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우리 역사자료에서 사비성은 어떤 곳인지 사비성 자료를 아래에서 살펴 보자.
“5세기 말-6세기 초에 건설되어 성왕의 천도에 의해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했다. 소부리(所夫里)라고도 불렸다.
660년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대패한 백제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23일엔 문무왕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하였다.
이후 신라령이 된 사비성에는 672년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0년(750년) 지명이 '부여현'으로 개칭,..”
“삼국유사엔 사비를 '전백제 왕도(前百濟 王都)'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는 사실 역시 서술했다. 당시 사비엔 부산(浮山), 일산(日山), 오산(吳山)이란 세 산이 있었는데 모두 신인(神人)이 살고 있어 하늘과 땅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사비성을 둘러싼 강을 사비하라고 불렀고 두 산 사이에 대왕포(大王浦)가 있어 백제 군주들이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
“사비성은 백제 때 도읍 자체의 명칭이기도 한다. 백제 때에는 부여 일대의 평야를 사비원(泗沘原)이라 하고, 금강을 사비하(泗沘河)라고도 하였다.
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ㆍ화사(畫師)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3900m)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東明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鹵辛)ㆍ구지(久遲)ㆍ부림(富林)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신문왕 때 군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바꾸어 웅주(熊州)관할하에 두었고, 석산(石山)ㆍ열성(悅城)의 두 현을 예속시켰다. 부여의 명칭은 성왕이 이곳으로 천도할 때 남부여(南扶餘)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고려 이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비의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소부리(所夫里)가 ‘ᄉᆡᄇᆞᆯ’로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과,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부리(夫里)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의 의미를 갖는다는 설이 있다.”
상기 자료는 사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5세기말 6세기 초 건설되어 성왕이 천도한 백제의 수도 (538-660)이다.
2) 사비에 부산 일산 오산의 세산이 있었는데, 신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높은 산으로 판단된다.
“당시 사비엔 부산(浮山), 일산(日山), 오산(吳山)이란 세 산이 있었는데 모두 신인(神人)이 살고 있어 하늘과 땅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
3) “사비성을 둘러싼 강을 사비하라고 불렀고 두 산 사이에 대왕포(大王浦)가 있어 백제 군주들이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 즉 사비성을 둘러 싼 강이 있었고, 두 산 사이에 대왕포라는 포구가 있어 군주들이 연회를 즐길 수 있는 매우 수려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4) 웅진은 협소하고 사비는 넓은 들이 있는 곳에 있다.
5) 무왕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양나라에 공장, 화가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미 있는 성을 수축하였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ㆍ화사(畫師)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6)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7)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3900m)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8)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9)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東明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鹵辛)ㆍ구지(久遲)ㆍ부림(富林)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10)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11) 사비의 지명 유래에는 소부리(所夫里)가 ‘ᄉᆡᄇᆞᆯ’로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이 있다.
“신라의 도읍을 적을 때에는 서라벌 이외에도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 서라(徐羅) 등 여러가지 표기..” (자료 : 서라벌, 나무위키)
12) 황산벌에서 가까이 있는 사비성이다.
"660년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대패한 백제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23일엔 문무왕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하였다.”
'한국의 역사 >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 중B) (0) | 2019.11.01 |
---|---|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 중A) (0) | 2019.10.31 |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서론) (0) | 2019.10.11 |
백제의 계뱩장군이 싸운 황산벌 전투는 터어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있었다. (0) | 2019.10.04 |
백제의 방어요지 ‘탄현’은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남부 Cilicia지역의 Gaziantep이다 (0) | 201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