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2019. 6. 15. 03:31한민족 역사/통일신라

 

 


1.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 연구의 의의


1) 신라와 당의 강역의 모호성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는 백제이다”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이고 로마가 백제라고 주장한 필자는통일신라이후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위치를 놓고 적잖은 고민을 한 것이 사실이다위치상으로 보면백제의 비잔틴제국 대부분을 흡수한 우마이야왕조가 통일 신라가 되어야 하는데기존의 서양역사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이 점령한 무슬림국가라고 나온다신라나 당나라가 불교는 관련이 있었어도 이슬람교와는 관련이 있었다는 우리 역사기록은 접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또한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우리 역사에서는 엄연히 다른 국가로 나오는데서양 역사기록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비잔틴제국과 무슬림 아랍국가인 사라센제국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기록된다는 것이다아랍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서양역사가의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래서 비잔틴제국과 사라센제국의 역사기록을 그대로 믿기 보다정제하여 보아야 하기 때문에더욱 동양 역사기록과 비교 연구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신라의 지역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동시대에 활동하는 당나라의 강역을 알아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용이하지 않다현재의 중공은 중국의 역사가 현 중공땅에서 있었다는 것을 주장 하기 위해 역사상 모든 자료를 왜곡하고 있다먼저 현 중공땅이 중국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미리 정해 놓고따라서 현 중공에서 발굴되는 모든 유물은 중국 역사의 것이다라는 주장이다마치 한반도의 모든 유물은 무조건 신라백제고구려가야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반도의 식민사학자들과 다름 없다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따라서 한반도와 일본그리고 현 중공지역의 진실된 역사를 확인하기 어렵다특히 삼한의 역사가 중공지역에 걸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유물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이 왜곡되고 있어 역사연구에 발전이 없는 것이다따라서 이 지역의 역사는 왜곡된 역사만 점철되어 있고진실된 역사는 수면 아래로 감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다른 지역에서의 진실된 역사를 파악하는 데에도 방해를 하고 있다다른 곳에서 유물을 통해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가 발견되어도 타지역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주장하기 힘들다이미 당사자인 한국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바를 틀렸다고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오죽하면 어느 터어키 역사학자는 한국에서 열린 공동 역사세미나에서 말하기를한국 역사학자들은 이상하다고... 다른 지역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라고 말해도 오히려 한국의 역사학자가 아니라고 한다고...그래서 이 지구상에서 Lost civilization 지역이 많아지고아랍인들이 자기들의 역사라고 우길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가능한 방법이당나라 관련 기록을 살펴 보면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보는 방법이다.현재는 중앙아시아 역사자료나 유럽 역사자료를 직접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이미 현 중공에 그려진 중국지도를 받아 들이면 다른 지역의 세력은 다른 집단으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신라와 당의 관련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그러나 신라의 강역도 불확실 하니,당연히 당의 강역도 불완전하게 유추될 수밖에 없다고구려백제 모두 마찬가지이다당나라의 전이나 후의 지나역사도 마찬가지이다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거란여진의 역사말갈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고려조선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정말 비극이다역사를 잃어 버린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그렇다고 손 놓고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통일 신라시절신라인인 장보고가 당나라에 가서 군관 벼슬을 하다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대사가 되었다는 기록과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의 황소의 난 때 토벌을 위한 격문을 썼다는 기록 등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서로 왕래하며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이는 서로 언어가 같거나같은 나라이면서 왕과 수도가 있는 조정이 있는 경기지역인 중화지역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다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또는 당나라가 내가 보는 중화지역페르시아 지역이 아닌 우즈벡카자흐스탄 지역이거나 타림분지지역천산산맥 주위 지역일 수도 있다고 본다그러나 지금의 지나지역은 신라고려조선의 지역은 될 수 있어도 중공이 주장하는 당나라의 지역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본다우즈벡의 사마르칸드에 있는 아프랍시궁의 벽화에서한 면에는 방문한 사신들 벽화가 있는데다른 한 면은 온통 당나라 왕과 신하들을 표시 하였다 한다수수께끼라고 그냥 넘어 가는 한국 TV이다. (본 블로그에 올린 유튜브, ‘아프랍시궁의 벽화’ 화면 참조이는 당의 위치를 가늠해주는 자료라 본다또한 당이 망한 후 후당을 세운 지역이 중앙아시아 우즈벡을 포함한 Sogdinia지역이며당나라 절도사 안록산이 당말기 안록산의 난을 일으킨 후 칭제한 지역 또한 이 지역으로 알고 있다요임금이 나라를 세운지역이 ‘당’지역이라 해서 요임금을 ‘당요’라 했다 한다즉 ‘당’이라는 고유명사는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고대사에서 ‘안’이라고 하는 지역이름과 같은 것이다신라의 황룡사 9층탑에 표시된 오월국은 907-978 기간의 나라로 나온다오월국도 당나라의 절도사가 세운 나라라 했다당이 망한 후인 오대십국 중 하나이므로 역시 이 지역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렇게 당의 지역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당을 통한 신라의 위치 파악은 매우
힘들다단지 당의 장수 설인귀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서신라백제고구려당이 중앙아시아에서 서로 싸웠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신라는 중앙아시아 근방이라는 정도의 유추뿐이다통일신라의 강역은 더욱 모호하다당과 싸워서백제고구려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보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사건 위주로 또는 인물위주의 역사에서이와 유사한 기록이 다른 나라 역사에 있는지 비교함으로써그 강역을 더듬어 가는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그래서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를 찾는 것은 통일 신라의 강역을 짐작하게 하는 큰 의미가 있다.




