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이어간 박혁거세의 신라라고 하면 정신이 제정신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사실로 판단된다.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들의 반성을 요하는 것이다. 보다 부드러운 제목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기를 쓴 사마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를 포함한 모두의 자성을 바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제목을 썼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 하나씩 이런 주장의 논거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본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첬다.
1) 한무제의 한나라는 페르시아 지역의 파르티마 제국이다.
우선 한나라 (전한, 후한 포함)와 파르티마 제국은 그 존재 기간이 유사하다. 그리고 Mithridates II의 내용이 한무제와 유사한 면을 보였다. 그리고 진나라를 알렉산더 제국으로 확신한 필자가 보기에, 한나라의 수도를 진나라가 있던 곳에 두었다는 내용에 착안한 바 있다. 본 블로그의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렉산더제국인가?' 등에서 필자는 진시황이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성, 안국으로 들어 가는 철문관의 위치, 항우에 의해 불타버린 아방궁 등을 페르시아 지역에서 밝히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에 치중한 상황에서 파르티마제국의 구체적인 면을 아직 살피지는 못했었다.
2)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사산왕조의 페르시아는 두 여왕의 존재를 바탕 삼아 그리고 한부울 님의 주장에 동기가 되어 연구하게 되었다. 결국 비담의 난, 두 여왕의 존재 이유가 카스트제도에 의한 신분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문화 등을 볼 때 그렇게 판단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로마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진흥왕의 신라와 성왕 시대의 백제의 모습으로 파악되어 구체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비잔틴제국이 벡제, 사산왕조 페르시아, 그 뒤를 이은 우마이야왕조가 신라라는 것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코카서스 산맥 아래에 있는 금관가야 등을 밝혔다.
그러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AD 226 - 651 존재한 것으로 위키피디아는 말하고 있다. 즉 신라가 되기에는 서기 226년 이전의 기간이 없으며, 삼한 일통의 신라로 이어지는 천년의 역사가 백제처럼 유사한 시기에 망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백제가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두 여왕의 존재,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 그리고 백제가 망하는 시점에서의 비잔틴제국 등을 보면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임이 틀림없다. 단 651년 이후는 위키피디아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신라)가 아랍에 망해 중국으로 도망갔다 조롱하지만, 필자는 그들 주장이 틀린 것을 밝혔다. 즉 신라가 아랍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귀족 세력에 의해 즉 진골 김씨에 의해 왕조가 이어진 것을 왕국의 관점에서 망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의 구분에 관한 주제이기도 한다.
그러나 계열이 다른 왕국으로의 변천, 즉 왕조의 변천이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라면 백제인 비잔틴제국도 백제가 망했을 때 망했다고 서술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더라도 구분해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양사가들은 중국과 아랍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역사를 차용하여 그들의 역사로 만드는 의미에서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종교적인 문제는 예민해서 언급하기 싫지만, 나의 개인적인 연구에 의하면 이슬람교나 기독교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한반도의 역사를 한민족의 역사의 전부로 인식하는 이들이나, 찬란한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의 그것으로 왜곡 시킨 일본의 잘못들도 모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과 다름 없다고 본다.
최근에는 재야 사학자들이 여러 주장을 하는데, 자유로운 역사 연구를 막는 중공이나,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드러 나는 것을 싫어 하는 소위 음모세력들이, 이에 관한 연구를 방해하거나, 오도하고, 또 감시하는 이들은, 앞으로 역사의 준엄한 심판, 그리고 하느님의 천벌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최근에 그동안 미루어 왔던 사산왕조 페르시아 이전의 역사에 대해 살펴 보았다. 즉 신라는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부터 초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아닌 어느 곳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나라인 Kushan Empire 등을 살펴 보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동안 이에 대한 해결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한나라가 왕망의 신나라에 의해 망하고, 후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중재선생의 말씀을 기억하고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구체적으로 파르티마제국을 살펴 보았다. 또한 신라의 건국시점의 역사와 그 이후 225년까지의 왕조역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전한이 망한 시점의 역사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박혁거세의 신라가 파르티마 제국을 이어 간 것이다. 이는 한나라가 망하고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 역사와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신라가 계속 파르티마 제국을 이어간 것이다. 이는 파르티마제국이 계속된 것이 아닌 새로운 왕국의 수립과 연속인데, 한나라의 전한, 후한의 주장과 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도 모르고 지냈던 한민족들은 지하의 조상님들에게 크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3 단계를 거쳐 후반기 파르티마 제국이 신라의 역사라는 것을 논하고자 한다.
