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안-사의 난 (755-763)은 현재의 중공지역에서 있었는가? (I)

Chung Park 2023. 12. 13. 05:12

I. 머리말

 

필자가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에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의 기간에 중국 전국에 걸친 내전이 있었다. 그 와중에 낙양, 장안이 언급된다. 따라서 그동안 프랑크역사가 중국역사로 추정하는 필자에게 프랑스에서 낙양 장안의 위치에 대해 불확실했던 점이 이 분석후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2) 750년 전후 이 기간동안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기간이다.

 

(1) 아랍에서는 우마이야왕조가 압바스왕조로 바뀌는 기간이다. 그리고 우마이야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로 피난했다고 서양사는 전하나, 필자는 이미 700년 즈음에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우마이야 왕조는 고구려의 서고트왕국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신라의 문무왕 세력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우마이야왕조가 압바스왕조에 패해 이베리아반도에 피난 간 것으로 기술하는 서양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2) 중국에서도 이 기간에 안록산 사사명의 난이 있었다. 그런데 서양사에서는 사라센제국이 프랑크왕국 Poitier까지 침략(732년)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당시 우마이야왕조 아랍이 신라라면 신라가 중국 즉 당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당나라를 공격했다는 역사적 기술이 문무왕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당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필자는 더 궁금하다. 

 

(3) 안록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이 일어난 기간은 755-763년 기간이다. 프랑크 역사에서 이 기간은 Mayor of Palace (환관) Charles Martel 의 아들인 Pepin the Short 가 프랑크왕으로 재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프랑스 남부와 동부에서 대대적인 반란사건이 있었다. 이 역사가 안사의 난 역사와 유사하다면, 프랑크역사가 중국의 역사인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셈이 된다. 

 

3)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통일신라는  경덕왕 (재위: 742-765) 시기이다. 신라가 중흥한 시기라는데, 한국사 내용을 보면 딱히 내용이 없다. 그러나 관호와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후비로서 아들(혜공왕)을 낳은 만월부인이 있는데 양귀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이 당시 당나라는 당현종(재위 : 712-756) 시기이다. 그래서 당과 신라에 대한 정체 파악에 더 도움이 되는 시기라 생각한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우선 안록산의 난에 대해 살펴 보자. 본 글에서는 안록산의 난을 설명하는 자료에서 위치 관련 자료를 취합하여 그러한 행동이 지금의 중공의 위치에서 가능한 지에 대해 가늠하고자 한다. 

 

자료가 방대한 만큼 관련 자료 정리 자료는 별도로 본 블로그 당나라 키테고리에 게재한다. 이후에 사사명의 난에 대해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하는 일정이 있을 것이며, 이후 프랑스지역의 역사와 견주어 연구하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II. 안록산의 난 (755-757) 자료 정리 및 위치정보

 

1. 안록산 사사명의 난 Timetable

 

경과

  •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 756년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 756년 6월 장안(長安)을 점령한다.
  •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한다.
  • 757년 1월 안녹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사형당한다.
  • 759년 안경서가 안녹산의 부장II이던 사사명에게 사형당한다.
  • 761년 사사명이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형당한다.
  •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한다.
  • 763년 사조의의 자살로 난이 평정된다.

(자료 : 안사의 난, 위키백과)

 

2.  안록산, 사사명의 난 관련 위치정보 요약

 

- 755년 11월 범양에서 거병, 평로 병마사 사사명 합류

- 동경(낙양, 하남부), 서경(장안, 경조부), 태원 (북경, 태원부, 대 돌궐 전선사령부)

-  당조정의 방어전 : 장안과 동관

 

 

2-1. 낙양 방면

1) 안록산군은 12월 2일 황하를 건너 영창, 박릉, 상산, 진류, 형양 등 중원 일대를 휩쓸며 낙양으로 접근

2) 낙양 방어 나선 봉상청, 6만여명 병력 모집, 하양교 끊음

3) 하남절도사직, 장개연, 진류 방면 파견

4) 장안에서 낙양 지원군 편성하여 동쪽으로 보냄 : 영왕 이완 (사령관), 우금오대장군 고선지(부사령관), 환관 변령성(감군)