2) 발해 강역 추정의 의의 신라 강역 추정 보완


신라의 강역을 판단할 수 있는 또 한가지 방법이 대진국 발해의 강역을 찾는 것이다신라와 발해는 남북국 시대라 할 만큼 남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즉 발해의 강역이 찾아지면 그 남쪽에 통일신라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대진국 발해 관련 자료는 별로 없다김부식의 의도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는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다른 지역의 역사에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마이야왕조의 지역을 통일 신라로 보는 나는대진국 발해는 흑해위 지역을 점하는 하자르왕국으로 생각한다그러나 통일 신라가 비잔틴제국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포함한다고 한다면 그 북쪽인 대진국 발해는 훨씬 그 강역이 넓어야 한다발트해가 발해라는 주장도 있는 만큼발해인 대진국이 흑해 북쪽을 넘어 발트해 남쪽의 유럽지역을 포함할 수도 있다고 본다말갈이 발해의 주를 이룬다 했는데지금의 항가리는 말갈족인 마자르족으로 서양역사에서는 말하고 있다거란족은 독일의 게르만족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게르만족은 Alans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독일을 영어로 하면 Germany (게르만)이지만블어로는 Allmagne이기 때문이다. Alans은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있다가 흑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더욱 서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에거란족인 게르만족이 발트해 남쪽지역을 포함한 점을 고려할 때대진국 발해가 이 지역을 포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하자르왕국 서쪽에, 샤를마뉴 대제의 나라인 프랑크왕국이 지금의 프랑스이태리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고, Pannonian Avars, Kingdom of Bulgars, Magyars, Slavic Tribes 등이 있었다이 지역도 대진국 발해가 포함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샤를마뉴 대제는 라틴말을 아주 잘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또한 현재의 프랑스는 수탉을 국가 문양으로 하고 있다인도에서는 고구려 신라인들이 닭의 깃털을 모자에 끼운다고 하며, ‘계림’이란 국명에서 보듯이 닭이 들어간다고 하며닭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놀렸다 한다따라서 프랑스가 수탉을 국가 문양으로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고구려 방식의 축성방식인 ‘치’를 가진 성곽을 프랑스식 성곽이라고 서양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그만큼 사를마뉴 대제의 프랑크왕국이 대진국 발해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그리고 대진국 발해를 동양역사에서는 해동성국이라 했다바다의 동쪽이 되려면 프랑크왕국과 아바르족, 불가족, 마자르족, 슬라브족 그리고 하자르왕국을 모두 포함하여야 가능하다그래야 신라와 남북국시대를 이룬다대진국 발해에 대한 검토는 차후를 기약한다..







Europe in 814 AD (source : Wikipedia)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되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세는 라틴지역에서 태어난 왕으로 로마의 정통파 왕이라는 묘사가 있었다그래서 우리는 라틴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로마 교황청은 라틴어를 쓰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보고 있었다라틴계 유럽이 어디인가지중해 연안의 남유럽이다.로마의 영역이고통일 신라로 추정되는 우마이야왕조 영역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통일신라의 영토는 옛 로마의 지역을 포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당나라와 모호성이슬람국가라 하는 사라센제국과의 모호성이 엄존한다그래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장보고의 ‘청해진’을 찾아 보고자 하였다통일신라가 로마의 영역을 포함한다면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지중해에서 청해진을 찾게 되면 통일신라의 역사는 지중해를 아우르는 우마이야왕조의 사라센제국이 되는 것이다또한 대진국인 해동성국 발해는 그 북쪽에 존재하는 거대국이 되는 것이다.




