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본 블로그에 올린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 로마는 백제이다’ 등의 글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고 비잔틴제국은 백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동안 가야에 대해서 고민을 해왔다. 미국 사학계에서는 가야가 인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하고, 실제 ‘보드가야’라 하는 지명이 인도 동북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사나 백제사를 보면 가야는 신라와 백제 양국과 전쟁이 있었고 결국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병합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도 동북부에 있다면 신라와의 전쟁은 이해가 가나, 백제와의 전쟁은 거리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왜와 가야가 지중해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어 왔다.
난 최근에 본 블로그에 올린 글, ‘신라 하대의 김헌창의 난은 지중해 크레타섬과 터어키 아나톨리아에서 있었다’는 글을 쓰면서, 터어키의 아나톨리아가 과거 백제 땅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벌주, 금관경 등의 신라강역이 아나톨리아지역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무열왕계의 후손인 신라의 김헌창으로 동일시되는 비잔틴제국 (660년이후 비잔틴제국은 신라임)의 Thomas the Slav가 아르메니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에서 ‘낙동강, 금해부에서 동쪽 바다로 들어 간다.’는 글을 읽고, 금관가야가 혹시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료를 좀 더 파헤친 결과,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헌창은 무열왕, 문무왕계의 후손으로서, 그 가문이 금관가야가 있던 금관경, 금관경이 있는 사벌주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금관가야 출신의 김유신 가문이 신라에 정착하여 이룬 가문이다. 금관가야 가문을 외가로 둔 문무왕은 20년 (680년)에 가야에 금관소경을 두었다. 그리고 문무왕은 김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532년, 법흥왕시,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출처 : 법흥왕, 나무위키)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소국들 역시 신라에 하나하나 병합될 때, 특히 큰 저항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경우는 신라의 유화 정책에 의해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김유신의 선조 집안인 금관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도 구형왕에게 김해를 식읍으로 주고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진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도 우륵, 강수, 김유신 가문, 진경대사 등 여러 가야계 인물들이 신라에서 활약했다.’ (출처 : 가야 – 나무위키)
문무대왕 때 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를 올린 적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문무대왕이 외가의 조상인 가락국의 김수로왕 제사에 관한 교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가야국 시조의 9세손인 구형왕이 신라에 편입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인 세종의 아들이 솔우공(김무력)이고, 그 아들인 서운(김서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다.때문에 시조인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조가 된다.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가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 (출처 : 수로왕, 위키백과)
그러면 금관가야가 있었다는 금관경은 어디이며 식읍으로 주었다는 김해는 어디인가?
정약용의 여유당 전집의 강역고에서, 금해부에 있는 금관가야에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가는 낙동강이 있다고 했다.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글 ‘낙동강, 금해부에서 동쪽 바다로 들어 간다.’참조)
낙동강은 상주시의 옛이름인 낙양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서 낙동강이라 했다 한다.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의 동일한 글에서 ‘택리지’, ‘연려실기술’에 언급됐다 함)
‘상주’는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사벌주’가 고쳐진 이름이다.
사벌주의 기록은 247년 첨해이사금때 처음으로 언급된다.
‘첨해이사금 재위 원년(247년)에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우로를 파견해 이를 평정하고 사벌국을 폐지해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이는 신라 역사상 첫 주(州)의 설치 사례이다.’(출처 : 위키백과, 첨해이사금)
‘이후 사벌주는 감문주(557년, 진흥왕), 다시 일선주(614년, 진평왕)로 바뀌었다가, 687년 신문왕 때에 사벌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 뒤, 757년 경덕왕 16년에 구주의 이름을 모두 고칠 때 상주로 되었으나, 그뒤에도 사벌주의 명칭은 계속 쓰였다.’ (출처 :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 글 ‘낙동강, 금해부에서 동쪽 바다로 들어 간다.’참조)
즉 금관가야가 있었다는 금관경은 금해부에 있는데, 금해부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있었다고 했다. 낙동강은 낙양의 동쪽으로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낙양은 상주시의 옛이름이라 했다. 상주는 사벌주를 이른다 했다. 즉 사벌주의 중심 도시라 생각되는 상주시 ,아마도 금관소경의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있고, 이 낙동강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했다.
