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올린 글,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아래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신라의 역사와 사산왕조 페르시아, 그리고 비잔틴제국(660년이후)의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오늘은 김수로의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는 보다 직접적인 증거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1. 고깔모자 관련 이야기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본인의 저서 강역고에서 '가나(駕那)'가 기원이고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삼국지를 쓸 때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한치윤 등 많은 실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고 일본의 아유가이도 가야가 갈(冠弁)에 기원을 둔다고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금관가야로 판단되는 Commagene 나라 (아래 지도 참조)의 Nemrut mountain 유적에서 고깔모자와 같은 모자를 쓴 왕들의 모습들을 본다.
- When the Romans conquered Commagene, the great royal sanctuary at Mount Nemrut was abandoned. (source : Kingdom of Commagene, Wikipedia)
- Pictures of Ruins in Nemrut Mount (source : Wikipedia)
Armenian Empire in BC 80 (source : Wikipedia)
2. 김수로왕 (AD 42-199) 장기 재위 관련 – Antiochus 가문 (Antiochus I – Antiochus IV)
아유타공주 : 158년 삶 – Princess Iotapa since Antiochus I
김수로왕은 157년 살고 재위한 것으로 역사에 나오는데, 이는 뭔가 이상하다. 태어나자 마자 왕이 된다는 것도 그렇고 오랫동안 왕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아유타공주도 158년 삶을 살았다고 나온다. 역시 이상한 기록이다. 난 단군이 3000년 살았다는 일화와 같이 김수로왕 왕조가 그렇게 지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도 금관가야로 판단되는 Commagene Kingdom에서 Antiochus I세부터 Antiochus IV세까지 142년(BC 70 - AD 72)이 지속된다. 그리고 그들의 왕비는 모두 Iotapa princess라 서술된다. 이것이 김수로왕이 아유타공주와 결혼하여 이 지역을 흡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래 Commagene 왕국의 왕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Satraps of Commagene, 290–163 BC
- Sames 290–260 BC
- Arsames I 260–228 BC
- Xerxes of Armenia 228–212 BC
- Ptolemaeus of Commagene 201–163 BC
Kings of Commagene, 163 BC – 72 AD
- Ptolemaeus of Commagene 163–130 BC
- Sames II Theosebes Dikaios 130–109 BC
- Mithridates I Callinicus 109–70 BC
- Antiochus I Theos of Commagene 70–38 BC
- Mithridates II of Commagene 38–20 BC
- Mithridates III of Commagene 20–12 BC
- Antiochus III of Commagene 12 BC – 17 AD
- Ruled by Rome 17–38
- Antiochus IV of Commagene 38–72 and wife, Julia Iotapa
- (source : Wikipedia)
3. 아유타공주와의 결혼 – Antiochus IV의 Cilicia 지역 지배
김수로왕의 아유타공주와의 결혼은 이지역과의 통합을 의미한다. 아유타공주는 인도의 공주가 아니고 Commagene 왕국 바로 좌측에 있는 Cilicia 지역 (상기 지도 참조)의 공주이다. 여기에 Antiochus IV 는 Aytap (아유타) 도시를 세우는 것으로 기록되며, 이후 이지역을 같이 지배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아래 자료 참조)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삼국유사)
In 38 AD, Caligula reinstated Antiochus III's son Antiochus IV and also gave him the wild areas of Cilicia to govern. Antiochus IV was the only client king of Commagene under the Roman Empire. (source : Kingdom of Commagene, Wikipedia)
Prior to the 1st century, there is no archaeological evidence found that Aytap could have been earlier inhabited by other clans of people. The city was founded by the King Antiochus IV of Commagene, who was of Armenian, Greek and Median descent. Antiochus IV founded this settlement around 52 and named the city in honor of his late sister-wife, Queen of Commagene Iotapa, who was Queen from 38 until her death around 52 of Commagene.(source : Aytap, Wikipedia)
Antiochus IV chose this site to establish the city, because there are 2 bays close to each other, giving shape of a natural harbor with a higher plateau for the town to be protected from the sea and any invasions from the sea. The natural port measures 50–100 metres. The peninsula between the 2 bays is on a high hill, which is connected to land and extends to the sea. In the peninsula, ruins remains of an Acropolis. Huge walls were built around the Acropolis to protect the monument. It is known during the reign of Antiochus IV, 38-72, in some cities in Cilicia, including Iotapa, mints were producing coins honoring Antiochus’ sons with Iotapa, princes Gaius Julius Archelaus Antiochus Epiphanes and Callinicus. These mints were producing coins honoring Iotapa, years after her death. (source : Aytap, Wikipedia)
4. 독수리 관련 언급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싸움에서 김수로왕은 독수리로 나타난다. (아래 글 참조) 그런데 우연히도 Commagene Kingdom Ruins 지역에 독수리상이 있다. (아래 그림 참조)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Eagle-topped column from the royal burial mound at Karakuş (source : Wikipedia)
"In Commagene, there is a column topped by an eagle, which has earned the mound the name Karakuş, or Black Bird. An inscription there indicates the presence of a royal tomb that housed three women. The vault of that tomb, however, has also been looted. The main excavations on the site were carried out by Friedrich Karl Dörner of the University of Münster. Another royal burial site is at Arsameia, which also served as a residence of the kings of Commagene."