2.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과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위치할 가능성이 있는 지중해의 섬들은 손꼽을 수 있다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이 있어야 하고상업적 무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섬이어야 한다이태리 남부의 시실리섬코르시카섬의 남쪽 사르데냐섬그리고 에게해의 크레타섬 등이 검토 대상이다코르시카섬은 샤르데냐섬 북쪽에 있어 적합지가 아니고샤르데냐섬과 코르시카 섬 사이는 항해하기 힘든 조류가 있다 한다키프러스 섬은 지중해에서 너무 우측으로 치우쳐 있다. 크레타섬은 김헌창의 난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제외하고, 시실리섬과 사르데냐섬을 청해진과 연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1) 시실리섬에 청해진이 있었는가?


장보고의 행적과 유사한 내용은 시실리섬의 역사에 나오는 (비잔틴의함대사령관 Euphemius으로 묘사되어 있. 따라서 먼저 장보고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먼저 살펴 보고, 이에 연관된 시실리아섬의 함대 사령관 Euphemius의 행적을 살피며 비교해 보고자 한다. 
 
먼저 장보고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뒤 흥덕왕에게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중국 해적들을 막겠다." 하니, 흥덕왕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직함까지 내려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상권을 장악했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대사건 김헌창의 난이 있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권과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828년) 통일신라 형편상 1만의 군사를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따라서 1만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해적을 때려잡긴 했지만 불법 군사 조직.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다. 아무튼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만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이 병력이 사병이라고 기록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 오히려 삼국유사(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미천한 신분이라며 반대했다는 기록만 있다. 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여 이 병력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 인정하는데,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이 천태종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보호를 부탁했으며, ....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기록했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다자이후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보고의 난과 최후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국도(國都)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번천문집》 권6, 장보고-정년전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년)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독립된 환경에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 끝에 밀려나 별 수 없이 청해진으로 도망 온 김우징을 돕기로 약속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장보고를 찾아온 것을 장보고가 환대하면서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보고는 '네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정년에게 5천 군사를 내주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 쳐들어갔다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치고, 이후 838년 12월 다시 출정해 달벌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 크게 승리해 절반 이상을 죽였고, 이 소식을 듣고 도망친 민애왕을 찾아내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올렸다. 

그렇게 옹립시킨 신무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이행되지 못했다. 이미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에게 사돈 결의를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다. 그런데 그 신무왕이 금방 죽어버렸으니 장보고는 후임인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한 것이다.

8년(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는 것을 거부한다.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미묘하게 다른데, 삼국사기상으로는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상으로는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고 했다고 한다. 즉 삼국유사의 장보고는 반란을 실제로 행동으로 일으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세력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조정은 염장을 장보고에 보냈고,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다.'고 전하게 했다. 장보고는 처음에는 '너희들 때문에 내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을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한 장보고를 죽였다고 한다.

장보고의 최후와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조에서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보고가 죽고 장보고의 부장 이창진(李昌珍)등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자 염장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고 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살짝 다른데, 상황을 보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보고 암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살짝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장보고의 신하와 세력은 염장이 대신 차지하려 한 듯 하다. 속일본후기의 해당 기록에서도 장보고의 부하가 일본에 가지고 간 물건들을 회수하려고 하는 상황을 다룬 기사다.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도 바로 없어지진 않았다...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없어지진 않았더라도 장보고 암살 당시 상당히 혼란에 빠졌던 것은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으며, 그 외에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년(서기 851년)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자료: 나무위키, 장보고)


 
시실리아섬의 역사에서 나오는 Euphemius의 반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나온다. 
 
 
 
 
In 826 Euphemiusthe Byzantine commander in Sicily, having apparently killed his wife, forced a nun to marry him. Emperor Michael II caught wind of the matter and ordered general Constantine to end the marriage and cut off Euphemius' headEuphemius rose up, killed Constantine, and then occupied Syracusehe in turn was defeated and driven out to North Africa. He offered the rule of Sicily to Ziyadat Allah, the Aghlabid Emir of Tunisia, in return for a position as a general and a place of safety. A Muslim army was then sent to the island consisting of ArabsBerbersCretans, and Persians...….
 
