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센제국의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는 구체적 자료

2019. 8. 19. 12:31한민족 역사/통일신라

지난 번 본 블로그에 올린 글, “ 대식국과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우리의 식습관인 대식에 연관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무열왕계의 신라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무슬림이란 단어가 꼭 이슬람교 신앙과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초기에는 비기독교인을 무슬림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바그다드에 가까이 있는 모슬(Mosul) 시의 사람들이라는 뜻(Mosalman)으로 무슬림이란 단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사라센제국이라 함은 백의 식국인 우마이야왕조와 흑의 식국인 아바스왕조의 두 왕조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데, 원래 사라세니란 말은 옛날의 (앗)시리아의 초원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었다고 했다. 우마이야 왕조때에는 수도가 현재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오늘은 이러한 일반적인 것을 벗어나 실제 구체적인 경우를 설명하며, 우마이야왕조와 아바스왕조가 신라인 것을 밝히고자 한다.

 

 

1. 신라(성덕왕)와 발해의 전쟁 (AD 733) - 우마이야왕조(Hisham)와 하자르칸국과 전쟁 (AD 730-737)

 

신라 성덕왕때 (AD 733)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의 남쪽을 공격한 일이 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AD 735년 당으로부터 패강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사한 시기 (AD 730-737)에 우마이야왕조의 Hisham Caliphate는 북코카서스의 하자르칸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볼가강까지 침범했지만 하자르칸국은 굴복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아래 자료 참조)

 

하자르칸국은 발해로 추정되는데, 코카서스산맥 북쪽에서 흑해 북쪽을 점하였던 국가로 나온다. 훈족이 점하였던 고구려의 지역 일부를 점한 발해로 판단된다. 이에 대한 추가 연구가 있을 것이다.

 

난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인 패강을 드네프로강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크리미아반도의 관미성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빼앗긴 후로는 다뉴브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했다.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이 경략한 백제의 관미성은 크리미아반도에 있었다’, ‘요수, 살수, 패수, 위치 비정을 통한 갈석산 추정’, ‘로마는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참조) 따라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그 지역을 차지한 당나라와 경계를 놓고 다툼의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발해의 등장으로 그 견제를 하면서 신라에게 패강이남의 지배권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이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발해(무왕) 남쪽을 공격했고 실패하였으나, 이 결과로 735년 당으로부터 패강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성덕왕)

 

 

In the Caucasus, the confrontation with the Khazars peaked under Hisham: the Arabs established Derbent as a major military base and launched several invasions of the northern Caucasus, but failed to subdue the nomadic Khazars. The conflict was arduous and bloody, and the Arab army even suffered a major defeat at the Battle of Marj Ardabil in 730. Marwan ibn Muhammad, the future Marwan II, finally ended the war in 737 with a massive invasion that is reported to have reached as far as the Volga, but the Khazars remained unsubdued.”

(source : Umayyard Caliphate, Wikipedia)



 

 

 

- 코카서스지역에서의 우마이야왕조와 하자르칸국 (AD 740)

 

2. 새로운 궁을 짓다

 

신라 성덕왕 16(AD 727) , 삼국사기에는 새 궁을 지었다고 기술되었다.

 

그런데 우마이야왕조의 Hisham Caliphate가 기존의 다마스커스보다 더 북쪽의 Resafa에 궁을 지었다고 나온다.

 

AD 717 (十六年春三月) 새 궁을 세우다 (출처 : 나무위키, 성덕왕, 삼국사기)

 

Hisham established his court at Resafa in northern Syria, which was closer to the Byzantine border than Damascus,...” (source : Wikipedia, Umayyard)

 

 

 

The North gate of the city of Resafa, site of Hisham's palace and court (source : Wikipedia)

 

 

3. 신라의 일본 공격 – 우마이야왕조의 Sindh, Punjab (India) 공격

 

신라와 왜와는 신라 초기부터 전쟁이 많았다. 그리고 통일 신라이후에도 왜, 탐라, (중원)은 황룡사 9층탑에 나오는 것처럼 신라의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왜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다. 왜는 백제의 일부 세력이었으므로 구백제의 일부가 일본에 합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잔틴제국이 나는 백제라 추정했다. 그런데 660년 백제가 망한 후 비잔틴제국의 백제 세력은 어디로 갔을까? 비잔틴제국은 그대로 존속한 것으로 서양사는 논하지만, 난 본 블로그에 올린 글, ‘신라 하대의 김헌창의 난은 지중해의 크레타섬과 터어키의 아나톨리아에서 있었다’에서 660년이후의 비잔틴제국은 신라라고 추정한 바 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서로 지나치게 싸워 힘이 약해져 아랍세력에게 점령당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으로 도망갔다고 은근히 조롱한다. 난 그러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망한 것이 아니고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상태로 무열왕계가 왕위를 잇는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백제세력은 일부는 신라로 동화 되었겠지만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전에 있던 22 담로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아메리카 서안의 부상국도 이때 백제 세력이 피신한 담로의 하나였을 것이다.)