5) 장개연, 진류 도착하자 안록산군에 참살당하고, 진류 전주민 학살 당함

6) 봉상청, 낙양 방어 실패(무뢰, 규원, 상동문, 도정역, 선안문) -섬군으로 후퇴

7) 안록산군의 낙양 함락, 장통오(수양태수), 양조종(진류장사) 임명

8) 당의 종실 이지(동평태수 사오왕), 이수(제남태수)가 안록산군 저지, 장통오 처형

 

 

2-2. 동관, 하동, 장안 방면

1) 봉상청, 고선지 섬군 철수하고 동관으로 이동

2) 안록산군 최건우, 섬군 배치

3) 임여, 홍농, 제음, 복양, 윤중군 항복

4) 가서한, 동관 20만 병력 지휘 (봉상청, 고선지는 변령성 참소로 사형)

5) 전랑구, 소흔, 화발귀인 부족병력 이끌고 가서한에 합류

6) 가서한은 방어전, 훈련하며, 동관에서 대치정국

7) 고구려계 유민출신 왕사례는 기병 30명으로 양국충 동관 납치 살해 시도, 가서한 만류 8) 양국충은 두려워 동관 배후에 파상(1만), 장안(3천) 병력 편성

9) 가서한은 파상군을 동관에 흡수

10) 가서한: 장안 방위, 안서, 북정지역과 당 본토를 연결하는 지역인 하서, 농유 절도사 겸

11) 가서한 주변인은 양국충 주살을 건의

12) 양국충은 당 현종에 말해 가서한이 동관 나가 공격하도록 함

13) 가서한군 대 최건우(안록산군), 함곡관 서쪽 평원에서 조우

14) 가서한 군 편성: 전방 왕사례의 정예 5만, 후방 미숙한 병력, 가서한 예비군 3만

15) 최건우 : 좁은 지형 이용한 복병 전략, 동라의 정예기병으로 당군 후방 가격

16) 당군 정예 병력까지 붕괴 : 대패, 8천명 동관 회귀

17) 가서한은 후방의 관서역으로 후퇴

18) 화발귀인이 가서한 납치후 안록산에 항복

19) 안록산은 가서한 낙양에 억류, 안경서가 낙양 탈출시 살해

20) 동관 함락 -> 하동, 회음, 풍익, 상곽의 방어사들 군을 이탈, 도주

21) 안록산군, 756년 8월말, 동관 돌파한 후 장안 점령

 

22) 당숙종 756년 10월 방관의 지휘하에 장안 탈환 시도

23) 방관 (6-7만) 3군으로 나누어 양희문, 유귀철, 이광진과 진격

24) 11월 20일 쯤 함양에서 안록산군과 접전 (우마차 2천승)

25) 당군의 대패, 사상자 4만

26) 23일 재차 도전하여 박살남, 양희문, 유귀철은 항복

27) 하동은 장안과 낙양 사이에 위치

28) 757년 1월 28일 곽자의는 비밀리에 하동에 접근

29) 연군 최건우가 하동 지킴 (동관 함락한 후 북진하여 하동지역의 절반 장악)

30) 757년 2월 11일 곽자의는 하동 함락 (항복했던 당 관리 회유 공작)

31) 연군 최건우는 4천명 전사, 5촌여명 포로되는 참패후 안읍으로 철수 

32) 안읍의 거주민 곽자의에 협조, 최건우는 다시 백령경으로 도주

33) 757년 2월 22일, 곽간, 병마사 이소광, 복고회은 대장 왕조 파견해 동관 함락

34) 안경서가 대규모 병력으로 동관 공격

35) 당 병사 1만여명 전사, 이소광, 왕조 전사

36) 곽간, 복고회은만 간신히 황하 다시 넘어 철수

37) 757년 3월 23일 안경서군 관서절도사 안수충이 기병 2만으로 하동 공격

38) 곽자의는 참수 8천, 포로 5천으로 하동 방어 승리, 하동지역 장악 공고히 함

 

2-3. 태원 방면

1) 사사명 별동대 태원 방면 공격

2) 삭방절도사 곽자의, 태원 방어 임무

3) 삭방, 하서, 농우진 주병력은 행영(황제 지휘군영)으로 이동

4) 곽자의, 진무군까지 전진한 안록산군의 고수암군 대파

5) 곽자의, 정변군까지 진격한 안록산군 대파

6) 곽자의, 안록산군 대동병마사 설충의 정변군 공격  대파

7) 곽자의 태원방면 승리 - 하동진으로 진격, 운중(대동) 포위, 마읍(삭주) 함락

8) 안록산의 주요 군거지 중 하나인 하동진 당이 장악 - 범양, 평로진까지 위협

9) 이광필 (하동절도사)(하동진 평정) 이 정형관 출발하여 상산 도착

 