The occasion for the invasion of Sicily was provided by the rebellion of the tourmarches Euphemius, commander of the island's fleet. According to later and possibly fictional accounts, driven by lust for a nun, he had forced her to marry him. Her brothers protested to Emperor Michael II, and the Byzantine ruler ordered the island's strategosConstantine Soudas, to investigate the matter and if the charges were found true, to cut off Euphemius' nose as punishment. Thus it came that Euphemius, returning from a naval raid against the African coast, learned that he was to be arrested. Instead, he sailed for Syracuse, occupying the city, while the governor sought refuge in the interior. Euphemius soon managed to gain the support of a large part of the island's military leadership. Euphemius repulsed an attempt by Constantine to recover Syracuse, forcing the governor to flee to Catana. Euphemius' forces pursued and drove Constantine out of Catana, and eventually captured and executed him. 
 
Euphemius was then proclaimed emperor.The historian Alexander Vasiliev doubts the "romantic" story of the origin of Euphemius' revolt, and believes that the ambitious general simply used an opportune moment, when the central Byzantine government was weakened by the recent Revolt of Thomas the Slav, and by its preoccupation with the contemporary Muslim conquest of Crete, to seize power for himself. 
 
At this point, however, Euphemius was deserted by one of his closest and most powerful allies, a man known through Arab sources as "Balata" (according to Vasiliev probably a corruption of his title, while Treadgold holds that he was named Plato), and his cousin Michael, commander of PalermoThe two men denounced Euphemius' usurpation of the imperial title and marched against Syracuse, defeated Euphemius and took the city.
 
Like one of his predecessors, Elpidius, who had rebelled under Irene of Athens,  Euphemius resolved to seek refuge among the Empire's enemies and with a few supporters sailed to Ifriqiya. There he sent a delegation to the Aghlabid court, which pleaded with the Aghlabid emir Ziyadat Allah for an army to help Euphemius conquer Sicily, after which he would pay the Aghlabids an annual tribute. This offer came as a great opportunity for the Aghlabids, who faced long-simmering ethnic tensions between Arab settlers and Berbers, dissension and rebellions within the Arab ruling elite (the jund), and criticism for their preoccupation with worldly concerns, their "un-Islamic" system of taxation and their luxurious lifestyle from the jurists of the Malikiteschool. Indeed, at the time of Euphemius' arrival, Ziyadat Allah had just suppressed a dangerous three-year revolt of the jund under Mansur al-Tunbudhi. As Alex Metcalfe writes, "by undertaking a jihad to expand the frontiers of Islam at the expense of the infidels by conquest ? the first major undertaking since the invasion of the Iberian Peninsula from 711 ? they could silence the criticism of the jurists. At the same time, they could redirect the destructive energies of a restless jundacross the Ifriqiyan?Sicilian channel to secure new sources of manpower and wealth". 
 
Ziyadat Allah's council was divided over the issue, but in the end the exhortations of the respected qadi of KairouanAsad ibn al-Furat, who used quotations from the Quran to support his case, swayed them. Asad was placed at the head of the expedition even while retaining his office of qadi, normally incompatible with a military post. The Muslim expeditionary forces is said to have consisted of ten thousand foot soldiers and seven hundred cavalry, mostly Ifriqiyan Arabs and Berbers, but possibly also some Khurasanis. The fleet comprised seventy or a hundred ships, to which were added Euphemius' own vessels.

 

Initial operations and conquest of Palermo

Muslim landing and siege of Syracuse, 827-828

 
On 14 June 827, the allied fleets sailed from the Bay of Sousse, and after three days they reached Mazara in southwestern Sicily, where they landed. There they were met with soldiers loyal to Euphemius, but the alliance soon began to show rifts: a Muslim detachment mistook some of Euphemius' partisans for loyalist troops, and a skirmish ensued. Although Euphemius' troops were ordered to place a twig on their helmets as a distinctive mark, Asad announced his intention to wage the campaign without them. Soon after that, Balata, who seems to have taken over the functions, if not the title, of the imperial strategos on the island, appeared nearby with a Byzantine force. The two armies clashed on a plain south-east of Mazara, where Asad's men, after exhortations by their leader, gained a victory. Balata retreated first to Enna and from there to Calabria on the Italian mainland, where he may have hoped to gather more troops. Instead, he died there shortly after his arrival.
 