 

백제 무왕시절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배하게 했다. 22담로는 대개 바다가 가까운 지역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해상왕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다. 한반도도 일본 열도도 이러한 22담로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인도의 남부 타밀국도 이러한 담로국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의 일부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인도지역도 그중의 하나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에서 볼 때 인더스강지역의 일부가 백제세력이 합류한 일부일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인도지역은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인도남부는 탐라국으로 연구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인도 북동부는 갠지스강 유역으로 가야의 일부인지 보다 더 살펴보아야 한다. 가야에 대해 신라의 최치원이 자료를 모은 바에 의하면 뇌질청예(금관가야의 김수로왕)는 얼굴이 희고 가름한 (아르메니아에 있는) 백인으로 보이지만, 대가야는 그 시조인 뇌질주일이 얼굴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즉 동양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이후 금관가야가 세력이 약해지고, 반파국인 대가야가 가야국들을 리드했다고 한국 역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이 반파국인 대가야가 인도 북동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도 '보드가야(Bodh Gaya)'란 도시가 있고 신라(라마신라, Lama Silla)와 고구려(막라가우리, Mangla Gauri)를 참배하는 성지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 사학계가 가야는 인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지도 모른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인더스강 유역(Sindh)과 판잡지역은 아직 연구가 되지 못한 지역이다. 고조선의 지역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고구려때는 '막라'이름을 가진 고구려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 지역일 지 모른다 생각하는데 아직 확신은 없다. 그 이후 인더스강 서쪽지역은 백인 훈족인 에프탈족(엽달족)이 있던 지역이다. 그런데 그중 한 왕이 ‘건길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위키피디아는 기술하였다. '건길라'는 백제의 왕을 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었던 지역일 수 있다. 비잔틴제국이 백제라는 가정의 문제는 다른 지역의 백제지역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로마는 인도 중서부지역과도 무역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가 망한 후 이 지역에 일본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왜나 일본은 도이 즉 섬나라들의 집합일 수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일본의 300척을 격퇴한 후 (AD 731), 일본으로 간 신라 사신이 신라는 '왕성국'이라고 주장하자(AD 734), 일본은 분노하여 신라침범계획을 세웠다 했는데, 각 섬나라로 3년동안 배를 나누어 건조하여 총 500척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나무위키 자료, 성덕왕 참조) 즉 왜나 일본은 섬나라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은 신라가 미처 확보하지 못한 백제의 22담로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마이야 왕조의 인더스강유역, 판잡지역 공격(AD 712)이 신라의 일본 공격(AD 720)으로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라의 동쪽이라는 것외에, 페르시아만을 빠져나간 우마이야 왕조의 수군 공격이라는 것이다. 육로로는 아프카니스탄 등을 지나기에는 험한 산악지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수로로 인더스강 유역을 통해 판잡지역까지 공격했다는 것이다. 대가를 비싸게 치루고 그 이후로는 인도에 다시 침입하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아래 위키피디아자료 참조)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고려 할 때, 신라의 서일본 공격이 우마이야왕조의 인더스강 유역, 판잡지역 공격일 수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는 또 하나의 자료라 할 수 있다.

 

720년에는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

 

성덕왕(聖德王) 30(AD 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731,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 아래 300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734년인 이 때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성덕왕)

 

In the year 712, Muhammad bin Qasim, an Umayyad general, sailed from the Persian Gulf into Sindh in Pakistan and conquered both the Sindh and the Punjab regions along the Indus river. The conquest of Sindh and Punjab, in modern-day Pakistan, although costly, were major gains for the Umayyad Caliphate. However, further gains were halted by the death of Al-Hajjaj bin Yusuf Al-Thaqafi, as after his death Muhammad was called back from his conquests. After this, Muslim chroniclers admit that the Caliph Mahdi "gave up the project of conquering any part of India.”

(source : Umayyard Caliphate, Wikipedia)

 

 

 

최대영역의 사라센 제국과 비잔틴제국 (AD 622-756) : 신라의 강역

 

 

4. 혜공왕(765-780 재위)때의 삼국유사 설화 – 신라 중대 말기의 암시,

선덕왕(780-785 재위)의 즉위 - 무열왕계의 단절, 새로운 왕조의 탄생 → 아바스왕조

 

신라 혜공왕시절에는 많은 반란사건들이 있었으며, 결국 김양상의 반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의 신라 중대가 끝났다고 한다. 이는 우마이야왕조가 망하고 아바스왕조에 의해 계속되는 사라센제국의 역사와 너무 흡사하다. 단지 우아이야왕조는 백색기를 아바스왕조는 흑색기를 사용한 것만 다르다. 즉 새로운 왕계통이 시작되면 Dynasty가 바뀌는 것이다. 신라와 우마이야왕조의 기록 연대는 30년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와 우마이야, 아바스왕조의 모습은 사라센제국이 신라라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된다.

