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사의 장강은 스페인의 에브로강이다.

Chung Park 2023. 9. 26. 03:04

부제 1: 한수는 에브로강의 지류 아라곤강이다.

부제 2: 파촉지역은 피레네산맥 서쪽지역이다

 

필자는 지난 글에서 중국의 장강이 프랑스의 르와르강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황하는 이 당시 언급이 별로 없던 위진 남북조 시대 역사를 보면서 그런 판단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찜찜했었다. 장강을 르와르강으로 판단하면, 중국의 크기가 너무 작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장강 또는 회수로 남조와 북조가 나뉘는 것으로 아는데, 프랑스에서는 르와르강이 남과 북으로 역사를 갈라 놓는다는 기술도 이러한 판단에 일조를 했다.

 

그런데, 최근에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자세히 보면서, Loire river(르와르강)은 황하로 판단되고, 장안은 Tours(뚜르), 낙양은 Orleans(오를레앙)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장강은 피레네 산맥의 아래 지중해로 흐르는 Ebro river(에브로강)로 추정된다.

 

이는 그동안의 필자의 추정과 많이 다른 결과이기 때문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 역사에서 흔히 언급되는 한수(漢水)는 장강의 지류이기 때문이다.그동안 한강이 이태리의 Po river(포강)가 아닌가 했고, 한산은 알프스산맥 근처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라면, 프랑스 동부 어딘가로 추정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촉나라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한수가 에브로강(Ebro river)의 지류라면,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한수가 언급되는 백제의 역사 활동지도 많이 달라진다. 그리고 마한의 위치도 또한 이베리아반도로 더 넓어진다. 이러한 막대한 영향이 있는 장강의 위치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프랑스의 르와르강 지도

 

스페인의 에브로강(Ebro river) 지도

 

 

River topography in Spain

 

 

이러한 판단의 변경은 안록산의 난에서 이태백의 영왕동순가 11수와 강남지방에서 홀로서기를 하려 했던 영왕, 이린의 반란의 내용이 그 키가 되었다. 우선 안록산의 난 시기에 이 난을 진압하는 군사활동 내용이 자치통감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를 참조한 나무위키 자료를 바탕으로 안록산 사사명의 난 시기의 전투상황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의 중국의 지리적 위치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안록산의 난은 중국의 동북지방 범양지역, 평로절도사 지역, 거란의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안록산 진영은 파죽지세로 동도인 낙양을 접수하고 이어서 서도인 장안을 점령한다. 그리고 당시 왕인 당 현종은 장안에서 중국의 서남쪽, 촉지역, 파촉지역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수도 장안에 머물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렴하는 차원에서 태자에게 남으라는 부탁을 한다. 태자는 서북방의 영무,삭방지역으로 이동하여, 당숙종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이후 당은 곽자의, 이광필 등의 장수가 안록산진영과 치열한 전투를 한다. 하동, 장안, 낙양 등의 지역에서 치열한 양진영의 전투가 벌어진다. 주로 황하를 위시한 황하이북의 지역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약간 신기하게도 강남지역, 즉 장강의 이남에서는 당 조정에 대한 원군도 없고,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전투도 벌어지지 않는다. 마치 다른 나라의 지역처럼 말이다.

 

이러한 가운데, 안록산진영과 삭방지역의 중간에 있는 태원지역이 중요한 양쪽의 전략지역이 된다. 태원은 예전부터 돌궐에 대비하는 군사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아래 지도 1,2가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는 지도이다.

 

 

안사의 난 당시 상황지도 1 (현 중공이 중국역사지역이라는 가정하)

 

안사의 난 상황시 중국 지도 2 (현 중공이 중국역사지역이라는 가정하)

 

결국 당나라는 독립적인 절도사들이 난무하는 나라가 되어 가며 쇠퇴의 길을 걷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지 못해, 북쪽의 회흘에 원군을 청한다. 당나라 북쪽에 있던 북해지역(북해절도사, 북해 태수지역) 북쪽에 있던 회흘은 동돌궐이 망한 후 들어 선 지역이다. 결국 당 조정은 온갖 모욕을 참아 가며 회흘의 지원을 얻어,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중국사의 지역이 프랑스가 된다면, 황하에 있던 서도 장안, 동도 낙양은, 프랑스 르와르강의 Tour, Orleans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돌궐에 대비한 군사지역인 태원은 프랑스 파리로 추정된다. 실제 파리시는 세느강으로 따라 들어와 공격한 바이킹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피신한 당현종이 있던 촉지역, 파촉지역은 피레네 산맥 서쪽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이 산세가 험한 지역이었던 촉나라가 있던 지역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피레네산맥 아래 Ebro river가 장강으로 추정된다. 장강의 지류에 한수가 있다 하니, Ebro river의 북쪽 지류 중 하나가 한수가 될 것이다.

 

장강을 Ebro river로 판단하는 것은, 당의 황족인 영왕 이린의 반란과 영왕 이린과 함께했던 시성 이태백이 지은 영왕동순가 11수에 근거한다. 아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3189045748

 
[공유] 영왕동순가 11수

드러나는 지구촌 역사 - DISCOVERED World History

blog.naver.com

 

영왕 이린의 난에 대한 아래 나무위키 자료를 보자. 이중 붉은 글씨로 쓰여진 부분 2가지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이린의 활동으로 당의 저지를 뚫고 안록산의 진영을 공격해 안록산 진영의 숙장인 아사나승경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다른 하나는, 영왕 이린이 강서채방사 황보신에게 잡혀 죽었는데, 당 숙종이 영왕 이린을 생포했으면, 태상왕이 된 당현종이 있는 곳인 촉지역에 보내지 않고, 살해한 황보신을 원망하며, 파직시켰다는 내용이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 참조)

 

"5. 영왕 이린의 난과 진압(756년 ~ 757년)

 

영왕 이린은 당현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당현종 곁에서 자랐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항상 그(현종)를 끌어안고 잤다고 한다. 당현종이 촉 땅으로 들어가면서 아들들을 여기저기 보내 절도사로 세워 각지를 통제할때 영왕 이린 또한 강남으로 보내졌다.