2-4. 하북 지역

1) 하북의 평원태수 안진경, 상산태수 안고경 제외한 하북 전지역 항복

2) 안록산군 장형성: 상곡, 박릉, 상산, 조군, 문안 일대 지휘

3) 안고경, 안진경 의병 봉기 -안록산군의 태원가는 길 끊음

4) 태원윤 왕승엽이 안고경 지원하지 않아, 상산 함락됨,

5) 사사명이 안고경을 낙양으로 이송, 후에 사형됨

6) 화북 지역 17개군 다시 사사명에 항복, 요양태수 노전성만 저항

7) 사사명(기병 2만, 보명 5천)의 요양 포위 및 격파

(당의 하가사법 이환의  7천병력, 경성장사 이위의 8천병력의 요양 지원 불구)

8) 사사명의 병력 상산도착 (요양과 상산의 거리 20리), 상산근처 호타수 있음

9) 상산전투 : 이광필 대 사사명, 이광필 승리, 사사명은 구문으로 후퇴

10) 이광필: 하동절도사, 범양 장사, 하북절도사 겸직

11) 삭방의 곽자의 상산 합류 : 총 10만

12) 구문성의 사사명부대 대파 : 구문전투 (혼감 명장)

13) 사사명 조군으로 도주, 당군은 추격후 조군 수복후 상산으로 귀환

14) 사사명 다시 도전 및 패배  : 사하 전투

15) 당은 삭방, 하동군, 하북 평정: 범양과 낙양 사이 길 끊김, 범양 위협

16) 구문전투 패한 후 낙양으로 도주한 최희덕에게 보병 기병 2만과 함께 사사명에 파견

17) 범양 지키던 우정개 1만병력 사사명에 합류

18) 사사명 병력 총 5만 (이민족 동라와 예락하 출신 1만 포함)

19) 항양에서 곽자의, 이광필 (방어전) 대 사사명(기병 주력) 다시 충돌

20) 가산전투 (5/29) : 곽자의 이광필 대승리

21) 사사명 5만중 4만병력 손실, 박릉으로 도주, 당군 박릉 포위

22) 안진경 : 평원 청하의 군진을 아우르고 병력 모아 하북일대의 안록산 세력 제압

23) 안록산이 파견한 태수 원진태 저항  : 당읍 패배

24) 북해 태수 하란진명 등 안진경에 합류

25) 안진경군 하북 대부분 평정, 안진경: 평원태수, 하북채방사

26) 곽자의 이광필 병력이 박릉 포위 풀고 영무로 이동

 

27) 삭방 방어하던 신도태수 오승은 사사명에 항복 

28) 사사명은 이후 고성 함락, 9월 조군과 상산 함락시키며, 태원 가는 길목 확보

29) 11월 하란진용이 조정(영무)에 입사후, 안진경 의병과 사사명 충돌

30) 평원까지 사사명에 함락됨

31) 안진경은 황하를 건너 형주로 피신

32) 요양도 사사명에 함락됨

33) 757년 1월 사사명은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와 함께 태원 공략

34) 이광필: 호부상서 (재상), 북도 유수로서 태원 방위 담당

35) 그러나 삭방 주축 정예병력 대부분 영무에 머뭄

36) 경성과 하간의 병력 5천으로 태원으로 감

37) 이광필의 대원 방어 : 벽돌 수십만장 만들어 방어시설 보수, 성밖에 참호 깊게 파놓는 등 준비, 태원 밖으로 비밀땅굴만들어 기습, 공성무기 끌어 들여 파손하고 야습까지 강행 

38) 결국 사사명은 1개월동안 전사자만 1만, 안록산 죽음 소식에 범양으로 귀환, 채희덕 공략 계속

39) 이광필의 결사대, 채희덕 본진 급습, 이만여명 참살하고 태원의 포위 푼다 : 태원 전투 승리

40) 태원에서 참패한 연군의 채희덕은 상당 지역 공세 

41) 당군 상당 절도사 정천리에 패함

42) 757년 9월 2일, 당군의 정천리는 기병 100여기 이끌고 교전하다 철수중에 다리가 부러져 생포됨, 추후 낙양에서 안경서 철수시 살해됨

 

