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필자는 그동안 프랑스지역이 중국사의 지역이라 추정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추정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일환으로 프랑크왕국의 Clovis I이 북위의 효문제라는 추정을 분석하며 보이고자 한다.
아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위 효문제에 대한 기존 자료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는 위키뿐만 아니라 나무위키 자료도 대동소이하다. 그나마 위키백과 자료가 더 나아서 아래 인용한다. 이러한 배경은 우선 중국자료의 부실함 내지 일부러 삭제하는 역사왜곡에 기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1) 북위와 백제의 전쟁
2) 북위와 고구려와의 결혼동맹 관계
3) 493년 북위의 낙양 천도
4) 507년 전쟁과 한성 및 횡악
5) 북위와 토욕혼과의 전쟁
6) 효문제와 선무제의 재위기간과 Clovis I의 재위기간
이러한 측면에서 검토해 보면서, 북위의 효문제가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이라는 것을 분석하고자 한다.
I. 백제와 북위의 전쟁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북위의 역사기록은 매우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건강실록, 삼국사기 백제 본기, 자치통감, 남제서에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으며, 484년에는 북위의 승리, 488년에는 백제의 승리, 490년 백제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이는 여러 사서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즉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를 고구려와 싸운 것을 잘못 기록했다느니 하는 해석은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한반도의 백제 존치를 합리화 하기 위한 궤변이라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북위 역사에서 누락하는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은 백제가 북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盧征之, 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자료 : 백제 동성왕, 나무위키)
또한 아래 남제서에서 동성왕이 표문을 올린 내용을 보면, 남제와 백제는 1국 2체제이거나 매우 가까운 동맹국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남제서 동남이열전 백제에서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 등이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래에서도 이들이 언급된다. 또한 이들의 직책을 보면,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등을 언급하고 있어 동성왕 당시 백제가 이들 지역을 점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지역의 추정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랑, 성양, 조선 지역을 백제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식민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존의 한반도 역사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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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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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자료 : 백제 동성왕, 나무위키)
북위가 백제와 싸운 시기는 북위 효문제가 어려서 풍태후가 섭정한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제와 전쟁했다는 기록은 북위의 역사기록에서는 없다. (아래 자료 참조). 단지 반란을 진압했다는 모호한 표현이 살짝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사를 감추기 위해 반란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로마사에서도 타국과의 전쟁을 내부 반란으로 묘사한 경우가 매우 많다. 중국 사가들의 의도적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북위 제5대 황제 헌문제(献文帝)의 맏아들로써 황흥(皇興) 원년(467년)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년)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子貴母死). 황흥 5년(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양위해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1]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풍태후는 헌문제의 치세 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한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禄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공조公調)과 지방재정(조외調外)을 분리[2]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닷새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넉 달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실제로 효문제의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자료 : 북위 효문제, 위키백과)
그러면 이러한 북위와 백제의 전쟁이 프랑크 역사에서 나타나는가? 그렇다. 프랑크왕국은 지금의 네델란드, 벨기에, 덴마크 지역에 있던 Salian Franks에서 프랑스지역으로 넘어와 프랑크왕국을 이루었다. 475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Salian Franks는 프랑스 Soissons지역에 남아 있는 서로마제국의 잔존세력인 Syagrius를 Soissons전투(486년)에서 이겨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한다. 이것이 484년 북위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쟁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한성백제가 프랑스 Clermont Ferrand(=한성)에 있다고 추정했다. (서로마제국은 프랑스지역에 있던 한성백제와 이태리반도에 있던 신라를 통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내용을 보면, Syagrius는 서고트왕국(고구려)으로 피신하나, 서고트왕국은 그를 프랑크왕국에 내주어 처형된다. 이것은 북위가 백제에 이긴 첫싸움으로 해석된다.
"The Battle of Soissons was fought in 486 between Frankish forces under Clovis I and the Gallo-Roman domain of Soissons under Syagrius. The battle was a victory for the Franks, and led to the conquest of the Roman rump state of Soissons, a milestone for the Franks in their attempt to establish themselves as a major regional power.
In the final collaps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between 476 and 480, Syagrius was the only remaining representative of Roman rule in the area between the Loire and the Somme. Syagrius was the son of Aegidius,[2] Roman magister militum per Gallias from 457 to 461; he preserved his father's rump state, the Domain of Soissons, between the Somme and the Loire, calling himself dux.
The central location of Soissons in northern Gaul and its largely intact infrastructure allowed a level of stability in the years of the Migration Period, but also made the area tempting for their Frankish neighbours to the north-east. The realm of Syagrius was of almost the same size as the Frankish area, though the Franks were divided into small kingdoms, and, on the right bank of the Rhine, little touched by Roman culture.
Nevertheless, Clovis I managed to assemble enough Franks to confront Syagrius's forces. Clovis issued a challenge to Syagrius naming the time and place of the battle.[3] Gregory of Tours mentions that one Chararic had brought his forces to the battlefield but then stood aloof, hoping to ally with the winner.[4]
The ensuing battle was a decisive victory for Clovis and his Franks. Syagrius fled to the Visigoths (under Alaric II), but Clovis threatened war and the Visigoths handed Syagrius over for execution."
(source: Battle of Soissons, Wikipedia)
두번째 (488) 세번째 (490) 전쟁에서는 백제가 북위에 이기는 것으로 위에서 살펴 보았다. 이러한 역사도 프랑크역사에서 유사한 면이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나 이번에는 백제로 추정되는 부르군디언의 내전에 참여하여 Clovis I왕이 공격하였으나 (500 or 501), 결국 여의치 않아 매년 공물을 받는 것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는 것으로 아래 기술한다. 약간의 연대 차이가 나나, 백제가 북위의 두번에 걸친 공격을 격퇴했다는 위의 내용과 유사하다.