 

근데 이 사람이 안녹산이 한참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 또한 풍요로운 강동 강남의 재화를 획득하자 '천하가 한참 소란스러우니까 금릉(남경)을 장악하고 있으면 동진처럼 될 수 있겠다.'는 야심을 품어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분리독립을 시도한다. 이 반란은 당, 그리고 안녹산 진영 양측의 주목을 끌어 공격을 받았으나 이린은 오히려 당의 저지를 뚫고 안녹산 진영까지 공격해 안녹산 휘하의 숙장 중 한명인 아사나승경까지 항복시키기도 했다.

 

이 반란은 1년이 채 안돼서 진압된다. 당은 이린을 진압하기 위해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를 설치하고 강동절도사와 함께 이를 진압하게끔 하자 이린은 곧 세력을 잃었으며 결국 강서채방사 황보신에게 사로잡혀 죽는다. 그런데 당숙종은 이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황보신은 이미 나의 동생을 산 채로 잡았는데, 어찌 그를 촉으로 보내지 않고 멋대로 죽였는가!" 힐책하면서 황보신을 파직시켜 버렸다.

 

여담으로, 시선 이태백이 이때 이린의 편에 섰다가 토벌 이후 귀양을 갔는데, 곽자의와 인연이 있어서 곽자의의 옹호로 인해 용서받았다."

 

(자료 : 안록산의 난, 나무위키)

 

 

아래 자료는, 영왕동순가 11수를 해설한 진옥경님, 노경희님이 영왕 이린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 자료이다. 이중에서 당현종이 영왕 이린에게 내린 직책이 눈에 띈다. 756년 "당현종은 촉지방으로 피난하여, 한중군에 당도하여 조서를 내려, 영왕 이린을 산남동로(山南東路) 영남(嶺南) 검중(黔中) 강남서로(江南西路) (또는 산남서로) 사도(四道) 절도채방등사(節度採訪等使), 강릉대도독(江陵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영왕 이린이 통치하는 지역이 산남동로, 영남, 검증, 강남서로(또는 산남서로)의 4도라는 것이다. 또한 이지역은 강릉대도독의 통치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눈에 띄는 기록은 영왕 이린을 공격하게 한 당의 직책이다. "숙종은 고적(高適)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 임명하여 광릉(廣陵) 등의 12개 군을 다스리게 하였고, 내진(來瑱)으로 하여금 회남서도절도사(淮南西道節度使)로 삼아 여남(汝南) 등 5개 군을 맡게 하고, 강동절도사 위척(韋陟)과 함께 영왕을 에워싸 공격하였다."라는 기록에서,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강동절도사가 영왕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수는 황하와 장강의 중간에 있는 강이름이다. 프랑스지역의 가론강이 회수가 되지 않을까 한다. 즉 회수이남의 절도사와 강동, 장강의 동쪽 절도사가 영왕 이린을 공격하게 했다는 것이다.

 

 

"해제

 

영왕(永王)은 당 현종(玄宗)의 열여섯 번 째 아들 이린(李璘)이다.

 

해설

 

천보(天寶) 14년(755) 11월 안록산(安祿山)이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15년 6월 당 현종(玄宗)은 촉(蜀)지방으로 피난하였다. 한중군(漢中郡)에 당도하여 조서를 내려, 영왕(永王) 린을 산남동로(山南東路) 영남(嶺南) 검중(黔中) 상남서로(江南西路? 오타?) 사도(四道) 절도채방등사(節度採訪等使), 강릉대도독(江陵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그해 7월 영왕은 양양(襄陽)에 당도하였고, 9월에는 강릉(江陵)에 이르러 장사 수만 명을 모집하여 자의적으로 부서(部署)를 늘렸으며, 강회(江淮)의 특산물과 세금을 거두어 강릉에 쌓아두고 수 억(數億)을 써대었다. 숙종(肅宗)은 이 소식을 듣고 명령을 내어 촉(蜀)으로 돌아오라 하였으나, 영왕은 이 명을 어기고 12월에 마음대로 배와 군사들 끌고 동쪽으로 내려갔으며, 승승장구하면서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숙종은 고적(高適)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 임명하여 광릉(廣陵) 등의 12개 군을 다스리게 하였고, 내진(來瑱)으로 하여금 회남서도절도사(淮南西道節度使)로 삼아 여남(汝南) 등 5개 군을 맡게 하고, 강동절도사 위척(韋陟)과 함께 영왕을 에워싸 공격하였다. 이에 영왕은 혼유명(渾惟明)으로 하여금 오군태수(吳郡太守)겸 강남도로채방사(江南道路採訪使)로 있던 이희언(李希言)을 습격하게 하고, 계광침(季廣琛)으로 하여금 광릉(廣陵)으로 가서 광릉장사(廣陵長將史) 겸 회남채방사(淮南採訪使) 이성식(李成式)을 잡게 하였다. 영왕의 장수 계광침은 여러 장군을 불러 팔을 베어 맹서하고, 혼유명과 함께 도리어 영왕을 공격하였다. 이린은 패하여, 남쪽 파양(鄱陽)으로 갔으나, 강서채방사(江西採訪使) 황보신(黃甫侁)의 호위병에게 잡혀 활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영왕 이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 당도(當塗)에 머물고 있었던 이백은 안록산의 잔당을 토벌해야한다는 명분에 못 이겨 영왕의 막하에 들어가 이러한 작품들을 지으면서 그의 승승장구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영왕의 행동은 역모로 간주되어 응징을 당하게 되고, 이십 여 일 동안 영왕 린의 막하에 있었던 이백도 이 일에 연루되어 천애 야랑(夜郞)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아래 영왕동순가 11 수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이태백의 시 내용은 후손들이나 역사가들이 조작할 수 없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사실대로 말한 내용으로 판단한다.