2-5. 당현종의 파촉 피신

1) 동관 함락 : 당현종 장안 떠나 파촉으로 피신

2) 마퇴역 도착시 병사들의 폭동으로 양국충 살해, 양귀비 자결

3) 왕사례(고구려계 유민출신): 하서, 농우 절도사 임명

4) 당현종은 부풍 가서야 관리 영접 받음

5) 파촉지역으로 들어감, 촉군 장사 최원 마중

 

2-6. 당숙종의 영무에서의 즉위

1) 황태자 충왕 이형, 2천 호위 병력으로 분조, 장안 서북쪽으로 이동

2) 아들 광평왕 이숙, 건녕왕 이담의 추천으로 삭방 번진으로 이동

3) 7월 12일 영무에서 제위 : 숙종

4) 박릉을 포위하고 있던 곽자의, 이광필, 그리고 안서번진, 하서번진들에 명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로 올 것을 명함

5) 하서절도부사 이사업(고선지의 부장, 봉상천과 함께 용맹), 안서행군사마 이서균, 각각 5천, 7천여 병력을 이끌고 영무 도착 

6) 곽자의, 이광필의 삭방군 5만여 영무 도착

 

 

2-7. 하서, 농우 방면

1) 농서공 이우(황족), 한중왕, 양주 도독, 산남서도 채방 방어사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파견 2) 하서의 여러 호족들이 당에 반기

3) 농우 병마사 주필을 농우절도사로 임명

4) 왕사례를 행재도지병마사로 삼아, 하서, 농우일대의 돌궐부락 기미주들을 이끌고 파촉으로 들어와 이들을 관리 하라 명함

 

2-8. 하남, 수양, 남양, 남하지역

1) 장안, 낙양 함락후, 하남지역 군현들이 안록산군에 항복

2) 하남성 기형(옹구)의 장순은 안록산군의 영호조 공격 방어

3) 안록산 임명한 하남절도사 이정망이 이민족 포함 병력 2만으로 접근하자 장순이 대파

4) 안록산 장수인 양조종이 옹구에서 후방으로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영릉을 2만여 병력으로 공격하려하자, 장순도 옹구에서 영릉으로 철수, 수양태수 허원과 합류하여 양조종 격퇴. 이후 장순은 하남절도사로 임명됨 

5) 하남, 남하지역은 상대적으로 전란이 비켜간 곳

6) 수양 지켜낸  당군 장순, 남양 수비한 당군 노경

7) 노경은 연군 무령순, 필사침, 전승사 등이 남하 지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양 수비 (757년 4월 15일까지 1년 가까운 기간 수비)

8) 757년 4월 남양에 식량 고갈

9) 당숙종은 환관장군 조일승을 남양 파견해 격려 원함

10) 양양태수 위증서는 조일승이 연군에 피살될까 도려워 보내지 않음

11) 하북에서 사사명에 패해 남하지역에 와 있던 안진경이 조일승의 남양행 막지말라 조언

12) 안진경은 757년 4월 즈음 영무로 감

13) 조일승은 757년 4월 이전 양양에 있었음

14) 조일승은 기병 10여기 병력으로 연군의 포위망 뚫고 남양에 도착, 격려후 양양귀환

15) 이후 조일승은 호위 병력 1천을 붙여 양양에서 식량 운반 해줌

16) 노경은 757년 4월 15일 병력을 이끌고 남양을 탈출, 양양으로 철수

17) 연군의 남양  함락이후 남하지역 공격

18) 노경이 남하지역 잘 수비함

 

2-9. 삭방 지역

1) 돌궐족 추장 아시나종례가 안록산군 이탈, 삭방군쪽으로 이탈하여 삭방군 변방 구성부와 돌궐, 동라 등 여러 이민족들을 선동하여 봉기하여 독립세력 되고자 추정

2) 당숙종은 석방진, 안서4진, 하서진 등 서북쪽 일대의 번진들을 주축으로 군 재건 기도 

3) 9월, 곽자의, 복고회은에게 아시나종례 토벌 명령

4) 복고회은의 활약으로 돌궐, 동라 집단 격파 

5) 12월, 회흘의 지원병력과 함께 곽자의는 우림하 북쪽에서 동라를 필주로 한 반란 일으킨 이민족 격파 (참수 3만, 포로 1만) 한후 영무로 귀환

