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으로 추정되는 (아랍의) Muawiyah는 터어키 아나톨리아 남쪽 해안 (기벌포 추정, 본 블로그의 글, ‘백제의 백강, 기벌포, 주류성은 터어키의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었다’ 참조)을 수군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육로로는 카파도키아로 공격했다. (아래 글 참조) 따라서 카파도키아는 백제의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벌 전투로 추정된다.
“In 654, Muawiyah undertook an expedition in Cappadocia while his fleet, under the command of Abu'l-Awar, advanced along the southern coast of Anatolia. Emperor Constans embarked against it with a large fleet.”
[출처] <펌> Battle of the Masts (654)
그 전에도 647년에 시라아 governor인 무아위아는 카파도키아를 침략해서 Caesarea Mazaca를 포위한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함락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글 참조)
“In 647 Muawiyah, the governor of Syria, sent an expedition against Anatolia, invading Cappadocia and sacking Caesarea Mazaca. In 648 the Rashidun army raided Phrygia. A major offensive into Cilicia and Isauria in 650–651 forced the Byzantine Emperor Constans II to enter into negotiations with Muawiyah.”
[출처] <펌> Rashidun Caliphate (632-661)
카파도키아는 지형상 남으로는 토러스산맥으로 cilicia와 분리되고, 동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접하고, 북으로는 Pontus에 접하며, 서로는 Eastern Galatia인 Lycaonia와 접하고 있다. (아래 지도 참조)
Map of Cappadocia (source : Wikipedia)
또한 카파도키아는 평지가 아니라 해발 1000미터의 고원으로 되어 있으며, Kayseri (예전의 Caesarea)근처에 가장 높은 3916미터의 Erciyes (예전의 Argaeus) 화산이 있다. (아래 글 참조)
Pictures of Cappadocia (source : Wikipedia)
“Cappadocia, in this sense, was bounded in the south by the chain of the Taurus Mountains that separate it from Cilicia, to the east by the upper Euphrates, to the north by Pontus, and to the west by Lycaonia and eastern Galatia.”
[출처] <펌> Cappadocia
“Cappadocia lies in central Anatolia, in the heartland of what is now Turkey. The relief consists of a high plateau over 1000 m in altitude that is pierced by volcanic peaks, with Mount Erciyes (ancient Argaeus) near Kayseri (ancient Caesarea) being the tallest at 3916 m.”
[출처] <펌> Cappadocia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본서기 등에도 계백장군이 진을 친 곳이 험지를 선점했다고 하며, 신라군도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황산벌이 험지의 일부이지 평지가 아니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글 참조)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계백이 들판에 진을 친 것이 아니라 험지를 선점했다고 적고 있다. ………..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한다.”
“신라의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 에서 주둔하였다.”《일본서기》 (자료 : 나무위키, 황산벌 전투)
Picture of Mount Erciyes in Cappadocia (source : Wikipedia)
Picture of Mount Hasan in Cappadocia (source : Wikipedia)
따라서 카파도키아가 황산벌전투가 이루어진 곳으로 사료된다. 필자는 이전글 ' 백제의 방어요지 '탄현'은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남부 Cilicia지역의 Gaziantep이다'에서 탄현이 Cilicia지역의 Gaziantep이라 했다. 즉 시리아 지역의 신라군이 이 탄현을 넘어 아나톨리아 카파도키아로 공격했으며, 따라서 카파도키아가 황산벌지역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서 논의되는 사비성의 위치를 파악하면 카파도키아가 황산벌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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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개요
660년 음력 7월 9일 ~ 10일 황산벌에서 벌어진 백제와 신라 간 전투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신라군의 사비진격을 막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사비성을 공격, 백제는 멸망한다.
*** 백제의 내분
660년 당군이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상륙하면서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인 백제 공격이 시작된다. 백제 조정의 전략은 성충, 흥수의 말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과 당군의 상륙을 일단 허용한 뒤 좁은 길목에서 당군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전략이 맞서게 된다. 백제 조정은 성충과 흥수의 1안 대신, 조공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수도 주력군으로 기벌포에 상륙해서 백강을 거슬러오르는 당군을 요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성충과 흥수의 1안은 단순한 전략적 판단 외에,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기존 귀족세력과 화합하여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맞서자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백제 왕실과 귀족 세력은 극도로 깊은 골이 파여있었고, 이 상황에서 재결합하기 위해서는 백제 왕실로서도 파격적인 양보가 필요했으므로 이러한 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1안과 2안 모두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백강에서 당군을 요격한다 해도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면 최소한 탄현 근처에서 신라군을 잡고 있어야 하므로, 백제의 기민한 초기 대응이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들판에서 싸웠다?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황산의 들판에 이르러, 세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조우하자 장병은 싸웠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결국 김유신 휘하 신라군 5만이 탄현(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 부근)을 넘어 충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자 백제 조정은 좌평 충상, 달솔 계백과 상영에게 5천명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게 한다. 병력 5천은 백제의 방군성 체제에서 중앙 5방의 주둔군 1천 병력의 합과 일치한다. 백제왕실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수가 황산벌에 투입된 병력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적들이 코앞까지 와있는 상황임에도 백제 왕실과 백제 지방 귀족들과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계백이 들판에 진을 친 것이 아니라 험지를 선점했다고 적고 있다. ………..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한다.