[1]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는 박혁거세의 신라이다
[2] 상대의 신라(BC 57-AD225)는 페르시아에 있는 파르티마제국이다.
[3] 신라의 역사는 파르티마제국에 이어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이어진다.
본 글에서는 먼저 1단계의 분석에 치중하고자 한다.
<목차>
[1]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는 박혁거세의 신라이다
1) 한을 멸망시킨 신나라의 왕망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비교
(1) 기간의 유사성
(2) 왕망의 가족사
(3) 왕망의 유교정책과 박혁거세의 유교이념
(4) 왕망과 박혁거세 시신의 처리 유사점
2) 박혁거세의 어머니 : 중국 (한)의 황실 출신, 박씨의 가능성
3) 신라 시조시대의 강력한 모습 : 기존 왕국 체제의 흡수 가능성
4) 흉노족 김씨 세력의 신라 초기 합류 가능성
5) 진한의 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6) 왕망에 대한 중국 사가의 혹평
7) 후한의 무존재 가능성 : 이중재 선생의 언급
[1]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는 박혁거세의 신라이다
먼저 왕망과 박혁거세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한을 멸망시킨 신나라의 왕망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비교
(1) 기간의 유사성
우선 기간이 유사하다. 구체적인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왕망에 대한 중국 사가들의 혹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마천을 비롯해 한나라를 중국 역사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그들에게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에 대해 좋은 서술을 할 리 없다. 사마천이 한무제때 흉노에 패한 싸움을 이긴 것처럼 포장한 것처럼, 왕망의 역사도 일부러 시기를 왜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사마천을 나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나라(AD 9-23)의 왕망(출생 BC 45)과 박혁거세 (출생 BC 69,재위 BC 57-AD 4)의 시기는 유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새 왕조를 여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2) 왕망의 가족사
왕망은 제나라 왕가의 후예라고 아래에서 말하고 있으며, 나중(AD 1)에는 '안한공'이 되었다고 했다. 안한공의 안은 안세고, 안식국, 안록산, 안국, 광개토태왕 이름 안의 안지역을 의미하는 안자이다. 즉 안지역은 중앙아시아 또는 그 서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 I & II 참조) 그리고 안한공의 한자는 한나라 한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직위 하나로 한나라가 파르티마제국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왕망의 기록을 보면 서로 상반된 두 인격을 보여 준다. 앞부분에서는 인자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후반부에서는 사람을 마구 죽이는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어 마치 두사람의 묘사 같다. 그런데 왕망의 활동시기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박혁거세의 치세기간 동안 (BC 57- AD 4), 위키자료의 파르티마제국에서는 대략적으로 두 왕의 시기이다. 박혁거세로 판단되는 Orodes II (BC 57-BC 37)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Phraates IV (BC 37-BC 2)이다. Orodes II도 형제와 같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Phraates IV는 왕이 된후 half-brothers 모두를 죽이고, OrodesII의 부인도 죽였다.
