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 (통일신라)의 강역을 살펴보는 방법의 하나로 장보고의 청해진을 살펴 보았다. (본 블로그의 글 "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참조)
이번에는 신라 하대의 김헌창의 난을 살펴 봄으로써 신라 하대의 강역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우선 김헌창의 난 (822-825)에 대해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김헌창은 무열왕, 문무왕의 후예로서 백제의 땅이었던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이라 하고 칭제하였다 한다.
"신라 헌덕왕 14년(822년), 웅천주의 지방관으로 부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 김헌창이 나라 이름을 장안으로 하고 연호를 경운으로 정해 일으킨 반란이다. 나당전쟁 이후로 큰 전란이 별로 없었던 통일신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내전이었다.
혜공왕 16년(780년) 2월,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자(김지정의 난) 같은해 4월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등이 힘을 합쳐 난을 진압하고, 나중에 사망한 혜공왕을 이어 관군 지휘관이자 내물왕의 10대손인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태종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단절되며, 이때부터 신라 중대가 끝나고 하대로 본다.
785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라 화백회의 전통에 따라 차기 왕을 가리는 귀족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金周元, 태종 무열왕 5대 손)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회의 당시 김주원은 서라벌 북쪽에 거주했던 관계로 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알천(오늘날의 북천)을 건너지 못해 궁궐에 당도하지 못하였고, 귀족들은 때마침 내린 비를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 여겨 선덕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당시 상대등 김경신(내물왕 12대 손)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38대 원성왕이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그러나 강물에 관련된 이야기는 왕위쟁탈전에서 김경신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뒤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경신이 사람들을 위협하여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원성왕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지 서라벌 정계를 떠나 본인의 장원(莊園)과 친족 세력이 있는 명주지방으로 물러나게 되고 원성왕 2년(786년)에는 원성왕이 그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였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원성왕이 죽고 손자인 김준옹(金俊邕)이 소성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년 반만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중희(金重熙)가 애장왕으로 뒤를 이었으나 어린 왕의 섭정이자 숙부인 김언승(金彦昇)과 이찬 김제옹(혹은 아우 김수종)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한 후 김언승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809년) 이가 곧 신라 41대 헌덕왕이다.
- 김헌창 난을 일으키다
한편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도 중앙 정계에 남아 활약했다. 무열왕계 귀족들이 비록 왕위는 놓쳤다지만 신라의 영웅이던 무열왕과 문무왕의 적통으로써 여전히 무시못할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4] 무열왕계의 대표 정치인이 된 김헌창은 애장왕 8년(807년)에는 집사부 시중(오늘날의 국무총리급)으로 임명되는 등 당시 상대등이였던 김언승 다음가는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809년, 김언승이 조카를 죽이고 헌덕왕으로 즉위하자 중앙 요직은 헌덕왕의 친인척에게 완전히 장악당했으며 정계에서 밀려난 김헌창은 무진주 도독, 청주 도독, 웅천주 도독 같은 지방직을 전전하게 되었다. 김헌창은 이에 반감을 느꼈고 822년 3월,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웅천주 도독 헌창이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였으나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김주원이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지 무려 37년(!) 후로 원성왕 이후 3번이나 왕이 바뀐 뒤니 아버지의 왕위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내물왕계로 왕위가 넘어간 뒤에도 그 아래에서 한동안 시중 등 중앙 요직에서 정치를 했으니 적극적으로 내물왕계 반대활동을 했다기에는 모양이 살지 않는다. 그리고 정작 김헌창 본인 또한 김주원이 설사 왕이 된다 하여도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으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적다.
그러므로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을 난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일단은 명목상의 명분으로, 내물왕계 왕위 계승의 비합법성을 강조하며 무열왕계 지지 귀족을 규합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정하니, 신라 9주 5소경중 5주(웅천, 무진, 완산, 청주, 사벌)의 도독, 3경(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사신들,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김헌창의 협박에 호응해 반란에 가담했다. 참고로 난의 근거지인 웅천주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이기도 하다.
특이점은 본인이 신라 왕족 계열의 인물임에도 신라의 국왕을 제거하고 직접 신라 국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옛 백제 지역에서 자신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 목표였고 나라 이름을 장안국이라 하였다. 당시 김헌창이 지방관을 부임하면서 옛 백제 백성들의 민심을 알았고 이를 역이용하여 분리주의 성격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도 볼 수 있어 이로 인해서 장안국을 백제부흥운동의 변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전개 과정
822년 3월, 헌창은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4개 주 도독(+자신의 관할인 웅천주 1주)과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사신,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해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그러나 반란 초기에 청주도독 향영(向營)이 배신하여 추화군으로 달아나 반란을 알렸고, 신라 북쪽의 한산주, 우두주, 패강진,북원경이나 수도 서라벌과 가장 가까운 삽량주 등은 김헌창의 반란을 미리 알았고 가담하지 않고 스스로 성을 수비했다.