 

 

"영왕동순가 (1)

 

永王正月東出師 영왕(永王)이 정월에 동으로 군사 내니

天子遙分龍虎旗1) 천자도 멀리에서 용호기(龍虎旗)를 보내셨다.

樓船一擧風波靜 누선 한번 납시면 풍파가 잠잠하고

江漢翻爲雁騖池2) 강한(江漢) 일대는 기러기와 오리 못 되리라.

 

 

1편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영왕이 동으로 군사를 내니 천자 즉 당현종이 용호기를 보내 응원하였다는 내용과 영왕이 활동한 지역이 강한(江漢)일대, 즉 장강과 한수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이 지역이 과거의 한나라 지역이라는 말도 포함한다고 본다. 당숙종이 회남서도절도사, 회남절도사, 강동절도사를 보내 영왕 이린을 공격하게 했으므로, 이들 지역과 접한 지역에서 영왕 이린이 활동했을 것이다. 당현종이 파촉지역에 피난하여, 한중군에 도착하여 영왕 이린에게 4도 절도사 및 강릉대도독 직위를 내렸으므로, 한수지역인 한중군(아래 한중군 자료 참조)은 파촉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피레네산맥 서쪽에 가까운 지역에 한수가 있지 않을까 추정한다. 아래 지도에서 Aragon river(아라곤강)가 한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Watershed of Aragon river at Ebro river Bassin (source: Wikipedia)

 

 

영왕동순가 (2))

 

三川北虜亂如麻3) 삼천(三川)의 북녘 오랑캐, 삼 가닥 얽히듯 어수선하고

四海南奔似永嘉4) 온 세상이 남으로 달아나니 영가(永嘉) 때와 같구나.

但用東山謝安石 다만 동산(東山)의 사안석(謝安石)을 쓰기만 한다면

爲君談笑靜胡沙 임금 위해 담소하며 오랑캐를 평정하리라.

 

주 3) 三川(삼천)

하수(河水), 낙수(洛水), 이수(伊水)가 있던 하남군(河南郡; 지금의 낙양 일대).

 

주 4) 永嘉(영가)

서진(西晉) 회제(懷帝) 때의 연호(307~313). 영가(永嘉) 5년(311), 유요(劉曜)가 낙양을 함락시켰을 때 죽은 자가 십만이 넘었다. 사안(謝安; 字 安石, 320~385)은 동산(東山)에 은거하고 있다가 백성들의 요청으로 출정하였다. 부견(符堅)의 대군이 진나라로 쳐들어오자, 사안은 아우 석(石)과 현(玄)을 동원하여 이들을 크게 물리쳤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남조(南朝) 시대가 열리게 되고, 강남(江南) 지역이 중국의 중심지로 바뀌게 된다. 가음 〈양원음〉, 〈동산음〉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사안석 (생몰:320-385): 중국 동진(東晋) 중기의 재상(宰相). 제위를 찬탈하려는 환온의 야망을 저지했고 재상 재직 시 전진왕 부견의 남하를 막았으며 사현과 부견의 군대를 비수에서 격파했다. 명재상으로 칭송이 높았고 당시의 손꼽는 문화인이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안 [謝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사안석을 언급하는 것은 강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영왕 이린이 사안석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본다. 그리고 이는 또한 낙양을 초토화한 유요의 시기나, 전진의 부견이 동진을 공격했을 때, 남조로 이동한 사람들의 애환이 이 당시 안록산의 난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을 시로 읊으며, 영왕 이린이 사안석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이백의 마음을 표현했다. 낙양 주위에 삼천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낙양 위치를 추정하는데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영왕동순가 (3)

 

雷鼓嘈嘈喧武昌5) 뇌고 소리 쿵쿵 무창(武昌)에 들렐 제

雲旗獵獵過尋陽6) 구름 깃발 펄럭펄럭 심양(尋陽)을 지나는다.

秋毫不犯三吳悅7)8) 추호도 범함이 없어 삼오(三吳) 지역 기뻐하고

春日遙看五色光 봄날 저 멀리로 오색 무지개 보이는도다.

 

주 8) 三吳(삼오)

오(吳) 땅에 있는 세 군데 지명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강동(江東) 일대를 가리킨다. 춘추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도읍지인 고소(姑蘇), 오왕(吳王) 비(濞)의 도읍지인 광릉(廣陵), 손권(孫權)의 도읍지인 건업(建鄴)을 일컬어 삼오(三吳)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수경주》 〈절강수(浙江水)〉에서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를, 《통전(通典)》 〈주군(州郡)〉에서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단양(丹陽)을 삼오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지명의 변경과정이나 분할의 내력을 따져볼 때 삼오(三吳)나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 등은 다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별칭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무창, 심양지역을 지나, 강남의 오나라 지역에서 영왕 이린이 약탈없이 활동했다는 내용이다. 즉 장강 일대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왕동순가 (4)

 

龍蟠虎踞帝王州9) 용 서리고 범 웅크린 제왕의 고을

帝子金陵訪古丘 왕자는 금릉(金陵)에서 옛 언덕을 찾아보네.

春風試暖昭陽殿10) 봄바람은 소양전(昭陽殿)을 덥히려 하고

明月還過鳷鵲樓11) 환한 달은 또 지작루(鳷鵲樓)를 지나가네.

 

주 9) 帝王州(제왕주)

금릉(金陵), 즉 지금의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일통지》에 따르면 주(周)나라 말엽부터 제왕의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秦始皇)도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으며, 제갈량(諸葛亮)도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龍蟠虎踞] 진정한 제왕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주 10) 昭陽殿(소양전)

남조시대 금릉(金陵)의 대성(臺城) 내에 있던 왕후의 거처.