즉 왕망과 박혁거세는 두 사람의 결합으로 된 이미지를 고려하면 동일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왕망에 대한 참고 자료
"2.1.1. 집안 내력 및 초기
산동 지역인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 원제의 치세였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로 제북왕이었던 전안(田安)의 후예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아예 왕씨(王氏)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버지 왕만(王曼)은 일찍 죽었는데 왕망은 그의 차남이었다. 왕망의 숙부들은 모두 후작의 지위에 있었지만 왕망은 외롭고 가난했다. 왕망의 고모 효원황후 왕씨는 왕망과 그의 어머니를 동궁에 데려와 살게 했는데 왕망은 절개를 굽혀 공손하고 검박하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어머니와 과부 형수를 섬기는데 공손하고 주도면밀하였으며 밖으로는 뛰어난 인물들과 사귀고 안으로는 여러 숙부들을 섬기면서 예의를 지켰다. 백부이자 대장군이었던 왕봉이 병석에 있을 때 왕망은 병문안을 정성스럽게 했는데 달포 동안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스스로 직접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 효원황후와 조카 성제에게 왕망을 돌봐주라고 부탁하였다. 왕망은 황문랑(黃門郞),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명사들과 그의 숙부 성도후 왕상, 효원황후 등은 모두 왕망의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성제도 결국 왕망이 어질다고 인정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오히려 더욱 검소하게 살고 의복과 물건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사들을 문하에 끌여들여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그를 추천하였다.
2.1.2. 유한의 기둥
수화 원년(기원전 8년), 왕망의 숙부 곡양후 왕근은 대사마였는데 병환으로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했다. 효원황후의 언니의 아들인 시중 순우장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어서 마땅히 왕근의 뒤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왕망은 이를 시기하여 오히려 순우장이 성제의 황후였던 허씨의 언니와 간통했고 허씨를 희롱하였으며 궁중 물품 천여 만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순우장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제는 왕망을 오히려 충직하다고 칭찬하고 왕근 역시 추천하였므로 왕망이 대사마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망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왕망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기를 단속하고 부지런히 했으며 그의 처도 검소하여 공경과 열후의 부인들은 그녀가 손님을 맞이했을 때 하녀로 잘못 알 정도였다.
하지만 건평 2년(기원전 5년), 왕망은 부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걸 반대한 탓으로 귀양을 갔는데 조정의 많은 관리들은 억울하다고 동정했고 왕망 자신은 두문불출했다. 차남 왕획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자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귀양 3년 동안 왕망의 죄를 씻어달라는 요구와 상소가 엄청나게 올라왔다. 결국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애제는 왕망을 수도로 불러들여 태황태후 왕씨를 시중들게 했다. 이 해 부태후가 죽고 이듬해에는 애제마저 죽었다. 결국 평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대사마에 마땅한 자를 추천하게 했는데 결국 왕망이 다시 선출되었다.
2.1.3. 태평성대
이에 왕망은 대사마, 상서가 되었고 원시 원년(기원후 1년)에는 안한공에 올랐는데 세 번 사양한 후에야 이를 수락했다. 왕망은 태황태후가 늙어 정사를 귀찮게 여기자 대신들에게 '태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작은 일까지 걱정하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보오'라고 하니 태황태후도 스스로 왕망과 네 명의 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왕망은 평제의 외가인 위씨 일가가 권력을 얻을 것을 걱정하여 그들을 수도로 오지 못하게 했다가 나중에 위씨 일가를 멸족시켰는데 오직 평제의 어머니만이 목숨을 건졌다. 또 자신의 장녀(효평황후 왕씨)를 평제에게 시집보내어 스스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되어 더욱 권력을 튼튼히 다졌다.
원시 2년(기원후 2년)에 전국에 한재가 들자 왕망은 돈 백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주어 민심을 얻었다. 원시 4년(기원후 4)에는 8천 명, 이듬해에는 무려 48만여 명이 그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청원을 올렸다.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사절했지만 뒤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시켜 자기의 공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가장하게 하여 '지금은 관청에 송사가 없고 고을에 도적이 없고 들에 빈민들이 없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가져가지 않는 태평성대'라고 조작했다.