이제 김헌창과 동일 인물로 판단되는 Thomas the Slav에 대해 자료를 보자. 아래 자료를 보면 Thomas the Slav는 터어키의 동북쪽인 Puntos region, Slav족이 남쪽에 정착한 지역, Armeniac Theme 출신이며, 아르메니아 민족 출신이라고 설명된다.
An army officer of Slavic origin from the Pontus region (now north-eastern Turkey), Thomas rose to prominence, along with the future emperors Michael II and Leo V the Armenian (r. 813–820),
[출처] <펌>Thomas the Slav |작성자 죽엽
Under the Byzantine Empire, the Pontus came under the Armeniac Theme, with the westernmost parts (Paphlagonia) belonging to the Bucellarian Theme.
[출처] <펌>Pontus (region)|작성자 죽엽
The 11th-century Theophanes Continuatus states that Thomas was descended from South Slavs resettled in Asia Minor by successive Byzantine emperors, while the 10th-century chronicler Genesios calls him "Thomas from Lake Gouzourou, of Armenian race". Most modern scholars support his Slavic descent and believe his birthplace to have been near Gaziura in the Pontus. Hence his epithet of "the Slav", which has been applied to him only in modern times.
[출처] <펌>Thomas the Slav |작성자 죽엽
따라서 김헌창과 Thomas the Slav가 동일 인물이라면 Armeniac Theme, 또는 아르메니아지역이 사벌주가 된다. 그리고 금관소경이 여기에 있게 된다.
이러한 가설은 아래의 조건들에 의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1. 첨해 이사금의 사벌주 정복 시기와 유사한 시기(252년)에 신라로 추정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도 아르메니아를 점령했다.
‘첨해이사금 재위 원년(247년)에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우로를 파견해 이를 평정하고 사벌국을 폐지해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이는 신라 역사상 첫 주(州)의 설치 사례이다.’ (출처 : 위키백과, 첨해이사금)
‘The Sassanid Persians occupied Armenia in 252 and held it until the Romans returned in 287.’ (source : Wikipedia, History of Armenia)
2.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철을 생산하고 수출하였다. 그런데 Armenian Highlands라 불리는 코카서스 산맥 좌측 아래는 철의 최초 생산지로서 철기시대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The Armenian Highlands is part of the Alpide belt, forming part of the Asian range that stretches from the Pontic Mountains to the Malay Peninsula. Its total area is about 400,000 km2. Historically, the Armenian Highlands have been the scene of great volcanic activity. Geologically recent volcanism on the area has resulted in large volcanic formations and a series of massifs and tectonic movement has formed the three largest lakes in the Highland, Lake Sevan, Lake Van and Lake Urmia.The Armenian Highlands are rich in water resources.
Most of the Armenian Highlands is in present day eastern Anatolia, and also includes northwestern Iran, all of Armenia, southern Georgia, and western Azerbaijan. Its northeastern parts are also known as Lesser Caucasus, which is a center of Armenian culture ……
From 4000 to 1000 BC, tools and trinkets of copper, bronze and iron were commonly produced in this region and traded in neighboring lands where those metals were less abundant. It is also traditionally believed to be one of the possible locations of the Garden of Eden.
The Armenian Plateau has been called the "epicenter of the Iron Age", since it appears to be the location of the first appearance of Iron Age metallurgy in the late 2nd millennium BC.
In the Early Iron Age, the Kingdom of Van controlled much of the region, until it was overthrown by the Medes and Orontid dynasty.