 

주 11) 鳷鵲樓(지작루)

금릉의 궁전 이름. 鳷는 새매, 鵲은 까치.

 

금릉에 영왕 이린이 거처를 마련했다는 의미이다.

 

 

영왕동순가 (5)

 

二帝巡游俱未迴12) 두 임금 길을 떠나 모두 돌아오지 못해

五陵松柏使人哀13) 오릉(五陵)의 송백이 서글프기 그지없네.

諸侯不救河南地14) 제후들은 하남(河南) 땅을 구하지 않으니

更喜賢王遠道來15) 어진 영왕(永王) 멀리서 옴이 더욱 더 기쁘도다.

 

주 13) 五陵(오릉)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당초(唐初) 제왕들의 능. 고조(高祖)의 헌릉(獻陵), 태종(太宗)의 소릉(昭陵), 고종(高宗)의 건릉(乾陵), 중종(中宗)의 정릉(定陵), 예종(睿宗)의 교릉(橋陵).

 

황하이남의 지역(하남)을, 안록산의 난 시기, 제후들이 돌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왕 이린이 이 지역까지 올라가 활동했다는 내용이다. 영왕 이린이 안록산 진영의 숙장 아사나승경의 항복을 받았다는 위에서 본 나무위키 내용이 생각난다.

 

 

영왕동순가 (6)

 

丹陽北固是吳關16) 단양(丹陽)의 북고산(北固山)은 오(吳) 땅의 관새

畫出樓臺雲水間 구름과 물 사이에 누대를 곱게도 그려 냈네.

千巖烽火連滄海 봉우리마다 봉홧불은 퍼런 바다로 이어지고

兩岸旌旗繞碧山 양편 강 언덕 깃발들은 푸른 산을 에워쌌네.

 

주 16) 丹陽(단양)

당대의 강남동도(江南東都)에 있던 윤주(潤州)로서 지금의 진강시(鎭江市) 지역에 해당한다.

* 北固(북고) : 윤주(潤州)의 단도현(丹徒縣)에서 북쪽으로 1리 되는 곳에 있는 산 이름. 장강(長江)에 삼면이 임하고 벼랑이 높이가 수십 길이 되는 등, 형세가 험준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당시 강남동도 지역(윤주)의 험한 지형(북고산) 속의 장강지역에서 영왕 이린이 활동했다는 언급이다.

 

 

영왕동순가 (7)

 

王出三江按五湖17) 왕은 삼강(三江)을 나와 오호(五湖)를 제압하고

樓船跨海次揚都18) 누선은 바다 끼고 양도(揚都)에 주둔했네.

戰艦森森羅虎士19) 전함엔 삼엄하게 용사들이 늘어섰고

征帆一一引龍駒20) 돛대마다엔 하나씩 용마를 매었네.

 

주 17) 三江(삼강)

양주(揚州) 일대의 양자강을 일컫는 말. 《주례(周禮)》에 "동남쪽이 양주(揚州)인데, 그곳의 내는 삼강(三江)이고 오호(五湖)로 흘러들어간다."라 하였다. 양자강은 아홉 갈래 강줄기가 심양(尋陽) 남쪽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 양주(揚州)로 흘러 팽려호(彭蠡湖)에 들어간 후, 다시 세 갈래로 나뉘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 五湖(오호) : 소주(蘇州) 서쪽 40리에 있는 태호(太湖)와 그 인근의 유호(遊胡), 막호(莫湖), 서호(胥湖), 공호(貢湖) 등을 통칭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주18) 揚都(양도)

양주(揚州)와 금릉(金陵) 일대를 가리킨다.

 

장강 주위에 있는 양주(楊州) 일대에 세개의 강(삼강)과 다섯개의 호수(오호)가 있는데, 이 지역을 평정하고, 동으로 바닷가로 나와 전함이 말들과 함께 출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장강이 동으로 흐른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 지도에서 삼강과 오호의 지역이 Cinca 강 주위일 수 있다. 장강(Ebro강)의 남쪽이라면 아래 지도의 Gaudalope강 주위일 수도 있다. 안록산진영이 바다에서 강으로 진입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두 후보지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삼강과 오호의 가능성은 Cinca강 주위가 더 커 보인다.

 

Cinca river as Ebro river tributary (source : Wikipedia)

 

Watershed of Guadalope river (Ebro river 지류) (source : Wikipedia)

 

 

 

영왕동순가 (8)

 

長風掛席勢難迴21) 긴 바람에 돛을 거니 돌쳐서기 어려워라

海動山傾古月摧22) 바다 흔들리고 산이 휘청하며 오랑캐가 꺾이도다.

君看帝子浮江日 그대 보시라, 영왕(永王) 강물 따라 출정하는 날

何似龍驤出峽來23) 용양장군(龍驤將軍)이 협곡을 나설 때와 얼마나 비슷한지.

 

주 23) 龍驤(용양)

서진(西晉)의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을 가리킨다. 《진서(晉書)》〈무제기(武帝紀)〉에 "함녕(咸寧) 5년(279) 11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켜 오(吳)를 정벌하였는데,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과 광무장군(廣武將軍) 당빈(唐彬)을 보내어 파촉(巴蜀) 지역의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장강의 상류에 있는 파촉지역에서 장강을 따라 동진하며 내려 가는 서진 시기의 용양장군과 같은 영왕 이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역시 장강은 동으로 흐르며, 파촉지역은 장강의 상류쪽에 있다는 언급이다.

 

 

영왕동순가 (9)

 

祖龍浮海不成橋24) 진시황은 바다에 나가 다리를 못 세웠고

漢武尋陽空射蛟25) 한 무제는 심양(尋陽)에서 공연히 교룡(蛟龍)을 쏘았도다.