(자료: 왕망, 나무위키)
(3) 왕망의 유교정책과 박혁거세의 유교이념
왕망의 유교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받은 것일 수 있다. 공자는 제나라의 사람으로 왕망도 제나라 왕가 출신이라 했다. 공자는 동이국을 군자국으로 좋게 생각했다. 아마도 제나라가 동이족 나라인지도 모른다. 상나라(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를 반대하다 처형위기에 놓인 백이와 숙제를 살린 사람이 제나라 사람 제환공이다. 따라서 제나라 출신인 왕망이 유교이념을 펼치려 한 것과 박혁거세의 유교정치 언급은 동일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높혀준다.
그리고 유교정치를 표한 왕망의 기간(BC 45년 출생, AD 23년 사망)과 박혁거세의 후반기(BC 28, BC 20)에서 신라의 유교이념이 표시되는 것을 보면, 파르티마제국의 Phraates VI(BC 37-BC 2, 박민, 박혁거세의 차남 추정) 시기에 유교이념을 표한 것으로 시기가 유사하다.
- 왕망의 유교 이념에 대한 참고 자료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역사상 유교를 본격적으로 정치이념으로 도입하여 체계화한 인물이다. 유교를 최초로 정치 이념으로 도입했다는 평을 받는 전한은 시작부터 유교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제와 경제 치세에는 도교와 임협사상, 무제 치세에는 법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제의 법가 사상은 만만찮은 폐해를 낳았고, 반작용으로 유교의 풍조가 점점 강해지더니 왕망의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왕망의 정치는 주나라의 것을 본받았던 초기 유교 사상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유교 이론이 춘추시대 이후 몰락한 이유도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서였는데 700년 뒤에 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니 성공할 턱이 없었다. 왕망은 터무니없는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 신라의 유교이념 참고자료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자료 : 나무위키, 박혁거세)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자료 : 나무위키, 박혁거세)
(4) 왕망과 박혁거세 시신의 처리 유사점
아래 글에서 보듯이 왕망이 난도질 당하여 시신이 훼손된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그후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이는 권력투쟁 와중에 시해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특히 후임자도 나중에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는 서술이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박혁거세의 죽음도 유사한 상황을 보여 준다. 시신이 부위별로 나누어 떨어졌다는 것과 뱀이 하나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서술도 왕권다툼에 희생된 둣한 내용을 보여 준다. 왕망과 유사한 상황을 보여 준다. 실제 파르티마제국에서는 박혁거세에 해당하는 Orodes II가 아들 Phraates IV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왕망의 죽음에 대한 참고 자료
"결국 참다못한 각지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눈썹에 붉은 물감을 들인 도적들의 집단인 적미군을 비롯하여 황족 유현의 지도하에 유수(광무제) 형제, 그 외에 공손술, 연잠, 왕랑 등 군벌들도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왕망은 겉으로 태연한 척 하면서 머리와 수염에 물감을 들였는데 너무 걱정을 하느라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기 때문이었다. 또 근심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병서를 읽다가 술과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인 말린 전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
결국 상인 출신 두오(杜吳)가 왕망을 살해한 다음 교위 공빈취(公賓就)가 왕망의 목을 자르고 그 옆에 있던 수천 명의 군사들이 왕망을 난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장군 신도건이 왕망의 머리를 완성으로 보내 효수하게 했을 때도 분노할대로 분노한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때리고 칼로 난도질하고 혀를 잘라 베어먹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우영 화백은 십팔사략 만화에서 '항우는 죽어서 5동강 났지만 왕망은 훨씬 더하게 그야말로 끔찍한 최후로 토막났다'고 썼다.
한편, 왕망을 도륙내고 나서도 신도건, 이송이 이끄는 유현 군대를 길라잡이하던 백성들은 궁궐을 약탈하고 마음껏 날뛰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온 신도건과 이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게 잡혀 수천여 명이 참수당했다. 궁궐을 약탈하고 황제의 물건을 건드리는 자를 처형하는 법 때문이었다.
효평황후는 아버지 왕망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자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가 향년 33세였다.