Asad then left Mazara under Abu Zaki al-Kinani, and turned to Syracuse: the Muslim army advanced along the southern shore towards the island's capital, but at Qalat al-Qurrat (possibly ancient Acrae), it was met by an embassy from the city which offered tribute if the Muslims halted their advance. The proposal was probably designed to buy time for the city to better prepare itself for a siege, but Asad, either persuaded by the emissaries' assurances or needing to rest his army, halted his advance for a few days. At the same time, Euphemius began to regret his alliance with the Aghlabids, and opened secret contacts with the imperials, urging them to resist the Arabs.
The Muslims recommenced their advance soon after, and laid siege to the city. Byzantium, which at the same time was forced to face a threat much closer to home at Crete, was unable to send much aid to the beleaguered island, while the Muslims received reinforcements from Africa. Giustiniano Participazio, the dux of the imperial protectorate of Venice, came to the city's aid, but was not able to raise the siege. The besiegers however suffered from lack of supplies as well as the outbreak of a disease in spring 828, which cost Asad his life. He was replaced by Muhammad ibn Abu'l-Jawari. When a Byzantine fleet arrived, the Arabs raised the siege and tried to sail back to Africa, but were hindered by the Byzantine ships. Thwarted, the Muslim army burned its ships and retreated over land to the castle of Mineo, which surrendered to them after three days.


First siege of Enna and the Byzantine counterattack, 828-829

 
 
View of Enna (Castrogiovanni)
 
Despite his contacts with the imperials, Euphemius was now willing to serve as their guide, evidently hoping that the Muslims, humbled by their failure and without the strong will of Asad to guide them, could now be made to serve his purposes. After Mineo surrendered, the Muslim army divided in two: one part took Agrigento in the west, while the other, along with Euphemius, attacked Enna. The garrison of Enna began negotiations, offering to acknowledge Euphemius' authority, but when Euphemius with a small escort met with their emissaries, he was murdered.
It is unknown what happened to Euphemius' supporters after his death, whether they dispersed or continued fighting alongside the Muslims. 
 
In spring 829, Michael II sent a new fleet to Sicily under Theodotus, who was well acquainted with the island, having already served as its strategos in the past. After landing, Theodotus marched his army to Enna, where the Arabs were continuing the siege. He was defeated in the subsequent battle, but was able to find refuge in the fortress with most of his men. The Muslims now became so confident of victory that they struck their first coins on the island, in the name of Ziyadat Allah and Muhammad ibn Abu'l-Jawari, who however died a short while after and was replaced by Zubayr ibn Gawth. Shortly after that, Theodotus managed to reverse the situation: he led a sally that routed a Muslim raiding party and then defeated the main Muslim army on the next day, killing 1,000 men and pursuing the rest up to the Muslims' fortified encampment, which he placed under siege. The Muslims tried to break out in a night sortie, but Theodotus was expecting such a move and routed them in an ambush.
 
The remains of the Muslim army once again sought refuge in Mineo, where Theodotus blockaded them and soon reduced them to the point of eating their horses and even dogs. When they heard of this reversal, the Arab garrison of Agrigento abandoned the city and retreated to Mazara. Thus, by the autumn of 829, Sicily had almost been cleared of the Muslim invaders.

 

[출처] <펌> Muslim conquest of Sicily- Wikipedia|작성자 죽엽






상기 글에서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지역의 강역이 왜의 세력이 아닌가 한다장보고 당시 일본(=)의 승려인 ‘엔린’이 왜구(=해적)의 공격을 피해 중국 (=중화지역, 당?)으로 가기 위해 청해진 선단을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보고와 일본 (=)와의 협력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시실리섬은 언어적으로도 시실리어라는 로마어가 존재하며최근 고인돌도 발견되었다 한다.
Salsu라는 이름의 강도 존재한다도자기 유물이 존재하는 것도 장보고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전략적 요충지이며농산물이 풍요로운 땅이다
 
Recent discoveries of dolmens on the island (dating to the second half of the third millennium BC) seem to offer new insights into the culture of primitive Sicily.
[출처] <펌> Sicily - Wikipedia |작성자 죽엽
The River Salso(SicilianSalsu), also known as the Imera Meridional (Greek: ?μ?ρα?; Latin Himera), is a river of Sicily. It rises in the Madonie Mountains (Latin: Nebrodes Mons; Sicilian: Munti Madunii) and, traversing the provinces ofEnna and Caltanissetta, flows into the Mediterranean at the western end of the Gulf of Gela at the seaport of Licata, in the Province of Agrigento
As John Bagnell Bury writes, "A fruitful land and a desirable possession in itself, Sicily's central position between the two basins of the Mediterranean rendered it an object of supreme importance to any Eastern sea-power