 

2-10. 강남지역 : 영왕 이린의 난 (756-757)

1) 현종이 촉땅으로 들어 가면서 영왕 이린 또한 강남으로 보내졌다

2) 금릉(남경?) 장악 후 (756년 12월), 동진 같은 독립 세력 꿈꾸었다

3) 당의 저지를 뚫고, 안록산 진영까지 공격해, 안록산 휘하 숙장 아시나승경이 항복

4) 당은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설치하고, 강동절도사와 함께 진압케함 

5) 강서채방사 황보신이 이린 생포해 죽임

6) 당숙종 " 어찌 그를 촉으로 보내지 않고 멋대로 죽였는가?" 하고 황보신 파직 시킴

 

7) 당현종은 촉지방으로 피신하여, 한중군에 도달하자, 조서를 내려, 영왕 이린을 산남동로, 영남, 검중, 강남서로 등 4도 절도채방등사, 강릉대도독으로 임명

(자료 : 영왕동순가 11수, 이태백, 인용출처: 고풍악부 가음, 이백 시의 정화, 저자 진옥경, 노경희,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공유자료,  https://blog.naver.com/lainfos/223189045748)

 

2-11. 기타 

1) 756년 당은 북해절도사, 상당절도사, 흥평절도사 직을 설치

2) 남양절도사, 하남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관내절도사,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경기절도사, 동기절도사, 청밀절도사, 상당절도사 

 

3) 토번은 위용, 신위, 정융, 선위, 제승, 천성 등의 군진과 석보성, 백곡성, 조과성 등 당에 의해 빼앗겼던 요충지 탈환

 

 

 

 

중공지역의 안사의 난 지도 1 (자료 : 리밋티드 블로그)

 

 

중공지역의 안사의 난 지도 2

(자료 : 사유하는 작은 서재 블로그, 현종의 은총, 충성경쟁이 안사의 난의 원인이 되다)

 

 

III. 안사의 난이 현 중공지역에서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

 

 

1.  당의 절도사 중 북해절도사의 존재 

 

당숙종 시기, 방관의 장안탈환 시기에 북해 태수, 하란진명 (안록산의 난 (나무위키)자료 110번 구절)이 언급되고, 방관의 장안탈환 전투가 대실패로 끝난 후, 당숙종은 여러 절도사들을 지방에 임명하는데, 이중에 북해절도사가 있다. (안록산의 난 (나무위키) 자료, 113번 구절). 즉 중국의 북쪽은 북해애 접해 있다는 기록이다.  현재 중공에 북해가 있는가? 없다. 혹자는 바이칼 호수가 북해가 될 수 있다 주정하나, 바이칼 호수는 호수이지 바다가 아니다. 더구나, 바이칼 호수까지 당나라의 영역이 미치지 않았다.

 

재야사학자 문무님은 "북해의 나라, 재2편- 문무의 조선사 해설"에서 북해의 북쪽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여, 북해는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였으나, 필자는 북유럽의 경우를 보면 북해위에 다른 나라가 있음을 보아, 북해는 북쪽의 바다로 판단한다. 즉 북해에 접한 나라는, 북극해에 접한 러시아와 북해, 발트해에 접한 북유럽 국가들이 있으며, 현 중공지역은 북해와 관련이 없다. 즉 중국의 역사는 현 중공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국의 동쪽에 접한 조선은, 이성계의 조상 이야기 중에서, 두만강은 북해로 흐른다는 기록이 나온다. (필자의 글,   참조). 상기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언급한 북해 태수, 북해 절도사가 말하는 북해가 아닌가 한다. 즉 조선과 중국은 같이 북해에 접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필자가 추정하는 중국의 위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확실하게 들어 맞는다. 

 

 

2. 동돌궐을 이은 회흘의 위치

 

안사의 난은 결국 회흘의 지원군의 덕분에 겨우 진압할 수 있게 된다. 위의 지도에서 회흘은 돌궐과 유사한 위치로 그려져 있다. 즉 중국의 북쪽에 있는 돌궐 중 동돌궐이 망한 후 세워진 나라가 회흘, 위구르제국이다.

