Compiegne의 왕궁에서 죽었다. 

 

(source : Clothar I ( r 555-561),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Chlothar(북제지역)의 프랑크통일은 돌궐로 해석되는 Saxons족으로부터 프랑크(북제)가 자유로워진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Chram이나 Conomor는 Saxons족이나, Bretons지역의 앵글로 삭슨족의 활동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해협 양쪽에 Conomor 영토가 있었다는 것은 프랑스 북부해안 지역에 있는 돌궐의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돌궐에 의해 북제, 북주가 홍역을 치루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여기서는 삭슨족이 돌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곧이어 Chlothar가 죽은 것은 삭슨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으로 죽었을 수 있다. 그리고 Chlothar의 죽음(561년)은 프랑스지역의 통일이 잠시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북주에 의한 북제의 멸망(577년)과 같은 사건이 아닌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뒤이어 등장한 Sigebert는 다시 Austrasia왕으로 묘사된다. 즉 Chlothar에 의한 프랑스 재통일은 매우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아래 네 아들이 나누어 갖는 프랑크지역을 보면, Rheims, Paris, Orleans, Soissons 등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다. 즉 북제 북주지역에 지나지 않는다.  

 

 

 

3. Sigebert I (r 561-575, Austrasia)시기의 프랑크왕국 역사와 돌궐

 

"Sigebert I (c. 535 – c. 575) was a Frankish king of Austrasia from the death of his father in 561 to his own death. He was the third surviving son out of four of Clotaire I and Ingund. His reign found him mostly occupied with a successful civil war against his half-brotherChilperic.

(번역) Sigebert는 그의 아버지가 561년 죽어서 Austrasia프랑크왕이 되었다. 그는 Clotaire와 Ingund의 네아들 중의 삼남이었다. 그는 이복동생 Chilperic과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가장 바쁜 왕이 되었다.  

 

When Clotaire I died in 561, his kingdom was divided, in accordance with Frankish custom, among his four sons: Sigebert became king of the northeastern portion, known as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Rheims, to which he added further territory on the death of his brother, Charibert I, in 567 or 568; Charibert himself had received the kingdom centred on ParisGuntram received the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and the youngest son, the aforementioned Chilperic, received Soissons, which became Neustria when he received his share of Charibert's kingdom.

 

(번역) Clotaire가 561년 죽었을 때, 그의 왕국은 프랑크 관습에 따라 4아들사이에 나뉘어졌다 : Sigebert는 북동쪽 Austrasia (수도는 Rheims)왕이 되었고, 567년 또는 568년 그의 동생 Charibert I이 죽음에 따라 더 영토를 넓혔다; Charibert는 Paris에 중심을 둔 왕국을 받았다; Guntram은 Orleans이 수도인 Burgundy왕국을 받았다; 앞에서 언급한 가장 어린 아들 Chilperic은 Soissons을 받았는데, 이는 Charibert왕국에 대한 그의 몫을 받았을 때 Neustria가 되었다. 

 

561년 Clotaire가 죽었을 때, 비로소 Neustria(북주), Austrasia(북제), 그리고 Burgundy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Incursions by the Avars, a fierce nomadic tribe related to the Huns, caused Sigebert to move his capital from Rheims to Metz. He repelled their attacks twice, in 562 and c. 568.

(번역) 훈족과 연결된 사나운 유목부족인 Avars의 기습은 Sigebert가 수도를 Rheims에서 Metz로 옮기게 했다. Sigebert는 이들의 562년, 568년, 두번 공격을 격퇴했다. 

 

상기 기록의 562, 568년 Avars족의 침입은, '신라는 이태리반도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고구려가 아닌 신라 진흥왕의 침입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 진흥왕은 흉노의 자손임을 의식적으로 나타낸 왕이다. 그리고 북제의 Sigebert는 서고트왕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다. 서고트는 고구려로 필자는 추정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아닌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보인다.