그래서 상선이 많이 왕래했을 것이고이들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행위가 빈번 했을 것이다전사 연구하는 유튜브 방송 (아래 참조)에서 오스만터어키의 ‘레판토해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당시 지중해에는 노젓는 노예가 많이 필요해서해적행위로 물건도 탈취하고 사람들은 노젓는 노예로 팔았다는 것이다기독교인은 무슬림인들을 노예로 팔고무슬림은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았다고 한다그래서 장보고 당시특히 진골 귀족들 사이 왕위쟁탈전으로 신라가 어지러울 때많은 신라인들이 해적의 습격을 받아 노예로 팔리는 일이 많았었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을 세웠다 했는데시실리섬은 827-902년 무슬림 지배, 902-965 비잔틴지배, 965-1000 무슬림 지배로 나타난다장보고는 846년 아군으로 접근하는 ‘염장’에게 암살되었다 하는데시실리섬의 Euphemius장군은 846년 보다 훨씬 이른 연대에반란후 칭제한 이후 비잔틴제국과 휴전을 위해 만나러 가는 길에서 비잔틴제국의 사람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시실리섬의 역사가 이슬람의 지배시기가 아니라도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사실 무슬림이란 단어는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총칭한다고 언급된 것을 보면 이슬람교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그러나 사독제 등 종교적 종묘 행사의 여부는 특별히 나타나지 않는다




2) 사르데냐섬에 청해진이 있었는가?


사르데냐섬의 역사에서는 Sardo 등의 어휘와 섬에 4개국이 있었다는 기록종묘행사와 같은 종교적 행사를 했다는 Nuraghe 시설이 7000개나 되는 점이 사독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역사적 군사요충지로서 82개 성이 있으며상업적으로도 주요 교역지였다장보고’의 친구 ‘정연’이 머물렀다는 ‘사’지역이 Sar라는 섬의 이름과 연관된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사르데냐섬이 장보고의 친구 정연이 머물렀다는 '사' 지역이 아닌가 한다. 아래 글에서 이름의 유래를 보자.
장보고가 재상이 된 후로는 정연이 청해진에 있었다 했다.


"The name Sardinia is from the pre-Roman noun *s(a)rd-, later romanised as sardus(feminine sarda). It makes its first appearance on the Nora Stone, where the word ?rdntestifies to the name's existence when the Phoenician merchants first arrived.According to Timaeus, one of Plato's dialogues, Sardinia (referred to by most ancient Greek authors as "Sardo", Σαρδ?) and its people as well might have been named after a legendary woman going by Sardo (Ancient GreekΣαρδ?), born in Sardis (Σ?ρδει?), capital of the ancient Kingdom of Lydia. There has also been speculation that identifies the ancient Nuragic Sards with the Sherden, one of the Sea Peoples. It is suggested that the name had a religious connotation from its use also as the adjective for the ancient Sardinian mythological hero-god Sardus Pater("Sardinian Father" or "Father of the Sardinians"), as well as being the stem of the adjective "sardonic". In Classical antiquity, Sardinia was called a number of names besides Sardo (Σαρδ?) or Sardinia, like Ichnusa (the Latinised form of Ancient Greek?χνο?σα),  Sandaliotis (Ancient GreekΣανδαλι?τι?) and Argirofleps (Ancient GreekΑργυρ??λεψ)."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Sardinia |작성자 죽엽


사르데냐섬의 중심지인 Cargliari (Caralis, Karaly)는 청해진의 군사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아래 글에서 8세기 아랍 해적들이 이지역을 공격할 때 이 도시가 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하며, 오래 전부터 항구로 쓰였으며, 대형배가 정박할 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Karaly (Punic?????????krly) was established around the 8th/7th century BC as one of a string of Phoenician colonies in Sardinia, including Tharros. Its founding is linked to its position along communication routes with Africa as well as to its excellent port. The Phoenician settlement was located in the Stagno di Santa Gilla, west of the present centre of Cagliari. This was also the site of the Roman Portus Scipio, and when Arab pirates raided the area in the 8th century it became the refuge for people fleeing from the city. Other Phoenician settlements have been found at Cape Sant'Elia. ....
Claudian describes the ancient city of Karalis as extending to a considerable length towards the promontory or headland, the projection of which sheltered its portThe port affords good anchorage for large vessels, but besides this, which is only a well-sheltered standby, there is a large salt-water lake or lagoon, called the Stagno di Cagliari, adjoining the city and communicating by a narrow channel with the bay, which appears from Claudian to have been used in ancient times as an inner harbor or basin. The promontory adjoining the city is evidently that noticed by Ptolemy (Κ?ραλι? π?λι? κα? ?κρα), but the Caralitanum Promontorium of Pliny can be no other than the headland, now called Capo Carbonara, which forms the eastern boundary of the Gulf of Cagliari and the southeast point of the whole island. Immediately off it lay the little island of Ficaria,[29] now called the Isola dei Cavoli ("Cabbage Island" in Italian, Isula de is Cavurus "Crab Island" in Sardinian)." (source : Wikipedia)