In Gilgamesh, the land of Aratta is placed in a geographic space that could be describing the Armenian plateau. (source : ‘Armenian Highlands’, Wikipedia)
- Map of Armenian Highlands (source : Wikipedia)
또한 다른 자료에서도 이 근처에서 철, 금의 광산이 많이 발달한 지역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In the almost 5000 years long history of Georgia metallurgy has always played an important role. Its specifics, development, ups and downs and new reincarnations in other times and places, over and over again are the main story in this paper. Southern Georgian metallurgical centres are considered the birth place of the iron metallurgy of the world and have played leading role on the markets of the then known world during the whole Antiquity. In the Middle Ages, however, Georgian metallurgy is forced to hide in the Northern mountains to keep away from aggressive intruders and suffers from restricted ore base and isolation. The last flash of the Georgian iron metallurgy is seen in the South Eastern territory in XIX century. The present day Georgian metallurgy is entirely based on import.” (source : Abstract of ‘ANCIENT GEORGIAN IRON METALLURGY AND ITS ORE BASE’ by David M. Kuparadze1 , Dimitri V. Pataridze1 , Thomas N. Kerestedjian2 1Caucasian Institute of Mineral Resources, 85 Paliashvili Str., 0161 Tbilisi, Georgia 2Geological Institute,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1113 Sofia; thomas@geology.bas.bg)
3. 한강유역 전투로 보이는 Lazic War (541-562)
이 Lazica지역은 흑해, 카스피해로 가는 관문, 지중해로 통하는 전략적 지역이다. 그래서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 사이에 주도권을 놓고 20년에 걸쳐 끊임없이 다툰 지역이다. 나는 이 Lazica지역에서의 전투를 신라와 백제가 다툰 한강유역 전투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 관산성전투가 이 근처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처에 있는 금관가야 출신의 김무력 (532년 법흥왕때 신라에 항복함)이, 이미 백제에 의해 함락된 관산성을 회복하기 위해 증원군에 합류하기 위해 오다가, 관산성전투에 반대했던 백제의 귀족들의 정보를 얻어, 관산성을 방문하는 성왕을 체포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지역에 금관가야가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한강은 코커서스산맥 아래 Kura River로서 동으로 흐른다.
Map of Kura River (source : Wikipedia)
“The Lazic War, also known as the Colchidian War or in Georgian historiography as the Great War of Egrisi (Georgian: Egrisis Didi Omi), was fought between the East Roman (Byzantine) Empire and the Sasanian Empire for control of the ancient Georgian region of Lazica. The Lazic War lasted for twenty years, from 541 to 562, with varying success and ended in a victory for the Persians, who obtained an annual tribute in exchange for ending the war…..
Lazica, situated on the eastern shore of the Black Sea, and controlling important mountain passes across the Caucasus and to the Caspian Sea, had a key strategic importance for both empires. For Byzantines, it was a barrier against a Persian advance through Iberia to the coasts of the Black Sea. Persians on the other side hoped to gain access to the sea, and control a territory from which Iberia, which was by now under their firm domination, could be threatened.
The Persian Sasanians recognized Lazica (Egrisi) as part of the Roman/Byzantine sphere of influence by the "Eternal Peace" Treaty of 532.
……
Then, in 557, a truce ended the hostilities between the Byzantines and Persians, and by the "Fifty Years Peace" of Dara of 562, Khosrow I recognized Lazica as a Byzantine vassal state for an annual payment of gold.” (Source : Lazi War, Wikipedia)
- Map of Lazica (source : Wikipedia)
4. 가야는 신라와 백제에 의해 병합되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왕국은 비잔틴제국 (백제)과 사산왕조 페르시아 (신라)에 의해 양분되었다.