"In 500 or 501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urgundian brothers took the turn to the worse began scheming against his brother. He promised his brother-in-law territory and annual tribute for defeating his brother. Clovis was eager to subdue the political threat to his realm and crossed to the Burgundian territory. After hearing about the incident Gundobad moved against Clovis and called his brother. The three armies met near Dijon, where both the Franks and Godegisel's forces defeated the host of dumbfounded Gundobad, who was able to escape to Avignon. Clovis proceeded to follow to the Burgundian king and laid siege to the city, however, after some months he was convinced to abandon the siege and settled for an annual tributary from Gundobad.[22] "
(source : Clovis I, Wikipedia)
2. 고구려와 북위 관계
이번에는 고구려와 북위와의 관계를 알아 보자. 고구려 장수왕 시기에, 북위가 467년 고구려에 결혼동맹을 요구했다. 473년에는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내용을 고구려에 알려 주기도 했다. 이 내용은 북위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북위는 고구려와 더 가까운 관계이므로 고구려에 이 내용을 알려 주었고, 결국 장수왕은 한성백제를 멸망 시키는 계기가 된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467)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473) :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사건
(자료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인용출처: 장수왕, 나무위키)
동성왕 시기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하면서, 백제는 북위를 '험윤'이라 칭했다. 험윤은 홍노를 일컫는 말이다. 즉 북위는 흉노족인 것이다. 따라서 북위는 고구려와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은 교황으로부터 제관식을 받을 때 교황은 Clovis I왕을 Sicambri라 불렀다 한다. Sicambri는 Cimmerians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키메리언이 스키타인의 일종이라 서양사가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언급했다. 스키타인은 색족, 사카족이다. 프랑크왕국은 네델란드, 벨기에, 덴마크지역(Salian Franks)에서 서진하여 프랑스지역에 진출하였다 한다. 즉 흉노족이 덴마크, 벨기에, 네델란드지역에서 프랑스지역으로 이동하며 프랑크왕국을 세웠다는 결론이다. 즉 북위가 흉노족의 정권일 수 있다. 남북조시대 남조와 북조가 서로 x이(夷)라 욕하며 대결했다는 것은 남북조가 모두 이족(夷族)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491년 음력 12월, (장수왕이)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 효문제는 특별히 직접 애도를 표했으며 관작을 추증하고 강왕(康王)이라 시호를 내렸다."
(자료 : 장수왕, 위키백과)
그리고 491년 장수왕이 사망하자 북위의 효문제는 강왕(康王)이란 시호를 주었다. 필자는 강왕이란 칭호가 강주, 즉 강거지역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주는 칭호라 분석했다. (필자의 글, '강주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 참조, 필자의 블로그 paul-park.com) 따라서 이는 고구려가 중공측 주장에 의하면 강주인 중앙아시아를 포함하였다는 주장이 되어 그들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이다. 강주를 점령한 왕식렴이 해양세력이라는 기록도 이를 방증한다.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중앙아시아의 강주 위치는 해양세력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다. 즉 중공측 사가들의 거짓말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주장의 식민사학 뿐 아니라 중공측 주장이 모두 틀렸음을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서양사가들의 주장도 틀렸음을 말해 주고 있다. 모두가 역사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크역사에서는 Clovis I왕이 고구려 문자왕으로 추정되는 동고트왕국의 Theodore The Great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아래 자료 참조) 북위의 효문제는 499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이때 493년은 북위 효문제 시기이다.
"Around 493 AD, he secured an alliance with the Ostrogoths through the marriage of his sister Audofleda to their king, Theodoric the Great.[17] "
(source : Clovis I, Wikipedia)
3. 북위 효문제의 낙양천도(493년)
아래 효문제의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 기록을 보면 이상하다. 한나라의 수도이전은 많은 공사를 요구한다. 궁의 건축, 신하들의 이사 등 거국적인 이동체계를 수반한다. 그런데, 제나라를 공격한다고 군사를 이동하면서 수도를 옮겼다 기록되어 있다. 매우 특이하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장면이다. 제나라는 남제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남제 원정 구실을 삼아 낙양에 도착했다가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낙양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수도를 낙양으로 삼았다고 해석된다.
"풍태후가 죽은 뒤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어 북위는 중앙집권과 한화를 추진해 나갔다.
우선 태화 17년(493년) 평성(平城)[3]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반대를 예상하고 제(斉) 원정을 구실로 낙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여러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자료 : 북위 효문제, 위키백과)
그러면 이러한 낙양은 어디일까? 낙양은 남제와 가까이 있으면서, 북위가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전쟁을 했으므로, 백제로부터도 멀지 않아야 한다. 한반도나 중공사가들의 역사주장으로는 이러한 지역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프랑스지역에서는 이러한 지역적 구성이 완벽하게 만족된다. 즉 낙양은 프랑스 서남쪽 Toulouse가 된다. (아래 지도 참조). 필자는 한 때, 낙양이 프랑스 동남쪽의 Narbonne가 아닌가 했는데, 북위와 프랑크왕국을 비교하면 Toulouse가 낙양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Narbonne는 장안이 되는 것이 된다. 고구려는 589년 장안성을 수도로 천도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낙양과 장안의 위치는 계속 검토될 것이다. 당태종 시기에 돌궐의 도움을 얻어 장안을 확보한 것이나, 안록산의 난때 장안과 낙양을 점한 일이나, 당나라 말기의 황소의 난때 장안을 두고 벌인 싸움 등이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프랑크왕국의 역사를 검토해 보면, 더 확실히 장안과 낙양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의 정복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프랑크역사를 고려하면, 북위,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남제의 역사에 대한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남제서에 나타난 동성왕의 표문을 보면, 발칸반도의 비잔틴제국(백제)과 프랑크왕국의 동남쪽의 부르군디언 (남제)이 1국 2체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남제가 백제가 되며, 북위가 남제를 친다며, 낙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북위와 백제의 전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Clovis I시기에 부르군디언의 내전이 있는 것으로 기술되는데, 비잔틴제국인 백제와 부르군디언왕국인 남제가 싸우는 내전이 아닌가 한다.