 

고려 후기의 명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는 이러한 신라의 상황을 혜공왕의 탄생설화로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 자료 참조)

 

 

"고려 후기의 명승(名僧) 일연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에게는 딸이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후계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경덕왕은 표훈이라고 하는 승려랑 벗하며 지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고승(高僧)이며, 하느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 경덕왕은 표훈에게 "나를 계승할 아들을 낳고 싶은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였더니, 표훈이 하늘님에게 왕이 아들을 갖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차라리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나라를 멸망시켜도 좋으니 사내 아이만을 바란다고 간청하여 결국 하느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얼마 후 경덕왕의 부인 만월부인혜공왕을 낳았고, 이것을 기뻐한 경덕왕혜공왕에게 "건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출처] <>혜공왕 (765-780 재위) - 위키|작성자 죽엽

 

혜공왕 때 신라에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768 일길찬 김대공과 아찬 김대렴이 반란을 일으켜다가 진압되었고 

770에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꾀하자 살해했고

775 김은거와 이찬 염상정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경덕왕 때 관제 개혁이 있었는데, 혜공왕 때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등의 대신들의 주도로 관제 개혁을 모두 취소하였다.

삼국사기에는 780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혜공왕이 난의 과정에서 살해당했다고 하였는데, 시해한 인물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야사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이 김양상, 김경신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武烈王係)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혜공왕의 치세의 종말과 더불어 중대(中代) 신라는 끝나며,

신라를 왕위(王位) 투쟁과 호족의 난립으로 엉망이 되는,

끝없는 혼돈으로 몰아넣게 되는 하대(下代) 신라가 시작된다.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김양상이 무열왕계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덕왕이 되었다.

[출처] <>혜공왕 (765-780 재위) - 위키|작성자 죽엽

 

 

5. 신라와 아바스왕조의 반란 → 왕과 가문의 처형

 

사라센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왕조의 : 마르완 2세와 우마이야 가문을 처형했다. (AD 750)

신라에서도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한다면서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 김양상(후에 선덕왕),과 이찬 김경신(후에 원성왕)이 혜공왕과 왕비, 김지정을 처형했다. (AD 780) (아래 자료 참조)

 

이러한 동일한 모습이 사라센제국이 신라라는 또 하나의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호라산을 근거지로 둔 아바스 가문과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이 손을 잡았다. 아바스 가문은 튀르크계 유목민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며 국경을 확장해왔던 터라, 숙련된 대량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하심 가문은 혈통의 지위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제국 내부에서 동조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이들은 747년 무함마드의 삼촌(백부)인 알 아바스의 고손자 아불 알 아바스를 옹립해 거병한다. 7482, 혁명군 사령관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함락하였고 메카의 하심 가문이 파견해 온 카흐타바 이븐 샤비브와 합세하여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카흐타바는 이란 북부의 라이에서 1만의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라크로 진군, 시아파의 성지인 쿠파를 포위하였다. 비록 포위전 도중에 그는 전사하였지만 아들인 알 하산 이븐 카흐타바가 이어받아 74992, 도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50년 대() 자브 강()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를 처형한 후 아바스가 새로운 칼리프로 등극하였다. 그 후 아바스는 친교를 맺는다는 핑계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을 모두 초대한 후, 그들을 몰살시켰다. 이때 초대에 응하지 않고 미리 도망쳐 살아남은 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쳤고,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알안달루스에 도착해 그곳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했다.”

[출처] <>아바스 왕조 - 나무위키|작성자 죽엽

 

스페인으로 피신한 후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 지역에서 활동지역을 넓혀간다. 그러면서도 아바스왕조의 권위를 인정한다. 따라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서칼리프국, 아바스왕조를 동칼리프국이라 했다. (위키백과 자료 참조) 서신라, 동신라라는 말이 이에 해당하는 지도 모른다.

 

필자는 조선의 임진왜란이 스페인 포루투갈 프랑스 이태리 네델란드 등의 구교세력이 비기독교세력인 오스만제국을 공격한 것일 수 있다고 본 블로그 글, ‘현 일본은 임진왜란의 왜가 아니다.’에서 주장했다. 난 이 오스만제국에의 공격일 수 있는 임진왜란이 이러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후손들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스페인의 많은 지명에 신라라는 잔재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