 

우리는 앞에서 북제가 고구려의 속국이란 주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고씨의 왕국 북제이다. 따라서 고구려로 판단되는 고트족과 프랑크왕국의 Austrasia(북제지역)가 어떤 인척관련이 있는지 살펴 볼 일이다라 했다. 그런데 567년 북제지역의 Austrasia의 Sigebert 는 서고트왕 Athanagild의 딸, Brunhilda과 결혼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위의 검토사항에 부응하는 자료인 것이다. 그래서 북제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About 567, he(Sigebert I (r 561-575, Austrasia)) married Brunhilda, daughter of the Visigothic king Athanagild.

(번역) 567년경, Sigebert는 서고트왕 Athanagild의 딸 Brunhilda와 결혼했다. 

 

According to Gregory of Tours:

 

Upon seeing this, his brother Chilperic sent to Athanagild for his other daughter's hand. This daughter, Galswintha, was given him and he abandoned his other wives. However, he soon tired of her and had her murdered in order to marry his mistress Fredegund. Probably spurred by his wife Brunhilda's anger at her sister's murder, Sigebert sought revenge. The two brothers had already been at war, but their hostility now elevated into a long and bitter war that was continued by the descendants of both.

 

(번역) Gregory of Tours에 의한 기록 :

 

Sigebert의 결혼을 본 그의 동생 Chilperic(Soissons)은 Athanagild에 또 다른 딸을 보내달라 했다. Galswintha라는 딸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Chilperic은 그의 다른 부인들을 포기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녀에 싫증이 났고, 그의 정부 Fredegund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죽였다. 아마도 부인인 Brunhilda가 그의 여동생의 죽음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더 자극되어, Sigebert는 복수하려 했다. 두 형제는 이미 전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적개심은 더욱 커지고 길고 쓰라린 전쟁이 양쪽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다.  

 

상기 내용은 북제(Sigebert)와 북주(Chilperic)의 끊임없는 싸움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In 573, Sigebert took possession of Poitiers and Touraine, and conquered most of his kingdom. Chilperic then hid in Tournai. But at Sigebert's moment of triumph, when he had just been declared king by Chilperic's subjects at Vitry-en-Artois, he was struck down by two assassins working for Fredegund.[2]

 

(번역) 573년, Sigebert(북제지역)는 Poitiers와 Touraine을 취했고, Chilperic(북주지역)의 거의 모두를 정복했다. Chilperic은 Tournai에 숨었다. 그러나 Sigebert가 Vitry-en-Artois에서 왕으로 선포되는 승리의 시점에, Fredegund가 준비한 두명의 암살자에 의해 쓰러졌다. 

 

상기 내용은 북제가 북주에 비해 유리한 상황에서 갑자기 Sigebert왕이 암살당함으로써 북주가 통일하게 되는 상황(577)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He was succeeded by his son Childebert under the regency of Brunhilda. Brunhilda and Childebert quickly put themselves under the protection of Guntram, who eventually adopted Childebert as his own son and heir.[3] With Brunhilda he had two daughters: Ingund and Chlodosind.

 

(번역)Sigebert의 아들 Childebert에 의해 승계되고 Brunhilda가 섭정하였다. Brunhilda와 Childebert는 째빨리 Gunram의 보호에 의지했고, Guntram은 Childebert를 자신의 아들과 상속자로 결국 입양했다. Brunhilda와 그(Guntram)는 두딸을 두었다 : Ingund와 Chlodosind.

 

(source : Sigebert I (r 561-575),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 (481-613))

 

북제는 북주로 통일되면서, 그 왕족들은 부르군디로 피난하는 상황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 당시의 부르군디는 진나라로 진흥왕의 신라가 점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선비족의 북주를 피해 북제의 왕족이 한민족의 신라로 피난하는 모습이다. 즉 북제는 고구려와 가까운 한민족의 국가였는지 모른다.

 

이상으로 북제, 북주 시기의 프랑크왕국의 역사를 중국사, 한민족사, 그리고 돌궐의 역사와 비교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본 기간에서는 돌궐족이 한번의 덴마크족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삭슨족의 활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시기 분석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부르군디 지역은, 롬바르드지역을 점한 신라의 진흥왕 시기의 남조 진나라로서 신라의 영역(한성지역)임을 나타내며, 그리고 진나라의 전 남조 왕조인 후량은 한성백제를 멸한 고구려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