상기 지도에서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은 Toulouse를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측의 부르군디언왕국은 백제의 영역으로 추정된다. 부르군디언은 부여계라고 필자는 이미 분석했다. 동고트왕국, 서고트왕국은 고구려로 추정했다. 즉 낙양을 확보한 것은 서고트왕국인 고구려와 싸워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은 서고트왕국과 전쟁을 하여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In 507 Clovis was allowed by the magnates of his realm to invade the remaining threat of the Kingdom of the Visigoths.[24] King Alaric had previously tried to establish a cordial relationship with Clovis by serving him the head of exiled Syagrius on a silver plate in 486 or 487.[13] However, Clovis was no longer able to resist the temptation to move against the Visigoths for many Catholics under Visigoth yoke were unhappy and implored Clovis to make a move.[25] But just to be absolutely certain about retaining the loyalties of the Catholics under Visigoths, Clovis ordered his troops to omit raiding and plunder, for this was not a foreign invasion, but a liberation.[24]
Armonici assisted him in defeating the Visigothic kingdom of Toulouse in the Battle of Vouillé in 507, eliminating Visigothic power in Gaul. The battle added most of Aquitaine to Clovis's kingdom[17] and resulted in the death of the Visigothic king Alaric II."
(source : Clovis I, Wikipedia)
북위에서는 이 시기에 효문제에 이은 선무제(재위 499-515)의 기간에 해당한다. 북위 선무제의 기록을 보자. 우선 양나라를 공격하여 사천지방을 확대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이 시기의 양나라는 남제를 이은 남조의 양나라(502-557)로 보인다.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의 시기이므로, 부르군디언지역과 가까운 지역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프랑크역사에서는 부르군디언과의 전쟁기록이 없고, 그 서쪽을 더 진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501년 국정을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고씨는 고구려인의 성씨이다. 508년 이후 고씨 세력이 황족들을 많이 죽였다는 기록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북위가 남조 양나라(=백제)의 세력과 치룬 전쟁피해가 아닌가 한다.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은 이 시기에 서고트왕국과 전쟁을 많이 했다. 507년 문자왕의 한성공격에서도 '고로'와 말갈을 시켜 전쟁했으나 횡악으로 물러났다 했는데, 이는 기존의 점령했던 한성이 이 시기에 다시 백제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백제이다. 그런데 북위 역사에서는 고조와 황족의 살해로 나타난다. 즉 북위는 남조와의 싸움에서 큰 피해를 보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남조 양나라도 역시 백제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의 사주로 싸우는 듯 하다. 필자는 한성이 Clermont-Ferrand이라 추정했다. 507년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서고트족이 Clermont-Ferrand에서 물러나는 기록을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Clermont-Ferrand은 Gaul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한다. 한성이란 수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고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되었다.
(자료 : 북위 선무제, 위키백과)
4. 507년 전쟁과 한성 및 횡악
이후 507년 서고트왕국과 프랑크왕국이 Vouille전투에서 싸워 프랑크왕국이 서고트왕국을 피레네산맥 이남으로 밀어 내는 것으로 아래에서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문자왕이 507년 고로와 말갈을 보내 백제 무령왕과 싸워 한성을 도모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횡악에 머물렀다는 한국사 기록을 보면, 프랑크왕국의 이 역사는 고구려인 서고트왕국과 백제인 부르군디언과의 전쟁역사를 차용 및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한성인 Clermont-Ferrand을 475년 점령하고 한성백제를 멸망시켰으나, 이후 백제의 동성왕, 무령왕 시기의 진흥으로 507년 다시 한성을 백제에게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기록에 무령왕이 '한성에서 돌아오다' 라는 기록은 이를 말해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여기서 횡악은 피레네산맥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필자는 횡악이 자주 거론되는 백제의 역사를 보면서 횡악이 피레네산맥인가 알프스산맥인가 했는데, 횡악을 피레네산맥으로 본다면, 백제의 영토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부르군디언지역을 넘어선 지역이 되는 것이다.
"Consequently, the realm of the Franks almost doubled in size; its border was now on the Loire adjacent to the realm of the Visigoths, who were finally routed at the Battle of Vouillé in 507 and forced to retreat south of the Pyrenées.
In due course Clovis marched against Chararic, captured him and his sons, and forced them to accept ordination and tonsures as deacons. On report of their hope to regain power, he had them executed.[4] "
(source: Battle of Soissons, Wikipedia)
"The next event about which information has survived is Gundobad's role concerning the Battle of Vouillé. He was one of several rulers to whom king Theoderic sent letters urging peace, and asking for mediation between Alaric II and Clovis.[15] Despite Theoderic's best efforts, the two kings met at Vouillé, and Alaric was slain; according to Isidore of Seville, Gundobad supported Clovis in this battle. Isidore also provides a hint that Gundobad exploited the Visigothic defeat by plundering Narbonne.[16] Delayed by the threat of the Byzantine Navy, which had been hovering off the Italian shore around the time of the battle, the Ostrogothic army arrived to relieve the Burgundian siege of Arles.[17] According to Herwig Wolfram, the Burgundians were "the real victims of the Ostrogothic counteroffensive" following the defeat of their cousins at Vouillé. "Not only had they lost all their conquered territories and hope of acquiring Arles and Avignon but all their territory as far as Orange had been devastated."[18]
(source : Gundobad, Wikipedia)
5. 북위와 토욕혼
아래 토욕혼의 역사 자료를 보면, 토욕혼은 북위와 남조의 양다리 외교를 하면 계속 살아 남았다가 결국 북위의 공격으로 473년 북위에 항복한다. 그후 북위의 효문제는 492년 토욕혼의 모용부연수에게 직책을 책봉한다. 즉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서융과 서해군개국공이라는 직책명에 주목한다. 즉 토욕혼, 토번과 티베트의 선조인 이들은 서해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서쪽에 바다가 있는가? 그것도 태초의 일이 아니라 492년이다. 이후에 바다가 없어지는 지각변동이 있었다면 역사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록은 없다. 즉 지금의 중공의 서쪽에 티베트가, 토번이나 토욕혼이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인가? 필자는 이 서해가 대서양이라 판단한다. 광개토태왕은 토욕혼을 정벌했다 하였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왕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다고 기록된다. 즉 대서양에 접한 토욕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지역이 북서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Suebi왕국이나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Gascony지역이 아닌가 한다. 북위의 효문제에 해당하는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이 피레니산맥을 넘어 간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즉 피레네산맥에 접한 프랑스지역까지 점령한 위 지도의 내용을 보건데, Gascony지역이 토욕혼지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면 번국으로 인정하고 독립세력으로 인정하였다면 Suebi왕국일 수도 있는데, Clovis I왕이 이 지역까지 진출한 역사기록이 없다. 이런 기록을 일부러 빠뜨릴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욕혼의 이동 상황을 고려하면, Suebi왕국의 추정이 더 맞게 된다.