경시제는 마침내 한나라의 옛 수도 장안에 입성해 조회를 받았다. 경시제는 먼저 입성해 왕망을 살해하고 황제의 거마와 전국옥새, 깃발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약탈을 저지르고 있던 왕헌을 죽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경시제는 나중에 적미군들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 잡혀서 유폐된 뒤 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유현의 군사들은 장안에 입성해서 왕망의 조상과 처자들의 무덤을 파헤져 관들을 모두 불태우고 왕망 일족들을 멸족시켰다. 왕망이 건축했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면서 장안은 폐허가 되었다."
(자료 : 나무위키, 왕망)
- 박혁거세의 장례에 대한 참고자료
"혁거세 거서간은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백성들은 할 수없이 양다리와 양팔과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은 5개가 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들을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뱀 때문애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따로 묻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2) 박혁거세의 어머니 : 중국 (한)의 황실 출신, 박씨의 가능성
박혁거세의 신라가 한나라를 멸망 시킨 신나라를 이어 받았다는 추정은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한나라 황실 출신이라는 것에서도 신빙성을 더해 준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사소부인은 한나라 황실의 딸이라는 아래의 글을 보면 혹시 사소부인이 박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 한무제시 폐위된 박 황후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박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무제시 BC 122년,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발각되어 줄줄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사소부인의 형산출신 운운은 이때의 형산왕 가문, 아마도 박황후 가문과 관계될 수도 있다.
- 박혁거세 어머니 사소부인에 대한 참고 자료
"일연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여러 제후를 다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
(자료 :위키백과, 박혁거세)
- 한무제에 대한 참고 자료
"원래 한무제는 부황 한경제의 11번째 아들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는 박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박 황후가 폐위된 뒤에 누구를 새 황후로 삼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제의 어머니인 왕지는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자신의 아들 유철을 혼인시킨 후 관도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새 황후가 되고 유철을 황태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관도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관도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 외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지와 관도공주의 공작의 결과 율희가 아닌 왕지가 새 황후가 되었으며,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유철이 새 태자가 되었다. 이후 경제는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효문황후 두씨의 조카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위기후 두영을 실각시키고 왕지의 동생인 무안후 전분을 승상에 앉혔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동생 양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즉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펌> 한무제-나무위키|작성자 죽엽 CG Park
"게다가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출처] <펌> 한무제-나무위키|작성자 죽엽 CG Park
3) 신라 시조시대의 강력한 모습 : 기존 왕국 체제의 흡수 가능성
신라에 박씨 (한의 황후 가문) 세력에 석씨, 김씨의 연합을 우리는 역사자료에서 본다. 난 이들이 한무제시 종실로서 숙청된 형산왕, 회남왕, 강도왕 출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즉 신라는 기존 왕국체제의 흡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왕망의 신나라도 그렇다. 그래서 신나라를 이은 신라가 아닌가 한다.
- 한나라 회남왕, 회남자에 대한 참고 자료
"중국 전한 회남왕 유안
한고제 유방의 손자로 문학 등에서 조예가 깊었으나 한무제때 역모의 뜻을 품었다가 발각되어서 자살한다. 사기의 '회남형산열전'에 그의 열전이 있다. 두부의 발명자라는 전승이 있고, 저작으로 회남자가 있는데 삼국지 시리즈를 플레이 한 적이 있는 유저라면 들어본 적 있을 아이템. 갈홍의 《신선전》에 따르면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자 팔공(八公)과 함께 신선이 되어 떠났으며, 한무제는 몹시 후회하며 유안을 모함한 뇌피와 오피의 구족을 멸했다고 한다." (자료 : 나무위키, 회남왕)
"중국 서한 시대 회남왕 유안(劉安)이 빈객들을 모아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원래는 내서, 외서, 중편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고 하지만 현전하는 부분은 내서 21편뿐이다.
대체로 도가 계열 사상서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유가, 법가에서부터 명가, 음양가에 이르기까지 당대 중국의 다양한 학문 유파의 내용을 담았다. 천문학이나 한의학 처럼 과학, 의학에 해당하는 저술도 있을 정도. 일종의 각종 잡학 지식 모음서 비슷하지만, 유가에서는 대체로 내용을 신뢰할 수 없는 잡서로 여겼다. 한서에는 여씨춘추와 함께 잡가로 분류된다.