(source : Kingdom of Commagene, Wikipedia)
5. 뇌질청예(김수로왕)의 모습 - 백인
신라의 최치원이 여러 고을 다녀 수집한 기록에서 김수로왕 (뇌질청예)는 얼굴이 희고 갸름하다고 했다. 이는 코카서스계의 백인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런 기록 또한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는 나의 추론과 궤를 같이 한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AD 42-199)이 맏형이었다고 한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중심의 형제설화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6. 신라 파사이사금과 금관가야의 관계
신라에는 파사이사금 (80-112 재위)이 있다. 파사는 페르시아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사산성이란 성도 있다. 파사이사금 때 세운 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선 유성룡에 의해 언급되는 파사산성과 관계도 있다. 임진왜란도 이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을 시사한다 아래 자료글 참조). 이 파사이사금이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이웃하고 지내는 것으로 아래 기록에서 전한다.
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 주장했다. 그 이전의 파르티마제국은 한나라로 추정했는데, 한나라 역사 역시 전한(BC 202 - AD 8), 후한 (AD 25 - AD 220)으로 나뉜다. 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중재 선생은 후한이 고구려라고 주장한다. 한나라(전한, 서한)가 '신'나라(AD 9 - AD 23)를 세운 왕망에 의해 망했다고 했다. 난 여기서 후한(동한)에 해당하는 기간동안의 파르티마제국을 고구려가 아닌 신라로 판단한다. 왕망은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지만 고구려가 응하지 않아, '하구려'라고 멸시하며 불렀다. 따라서 고구려 세력이 아닌 것이다. 로마가 백제라면 해당세력은 신라로 귀착된다. 또한 이 후한시기에 파르티마제국은 로마와 끊임없이 전투를 벌인다. 신라와 백제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기로 연구하여 글을 올리고자 한다.
따라서 파사이사금은 파르티마제국의 신라의 왕이고 이와 이웃하는 금관가야는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는 나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파사이사금 23년(AD 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출처 : 삼국사기)
"파사산성은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파사성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진다….
파사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받게 된 것은 류성룡에 의해서이다. 류성룡은 경기지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파사성과 수원의 독성(禿城), 양성(陽城)의 무한산성(無限山城) 등을 정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져 1595년(선조 28) 파사산성 수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류성룡은 축성을 담당한 의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독려하고, 산성의 군기(軍器) 역시 확충하도록 하는 등 계속하여 관심을 가졌다.
파사산성을 수축할 때 의엄이 동원한 승군이 5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28년 8월 22일). 이때 수축한 성벽의 길이는 1,100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의엄이 축성을 끝내고 돌아간 뒤 여주의 관원만으로 관리했을 뿐 별장을 파견하지 않아 성의 군사적 기능은 상실되었다. 그리하여 비변사에서는 죽산산성(竹山山城)을 수축했던 승려 영주(靈珠)를 파사산성에 들여보내 주지(住持)로 삼아 승군으로 하여금 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영조대의 『여지도서』에는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이 허물어져 성첩이 반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고종대의 『대동지지』에도 역시 허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파사산성,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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