 
또한 사르데냐섬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구리와 납의 수출지였다고 언급된다. 신라는 구리를 수출했다고 역사에 나온다고 한다. 
"Sardinia was at the time at the centre of several commercial routes and it was an important provider of raw materials such as copper and lead, which were pivotal for the manufacture of the time. By controlling the extraction of these raw materials and by commercing them with other countries, the Nuragic civilisation was able to accumulate wealth and reach a level of sophistication that is not only reflected in the complexity of its surviving buildings, but also in its artworks (e.g. the votive bronze statuettes found across Sardinia or the statues of Mont'e Prama)."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Sardinia|작성자 죽엽


청해진에서는 종묘제인 사독제를 지냈다 한다. 
아래에서 묘사되는 사르데냐섬의 Nuragic Civilization이 이와 연관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동시에 사독제의 '사독'의 움운이 "Sardo"의 음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From about 1500 BC onwards, villages were built around round tower-fortresses called nuraghe (singular form "Nuraghe", usually pluralized in English as "Nuraghes"). These towers were often reinforced and enlarged with battlements. Tribal boundaries were guarded by smaller lookout Nuraghes erected on strategic hills commanding a view of other territories. 


Today, some 7,000 Nuraghes dot the Sardinian landscape. While initially these Nuraghes had a relatively simple structure, with time they became extremely complex and monumental (see for example Nuraghe Santu AntineSu Nuraxi, or Nuraghe Arrubiu).
[출처] <펌> Sardinia |작성자 죽엽 



 
Nuraghe Santu Antine in Torralba, Sardinia Island (source : Wikipedia)
 
Su Nuraxi of Barumini, Sardinia Island, included in the UNESCO list of World Heritage Sites since 1997
 
(source : Wikipedia)
 


 
Nuraghe 관련하여 아래 설명을 보면 종묘행사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Religion had a strong role in Nuragic society, which has led scholars to the hypothesis that the Nuragic civilization was a theocracy
 
Some Nuraghe bronzes clearly portray the figures of chief-kings, recognizable by their wearing a cloak and carrying a staff with bosses. Also depicted are other classes, including miners, artisans, musicians, wrestlers (the latter similar to those of the Minoan civilizations) and many fighting men, which has led scholars to think of a warlike society, with precise military divisions (archersinfantrymen). Different uniforms could belong to different cantons or clans, or to different military units.The priestly role may have been fulfilled by women. Some small bronzes also give clues about Nuragic personal care and fashion. Women generally had long hair; men sported two long braids on each side of the face, while their head hair was cut very short or else covered by a leather cap."(source : Wikipedia)




이 섬에 대한 비잔틴지배가 끝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650년이후해적들의 약탈과 습격이 심했다 한다.그래서 705년이후 자체 군사적 방어를 강화했다는 언급이 있다. 952년이후에는 더이상 비잔틴소속의 땅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우리 역사에서는 장보고의 청해진은 장보고의 반란이후 AD 851년 폐쇄되고 그 주민들을 벽골제로 철수했다. 
 
 
"The dates and circumstances of the end of Byzantine rule in Sardinia are not known. Direct central control was maintained at least through c. 650, after which local legates were empowered in the face of the rebellion of Gregory the PatricianExarch of Africa and the first invasion of the Muslim conquest of the MaghrebThere is some evidence that senior Byzantine administration in the Exarchate of Africa retreated to Caralis following the final fall of Carthage to the Arabs in 697. 
The loss of imperial control in Africa led to escalating raids by Moors and Berbers on the island, the first of which is documented in 705, forcing increased military self-reliance in the province.Communication with the central government became daunting if not impossible during and after the Muslim conquest of Sicily between 827 and 902."(source : Wikipedia)
[출처] <펌> Sardinia|작성자 죽엽