우리가 아는 고사성어의 많은 일화가 이 책에서 유래했다. 일상어로도 자주 쓰이는 선견지명, 새옹지마,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의 출전이 바로 회남자.
편찬자인 회남왕 유안은 한무제 때 반역 혐의가 걸려 처형당했지만 회남자는 다행히 남아 후세까지 전해졌다."
(자료 : 나무위키, 회남자)
또 섭황제 시절이었던 원시 7년(7년)에 동군태수 적의가 군대를 이끌고 봉기하자 적의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들을 불태우고 삼족을 멸했으며 어린 아이들도 오독을 먹여 죽이고 모두 한 무덤에 묻었다. 적의도 곧 체포되어 주살되었으며 천봉 3년(16년), 적의의 동지였던 왕손경이 체포되자 태의를 시켜 그를 해부하여 오장의 길이와 무게를 재게 하고 가는 대나무를 혈맥을 따라 넣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 '이것으로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중국 역사서에 실린 최초의 인체해부다.
(자료 : 왕망, 나무위키)
왕망은 인체의 해부를 통한 병의 치료를 아는 듯한 모습을 위 자료에서 보였다. 그런데 회남자에 한의학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왕망은 회남왕 가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 흉노족 김씨 세력의 신라 초기 합류 가능성
신라 초기의 연합세력인 김씨 가문은 한무제시 등용된 흉노족 왕자 김일제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무왕의 비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김씨 세력은 파사이사금에 이르러 왕비로 연합하는 것을 보면 건국 초기보다 뒤늦게 합류한지도 모른다.
왕망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흉노를 치려 했는데 고구려가 응하지 않자 '하구려' 라고 칭했다 한다. 실제 흉노가 고구려와 동일하거나 같은 부류인 것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난 왕망의 신나라 건국시 흉노족 왕자 출신인 김일제의 협력이 거절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하고 싶다. 그래서 신라 건국시 참여하기 보다 파사이사금 시기 (AD 80-112)에 가서야 왕비로 간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망은 토하라에 대해서도 모멸하였다 하는데, 신나라 건국시 협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왕망은 대군을 이끌고 토하라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고 서술된다. 토하라국도 한민족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나 토하라에 대해 동맹을 요청한 왕망이 한민족의 일원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파사이사금 시기에 이르러 반초(후한의 장군, 신라의 장수로 추정, 이후 전개된 내용 참조)에 의해 토하라국이 경략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왕망이 토하라에 대한 태도를 해석할 수 있다.
- 김일제에 대한 참고 자료
"한 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
[출처] <펌> 한무제-나무위키|작성자 죽엽 CG Park
"김일제(金日磾)의 자는 옹숙(翁叔)이며, 흉노 이치사 선우 때의 번왕 휴저왕(休屠王)의 장남이다. 유명한 전한의 명장 곽거병은 휴저왕을 토벌하고 일가족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김일제의 나이는 14세. 포로로 노비 신세가 된 김일제는 말을 키우는 노비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한무제의 눈에 띄었고, 무제 암살 시도 사건을 막는 등 공으로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고 사성정책에 의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 투현 지방을 하사받아 열후(列侯)가 됐다."
(자료: 나무위키, 김일제)
"우선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인물이 바로 전한(前漢) 때의 흉노 왕자 출신인 김일제다.
투후(秺侯)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3자불명)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령(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후략)
『문무왕릉비』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전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시었다. (후략)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자료: 나무위키, 흉노족 신라왕족설)
5) 진한의 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진한의 신라는 진의 유민이 세운 사로국에서 출발하여 차차 세력을 키워 진한 6부를 지배했다. 따라서 진나라가 있던 곳에 한나라 수도가 있었다는 기록과 진나라의 유민이 세운 신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가 한나라를 이은 왕망의 신나라와 위치가 같을 수 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단,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한과 다르다고 해서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 땅이 본래 마한의 영토였던 걸 감안하면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풍속이 유순하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褊頭) 풍속이 있어서, 머리가 납작하였다. 남녀에 구별이 있다."