"토욕혼의 창시자는 모용 토욕혼이며, 그의 이복동생은 전연의 시조인 모용외이다. 기록에 따르면 토욕혼은 모용외와 다투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토욕혼은 285년 모용 토욕혼이 창시하였으며, 중국에서 하남국(河南國)으로 알려지게 된다.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 Azha)라고 불렸다. 얼마 지나자 백란(白蘭)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알려졌다. 수도는 칭하이 호의 서쪽에 있었으며, 부사(伏俟)라고 불렸다.
토욕혼의 시조인 모용토욕혼은 본래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섭귀의 서자로, 아버지로부터 부락민 1700가(家)를 물려받았다. 이후 아버지 모용섭귀가 죽고 285년에 적자인 모용외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모용토욕혼은 말을 방목하는 문제로 모용외와 충돌을 빚자 본래 근거지인 요동을 떠나 서쪽의 음산(陰山) 일대로 이주하였다.[1] 이후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다시 서쪽의 감송(甘松)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그 영역이 백란(白蘭) 일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모용토욕혼은 317년,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토욕혼이라는 국호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건국 초기의 토욕혼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강족 · 흉노 등의 세력과 융합하였다.[2]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적지 않아서 329년, 수장인 모용토연이 휘하에 거느렸던 강족인 강총(姜聰)의 배신으로 칼을 맞아 죽기도 하였다.[3]
오호십육국시대
한편 토욕혼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화북의 이민족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371년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말 1천 필과 금은 5백 근을 바치고 안원장군의 관작을 받았다. 또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조공을 하고는 백란왕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토욕혼은 걸복건귀가 하사한 작위를 거부하고 충돌을 일으켰다가 걸복건귀의 침공을 받았고, 모용오흘제 때에 이르러서는 장안을 점령한 걸복건귀의 국경을 약탈하였다가 다시 침공을 받고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잃었다. 이후에도 걸복건귀와 그 아들 걸복치반에게 수차례 충돌했으나 패하였는데, 모용수락간은 이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남북조시대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토욕혼은 중국 남조의 유송에 사자를 수차례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또한 북조의 북위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431년에는 북위와 연합하여 대하를 공격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을 사로잡고는 북위로 압송하였다.
이후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은 토욕혼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 토욕혼은 대체로 유송과 더욱 사이가 가까웠다. 이후 439년,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후에 토욕혼을 제압하기 위하여 444년 6월에는 토욕혼 내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으며, 446년 8월에는 마침내 직접 토욕혼을 침략하여 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451년에 집권한 모용섭인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쳤고, 북위는 460년 4월에 다시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살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하였고, 북위는 끝내 토욕혼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470년 이후로도 북위가 수차례 토욕혼을 공격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쳤고, 유송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기근에 시달리던 모용섭인은 결국 473년 8월에 북위에 항복하고 해마다 조공하였다.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욕혼은 북위의 번국을 자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 따르면 "새표(塞表) 내에서 부강한 나라로 불러지며, 거의 천조(天朝, 북위)에 준하는 관사(官司)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稱制)하여 스스로 대국(大國)임을 자랑하였다."고 할 정도로[5] 주변 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위상을 구축하였다."
(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필자의 블로그 paul-park.com, 카테고리, 토욕혼-토번, 펌글 참조)
6. 효문제/선무제 재위기간 (471-515)과 Clovis I 재위기간 (481-511)
마지막으로 북위의 효문제/선무제와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출생년도가 북위의 효문제와 프랑크의 Clovis I왕이 같다. 단지 효문제는 5살에 왕이 되고 풍태후의 섭정을 받지만, Clovis I왕은 15세에 왕이 되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효문제와 선무제가 모두 33살에 죽는 것으로 기록된다. 이 또한 수상한 기록이다.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준다. 재위기간은 효문제와 선무제의 합친 기간이 Clovis I의 재위기간과 유사하다. Clovis I왕이 5살에 왕이 되었다면 471년에 왕이 되었을 것이다. Clovis I왕은 513년까지 살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고려하면 471-513 재위기간으로 효문제/선무제 재위기간(471-515)과 더욱 근접한다. 그리고 Clovis I왕의 확장전쟁 기록은 효문제와 선무제의 전쟁기록과 유사한 것도 더욱 이러한 추정의 신빙성을 높힌다.
7. 맺는 말
이상으로 북위의 효문제/선무제와 프랑크왕국의 Clovis I왕의 비교를 마치고자 한다. 여러 정황상으로 보면 이들의 동일성을 추정할 수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루나쿠르세가 북위를 언급한 것은 프랑크왕국과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장강과 장안 및 낙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당태종의 확장 역사, 안록산의 난과 황소의 난 등을 프랑크역사와 비교 연구하면, 보다 확실히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아래에 관련 자료들의 원문 전체를 독자들을 위해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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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위의 효문제에 대한 자료
"위 고조 효문황제 원굉(魏 高祖 孝文皇帝 元宏, 467년 10월 13일 ~ 499년 4월 26일, 재위:471년 ~ 499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제7대 황제이다. 원래 성씨는 탁발씨(拓跋氏)이다
생애
북위 제5대 황제 헌문제(献文帝)의 맏아들로써 황흥(皇興) 원년(467년)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년)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子貴母死). 황흥 5년(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양위해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1]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풍태후는 헌문제의 치세 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한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禄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공조公調)과 지방재정(조외調外)을 분리[2]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닷새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넉 달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실제로 효문제의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풍태후가 죽은 뒤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어 북위는 중앙집권과 한화를 추진해 나갔다.