“성왕은 반로국을 위시한 가야 연맹을 사비회의를 통해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왜왕 말도 안 듣는 왜인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탁순국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를 격퇴해주는 대신 가야 남부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은 물론 가야 연맹 No.2인 안라국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서기 543년조에는 임나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의 군령(郡令, 군장이라는 뜻)과 성주(城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가야의 일부 지역까지는 백제가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왕은 가야 소국의 사신들을 초청해 사비회의를 열어 가야 소국을 신라에게서 백제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고 선물을 뿌리며, 안라국이 신라에도 접촉을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자 신라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회유와 협박을 하는 등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가야의 일부인 탁기탄, 탁순국, 구야국을 정복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성왕의 영향력 하에 놓인 것이다. ..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백제의 간섭을 받게 된 안라국은 왜인을 매수해서 백제에게서 벗어나려 해보기도 하고 나중엔 고구려와 은밀히 손을 잡았으나 당시 고구려는 전성기 다 끝나고 내전으로 허약해진 상태라, 동예인까지 박박 긁어모아온 고구려군을 독산성 전투에서 나제 연합군이 대파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진흥왕도 쾌히 수천의 원군을 보내주는 등 나제 동맹이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가야는 백제의 속국으로 전락해 한강 유역 공격과 관산성 전투에서도 백제의 우군으로 동원되는 등 백제를 돕게 되었다.” (자료 : 성왕, 나무위키)
“진흥왕은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해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阿羅加耶)와 비화가야(非火加耶)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후에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성왕 사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출처 : 진흥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The Sassanid Persians occupied Armenia in 252 and held it until the Romans returned in 287. In 384 the kingdom was split between the Byzantine or East Roman Empire and the Persians. Western Armenia quickly became a province of the Roman Empire under the name of Armenia Minor; Eastern Armenia remained a kingdom within Persia until 428, when the local nobility overthrew the king, and the Sassanids installed a governor in his place.” (source : Wikipedia, History of Armenia)
Armenia’s geographical position would, yet again, cause its downfall. By the end of the 6th century CE, Persia and the Byzantine Empire created yet another division which saw Byzantium acquire two-thirds of Armenia.(source : Ancient Armenia, Ancient History Encyclopedia, by Mark Cartwright )
ㅡ Map of Greater Armenia (source : Wikipedia)
5. 낙동강은 동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 흐름을 보면 유프라테스강으로 판단되며, 그 서쪽에 사벌주, 금관가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Greater Armenia가 가까운 지역이 된다.
정약용, 여유당 전서 강역고에 이르기를
“김해의 금관가야이다. 또 이름이 대가라이다. 함안은 아나가라인데, 또 이름이 아시랑이다. 고성은 소가야인데, 또한 고지국이다. 이 모두가 황수 이남의 여러 현에 있다.
황수는 태백산의 황지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3백여리 흘러, 함창현의 동쪽으로 이르고, 꺾여 남쪽으로 3백여리를 흘러 함안군 북쪽에 이른다. 또 꺾여 동쪽으로 백여리를 흘러, 금해부 동북 황산 포구에 다다른다. 또 꺾여 남쪽으로 흘러 김해부에 다다라, 동쪽 바다로 들어 간디. 이게 소위 낙동강이다.” 라고 하였다. (자료 :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 언급된 글)
그 흐름을 말한 것을 보면 낙동강은 유프라테스강으로 보인다. 신라라 판단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지역에서 이렇게 흐르는 강은 유프라테스강뿐이다. 또한 유프라테스강은 강의 흐름 속도가 느려 토사가 많이 쌓인다. 따라서 황수가 될 것이다. 반면 티그리스강은 swift river, 즉 유속이 빠른 강이다.
- Map of Euphrates River (source : Wikipedia)
“The Euphrates receives most of its water in the form of rainfall and melting snow, resulting in peak volumes during the months April through May. Discharge in these two months accounts for 36 percent of the total annual discharge of the Euphrates, or even 60–70 percent according to one source, while low runoff occurs in summer and autumn. The average natural annual flow of the Euphrates has been determined from early- and mid-twentieth century records as 20.9 cubic kilometres (5.0 cu mi) at Keban, 36.6 cubic kilometres (8.8 cu mi) at Hīt and 21.5 cubic kilometres (5.2 cu mi) at Hindiya….
Tamaz V. Gamkrelidze and Vyacheslav Ivanov suggest the Proto-Sumerian *burudu "copper" (Sumerian urudu) as an origin, with an explanation that Euphrates was the river by which the copper ore was transported in rafts, since Mesopotamia was the center of copper metallurgy during the period...