(자료 : 진한, 위키백과)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
(《후한서》 동이 열전)
(자료 : 나무위키, 진한)
아래 자료에서는 진한 사람들이 진나라 사람과 낙랑 사람들과 같은 부류라 하는데, BC 28년 박혁거세 시기에 낙랑이 쳐들어 왔다가 군자의 나라라 하여 철수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낙랑은 진한의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어느 노인이 대대로 전해지는 바를 말했는데, 옛날 망명인이 진(통일왕조)(秦)의 사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고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부른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여 진(통일왕조)(秦)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명칭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스스로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 (<삼국지> 위서동이전)
(자료 : 나무위키, 진한)
6) 왕망에 대한 중국 사가의 혹평
왕망에 대해 중국의 사가들은 매우 나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들이 제일 자랑하는 한나라를 멸망 시켰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마천도 한무제의 흉노전쟁에서의 패배를 승리로 포장한 것을 보면, 사마천의 사기 기록도 무조건 믿을 것은 못된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왕망의 신나라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서양사가 로마사를 포장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훈족을 나쁘게 평가하는 것과 같으며, 신라에 의해 망한 비잔틴제국(백제)이 계속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참고로 사마천 사기의 한무제 평가에 대한 어느 서양사가의 평가를 실어 이에 대변하고자 한다.
"독일의 중국사학자 Hans van Ess는 꽤 과감한 내용을 담은 연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 사기에 서술된 진시황의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상당부분이 한무제의 기록된 행적들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많고 의도적으로 배치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해당 구절들에 대한 상당히 꼼꼼한 대조와 분석의 결과, van Ess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의 본래 목적은 진시황과 진나라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라는 것이다."
[출처] <펌> 한무제-나무위키|작성자 죽엽 CG Park
7) 후한의 무존재 가능성 : 이중재 선생의 언급
재야 사학가 이중재 선생은 중국의 사가들과 세미나에서 후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며 주장하니 중국의 사가들이 반박하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나라이후 후한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주장과 신나라를 이은 나라가 신라라는 나의 주장과 대칭된다 할 것이다. 단지 이중재 선생은 후한 (동한)이 고구려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나라(서한)의 위치는 페르시아지역이라 생각하는 필자는 한나라(서한)가 망하고 그 자리에 신라로서 계속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언급되겠지만 중국측 사가들이 주장하는 후한 즉 동한에 해당하는 나라는 파르티마 동쪽에 있는 쿠샨왕조 (AD 30-225)로 판단된다. 이들은 Artabanus II 시절 분리해 나간 파르티마 제국의 동쪽 맥족으로서 이중재 선생이 추측하는 고구려의 일부라고 본다.
아래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칭한 것을 보면 서한을 이은 나라는 고구려 보다는 신라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 왕망의 ‘하구려’ 언급
"시건국 2년(10년), 왕망은 고구려의 군사들을 징발해 흉노를 치려했지만, 고구려가 거부하자 엄우를 시켜 그 수장인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죽였다. 또한 고구려의 이름을 멋대로 고쳐 "하(下)구려"(...)라 칭했으며, 그 우두머리 또한 고구려왕에서 하구려후(후작)로 낮추었다. 그러자 고구려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변방을 약탈함이 더욱 심해졌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내용을 다소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왕은 유리왕이었으며 그때 죽은 사람은 고구려의 왕이 아닌 고구려의 장수인 연비라고 하였다."
(자료: 나무위키, 왕망)
이상으로 왕망의 신나라가 박혁거세의 신라라고 하는 검증을 마치고자 한다. 이후 파르티마제국이 신라로 판명되는 것을 계속 검증할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파르티마 제국에 대한 검증이 신라로 판명된다면 그리고 그 주장이 합리성과 설득력을 가진다면, 여기서 주장하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필자의 주장도 합리성과 살득력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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