우선 태화 17년(493년) 평성(平城)[3]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반대를 예상하고 제(斉) 원정을 구실로 낙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여러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그는 선비의 성씨를 한풍(중국풍)으로 고치기로 하고 국성(国姓)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으며, 신하들에 대해서도 반강제적으로 한풍 성씨를 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선비의 말과 복장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을 금지시키고 선비식 관명을 배제하는 등 선비의 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나아가 한족과 마찬가지로 선비족 귀족의 등급을 매기고 선비족과 한인 명족(名族)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선비와 한인의 융화, 한인 사회에서의 선비의 명족으로써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또한 한족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본뜬 북조귀족제를 성립시켰다.
태화 23년(499년) 4월 초하루(양력 4월 26일)、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宫)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 사후 묘호를 고조(高祖),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였다.
효문제에 대한 평가
효문제의 치세에 북위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효문제는 풍태후의 개혁을 이어받아서 보다 나아간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위는 그때까지의 유목민 중심의 국가 체제에서 보편적인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고, 훗날의 수 왕조에 의한 중원 왕조의 재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그런 한편으로 급격한 한화정책의 추진으로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 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동시에 지배자층이었던 선비족의 불만을 초래하였는데, 496년에 옛 도읍 평성(平城)에서 일어난 반란에는 효문제의 맏아들로 황태자였던 원순(元恂)도 가담했을 정도였다. 반란은 단기간에 진압되었고 효문제는 맏아들 원순을 폐적시키고 처형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불만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효문제 사후 육진의 난(523년)이라 불리는 반란으로[4] 북위의 동서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자료 : 북위 효문제, 위키백과)
** 북위 선무제(재위 499-515) 에 대한 자료
"위 세종 선무황제 원각(魏 世宗 宣武皇帝 元恪, 483년 5월 27일 ~ 515년 2월 12일, 재위:499년 ~ 51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제8대 황제이다.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이다.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가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고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되었다.
(자료 : 북위 선무제, 위키백과)
** 토욕혼 관련 자료
"토욕혼의 창시자는 모용 토욕혼이며, 그의 이복동생은 전연의 시조인 모용외이다. 기록에 따르면 토욕혼은 모용외와 다투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토욕혼은 285년 모용 토욕혼이 창시하였으며, 중국에서 하남국(河南國)으로 알려지게 된다.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 Azha)라고 불렸다. 얼마 지나자 백란(白蘭)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알려졌다. 수도는 칭하이 호의 서쪽에 있었으며, 부사(伏俟)라고 불렸다.
토욕혼의 시조인 모용토욕혼은 본래 모용선비의 수장인 모용섭귀의 서자로, 아버지로부터 부락민 1700가(家)를 물려받았다. 이후 아버지 모용섭귀가 죽고 285년에 적자인 모용외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모용토욕혼은 말을 방목하는 문제로 모용외와 충돌을 빚자 본래 근거지인 요동을 떠나 서쪽의 음산(陰山) 일대로 이주하였다.[1] 이후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다시 서쪽의 감송(甘松) 일대로 이동하였으며, 그 영역이 백란(白蘭) 일대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모용토욕혼은 317년,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토욕혼이라는 국호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건국 초기의 토욕혼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강족 · 흉노 등의 세력과 융합하였다.[2]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도 적지 않아서 329년, 수장인 모용토연이 휘하에 거느렸던 강족인 강총(姜聰)의 배신으로 칼을 맞아 죽기도 하였다.[3]
오호십육국시대
한편 토욕혼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화북의 이민족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371년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말 1천 필과 금은 5백 근을 바치고 안원장군의 관작을 받았다. 또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조공을 하고는 백란왕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토욕혼은 걸복건귀가 하사한 작위를 거부하고 충돌을 일으켰다가 걸복건귀의 침공을 받았고, 모용오흘제 때에 이르러서는 장안을 점령한 걸복건귀의 국경을 약탈하였다가 다시 침공을 받고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잃었다. 이후에도 걸복건귀와 그 아들 걸복치반에게 수차례 충돌했으나 패하였는데, 모용수락간은 이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
남북조시대
토욕혼은 모용아시 때(417~424)에 이르러 주변의 저족과 강족의 부락들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에 달하여 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4] 또한 모용모괴 때(424~436)에 이르러 진주 · 양주의 유랑민 및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흡수하여 남쪽으로는 촉한과 통하였고, 북쪽으로는 양주 · 대하와 통하는 등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토욕혼은 중국 남조의 유송에 사자를 수차례 파견하여 교류하였다. 또한 북조의 북위와도 교류를 시작하여, 431년에는 북위와 연합하여 대하를 공격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혁련정을 사로잡고는 북위로 압송하였다.
이후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은 토욕혼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 토욕혼은 대체로 유송과 더욱 사이가 가까웠다. 이후 439년,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후에 토욕혼을 제압하기 위하여 444년 6월에는 토욕혼 내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으며, 446년 8월에는 마침내 직접 토욕혼을 침략하여 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451년에 집권한 모용섭인은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쳤고, 북위는 460년 4월에 다시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은 북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살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하였고, 북위는 끝내 토욕혼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470년 이후로도 북위가 수차례 토욕혼을 공격하여 초토화작전을 펼쳤고, 유송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기근에 시달리던 모용섭인은 결국 473년 8월에 북위에 항복하고 해마다 조공하였다.
모용섭인의 뒤를 이은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욕혼은 북위의 번국을 자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에 따르면 "새표(塞表) 내에서 부강한 나라로 불러지며, 거의 천조(天朝, 북위)에 준하는 관사(官司)를 두고 여러 나라에 칭제(稱制)하여 스스로 대국(大國)임을 자랑하였다."고 할 정도로[5] 주변 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위상을 구축하였다."