 

그런데, 중국은 북쪽에 북해에 접해있다. 그리고, 회흘과 돌궐은 중국의 북쪽 국경 위에 있었다. 즉 회흘과 돌궐은 북해 북쪽에 있는 나라가 된다. 필자가 추정한 스킨디나비아반도의 나라가 회흘이나 돌궐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북해위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은 회흘이나 돌궐을 의미한다고 판단한다. 즉 북해는 북쪽에 있는 바다라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중공 위치를 가정한 상기 지도들은 모두 허위가 되는 것이다. 즉 현재의 중공의 위치가 과거 중국의 역사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돌궐 대비 전선사령부 태원의 위치와 현재 북경의 위치

 

태원은 중국사에서 장안, 낙양과 함께 중요한 도시로서, 돌궐 대비 전선사령부가 있던 곳이라 하였다. 그런데 태원이 북경이라 한다. 지금의 중공 북경은 지나치게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리고 타이위안(태원)은 훨씬 내룩으로 들어와 있다. 그들이 상정한 돌궐의 위치는 한참 내륙으로 들어가 북쪽에 위치해 있다. 즉 지금의 북경은 태원의 지리적 요구사항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태원이 타이위안이라 한다면, 지금의 북경처럼, 중국사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는지 궁금하다. 따라서 지금의 중공지역이 중국사의 지역이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4. 수양성 전투에 참여한 북해절도사

 

수양성 전투는 당군 장순과 연군 윤자기의 전투 대결인데, 수양성은 하남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그동안 장순이 식량부족에도 불구하고 처절히 방어하고 있었다. 이에, 낙양과 장안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남절도사 장호가 절동절도사, 절서절도사, 회남절도사, 북해 절도사에게 격문을 돌려, 수양성 구원에 나섰으나, 수양성 홤락후 4일 뒤에야 도착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북해 절도사는 물론 장강 주위에 있었던 절동, 절서 절도사가 급히 도착하기 위해서는 강과 바다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당시, 당은 장안을 탈환한 후, 동경인 낙양에 접근하기 위해 수양성 함락을 노렸다.  그러면북해 절도사는 바다를 건너 황하를 통해 접근하는 길이 있고, 장강변의 절도사나 회수이남의 절도사들도, 황하을 통해 접근해야 신속하게 접근한다. 그런데, 현 중공의 황하는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즉 바다를 통해서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구조가 된다. 그러나 장안은 서경이고 낙양이 동경이다. 이들이 황하변에 있다. 따라서 동쪽으로부터 황하를 타고 들어 오는 것은 적이 진을 치고 있는 낙양근처를 지나 수양성에 도착하는 길이 된다. 즉 말이 안되는 비합리적인 경로가 된다. 더구나 가까이 바다가 없다면 북해절도사는 신속하게 도달할 수 없다. 즉 현재의 중공지리상으로는 합리적인 신속한 이동경로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한 중국역사의 위치, 프랑스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하다. 북해에 접한 지역의 북해절도사는 북해를 이용해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황하인 르와르강을 따라 들어 오면, 장안(Tours?)에 먼저 도착후, 수양성에 도착할 수 있다. 수양성 우측에는  낙양일 수 있는 Orleans이 있다. 회남절도사도 회수일 수 있는 가론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가 르와르강을 타고 다시 동쪽으로 가면 장안을 지나 수양성에 도착할 수 있다. 장강(Ebro river)변의 절동 절서 절도사들도 가론강을 타고 대서양으로 나가 다시 르와르강을 타고 동진하여 들어 오면 장안(서경, Tours?)을 지나 수양성에 도착할 수 있다. 즉 황하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에서 서로 흘러야 이 상황에 맞는다는 것이다. 

 

즉 현 중공의 위치에서는 중국사의 이동 경로 설명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5. 외국 군대의 총동원으로 막은 안사의 난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막기 위해 회흘, 대식, 발한나(대완), 남만 등의 이민족군을 총 동원하였다. 회흘의 위치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해 이북에 있었다.