"By the time of De Administrando Imperio, completed in 952, the Byzantine authorities no longer listed Sardinia as an imperial province, suggesting they considered it lost." (source : Wikipedia)
[출처] <펌> Sardinia|작성자 죽엽




국기 문양에는 신라인 또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또는 왜인으로 볼 수 있는얼굴이 까만 머리에 흰띠를 두른 문양이 있다. "Sea Peoples"이라 하는 이들의 정체에 대한 추가연구가 필요하다. 코르시카섬도 같은 문양이다언어는 사르디니아어로서 로마어 계통이고 라틴어와도 가깝다 한다역시 도자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한다이 섬의 역사에는 공식적으로 이슬람이 지배했다는 역사는 없다
 
 

Flag of Sardinia (source : Wikipedia)





Sardinia Warrior Figure (source : Wikipedia)







Model of Nuragic ship from BulteiMuseo archeologico nazionale (Cagliari)
(source : Wikipedia)
 





Nuragic vase from Sardara (source: Wikipedia)
 




"In the ceramics, the skill and taste of the Sardinian artisans are manifested mainly in decorating the surfaces of vessels, certainly used for ritual purposes in the course of complex ceremonies, perhaps in some cases even to be crushed at the end of the rite, as the jugs found in the bottom of the sacred wells.
 
Ceramics also display geometric patterns in the lamps, in the pear-shaped vessels (exclusive of Sardinia) and the askos. Imported (e.g. Mycenaeans) and local forms were found in several sites all over the island. Also found in the Italian peninsula, Sicily, in Spain and in Crete everything points to a Sardinia very well integrated in the ancient trade of the Mediterranean sea. "
(source : Wikipedia, Nuragic Civilization)


우리 역사에서는 장보고의 청해진은 장보고의 반란이후 AD 851년 폐쇄되고 그 주민들을 벽골제로 철수했다는 기록과 종묘 행사인 사독제를 지냈다는 기록도자기 제조업의 존재그리고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라는 기록 등이 있는데사르데냐섬은 이러한 측면에서 청해진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

-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에서 청해진은 
신라에서 사독제(종묘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을 다시보면
청해진은 군사 1만명이 자급자족하면서 지킨 넓은 땅이었으며

후에 장보고가 재상이 되면서
당에서 신라땅 "사, 연수"로 돌아온 친구 "정연"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지키게한 곳이 청해진이었다 




장보고의 파트너 정연이 ‘사’, ‘연수’라는 2개지역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청해진이 시실리섬사르데냐섬 2개지역에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3. 비잔틴제국과 통일 신라


Euphemius, Thomas the Slav (=크레타섬에서 반란을 일으킨 commander, 김헌창의 난의 김헌창으로 판단됨) 공히 비잔틴제국의 military commander로 위키피디어에서는 말하고 있다즉 신라의 백제통합시기를 비잔틴제국의 시기로 말하고 있다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백제이고 비잔틴제국이 신라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으나두 여왕의 존재비담의 난골품제인 신분제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조건 등을 고려하면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인 것은 확실하다로마사를 좋게 남기려고 이러한 왜곡이 있었다고 생각한다즉 650년이후 비잔틴역사는 신라역사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 경우 비잔틴과 무슬림 우마이야왕조와의 싸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신라의 내부 다툼일 수 있다진골이 왕이 될 수 있는 무열왕/문무왕이후, 통일 신라시대에는 실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진골간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있었다. 비잔틴제국의 당시 모습과 유사하다. 


러시아의 포멘코는 로마의 역사가 아시아의 어느 한 나라의 역사를 모방한 조작이라고 주장했다로마시절 동전의 조작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있었다고 서양 역사학자는 지적하고 있다그러나 포멘코가 주장하듯 모든 세세한 자료를 모두 창작 조작할 수는 없다고 본다일부 미화와 각색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하듯이 말이다. 그리나 역사적 유물이 발견되며 연구가 계속되므로 모두 조작이라는 주장은 무리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지중해 사르데냐섬, 시실리섬에 있었다는 것은,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이고 백제가 로마라는 나의 주장을 믿받침하게 된다. 650년이후 비잔틴제국은 통일신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으로 증명된다. 아랍세력으로 묘사되는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국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세계삼한역사연구 블로그 한부울님은 칼리프국이 신라와 유사하다고 했다. 어느 자료를 보니 신라와 당이 22번의 해전을 가졌는데, 모두 신라가 승리했다는 글이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추가적인 연구를 해봐야 당과 신라의 정체를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아랍세력으로 묘사되는 이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