(자료 : 토욕혼, 위키백과, 필자의 블로그 paul-park.com, 카테고리, 토욕혼-토번, 펌글 참조)
** 프랑크왕국 Clovis I (재위 481-511)에 대한 자료
Background
Clovis was the son of Childeric I, a Merovingian king of the Salian Franks, and Basina, a Thuringian princess. It was his supposed ancestor, Merovich, for which his Merovingian dynasty is named. Clovis succeeded his father to become king at the age of 15 in 481, as deduced from Gregory of Tours placing the Battle of Tolbiac (Zülpich) in the fifteenth year of Clovis's reign.
Numerous small Frankish petty kingdoms existed during the 5th century. The Salian Franks were the first known Frankish tribe that settled with official Roman permission within the empire, first in Batavia in the Rhine-Maas delta, and then in 375 in Toxandria, roughly the current province of North Brabant in the Netherlands and parts of neighbouring Belgian provinces of Antwerp and Limburg in current Belgium. This put them in the north part of the Roman civitas Tungrorum, with Romanized population still dominant south of the military highway Boulogne-Cologne. Later, Chlodio seems to have attacked westwards from this area to take control of the Roman populations in Tournai, then southwards to Artois, and Cambrai, eventually controlling an area stretching to the Somme river.
Childeric I, Clovis's father, was reputed to be a relative of Chlodio, and was known as the king of the Franks that fought as an army within northern Gaul. In 463 he fought in conjunction with Aegidius, the magister militum of northern Gaul, to defeat the Visigoths in Orléans. Childeric died in 481 and was buried in Tournai; Clovis succeeded him as king, aged just 15. Historians believe that Childeric and Clovis were both commanders of the Roman military in the Province of Belgica Secunda and were subordinate to the magister militum.[10] The Franks of Tournai came to dominate their neighbours, initially aided by the association with Aegidius.[11]
The death of Flavius Aetius in 454 led to the decline of imperial power in the Gaul; leaving the Visigoths and the Burgundians compete for predominance in the area. The part of Gaul still under Roman control emerged as a kingdom under Syagrius, Aegidius' son.[12]
Early reign (481–491)
Road to Soissons
See also: Battle of Soissons (486)
The ruler of Tournai died in 481 and was succeeded by his sixteen-year-old son, Clovis. His band of warriors probably numbered no more than half a thousand. In 486 he began his efforts to expand the realm by allying himself with his relative, Ragnachar, regulus of Cambrai[13] and another Frankish regulus, Chalaric. Together the triumvirate marched against Syagrius and met the Gallo-Roman commander at Soissons. During the battle Chalaric betrayed his comrades by refusing to take part in the fighting.[14] Despite the betrayal, the Franks landed a decisive victory, forcing Syagrius to flee to the court of Alaric II.[13] This battle is viewed as bringing about the end of the rump stat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outside of Italy.[15] Following the battle, Clovis invaded the traitor Chararic's territory and was able to imprison him and his son.[14]
Taming Gaul
See also: Frankish campaign against the Thuringians (491)
Conquests of Clovis between 481 and 511 |
Prior to the battle, Clovis did not enjoy the support of the Gallo-Roman clergy, hence he proceeded to pillage the Roman territory, including the churches. The Bishop of Reims requested Clovis return everything taken from the Church of Reims, and, as the young king aspired to establish cordial relationships with the clergy, he returned a valuable ewer taken from the church.[16] Despite his position, some Roman cities refused to yield to the Franks, namely Verdun‒which surrendered after a brief siege‒and Paris, which stubbornly resisted a few years, perhaps as many as five.[13] He made Paris his capital[17] and established an abbey dedicated to Saints Peter and Paul on the south bank of the Seine.[18]
Clovis came to the realisation that he wouldn't be able to rule Gaul without the help of the clergy and aimed to please the clergy by taking a Catholic wife.[16] He also integrated many of Syagrius' units into his own army. The Roman kingdom was probably under Clovis' control by 491, because in the same year Clovis successfully moved against a small number of Thuringians in the eastern Gaul, near the Burgundian border.[19]
Middle reign (492–506)
Barbarian bonding
See also: Audofleda
Around 493 AD, he secured an alliance with the Ostrogoths through the marriage of his sister Audofleda to their king, Theodoric the Great.[17] In the same year, the neighboring King of the Burgundians was slain by his brother, Gundobad; bringing civil strife to that kingdom. He proceeded to drown his sister-in-law and force his niece, Chrona, into a convent; another niece, Clotilde, fled to the court of her other uncle. Finding himself in a precarious position this uncle, Godegisel, decided to ally himself to Clovis by marrying his exiled niece to the Frankish king.[20]
Assault of the Alamanni
See also: Battle of Tolbiac
In 496 the Alamanni invaded, some Salians and Ripuarians reguli defected to their side. Clovis met his enemies near the strong fort of Tolbiac. During the fighting, the Franks suffered heavy losses and Clovis (+three thousand Frankish companions) might have converted to Christianity.[21] With the help of the Ripuarian Franks he narrowly defeated the Alamanni in the Battle of Tolbiac in 496.[17] Now Christian, Clovis confined his prisoners, Chararic and his son to a monastery.[14]
Business in Burgundy
See also: Franco-Visigothic Wars § Burgundian_civil_war_(500–501)
In 500 or 501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urgundian brothers took the turn to the worse began scheming against his brother. He promised his brother-in-law territory and annual tribute for defeating his brother. Clovis was eager to subdue the political threat to his realm and crossed to the Burgundian territory. After hearing about the incident Gundobad moved against Clovis and called his brother. The three armies met near Dijon, where both the Franks and Godegisel's forces defeated the host of dumbfounded Gundobad, who was able to escape to Avignon. Clovis proceeded to follow to the Burgundian king and laid siege to the city, however, after some months he was convinced to abandon the siege and settled for an annual tributary from Gundobad.[22]
Armonici allies
In 501, 502 or 503 Clovis led his troops to Armorica. He had previously restricted his operations to minor raids, yet, this time the goal was subjugation. Clovis' failed to complete his objective via military means, therefore, he was constrained to statecraft, which proved fruitful for the Armonici shared Clovis' disdain for the Arian Visigoths. And thus Armorica and her fighters were integrated into Frankish realm.[23]
Late reign (507–511)
Visiting the Visigoths
See also: Franco-Visigothic Wars § Second Franco-Visigothic war (507–508)
Frankish territories at the time of Clovis's death in 511 |
In 507 Clovis was allowed by the magnates of his realm to invade the remaining threat of the Kingdom of the Visigoths.[24] King Alaric had previously tried to establish a cordial relationship with Clovis by serving him the head of exiled Syagrius on a silver plate in 486 or 487.[13] However, Clovis was no longer able to resist the temptation to move against the Visigoths for many Catholics under Visigoth yoke were unhappy and implored Clovis to make a move.[25] But just to be absolutely certain about retaining the loyalties of the Catholics under Visigoths, Clovis ordered his troops to omit raiding and plunder, for this was not a foreign invasion, but a liberation.[24]
Armonici assisted him in defeating the Visigothic kingdom of Toulouse in the Battle of Vouillé in 507, eliminating Visigothic power in Gaul. The battle added most of Aquitaine to Clovis's kingdom[17] and resulted in the death of the Visigothic king Alaric II.