 

남만은 춘추시대에, 장강이남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를 호칭하는 말이었다. 원나라는 남송을 정복한 후, 남송의 한족들을 남만으로 차별대우 하였다. 즉 장강유역의 일부 당 영토를 제외하고는 장강이남은 이민족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지역에서, 장강이남의 지역에서도 지원이 없는데, 저 멀리 베트남 등에서 지원군이 올 수 있을까? 역시 현 중공지역의 안사의난 역사인가에 회의가 간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하는 프랑스지역이라면 이런 남만의 지원이 가능하다.  나아가 남만을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확대해서 볼 수도 있다. 모두 지중해 해상으로 이동하니 가능한 상황이다. 

 

 

대식, 발한나(=한(漢)나라 시대 대완이라 불림) 등은 서역의 나라였다 한다. 대식은 페르시아로서, 현 중공의 위치에서는 매우 먼 지역이다. 육지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먼 지역이다. 그러나 대식국을 신라인 페르시아로 보면 다르다.  그리고 당나라를 프랑스지역으로 보면 가능할 수 있다. 역시 지중해를 통한 바다로 이동하는 경로가 가능한 것이다. 당시 아바스왕조가 이베리아반도나 북아프리카에 진출했다면, 더욱 용이한 일이 된다. 

 

 

6. 영왕동순가 11수 (이백의 시)에 나타난 파촉과 강남의 근접성 

 

당현종은 장안이 안록산군에 의해 함락되자 남서쪽 촉지역으로 피신했다 한다. 그러면서 영왕 이린에게 산남동로, 영남, 검중, 강남서로 등 사도 절도채방등사 강릉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백의 위 시 영왕동순가를 보면 영왕 이린이 강한(江漢)지역 즉 장강과 한수(漢水)지역에서 활동한 것을 노래하였다. (이백의 영왕동순가 (1)). 한수는 장강의 지류로서, 유방이 이 지역을 점하고 있어 한왕, 한중, 등의 표현이 생겼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장강의 중류지방인 무창, 강동지방에서 영왕 이린은 활동했다. 이 지역은 또한 초나라 발상지이다.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楚)의 발상지가 이 지역이었으며, 초나라는 한동 제국(漢東諸國)을 정복하면서 남방의 패권국이 된다. 그리고 전한/후한의 한은 이 강에서 따 왔다. 진나라(秦) 멸망 이후 항우가 18제후를 책봉할 때 유방이 이 강 유역 일대인 한중을 분봉받으면서 한왕이라는 이름으로 책봉이 되었고 이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왕이 한제(漢帝)로 격상되어 한 왕조가 열리면서 ..." (자료 : 한수, 나무위키)

 

또한 영왕동순가 (8)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 그대 보시라 영왕 강물 따라 출정하는 날, 용양장군이 협곡을 나설 때와 얼마나 비슷한지'. 용양장군은 서진(西晉)의 용양장군 왕준을 가리킨다. 진서 무제기에 "279년 11월, 크게 병사를 일으켜 오(吳)를 정벌하였는데,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을 보내어, 파촉지역의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자료: 고풍악부 가음, 영왕동순가(11),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lainfos/223189045748 참조)  즉 파촉지역과 장강의 한중지역이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당현종과 영왕 이린이 함께 있는 장면을 노래한다. 예를 들어 영왕동순가 (5)에서, '어진 영왕이 멀리서 옴이 더욱 더 기쁘도다', 영왕동순가 (10)에서, '황제께서 어진 왕을 아껴 초(楚)땅에 들어 오더니' 등이다.  즉 촉지역에 피신한 당현종과 장강 유역의 영왕 이린이 서로 만나는 것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이는 두 지역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황제인 당현종의 이동은 먼 지역은 힘들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현 중공지역에서 사천성의 촉지역과 장강유역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당시 안록산의 난으로 어지러운 시기에 먼 거리 이동은 불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 중공지역의 중국사가 의심되는 것이다.

 

또한 영왕 이린의 난을 진압하면서 황보신이 이린을 죽인 것을 보고 받고, 삭방지역 영무에 있던 당숙종은, 왜 촉의 당현종에게 보내지 않았는가? 하고 한탄하였다.  (아래 안록산의 난 참고자료, 192) 구절 참조) 이는 촉지역과 장강유역이 가깝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파촉지역이 장강유역에 있는 한수지역이라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촉지역은 지금 중공의 사천성지역이 아니라, 장강 유역의 한수지역일 수 있다. 파촉의 파는 바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신라에서는 쓰였다. 예를 들어 파진찬 등의 직책명의 예이다. 이를 고려하면 파촉은 장강유역의 상류에서 가까운 곳이라 판단된다. 이 또한 현재의 중공지역의 중국사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 된다.

