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친스크조약이 언급하는 아무르강은 어디일까? (I)

2023. 5. 25. 03:18한민족 역사/기타

청나라와 루스차르국이 영토관련하여 맺은 1658년 네르친스크 조약의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언급되는 지역이 어딘가 살펴보는 것은 일차적인 양국의 국경 위치 추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참고로 글 말미에 실은 나무위키자료를 참고하면 네르친스크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거르비치(Gerbici, Горбица) 강의 발원지에서 스타노보이 산맥(Становой хребет)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남쪽은 청국이, 북쪽은 러시아국이 소유한다.

2) 우디(Udi, Уда) 강의 남쪽과 스타노보이 산맥의 북쪽 사이에 있는 땅은 중립지대로 삼으며, 나중에 다시 협의하여 조정하기로 한다.

 

3) 아무르 강에 접한 어르구너(Ergune, Аргун) 강의 북쪽 연안은 러시아가, 남쪽 연안은 청이 소유한다.

4) 머이럴커(Meirelke, Мэйрелкэ) 강 하구, 약사(Якса, Yaksa)의 땅에 있는 러시아인은 모두 퇴거하며, 그 가옥 등은 철거한다.

 

1) 거르비치 강 (GERBICI RIVER)

2) 우디 강 (UDI RIVER)

3) 스타노보이 산맥 (Stanovoy mountains)

4) 아무르강 (Amur river)

5) 어르구너 강 (Ergune river)

6) 머이럴커 강 (Meirelke river)

7) 약사의 땅 (Yaksa) 

 

네르친스크 조약은 1658년 청국과 루스차르국이 맺은 조약이다. 그리고 라틴어 조약문에 서로 싸인했다 한다. 또한 라틴어, 만주어, 러시아로 된 비문을 세워 경계에 세운다 했다. 

 

우선 상기 강 이름이 어디를 나타내는지 위키피디아 내용을 근거로 알아 보자.

1) Gerbici river

Gerbici river는 wikipdia사전에 없다. Berbici river는 남미에 대서양에 접한 강이다. 따라서 이는 확실히 아니다. Corobici river는 코스타리카에 있는 강이다. 이도 확실히 아니다. Geber river는 knife의 이름만으로 남아 있다. 즉 Gerbici river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17세기라면 최근의 역사인데, 왜일까? 의도적인 숨기기는 아닐까?

 

2) 우디강 (Udi river)

 

우디강은 Udi river인데, 위키피디아 사전에는 Udy river자료가 나온다. 그런데 우디강은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가 우디강과 Lopan 강의 합류지점으로 설명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도네츠강의 우측 지류로서 설명된다. 극동지방의 어느 강이름이 아니다. 

"The Udy (also: UdaRussian: Уды, Ukrainian: Уди) is a river that rises in Belgorod Oblast of Russia and runs through Kharkiv Oblast of Ukraine. It is a right tributary of the Siversky Donets near Chuhuiv.[1] Its length is 164 kilometres (102 mi). The drainage basin occupies 3,890 square kilometres (1,500 sq mi). The second largest city of Ukraine, Kharkiv, stands at the confluence of the Udy with the river Lopan.[1] "

(source : Udy river,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러시아-시베리아)

 

그런데, 우디강의 남쪽과 스타노보이산맥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립지대로 한다 하였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한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디강의 남쪽이 스타노보이산맥의 북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디강은 우크라이나 도네츠강변에 있고, 스타노보이산맥은 동시베리아에 있다. 즉 조약의 내용과 현재의 지리상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필자는 우디강과 스타노보이산맥의 위치 내용 중 하나가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디강에 방점을 두면, 우디강의 남쪽에 있는 스타노보이산맥은 우크라이나 남쪽에 있어야 하는데, 실제 지도를 보면 도네츠강 남쪽에 스타노보이산맥이 있을 수 없다. 도네츠강 아래는 흑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처에 카프카스산맥이 있다.