According to Gregory of Tours, following the battle, the Byzantine Emperor Anastasius I granted Clovis the title of consul. Since Clovis's name does not appear in the consular lists, it is likely he was granted a suffect consulship.[citation needed]
Ravishing the Reguli
In 507, following Vouillé, Clovis heard about Chararic's plan to escape from his monastic prison and had him murdered.[14]
In the same year, Clovis convinced Prince Chlodoric to murder his father, earning him his nickname. Following the murder, Clovis betrayed Chlodoric and had his envoys strike him down.[26]
In 509, Clovis visited his old ally, Ragnachar in Cambrai. Following his conversion, many of his pagan retainers had defected to Ragnachar's side, making him a political threat. Ragnachar denied Clovis's entry, prompting Clovis to make a move against him. He bribed Ragnachar's retainers and soon, Ragnachar and his brother, Ricchar were captured and executed.[27]
Death
Shortly before his death, Clovis called a synod of Gallic bishops to meet in Orléans to reform the Church and create a strong link between the Crown and the Catholic episcopate. This was the First Council of Orléans. Thirty-three bishops assisted and passed 31 decrees on the duties and obligations of individuals, the right of sanctuary, and ecclesiastical discipline. These decrees, equally applicable to Franks and Romans, first established equality between conquerors and conquered.
Clovis I is traditionally said to have died on 27 November 511; however, the Liber Pontificalis suggests that he was still alive in 513, so the exact date of his death is not known.[28] After his death, Clovis was laid to rest in the Abbey of St Genevieve in Paris. His remains were relocated to Saint Denis Basilica in the mid- to late-18th century.
When Clovis died, his kingdom was partitioned among his four sons, Theuderic, Chlodomer, Childebert, and Clotaire. This partition created the new political units of the Kingdoms of Rheims, Orléans, Paris and Soissons, and inaugurated a tradition that would lead to disunity lasting until the end of the Merovingian dynasty in 751. Clovis had been a king with no fixed capital and no central administration beyond his entourage. By deciding to be interred at Paris, Clovis gave the city symbolic weight. When his grandchildren divided royal power 50 years after his death in 511, Paris was kept as a joint property and a fixed symbol of the dynasty.[29]
The disunity continued under the Carolingians until, after a brief unity under Charlemagne, the Franks splintered into distinct spheres of cultural influence that coalesced around Eastern and Western centers of royal power. These later political, linguistic, and cultural entities became the Kingdom of France, the myriad German States, and the semi-autonomous kingdoms of Burgundy and Lotharingia.
(source : Clovis I, Wikipedia)
** Franco-Visigothic Wars
Franco-Visigothic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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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of The battles of Clov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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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y movement during the Second Franco-Visigothic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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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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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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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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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itaine, Provence, Burgu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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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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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sh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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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itorial
changes |
Gallia Aquitania is annexed by the Frank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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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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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the Fr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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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the Visigo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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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orica
Kingdom of the Burgundians (post-507) Empire of the Romans |
Kingdom of the Ostrogoths
Kingdom of the Burgundians (pre-507) Alemanni |
Commanders and l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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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vis I
Theuderic I Godegisel † Gundobad (post-507) Aurelianus Chilo |
Alaric II †
Suatrius (POW) Gundobad (pre-507) Aridius Gesalec Theudis Theoderic the Great |
The Franco-Visigothic Wars were a series of wars between the Franks and the Visigoths, but it also involved the Burgundians, the Ostrogoths and the Romans. Most noteworthy war of the conflict would be the Second Franco-Visigothic War that included the famous Battle of Vouillé and resulted in Frankish annexation of most of Southern France.
