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4대 유례 이사금부터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6대 흘해 이사금까지 3명의 왕들의 자세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미추 이사금 이후에는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석씨 왕실이 무너지고 김씨가 왕실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석씨 왕실의 계보가 실전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기림 이사금은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나이 차이로 보아 아들일 가능성은 적고 일반적으로 삼국유사가 걸숙을 누락한 것으로 본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을 따르면 아버지는 이찬 걸숙인데, 삼국사기에는 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주장도 함께 싣고 있다.
2. 업적
300년 정월에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해 노인과 빈민들을 위문하고 식량을 하사했다. 이때의 비열홀이 현재 비정되고 있는 함경남도 안변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고 있다. 경상도 지역도 다 제패하지 못한 3~4세기 신라의 상태에서 그 정도 북쪽까지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지금의 춘천시 근방인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고 그해 음력 3월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고 한다. 다만, 낙랑과 대방이 이 시기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은 다소 믿기 어렵다. 꼭 신빙성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봐도 낙랑과 대방의 항복 기사는 아무래도 진짜 항복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직전에 고구려와 맞대고 있는 지역인 비열홀에 순행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신라가 비열홀까지 갔을 가능성도 드물어서 이 기사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되돌렸다. 그리고 신라로 확정한 것은 후대 지증 마립간 때의 일이다. 서라벌의 음차인 신라, 사로, 사라 등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이걸 확정했다는 언급은 지증 마립간 대에 나온다.
어쨌든 그의 행적은 동시대의 다른 신라 왕들과 비교해봐도 굉장히 기이하며, 위와 같이 시기적으로 모순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 때문에 미추 이사금, 유례 이사금과 더불어 후대의 기록이 앞당겨졌다는 설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가 충주 고구려비(480년 건립 추정)에 나오는 마립간 기(忌)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기림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二月 기림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98)
二年春一月 장흔을 이찬으로 삼다 (299)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299)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AD 300)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AD 300)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AD 300)
三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300)
301-303 : 3년 공백
七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 샘물이 솟아오르다 (AD 304)
七年秋九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304)
305-306 : 2년 공백
十年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 (AD 307)
308-309 : 2년 공백
十三年夏五月 죄수들을 사면하다 (310)
十三年夏六月 왕이 죽다 (AD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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