我王樓艦輕秦漢26) 우리 왕의 누선은 진(秦)과 한(漢)을 능가하리니

卻似文皇欲渡遼27) 흡사 태종(太宗)께서 요수(遼水)를 건널 적 같도다.

 

주 24) 祖龍(조룡)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 〈고풍 31〉 참조.

* 成橋(성교) : 《수경주》에 인용된 〈삼제략기(三齊略記)〉에 따르면, 진시황(秦始皇)이 바다에 돌다리를 놓으려 하자 바다의 신(神)이 기둥을 세워주었다. 시황이 그를 만나보려 하였더니, 바다 신이 말하기를 "내 모습이 추하니, 나의 모습을 그리지만 않는다면 황제를 만나보리라."라 하였다. 진시황은 바다로 40리를 들어가 바다 신을 만났다. 이때 신하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화공(畵工)만이 자맥질하며 그 모습을 그렸다. 신이 노하여 "그대는 약속을 어겼으니 빨리 가시오."라고 하였다. 시황이 말을 돌려 돌아오는데, 말의 앞 다리는 서 있고, 뒷다리만 따라 달려 겨우 언덕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림 그리던 이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 뭇 산의 돌은 모두 비스듬히 쏟아져 지금도 동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주 25) 射蛟(사교)

《한서》〈무제기(武帝紀)〉에 따르면 원봉(元封) 5년(B.C.106) 겨울에 남쪽으로 순방을 떠나 심양(尋陽)에서 배를 저어 가다가 교룡(蛟龍)을 쏘아 잡았다고 한다.

 

주 27) 文皇(문황)

문황제(文皇帝) 즉 당 태종(太宗). 《구당서(舊唐書)》〈태종본기(太宗本紀)〉에 따르면, 정관(貞觀) 19년(645) 2월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낙양을 떠나, 5월에 요수(遼水)를 건넜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영왕 이린의 전함이, 진시황과 한무제를 능가하며, 당태종이 요수를 배로 건너는 모습 같이 늠름하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영왕동순가 (10)

 

帝寵賢王入楚關28) 황제께서 어진 왕을 아껴, 초(楚) 땅에 들어오더니

掃淸江漢始應還29) 강한(江漢) 지역 쓸어내고 이제사 소환에 응하는도다.

初從雲夢開朱邸30) 처음엔 운몽(雲夢)으로 가서 붉은 궁궐 세우더니

更取金陵作小山31) 다시 금릉(金陵)을 취하여 작은 산을 만들도다.

 

주 28) 入楚關(입초관)

영왕(永王)이 사도절도사(四道節度使)와 강릉대도독(江陵大都督)에 임명된 일을 가리킨다.

 

주 29) 江漢(강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유역.

 

주 30) 雲夢(운몽)

지금의 호남성 북부와 호북성 서중부에 넓게 분포하던 고대의 늪 지역이다. 강북의 못을 운(雲)이라 하고 강남의 못을 몽(夢)이라 하였다는데, 운(雲)은 장사(長沙), 감리(監利), 경릉(景陵) 일대를, 몽(夢)은 공안(公安), 석수(石首), 건녕(建寧) 일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 《태평환우기》에 따르면 운몽택(雲夢澤)은 안주(安州) 안륙현(安陸縣) 동남쪽 수십 리 넓이의 호수로서, 남쪽으로는 형(荊)과 양(襄)에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호북성의 강릉(江陵) 일대를 가리킨다.

* 朱邸(주저) : 붉은 집, 궁궐. 여기서는 강릉대도독(江陵大都督)의 관부(官府)를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주 31) 小山(소산)

옛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거처를 소산(小山)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일명 금릉산(金陵山)이라고도 하는 종산(鍾山)이 영왕 린(璘)의 거처가 됨을 빗댄 것이다. 가음 〈금릉가송별범선(金陵歌送別范宣)〉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영왕 이린은 초나라 지역인 사도절도사와 강릉대도독이 되었다는 것과, 장강과 그 지류인 한수지역을 평정하고, 직함을 받은 지역(산남동로, 영남, 검중, 강남서로)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이다. 강북, 강남지역의 호수지역인 운몽지역을 평정하고, 다시 금릉을 취했다는 이야기이다.

 

운몽지역은 장강의 남북에 모두 호수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산남, 영남 등의 명칭은 피레네산맥 남쪽을 말하나 생각되어진다. 필자는 과거에 산남동도, 산남서도 등이 피레네산맥 위쪽 지역(프랑스 아키텐지역)을 말하나 싶었는데, 피레네산맥 아래쪽을 의미 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영왕동순가 (11)

 

試借君王玉馬鞭 옥으로 된 군왕의 말채찍 한번 빌려

指揮戎虜坐瓊筵 오랑캐 무찌르고 잔치 자리에 앉고파라.

南風一掃胡塵靜 남풍 한 줄기에 오랑캐 먼지 사라지면

西入長安到日邊32) 서쪽 장안으로 가, 해 근방에 닿으리라.

 

주 32) 日邊(일변)

《진서(晉書)》에 따르면, 명제(明帝)가 어려서 총명하여 원제(元帝)의 사랑이 남달라 여러 번 무릎 앞에 앉히곤 하였다. 어느 날 장안(長安)에서 사신이 왔기에, 명제(明帝)에게 "해와 장안 중에 어디가 더 멀까?"라고 물었더니, "장안이 가깝습니다. 사람이 해에서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원제는 기특하게 여겼다. 이튿날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며 또 물으니, 이번에는 "해가 가깝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원제는 아연실색하며, "어이하여 다른 이야기를 하는가?"라고 하자, "고개를 들면 해를 볼 수 있지만, 장안은 못 봅니다."라고 하여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이후로, 임금이 있는 곳을 해 근방[日邊]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네이버 지식백과] 영왕동순가 11수 [永王東巡歌-] - 영왕의 동쪽 순방의 노래 (고풍 악부 가음, 2014. 5. 26., 진옥경, 노경희)

 

 

상기 영왕동순가에서 한수지역이 언급된다. 즉 이 지역에서 영왕 이린이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수지역, 한중군의 지역에 대해 자료를 더 자세히 보고자 한다. 그리고 파촉지역도 여기서 멀지 않은 것으로 언급된다.