 

필자가 당나라 지역으로 추정하는 프랑스지역을 고려하면, 장강은 스페인의 북부 Ebro river가 될 수 있고, 이 강의 지류인 한수는 Ebro river의 어느 지류(아르곤강)일 수 있으며, 따라서 파촉지역이나 촉지역은 피레네산맥의 서쪽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장강과 촉지역이 모두 상당히 근접하여 있으며, 촉지역의 험한 지형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바다와 근접한 파촉지역은 대서양에 근접한 피레니산맥지역일 수 있다. 

 

 

7. 안서4진과 농우지역과 돌궐의 기미지역

 

안사의 난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의 서쪽에 안서4진 절도사가 있고 농우 절도사가 있다. 이들 지역은 또한 돌궐의 기미지역으로 기록된다. 기미지역이란 그 피지배민족의 거주지라는 것이다. 회홀은 북해 위에 있다 했고, 돌궐은 일부가 회흘지역이 되었다 했다. 또한 당나라 서쪽에 돌궐의 기미지역이 있어 이들 주민들을 징병하여 당나라의 안록산 진영 토벌군에 합류하라 하였다. 즉 안서4진이나 돌궐, 회흘 등은 서쪽의 바다나 서쪽으로 흐르는 황하를 이용하면 용이하게 접근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공지역의 서쪽은 바다가 아니다. 북해도 없다. 따라서 돌궐의 기미지역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쪽에 4진이라는 수군기지가 있는 것도 이상하다. 즉 현 중공의 지형으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간다.

 

그러나 프랑스지역이라면, 서쪽에 대서양이 있다. 돌궐의 해상 침투를 막으려면, 안서 4진이 있어야 한다. 황하(르와르강)가 서쪽으로 흐른다면, 이 강을 통해 용이하게 삭방군이나 장안에 접근할수 있다.

 

그리고 지금 프랑스에는 아직도 Anjou, 안주라는 지역이 존재한다. 서쪽 대서양에 가까운 지역이다. 안서4진이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수군기지일 수 있다. 

 

 

IV. 맺음말

 

2023년 3월에 시작한 글이 어언 9개월이 다 되어 간다. 이해가 가기 전에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사사명의 난을 함께 연구하려 했는데, 자료의 방대함으로, 또한 시간상 너무 지체되므로, 본 글은 일단 안록산의 난에 한정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백의 영양동순가를 통해 파촉지역이 중공 서부가 아닌 피레네산맥 서쪽이라는 판단과 한수가 스페인의 에브로강의 서쪽의 지류 아라곤강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수지역은 백제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 그동안 그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어 왔는데, 이 연구 덕분에 더 확실히 알게 되어 기쁘다.

 

또한 북해 절도사와 북해태수를 임명한 중국 당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북해의 위치를 현재 바이칼호로 추정하는 재야사학계와 중공사학계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최근 연구한 환단고기를 통해 더욱 알게된 북해의 위치는 결국 지금의 유럽의 북해라는 결론이 더욱 확실해진다. 당나라의 시기의 북해가 지금의 유럽의 북해라 하면, 중국의 위치가 프랑스에 있었다는 필자의 그동안의 연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프랑스에서 장안은 Poitiers일 것으로 추정되고, 낙양은 Orleans으로 추정된다. 돌궐에 대항하는 주요 군사도시 태원은 프랑스의 파리로 추정된다. 모두 강이 연결되는 지역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프랑스의 르와르강이 황하로 추정된다.  동으로 흐르는 장강은 스페인의 에브로강으로 추정된다. 황하와 장강의 중간에 있는 회수는 프랑스의 가론강이나 Dordogne 강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그동안의 연구는 돌궐이나 회흘이 강을 따라 또는 바다를 따라 이동하는 해양세력이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이미 바이킹이 돌궐의 후예가 아닌가 판단하고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는 그동안 Gokturk를 돌궐이라 추정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미 Gokturk를 고구려로 추정했다. 이러한 추정 또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최근 환단고기의 연구로 북유럽이 단군조선의 태동지라는 것을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점점 필자의 모든 연구가 진실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올해의 큰 선물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