“신라의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 에서 주둔하였다.”《일본서기》
** 전투의 성격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우리의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문무왕릉비』
적이 가려는 진군로 앞에 험준한 산지가 있다면 누구나 방어전에 알맞은 자리
신라군의 목표는 진격로 상의 교전이 아니라 수도 사비성 도착, 당군과의 합류였기에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고 곧장 진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백의 백제군은 신라군과 반드시 싸워야만 했기에 성이나 방어에 용이한 장소에 틀여박혀 방어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라군을 도발, 합전(合戰)을 해야만 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일정한 영토점령이 아닌 애초부터 수도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황산벌이 벌판이 아닌 산성이었다는 견해와 험준한 곳에 목책을 둘러 방어했다는 의견은 일부 사실일지 모르나, 이 전투는 기본적으로 공격군을 방어로서 요격하려는 성격이 아니었다. 백제군 지휘부는 이미 신라군의 진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단 걸 알고 있었고 이를 황산벌에서 최대한 저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후방에서 전력을 추스르겠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그것은 5천 결사대 전멸(全滅)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백제군의 규모
이 때 백제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적게는 5천 명에서 많게는 1만 5천 명으로 본다. 1만 5천 명설은 달솔 계백보다 상위 직급인 좌평 충상, 상영이 존재했음을 이유로 이들이 계백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병력을 통솔하여 3군을 배치하였다고 추측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명시적으로 백제군 5천 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고, 지휘관도 좌평 충상, 상영 대신 계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충상, 상영은 명목상 지휘관이고, 실제 지휘는 계백이 맡았을 것이다.
*** 관창, 그리고 패배
처자식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발한 계백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라고 말하며 사기를 올리려 했다. 한명이 천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봐서 백제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는걸 알 수 있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화랑 반굴과 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병력이 크게 소모된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3영이 붕괴되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은 사로잡혔으나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시간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산성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그만큼 계백의 지휘가 탁월했고 백제군이 분전이 눈부셨다는 방증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이 입은 피해는 알 수 없다. 백제군의 분전으로 인해 피해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반굴과 관창이 이끈 별동대 이전에 있던 4차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큰 피해 없이 압도적인 전력차의 신라군이 포위섬멸 했을 가능성도 있다. 황산벌 전투 전투서열을 정리한 대전대 군사학과 윤일영 교수는 아예 백제군이 4차례에 걸쳐 신라군을 저지한 후에 반굴의 공격이 이뤄진게 아니라 반굴의 공격이 그 4차례 공세에 포함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에선 신라군을 4차례 걸쳐 격퇴했다고 서술했고, 반굴이나 관창이나 단기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공격이 4차례 공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4차례 공세에 이 둘의 공세까지 더해(관창의 공세는 2번이니까) 7차례에 걸쳐 저지하고 8차례째에 무너졌다고 서술해야 한다는게 윤교수의 주장.
이게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 본기와 《삼국사기》계백, 관창 열전의 기록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무열왕 본기에선 4차례에 걸친 공세가 실패한 후 반굴과 관창을 투입했다고 적었으나 관창 열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계백 열전에는 4차례 걸쳐 신라군을 저지했으나 힘이 다하여 죽었다고 적고 있다. 흔히 반굴과 관창이 단기돌격한걸로 알려져 있다보니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은데 상술했듯 반굴이나 관창이나 혼자 돌격했을 가능성은 없다. 병력을 이끌었는데 이들을 격퇴했다면 이를 세지 않을 이유가 없다.
흔히 반굴과 관창의 돌격이 '단기돌격'이라 알려져 있고 여타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데, 이건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와전된 이야기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관창이 잡힐 때 분명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而彼衆我寡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라고 적혀 있어서, 숫자가 적었던 건 맞지만 관창 혼자서 돌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돌격이 사기 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군의 기동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는데, 반굴과 관창이 자살돌격으로 시선을 끄는 사이 병력의 일부를 나누어 황산벌의 중심을 흐르는 연산천 옆의 구릉을 우회하여 계백의 5천 병력을 포위섬멸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단기돌격이 아니라 상당수의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 후폭풍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던 백제의 전략은 실패했고, 백강으로 들어오는 당군에게도 대패하면서 결국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한다. 하지만 신라군의 출발시점이 너무 늦었던 탓 신라군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당군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려고 하는 등 압력을 넣었으나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강경대응하면서 일단 알력은 무마되었고, (김유신이 직접 도끼를 매고 당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 당군 네놈들부터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얼마 되지않아 의자왕은 부여성에서 탈출하여, 방어에 조금 더 유리한 성 웅진으로 달아났으나 결국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 (사실 계백의 전사 후 패잔병들이 웅진강 입구 (상류쪽으로 추정됨)를 막고 강변에 주둔했다고 한다 → 의자왕의 웅진성 피신을 위해 ? )
이를 두고 의자왕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했다는 시각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다. 그러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충, 흥수의 1안을 따랐어야 한다(...). 거기에 백제의 정규군은 위의 두 전투를 거쳐 거의 와해된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백제는 황산벌 전투를 계기로 수뇌부가 붕괴하여 멸망한다.
그러나 660년의 상황은 백제 전국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수도권만 격파 당한 상태였고, 이후 3년간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풍왕을 중심으로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다. 실질적으로 백제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은 백강 전투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 등 조선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의자왕 다음으로 풍왕이 마지막 왕이고 백제의 멸망은 663년이라고 봤다. 이렇게 볼 경우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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