 

아래 한중군, 한수지역에 대한 위키백과 자료를 보면, 역사적으로 매우 유서 깊은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중군(漢中郡)은 진나라에서 설치한 중국의 옛 군이다. 군의 이름은 이 군을 지나는 한수에서 유래했다. 한수 유역에 설치된 군이었기 때문에 한중이 지역내에서는 한천(漢川)으로도 불렸다....

 

[편집]

파나라와 촉나라에 인접한 지역으로 진나라가 파나라와 촉나라를 정복한 이후 기원전 312년에 초나라를 공격해 한중을 빼앗고 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남정현(지금의 한중 시)으로, 이곳은 서주가 망할 무렵 정 환공이 전사하면서 본국이 지금의 섬서성 화현 지역이던 정나라 백성 일부가 이곳으로 달아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속현은 한중·서성(西成)·성고(成固)·상용(上庸)·양(鍚)·운양(鄖陽)·방릉(房陵)·저(沮)·순양(旬陽)·안양(安陽)·장리(長利)·무릉(武陵)이 있다.[1]

전한[편집]

기원전 206년 항우 진나라를 멸하고 18제후왕을 세우면서 유방을 한왕으로 세우고 이 군을 파군·촉군과 함께 주었으며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했고 서울도 이 군의 남정현에 두었다. 곧 한 왕조의 이름은 이 군에서 나온 것이다.[2] 항우는 원래 파군과 촉군만을 주려 했으나 장량 항백을 움직여 한중까지도 받아낸 것이다.[3] 고제가 기원전 205년에 옹·새·적 삼진을 정복하면서 남정에서 옛 새나라의 약양으로 수도를 옮겼다.[4]

무제가 자사를 두면서 익주자사부에 속했다.....

 

촉한[편집]

무도군, 음평군과 함께 촉한의 최북단에 있던 군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북벌, 강유의 북벌시기 북벌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위 촉한의 국경분쟁이 빈발했다....

 

서진[편집]

263년 촉한의 멸망이후 조위는 익주의 북동부지역에 양주를 신설했는데, 한중군은 이때 양주로 소속이 이관되었다. 서진 혜제시기 과거 한중군에 속했던 위흥군, 신성군, 그리고 상용군이 양주로 옮겨졌다. 8현 15,000호를 거느렸다. 영가의 난이후 성한이 파촉지방을 점령하면서 성한의 땅으로 편입되었다.[13]

 

남조[편집]

347년(동진 목제 영화 3년),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며 동진의 관할지로 편입되었다. 373년(동진 효무제 영강 원년), 전진이 파촉을 재점령하면서 전진이 차지하게 되었으나 비수대전에서 참패를 겪은 전진이 몰락한 틈을 타 동진이 다시 통치하게 되었다. 390년(태원 15년) 양주자사 주경표가 자사부를 두며 양주의 속군이 되었다. 무도군지역을 통치했던 저족국가 구지와 인접했기 때문에 구지와 동진 및 유송과의 교류가 이뤄지기도 했다....

 

 

남제[편집]

서상용현(西上庸縣)을 본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북주, 수[편집]

수나라에서는 개황초 양주(梁州)를 서치했고 대업초 한천군(漢川郡)으로 개명했다. ..."

 

(자료 : 한중군, 위키백과, 인용출처: 본블로그, 카테고리, 전국시대)

 

이상의 한중군 자료에서 보듯이, 파촉지역과 한수지역은 매우 인접한 것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당 현종이 피신해 있던 파촉지역과 영왕 이린이 활동했던 한수지역이 그리 멀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장강이 이베리아 반도의 Ebro river라 할 때, 파촉지역은 산세가 험한 피레네산맥 서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서진의 용양장군도 파촉지역에서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 왔다는 위의 주석 자료를 확인한 바 있다. 프랑스와 이베리아반도에서 동으로 흐르는 강은 Ebro river가 거의 유일하다. 따라서 장강은 Ebro river이며, 파촉지역은 피레네산맥 서쪽으로 판단된다.

 

또한 상기 자료에서 한수지역은 양주(楊州), 양주(梁州)이며, 한중군(=한천군)이 촉한의 최북단이었으므로, 제갈량은 북벌을 단행해 조위를 공격했다. 즉 촉한은 Ebro river이남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고구려지역으로 언급되는 서량지역은 양주의 서쪽이 아닌가 한다. 즉 대서양에 접한 서쪽 이베리아반도지역이 아닌가 한다. 광개토태왕은 이 지역에 있는 토욕혼을 정복했으며, 필자는 서고트왕국이 고구려라 추정했다.

 

 

 

다음으로 영왕 이린을 진압하기 위한 당 조정의 병력 중, 회남서도 절도사 등이 있다. 즉 회수 이남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영왕동순가에서 영와 이린이 담당하는 지역이 초나라 지역이라 언급된다. 따라서 회수와 초나라에 대한 자료를 더 보고자 한다.

 

 

아래 회수에 관한 나무위키 자료를 보면, 황하와 장강 사이에 흐르면서 황하, 장강 다음으로 큰 하천이라 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까지 회수를 중원의 경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회수이남의 추나라도 중원의 나라로 취급을 못받았다는 것이다. 오나라, 월나라도 물론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던 시기부터, 회수이남의 제국도 한족문화권으로 들어 간다.

 

회수이북은 밀을 생산하고, 회수이남은 쌀을 생산한다는 기록이다.