Both the Kara Su and the Murat Su rise northwest from Lake Van at elevations of 3,290 metres (10,790 ft) and 3,520 metres (11,550 ft) amsl, respectively.”
(source : Euphrates, Wikipedia)
낙동강은 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강이라 했다 한다. 또한 낙동은 가락의 동쪽이란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상주가 낙양과 같다고 하여 그 동쪽을 흘러 지명이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하였다. 가락은 가락국을 말하며, 금관가야를 말한다.
상주는 사벌주를 말한다. 따라서 낙동강은 가락국 금관가야의 동쪽을 흐르며, 사벌주의 동쪽에 있다. 여기서 유프라테스강을 낙동강으로 대체하면, 유프라테스강의 서쪽에 사벌주와 금관가야가 있는 것이 된다. Greater Armenia에 가까이 위치한다.
코카서스산맥의 아래에 흐르는 Kura River가 한강이고, 이지역을 놓고 싸우는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Lazic war이 한강유역을 다투는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라 난 추정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빼앗긴 것에 대한 성왕의 보복 전투인 관산성 전투도 이 근처일 것이다. 이 경우 금관가야의 후예인 김해에 식읍을 가진 김무력이 낙동강인 유프라테스강의 서쪽에 있었다면, 관산성에 증원군으로 근접하기 용이할 것이다. 즉 나의 추론과 논리가 맞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추론을 가능케 한다.
1) 황수는 태백산의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했다.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Kara su와 Murat su)은 3290 미터(가라강), 3520미터(무라강) 고지의 Lake Van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했다. 이곳이 태백산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앞에서 Armenian Highlands가 Lake Van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2) 이미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신라와 벡제가 다툰 한강유역은 코카서스 산맥 아래의 Kura river지역, Lazica 지역이며, Kura River가 한강으로 판단된다.
3) 그리고 낙동강은 유프라테스강으로 보인다. 조선의 실학자들 시절에서도 낙동강은 유프라테스강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조선이 이 지역을 점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실학시대 이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이 지역에서 일어 났다는 말이 된다. 최근에 올린 글, '현 일본은 임진왜란의 왜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임진왜란이 스페인을 포함한 구교세력과 비기독교 세력인 오스만제국과의 전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피력했는데, 이러한 추리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4) 아르메니아지역이 철기시대를 연 철의 산지라는 것을 보면,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철령이 코커사스산맥이라는 생각이다. 난 본 블로그에 올린 갈석산 추정,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렉산더제국이다 등의 글에서 철령이 카스피해 우측의 어디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짐작한 바와 같이 철령이 코카서스산맥으로 보인다. 난 우랄강이 압록수라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고려말 이성계의 요동정벌 및 위화도 회군의 계기가 된 명과의 철령 이북 논쟁은 코카서스 산맥 이북의 요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의 장군 서희가 거란 요나라로부터 점령 권한을 획득한 강동 6주도 우랄강 우측지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5) 코카서스산맥 이북에는 Alans이란 종족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상기 Lazica 지도에 나온다.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 글 '낙동강, 금해부에서 동쪽 바다로 들어 간다'에서 거란의 별종인 금산왕자 이야기가 나온다. 대요수국이라 하는 이들이 몽고에 망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난 이들이 코카서스산맥 이북에 있는 Alans라 생각한다. Alans은 Don river 유역에 있다가 훈족에 밀려 중유럽으로 이동한 Allmagne (Germany(독일)의 불어), German의 거란으로 생각된다. 후에 코카서스산맥 이북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들은 광개토대왕 시절에도 언급되는데, 이에 대한 검토는 차후로 미룬다.
6) 지난 번 블로그에 올린 글, ‘신라 하대 김헌창의 난은 지중해의 크레타섬과 터어키의 아나톨리아에서 있었다’란 글에서, 아나톨리아지역에서 지리산 (Giresun Mountains)이란 지명을 확인 했다. 즉 지리산이란 지명이 오늘 글을 통해 그 가능성이 많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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