Contents
- 1 Background
- 2 First Franco-Visigothic war (492–496)
- 2.1 Frankish offensive
- 2.2 Visigothic counter-offensive
- 3 Burgundian civil war (500–501)
- 3.1 Frankish intervention
- 3.2 Visigothic intervention
- 4 Second Franco-Visigothic war (507–508)
- 4.1 Road to Vouille
- 4.2 Eastern campaign
- 4.3 Western campaign
- 5 References
Background
In 486, Clovis I defeated the Gallo-Romans decisively, impelling the commander, Syagrius to flee to the court of Alaric II. Probably in 487, while Clovis was pillaging the land and besieging the cities that resisted (at least Verdun and Paris) he sent the King of the Visigoths an ultimatum: hand-over Syagrius or risk war. Therefore, instead of aiding the exile, Alaric—reluctant to combat the Franks—forfeited Syagrius, whom Clovis immediately executed.[2]
First Franco-Visigothic war (492–496)
Frankish offensive
By 491, Clovis had stabilized the former Roman territory and was eager to move against Alaric.[3] Hence soon, he laid a siege to Nantes; the most northern city under Visigothic rule. Nantes resisted sixty days. The Frankish commander, Chilo was impressed and thus converted to Catholicism. During this phase, Alaric seemingly refused to give Clovis battle, thus leaving Clovis to besiege Poitiers, Saintes, and Bordeaux. During the latter, an important Visigothic noble, Duke Suatrius of Bordeaux was captured. During his return from Bordeaux, Clovis might have captured Tours.[4]
Visigothic counter-offensive
In 496, despite winning the Battle of Tolbiac against the Alemanni, the Franks took heavy casualties (and might have suffered from internal turmoil). Seeing the opportunity, Alaric quickly retook Bordeaux, Saintes, Poitiers, and Tours (if it had been taken). Therefore, rendering the war mostly null,[4] even though Nantes was seemingly taken by the Armonici.[5]
Burgundian civil war (500–501)
Frankish intervention
Godegisel, the brother of King Gundobad of the Burgundians seduced his brother-in-law, Clovis with the promise of annual tribute and territorial cessions to plot against Gundobad and in the year 500, the Franks entered the kingdom. Gundobad requested aid from his brother, and together the brothers marched against the invaders. The three armies met near Dijon, soon Gundobad found himself fighting the Franks and the forces of his brother and fled to the City of Avignon. Victorious, Godegisel retired to Vienne and assumed the kingship of the kingdom, but Clovis was not satisfied and marched to besiege Avignon. However, after a lengthy siege, a Roman magistrate of the city and a general, Aridius, convinced Clovis that the city could not be taken. Therefore, Clovis departed from the kingdom after parleying with Gundobad, who agreed to pay annual tribute.[6]
Visigothic intervention
In 501, discontented, Gundobad allied himself with Alaric II, thus he stopped paying the annual tribute to Clovis and with Visigothic help besieged his brother in Vienne. When the city fell, Gundobad executed Godegisel and many of his Burgundian supporters, and thus re-established himself as the king of the Burgundians.[7] For their efforts, Gundobad sent the Frankish captives to Alaric and gifted Avignon to Alaric II, who proceeded to meet up with Clovis. The two kings met near in the Village of Amboise, where Alaric agreed to release the captives, while Clovis returned all Visigothic territory he still held.[4]
Second Franco-Visigothic war (507–508)
Road to Vouille
After allying the Armonici around 503 and gaining the approval of magnates of his realm, Clovis began the liberation of Aquitaine in 507. It's quite clear that this was intended to be a liberation and not an invasion, for Clovis forbade his men from pillaging the land. While marching from Nantes to Poitiers, Clovis' march was interrupted by Alaric II‒who was apparently aware of Clovis' support among the Catholics of his subjects and decided to defeat the Franks before they could join forces. This event is referred to as the Battle of Vouille, though little is known about this incident, only that the core of Visigothic army was destroyed and that Alaric II was killed (supposedly by Clovis in a single combat).[8]
Eastern campaign
Clovis sent his son Theuderic to lead an independent campaign. The Frankish prince advanced from Clermont to Rodez, finally arriving in Albi. Meanwhile, Gundobad, assisted by the Franks, besieged Arles. However, after a lengthy siege, the Ostrogoths intervened and deflected a high loss, forcing the Burgundians to retreat.[8]
Western campaign
Clovis was able to recapture Bordeaux before the end of 507 and spend the winter there. In the following year, Clovis was able to seize the enemy capital of Toulouse and the treasury with it. The Visigothic court had relocated Narbonne, hence Clovis aspired to take it as well, however, the city was protected by mountainous terrain, thus Clovis was forced to besiege Carcassonne, located between Toulouse and Narbonne. The siege, however, ended in failure, for Ostrogothic relief force was successful in driving the Franks off. The defeated Clovis turned back and took Angouleme, that he initially ignored. In order to nullify the chances of Ostrogoths recapturing any cities, Clovis installed extensive garrisons in the recently taken cities.[8]
(source : Franco-Visgothic war, wikipedia)
** Battle of Soissons (486)
Battle of Soi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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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ptured Syagrius is brought before Alaric II, who orders him sent to Clovi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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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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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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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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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r Soissons, Ais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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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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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sh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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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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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Soi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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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ian Franks of Tournai and Camb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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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anders and l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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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ag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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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vis I
Ragnachar Wiomad |
Str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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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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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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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ualties and lo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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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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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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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Soissons was fought in 486 between Frankish forces under Clovis I and the Gallo-Roman domain of Soissons under Syagrius. The battle was a victory for the Franks, and led to the conquest of the Roman rump state of Soissons, a milestone for the Franks in their attempt to establish themselves as a major regional power.
In the final collaps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between 476 and 480, Syagrius was the only remaining representative of Roman rule in the area between the Loire and the Somme. Syagrius was the son of Aegidius,[2] Roman magister militum per Gallias from 457 to 461; he preserved his father's rump state, the Domain of Soissons, between the Somme and the Loire, calling himself dux.
The central location of Soissons in northern Gaul and its largely intact infrastructure allowed a level of stability in the years of the Migration Period, but also made the area tempting for their Frankish neighbours to the north-east. The realm of Syagrius was of almost the same size as the Frankish area, though the Franks were divided into small kingdoms, and, on the right bank of the Rhine, little touched by Roman culture.
Nevertheless, Clovis I managed to assemble enough Franks to confront Syagrius's forces. Clovis issued a challenge to Syagrius naming the time and place of the battle.[3] Gregory of Tours mentions that one Chararic had brought his forces to the battlefield but then stood aloof, hoping to ally with the winner.[4]
The ensuing battle was a decisive victory for Clovis and his Franks. Syagrius fled to the Visigoths (under Alaric II), but Clovis threatened war and the Visigoths handed Syagrius over for execution.
Consequently, the realm of the Franks almost doubled in size; its border was now on the Loire adjacent to the realm of the Visigoths, who were finally routed at the Battle of Vouillé in 507 and forced to retreat south of the Pyrenées.
In due course Clovis marched against Chararic, captured him and his sons, and forced them to accept ordination and tonsures as deacons. On report of their hope to regain power, he had them executed.[4]
(source: Battle of Soissons,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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