 

남북조시기에는 회수가 남조와 북조를 가르는 강이었다.

 

남송, 금 시기에는 북방이민족과 한족의 경계였다. 즉 남송은 회수이남에 있었다는 말이다.

 

원나라 시기 태평천국의 난 당시 태평천국의 북쪽경계가 회수유역이라 한다.

 

"회하(淮河). 회수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황하, 양쯔강(장강) 사이에서 흐르면서 황하, 양쯔강 다음으로 큰 하천이다. 원래 중국에서 河는 황하를, 江은 장강을 뜻하는 고유명사고 그 이외에는 수(水)를 붙였기 때문에 과거엔 회수(淮水)라 불렀다.[1] ....

회수는 황하와 장강의 사이를 동서로 흐르고 있다. 그 하류는 평탄한 저지대를 지나고 있어 물길이 복잡하기 때문에 홍수를 일으키기 쉽고 치수가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괴하(壊河)’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위치 때문인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한 세력이나 반란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 원술 왕릉, 제갈탄, 관구검 등이다. 한참 후대이지만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도 이 일대 출신이다. 태평천국을 진압하기 위해 거병했던 이홍장의 세력은 아예 깃발에다 '회(淮)'라고 새겨놓았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안자가 비유를 들어 인용했던 귤화위지(橘化爲枳)나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은 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라는 속담과 같은 뜻이다. 회남에서는 귤이 나고 회북에서는 탱자가 나기 때문. 또한 회수 이북으로는 주로 을 재배하고 이남으로는 을 재배한다.[2]

---춘추시대까지는 중원의 남쪽 경계였고, 회하 이남에 많은 땅을 가졌던 초나라가 중원 문화권에 속함에도 동시에 오랑캐 취급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3]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회수 이남의 , 월나라 강역까지 중원의 문화권에 포함되지만 여전히 촌뜨기 취급이었다. 진시황이 죽고 항우 유방이 맞붙던 시절쯤 가야 회수 이남도 완연한 한족 문화권에 포함된다. 삼국지의 시대에서는 위나라 오나라 합비를 두고 피터지게 일진일퇴를 거듭했고[4] 이후 남북조시대에 남조-북조, 12~13세기 남송- 시기에는 북방 이민족과 한족의 경계를 이루었다. 원나라 이후에는 크게 정치적으로 국경을 이루는 일은 없었으나 태평천국의 난 당시 태평천국의 북쪽 경계가 회하 유역이다......"

 

​(자료 : 회하(회수), 나무위키, 인용출처 : 본블로그, 카테고리, 초나라)

 

 

필자는 회수를 프랑스에서 가늠할 때, 가론강으로 본다. 르와르강이 황하, 에브로강(스페인)이 장강이며, 그 사이에 있는 가론강이 회수로 보인다. 가론강(529km, 329마일)은 르와르강(1006km, 625마일)과 에브로강(930km, 580마일) 사이에 있는 강중에서 제일 길다.

 

 

이어서 영왕의 활동지역이 초나라라 언급되므로, 초나라에 대한 아래 위키백과 자료를 살펴 보자.

 

초나라는 장강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되며, 형만지역이라 불린다. 초나라의 도읍지는 단양이었다.

 

기원전 690년, 초문왕은 수도를 단양에서 영으로 옮기고, 기원전 638년, 등나라를 정복했다. 기원전 614년, 춘추오패 중의 하나인 초장왕이 장강이남을 호령하였다.

 

이후 기원전 223년 초왕 부추때,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초한 쟁패기에 초 의제에 의해 부활한 초나라는 서초패왕인 항우가 유방에게 패배(초한전쟁)함으로써 초나라는 BC 202년 역사에서 사라진다.

 

 

"초(중국어: 楚, 병음: Chu, ? ~ 기원전 223년)는 현재의 후베이성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 중의 하나이다. 군사력은 갑병 수십 만, 전차 천 승(乘)과 기병 1만 기를 낼 수 있었다. 국성이 미성 웅씨인 주나라 제후국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비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되며,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다. .....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그 군주의 처음 작위 자작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이 왕을 자칭했고 전국 시대 말기 기원전 223년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 기원전 208년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에서 전한에게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역사[편집]

 

사마천 사기 초세가에 초나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은 창의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 축융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의 아들이다. 주 문왕  계련의 후손 중에 육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초나라 웅씨들의 시조이다.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했다. 하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다.[1]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2]으로 정했다.

 

서주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3]과 양오(楊奧)[4]에서 악(鄂)[5]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웅거는 잠시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서주 여왕이 즉위하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 칭왕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 웅순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은 가라앉았고,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오, 소오와 분모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있던 당시에 가장 강한 국가인 수나라와 어깨를 겨뤘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초 무왕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6]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7]에 소집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8]가 조상인 축융과 육웅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9]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목왕이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3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초한 쟁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워 초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의제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했고 항우도 한나라 유방에게 패망했으며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서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자료 : 초(춘추전국), 위키백과,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춘추전국)

 

이러한 초나라의 역사를 살펴 보는 것은, 장강이 에브로강이라 할 때, 로마 공화국의 역사와 대비함으로써, 장강이 에브로강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초나라의 항우일 수 있는 페니키아의 식민지 카르타고의 장군 Hannibal(한니발)은 Ebro강을 로마공화국과 카르타고의 분류지점(1차 포에니전쟁(BC 264- BC 241) 이후)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항우의 초나라가 장강을 분기점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로마공화국이, 한니발의 이베리아반도 영향력을 우려하여, 지금의 스페인 동부 해안의 Valencia부근 Saguntum에 기지를 세우자, 한니발은 이를 조약위반으로 카르타고에 도전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한니발은 2차 포에니전쟁(BC 218 - BC 201)을 일으켰다 한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The Greeks called the river Ἴβηρ (Ibēr),(abir), ah'ir and the Romans called it the Hibēr, Ibēr, or Ibērus flūmen, leading to its current name. The Iberian peninsula and the Hibērī or Ibērī (the people of the area) were named after the river.[4] It is not known with any certainty whether the Greeks used a local native name for the river. Nor is it known what the word "Ibēr" or "Hibēr" might mean. In modern Basque the word ibar means 'valley' or 'watered meadow', while ibai means 'river', but there is no proof relating the etymology of the Ebro River with these Basque words. There are rivers in the Balkans called Ibar (Montenegro and Serbia) and Evros (Bulgaria and Greece).