18일에 완산주 장사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라벌로 도망와 반란을 보고했다.헌덕왕은 곧바로 최웅을 급찬 겸 속함군 태수직을, 영충을 급찬으로 임명하고 장군 8명을 뽑아 서라벌의8방을 지키게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을 선발로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 등이 차례로 군사를 출발하면서 이찬 김균정, 잡찬 김웅원, 대아찬 김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각간 충공, 잡찬 윤응이 문화를 지키고 화랑 명기, 안락 등이 여러 낭도를 이끌고 신라에서 파견한 토벌군에 종군을 요청해 명기는 황산,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향했다.
김헌창의 군대는 장수를 보내 주요 도로를 미리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장안국의 군사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둬 장웅이 도동 고개에서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위공, 제릉이 장웅과 연합해 삼년산성을 함락하자 속리산으로 진군해 격파했으며, 김균정이 성산에서 승리를 거두고 신라의 여러 군대가 김헌창의 본거지격인 웅진에 집결, 크게 싸우면서 장안국의 병사를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김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해 웅진성에 들어가서 항거하다가 신라군이 성을 포위해 10일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묻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자료 : 김헌창의 난, 나무위키)
즉 김헌창의 난은 신라하대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반란으로 신라 하대의 9주 5소경 중 5주 3소경이 반란에 참여하였다.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웅천주 의 5개주가 동조했는데, 주로 예전의 백제 지역이라 했다. 북쪽의 한산주, 우두주, 서라벌과 가까운 삽량주 등은 가담하지 않았다 한다. 김헌창이 칭제하고 '장안국'이라 했는데, '장안'의 위치를 가늠해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지역은 후일 후백제의 견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이라 하는 점을 부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라 하대의 왕위쟁탈전과 같은 모습은 비잔틴제국의 동시대에도 많이 거론된다. 장보고의 난과 유사한 Euphemeus revolt도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유사한 반란의 모습 중에 비잔티제국의 크레타섬에서 같은 시기에 military commander인 Thomas the Slav(생몰: 760-823, 군역복무:803-820)의 revolt(821-823)가 김헌창의 난과 유사하다.
" Thomas the Slav (Greek: Θωμᾶς ὁ Σλάβος, romanized: Thōmas ho Slavos, c. 760 –October 823) was a 9th-century Byzantine military commander, most notable for leading a wide-scale revolt in 821–23 against Emperor Michael II the Amorian (r. 820–829).
An army officer of Slavic origin from the Pontus region (now north-eastern Turkey), Thomas rose to prominence, along with the future emperors Michael II and Leo V the Armenian (r. 813–820), under the protection of general Bardanes Tourkos. After Bardanes' failed rebellion in 803, Thomas fell into obscurity until Leo V's rise to the throne, when Thomas was raised to a senior military command in central Asia Minor. After the murder of Leo and usurpation of the throne by Michael the Amorian, Thomas revolted, claiming the throne for himself. Thomas quickly secured support from most of the themes (provinces) and troops in Asia Minor, defeated Michael's initial counter-attack and concluded an alliance with the Abbasid Caliphate. After winning over the maritime themes and their ships as well, he crossed with his army to Europe and laid siege to Constantinople. The imperial capital withstood Thomas's attacks by land and sea, while Michael II called for help from the Bulgarian ruler khan Omurtag. Omurtag attacked Thomas's army, but although repelled, the Bulgarians inflicted heavy casualties on Thomas's men, who broke and fled when Michael took to the field a few months later. Thomas and his supporters sought refuge in Arcadiopolis, where he was soon blockaded by Michael's troops. In the end, Thomas's supporters surrendered him in exchange for a pardon, and he was executed.
Thomas's rebellion was one of the largest in the Byzantine Empire's history, but its precise circumstances are unclear due to competing historical narratives, which have come to include claims fabricated by Michael to blacken his opponent's name. Consequently, various motives and driving forces have been attributed to Thomas and his followers. As summarized by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Thomas's revolt has been variously attributed to a reaction against Iconoclasm, a social revolution and popular uprising, a revolt by the Empire's non-Greek ethnic groups, Thomas's personal ambitions, and his desire to avenge Leo V." Its effects on the military position of the Empire, particularly vis-à-vis the Arabs, are also disputed.
[출처]<펌> Thomas the Slav |작성자 죽엽
- Outbreak and spread of the revolt in Asia Minor
Map of the themes of Asia Minor (modern Anatolia) and of Thrace c. 842
As commander of the Foederati, Thomas was based at Amorion, the capital of the Anatolic Theme. Although junior to the theme's strategos (military governor), his proclamation received widespread support throughout Asia Minor. Within a short time, all the Asian themes supported Thomas, except for the Opsician Themeunder the patrician Katakylas, a nephew of Michael II, and the Armeniac Theme, under its strategos, Olbianos. The Thracesian Theme wavered between the two rivals, but finally threw its support behind Thomas. More than two-thirds of the empire's Asian army eventually aligned with Thomas, while the defection of the provincial tax officials provided him with much-needed revenue.