 

In antiquity, the Ebro was used as the dividing line between Roman (north) and Carthaginian (south) expansions after the First Punic War (264–241 BC). When the Roman Republic, fearful of Hannibal's growing influence in the Iberian Peninsula, made the city of Saguntum (considerably south of the Ebro) a protectorate of Rome, Hannibal viewed the treaty violation as an aggressive action by Rome and used the event as the catalyst to the Second Punic War. "

 

(source : Ebro(river), Wikipedia,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Cartage)

 

 

아래 지도는 1차 포에니전쟁 시기의 로마공화국과 카르타고제국의 지역 분포 지도이다. 로마공화국은 이태리반도에 한하여 있고, 반면 카르타고제국의 영역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남쪽, 그리고 시실리섬, 코르시카섬, 사르데냐섬, 발레아레스제도 등을 퍼함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분포는 카르타고 제국이 로마 공화국 보다 더 강성한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제1 포에니전쟁은 BC 264- BC 241 기간에 걸쳐 있었다. 초기 시실리섬에서의 전쟁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 당시 카르타고에는 Hamilcar Barca (생몰: BC 275 - BC 228)가 군사지도자 및 정치 지배자로 있었는데, Hannibal의 아버지로 기술된다. 항우의 할아버지 뻘 되는 항연 (생몰: ? - BC 224/223)과 시기가 비슷하다.

 

First Punic War, 264 BC (source: Wikipedia)

 

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한다. 그 결과 시실리섬, 코르시카섬, 샤르데냐섬을 로마공화국에 빼앗긴다. (아래 지도 참조)

 

End of First Punic War, 237 BC (source : Wik), ipedia)

 

1차 포에니전쟁시기(BC 264-BC241)는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기 전인 전국시대(BC 453 - BC 221)이다. 이 당시에는 진(秦), 초(楚), 제(齊), 연(燕), 조(趙), 위(魏), 한(韓)의 7웅이 할거하던 시대였다. 당시 진나라는 서방, 초나라는 남방의 강대국이었다.

 

카르타고 제국 지역은, 장강(에브로강) 이남을 호령한 초나라의 일부지역이라 할 수 있다. 진나라는 한수지역을 점령하여 한중군을 설치했다고 위의 한중군 자료에서 보았으므로, 피레네산맥 위쪽의 서방쪽을 점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연나라나 제나라는 중국의 동방의 지역으로, 압록수인 프랑스의 론강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 지도에서의 로마공화국 지역인 이태리반도지역은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의 한(韓)나라 지역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이후 진한(秦韓) 지역이 이 지역으로 추정되고, 마한(馬韓)의 일부 지역으로 판단되며, 진나라에 망한 한나라의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창해역사 사건의 창해지역이 이 근처의 지중해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후일 한(漢)나라가 설치한 창해군은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필자는 추정했다. 한(韓)나라는 춘추시대 진(晉)나라가 3나라로 분리된 한(韓), 위(魏), 조(趙)의 하나이다. 위나라는 중국의 중원에 위치한 나라로서, 프랑스의 중동부지역으로 추정된다. 한(韓)나라 지역은 비교적 남쪽의 지역으로 바다와 접한 지역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할 때, 1차 포에니 전쟁시기의 로마공화국은 전국시대의 7웅 중 하나인 한(韓)나라 지역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2차 포에니 전쟁 (BC 218-BC201) 시기는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정벌한 시기이므로, 이 당시 이태리반도는 통일제국 진(秦)나라(=大秦제국)의 일부지역(BC 218 - BC 210)이며, 이후 초한전쟁시기의 한(漢)나라 지역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Mediterranean at 218 BC (source: Wikipedia)

 

Hannibal's allies in Italy at Second Punic war (source: Wikipedia)

 

 

 

Hannibal's route of invasion to Italy (source : Wikipedia)

 

상기 지도에서 한니발의 침입경로를 보면,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프랑스 남부를 거쳐 이태리 북부를 지나 이태리 반도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이베리아반도나 프랑스 남부를 지날 때, 이 지역에서의 반발이 없었다는 추정이다.

 

이는 당시 항우가 한창 전성기의 시기이므로 이들 지역을 광범위하게 점령하고 있었을 수 있다.

 

반면, 유방은 피레니산맥의 아래 에브로강의 지류인 한수(漢水)지역(파군, 촉군, 한중군 지역)에서 발판을 마련했지만, 점점 세력을 넓혀 갔었다. 그래서 이태리반도에 있었는지 모른다. 한신(韓信)이 항우와 겨루는 유방을 도우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할 수 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결국 진나라 말기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초한전쟁에 패한 항우가 BC 202년 생애가 끝나는데, 2차 포에니전쟁은 BC 201년 끝난다. 항씨는 목 형태의 지역에서 태어나서 항씨를 가졌다 한다. 올돌목을 한자로 쓰면 그래서 울돌항으로 쓴다 한다. 필자는 이를 근거로 당항성을 북아프리카의 탕헤르 (모로코)라 추정하였다. 카르타고의 형태도 목처럼 길게 올라온 지형을 보인다. 항우, 항연, 항량 등의 항씨 가족들은 태생지가 카르타고인지도 모른다. 카르타고의 Hannibal, Hamilcar Barca 등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