[출처]<펌> Thomas the Slav |작성자 죽엽
(자료 : Wikipedia)
Byzantine Empire in 802 AD
Thomas the Slav의 난과 김헌창의 난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반란의 시점이 821-825 기간으로 거의 같은 시기이다.
2) 신라나 비잔틴제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반란이었다.
김헌창의 난은 9주 5소경 중 5주 3소경이 지지하였었다.
Thomas the Slav는 소아시아의 2/3 지역이 지지했다.
3)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고, Thomas the Slav는
Arcadiopolis를 마지막 피난처로 찾았다.
4) 신라나 비잔틴제국이나 당시 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치열했다.
귀족들은 사치가 심했고 녹읍제로 세금징수가 3배로 늘어 농민들은 피폐한 생활을
하고 있어 민심의 이반이 심했다. 신라나 비잔틴제국에서 반란에 많은 지지가 있었
던 이유이기도 하다. (위키 자료에서는 Thomas the Slav 반란이 왜 지지가 컸는
지 불명확하다고 했다. 이것 역시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는 의도로 보인다.)
만약에 Thomas the Slav가 김헌창과 동일 인물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1. 김헌창의 마지막 거점인 웅진과 웅진성이 Thomas the Slav의 마지막 거점
Arcadiopolis가 된다.
우선 웅진과 웅천주의 위치를 점검해 보자.
신라의 김헌창은 마지막으로 웅진의 웅진성에서 버티다가 끝을 맺는다.
반면 Byzantine Empire의 Thomas the Slav는 마지막으로 Arcadiopolis로 피난처를 찾는다.
그래서 Arcadiopolis가 웅진성이 아닌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자.
Wikipedia 자료에서는 Arcadiopolis가 Constantinople 주위로 말하고 있다. '웅진'이 군사적인 항구도시라는 것은 끝이 '진'이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constantinople이 웅진이 될 수도 있다. 비록 위례성 백제가 망한 475년이후의 웅진백제 이전에 constantinople이 있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본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위키자료에서 이곳은 로마의 피난처가 되곤 했다는 설명이 눈에 띤다.
"Its importance would take on new meaning with Alaric’s invasion of Rome in 410 CE and the eventual fall of the city to Odoacer in 476 CE. During the Middle Ages, the city would become a refuge for ancient Greek and Roman texts."
(source : "Constantinople", Ancient History Encyclopedia, by Donald L. Wasson )
(여기서 Alaric은 광개토대왕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우리는 비잔틴제국의 475년이전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백제가 고구려처럼 좌현왕 우현왕 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콘스탄티노플이 생긴 324년이후부터인지 아님 왕자가 파견된 왜와 관련된 다른 설명이 필요한지 말이다.
그런데 웅진을 지나는 것으로 판단되는 '웅진하' 라는 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글이 있다.
■ 백제 하천 : 웅수, 여백천, 웅진하, 기문하
熊水 西流侶百川而濟騖
括地志曰 熊津河源出國東界 西南流經國北百里 又西流入海 廣處三百步 其水至清
又有基汶河源出其國南山 東南流入大海
웅수(熊水)는 서쪽으로 흐르는데 여백천(侶百川)과 함께 흘러간다.
괄지지(括地志)에서 이르길 웅진하(熊津河)는 백제국 동쪽 변경에서 시작된다.
서남으로 흘러가는데 백제국 북쪽 변경 100리에 있다. 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폭이 넓은 곳은 3백보이다...
또 기문하(基汶河)가 백제국 남산에서 시작된다. 동남으로 흘러 대해로 들어간다.
[출처] 고구려 대요수, 압록수 와 백제 웅진하 하천비교|작성자 방랑자
즉 '웅진하'는 백제국 동쪽 변경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했다. 따라서 Constantinople은 이러한 서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웅진이 될 수 없다.
660년까지의 비잔틴제국을 백제로 판단하는 필자는 위의 글에서 '웅진하'는 아나톨리아 지역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웅진하일 것이며, 그 바닷가에 웅진성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비잔틴제국의 provinces(Themes) 지도에서 보면 Thracesian Theme의 지역을 지나는 강일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Thomas the Slav가 피난처로 삼은 'Arcadiopolis in Asia'를 검색하면 constantinople 근처지역이 아닌 현재 터어키의 Izmir (Tire 시) 시로 나타나며 Gediz river(길이 416 km) 하류지점의 도시이다. 바로 밑에 Buyuk Menderes River(길이 548 km)가 에게해로 흐르는 아나톨리아 제일 큰 강가에는 고대도시 Miletus가 있다. 즉 Tire city 또는 Miletus city가 웅진이 될 수 있다. 성곽이 있고 왕궁이 있으면 유사하다. 두 곳 모두 고대로부터의 역사적 도시인데, 이상하게 이시기의 중세에는 그 기록이 거의 없다. 뭔가 일부러 감춘 느낌이다. 따라서 웅진성이 이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Izmir city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Izmir 시는 Smyrna 라는 고대명을 가지고 있는데, 성곽을 가지고 있으며, 아래와 같은 설명 즉 동로마제국의 중요 religious center가 되었다가 이후 쇠퇴했다고 나온다.
" After the Roman Empire was divided into two distinct entities, Smyrna became a territory of the Eastern Roman Empire. The city kept its status as a notable religious center in the early times of the Byzantine Empire. However, the city did decrease in size greatly during Late Antiquity and the Early Middle Ages, never returning to the Roman levels of prosperity."
(source : Wikipedia, "Izmir")
Entry of the castle walls in Kadifekale (ancient Pagos)
2. 김헌창의 반란에 가담한 주와 그러지 않은 주와 Thomas the Slav와 관련된 Theme을 비교하면 신라의 각 주에 대한 위치가 짐작된다.
Armeniac Theme 은 신라의 북쪽에 있는 한산주가 된다.
웅진성이 있는 웅천주는 Thracesian Theme이 된다.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는 Anatolic theme, Bucellarians Theme, Optimatoi theme, Cibyrrhaeots Theme 등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는 어렵다. 단지 아래에서 보듯이 이 지역에서 우리말과 유사한 지명이 많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2-1. 지중해로 흐르는 Goksu (곡수) river (터키말로 blue water (청해?) 의미라함)에는 Akgol (악골) lake를 포함하고 있으며, Geyik (계익)mountains 북쪽에서 기원한다.
2-2. 흑해로 흐르는 Sakarya River의 지류중에 Porsuk(포석) River가 있다. 앙카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신라 경애왕과 관련 있는 포석정과 관련있지 않나 생각된다.
Map of Sakarya River in Anatolia, Turkey
2-3. 남쪽 지중해로 흐르는 가장 긴 강 Seyhan (세한) river (560 km)는 고대에는 Sarus, Saros (사로)로 불렸다 한다.
2-4. Aksu (악수) is one of the main water streams of Giresun (지리산) Province in the eastern Black Sea Region of Turkey. Its name is Turkish for "white water (백강?)".
Aksu Deresi rises in Karagöl (가라골), a rural highland area located very near to provincial borders of Giresun, Ordu and Sivas provinces.
Karagöl is a chain of mountains which is part of the Giresun mountains (지리산), in the south of Dereli district of Giresun, and its summit is 3107 meters high. There is a crater lake on its summit, at 3,107 metres (10,194 ft) above sea level. The Aksu creek flows down to the Black Sea passing Kızıltaş, Sarıyakup, Pınarlar and Güdül (구둘) villages. Its mouth is next to the eastern part of Giresun city. The Aksu Deresi is 60 kilometres (37 mi) long.
2-5. '아나톨리아' (터키 소아시아지역)는 터키말로 '동쪽' (East), '해뜨는 (일출)' (Sun Rise) 뜻이라 한다. 해뜨는 동쪽의 나라 Corea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상에서 살펴 볼 때, 김헌창의 난은 아나톨리아에서 일어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백제땅이라 했다. 즉 비잔틴제국이 백제라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로마는 백제이다' 참조)
그리고 장안국이라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안'이란 말은 이곳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안국'의 '안'자이다. 광개토왕의 이름 '안'이다. ( 본 블로그의 글,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 ? (1) & (2) 참조). 신라시대 고승 혜초는 철문관을 거쳐 '안국'으로 갔다 했다. 난 본 블로그의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렉산더제국인가?", "요수, 살수, 패수 위치 산정을 통한 갈석산 위치연구"에서 철문관은 코카서스산맥 바로 아래 derbent city에 있는 Alexander gate 라 했다. 여기를 통해 서쪽으로 가면 '안국'이 나온다. 그래서 아나톨리아지역이 '장안국'이 될 수 있다. '장안'이란 도시도 이곳 어디일 것이다.
이지역에서 우리말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곳이 우리 역사의 지역이란 것을 의미한다. 악수강, 곡수강, 악골 호수, 가라골, 지리산, 계익산, 세한강, 사로, 포석강, 구둘마을 등의 지명이 그것이다.
이상 김헌창의 난을 검토해본 결과, 660년 이후의 비잔틴제국은 통일신라의 강역임을 또한 말해 준다. 그러나 아직 금성, 서라벌의 위치는 아직 더 연구가 필요하다. 사라센제국의 정체도 또한 더 연구가 필요하다. 후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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