 

반면 동시베리아에 있는 스타노보이산맥의 현 위치에 방점을 둔다면, 우디강은 동시베리아의 스타노보이 산맥 북쪽에 있어야 한다. 이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런데 왜 우디강이 동 시베리아 지역에서 존재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제3의 방안은 우디강의 남쪽과 스타노보이 산맥의 북쪽을 별도로 보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우디강을 도네츠강의 지류로 본다면, 스타노보이산맥은 카프카스산맥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어디가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당시 청국과 루스짜르국의 위치에 더 달려있다 할 것이다. 필자는 루스키예프가 이 지역에 있었고 이를 이어간 루스짜르국이 이 지역에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청국이 프랑스지역에서 여기까지 진출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3) 스타노보이 산맥 (Stanovoy Range)

 

스타노보이산맥은 Sakha공화국에 위치한 산맥으로 기술된다. 사하(Sakha)공화국은 사카공화국으로도 읽히지 않을까 한다. 사카는 Saka, 즉 스키타인을 일컫는다.  Indo-Saka는 인도의 서쪽에 있었다. 스키타인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대서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 시베리아의 사하공화국에 위치한 스타노보이 산맥은 시베리아 동쪽의 오츠크해에 닿는 산맥이다. (아래 지도 참조) 

 

그러나 스타노보이산맥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기술한 러시아 연구가 Alexander von Middendorf는 19세기 사람이다. (아래 자료 참조). 즉 1658년에 체결된 네르친스크조약이 맺어진 당시의 스타노보이 산맥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The Stanovoy Range (Russian: Станово́й хребе́т, Stanovoy khrebetYakut: Сир кура; traditional Chinese: 外興安嶺; simplified Chinese: 外兴安岭; pinyinWài Xīng'ān Lǐng), is a mountain range located in the Sakha Republic and Amur OblastFar Eastern Federal District. It is also known as Sükebayatur and Sükhbaatar in Mongolian, or the Stanovoy Mountains, or Outer Khingan Range in English. The range was first studied and scientifically described by Russian researcher Alexander von Middendorff.[2]

 

History[edit]

 

The range formed the border between Russia and China from 1689 (Treaty of Nerchinsk) to 1858 (Treaty of Aigun)."

(source: Stanovoy Range,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러시아-시베리아)

 

 Map of Stanovoy range in Russia

 

네르친스크조약에서 1) Gerbici river의 원천에서 스타노보이산맥이 바다에 닿은 지역까지 남쪽은 청국, 북쪽은 루스짜르국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르비치강이 어디인지 모른다. 따라서 거르비치강의 원천이 되는 지역도 오리무중이다. 서쪽의 국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르비치강의 원천이 되는 위치를 모르니 청국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스타노보이산맥을 현재 동시베리아의 그것으로 본다면 이는 동쪽의 국경을 언급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스타노보이산맥이 위에서 추정한 것 같이 중앙아시아의 어디에 있다면, 바다에 접한다 했으니, 카스피해나 흑해에 접할 수 있다고 할수도 있다. 거르비치강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스타노보이산맥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진다면, 정말 국경과 중립지대는 우디강의 위치만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즉 흑해나 카스피해 주위 어디가 청국과 러시아 국경이 접하는 중립지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경우에는 아무르강이 카스피해에 접한 아무다리야강이 될 확율이 높다. 

 

4) 어르구너강 (Ergune river)

 

아무르강에 접한 어르구너강이라 했다. Ergune river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 보니 Argun river라 나타난다. 부리야트말의 우르겐골(Urgengol)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Urgen은 wide란 뜻이고, Gol(골)은 우리말의 골짜기의 골인 강으로 추정된다. 즉 넓은 강이란 뜻이라 한다. 그런데 조약문에서는 아무르강에 접한 강이라 하는데, 위키피디아 자료는 이강이 곧 아무르강에 합류한다고 설명된다. 즉 아무르강의 지류라 할 수 있다. 

 

"The Argun or Ergune (Russian: Аргунь, Buryat: Эргэнэ гол, Ergene golMongolian: Эргүнэ мөрөн, Ergüne mörönEvenki: Ергэне YergenyeChinese: 额尔古纳河 Éěrgǔnà hé) is a 1,620-kilometre (1,010 mi) long river that forms part of the eastern China–Russia border, together with the Amur (Heilong Jiang). Its upper reaches are known as Hailar River (Chinese: 海拉尔河; pinyinHǎilā'ěr Hé) in China. The Argun marks the border (established by the Treaty of Nerchinsk in 1689) between Russia and China for about 944 kilometres (587 mi), until it meets the Amur.

 

Name[edit]

 

The name derives from Buryat Urgengol 'wide river' (urgen 'wide' + gol 'river').[1] Mongolian word "ergün" (in Traditional Mongolian alphabet) or "örgön" (in modern Mongolian) means "wide"."

(Argun river,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러시아-시베리아)

 

 

5) 머이럴커강 (Meirelke river) and  yaksa

 

Meirelke river는 위키피디아 자료에는 없다. 그래서 이 강의 하구에 있는 약사(Yaksa)라는 지방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Yaksa는 아무다리야강의 쌍둥이 강인 시르다리야강(Jaxartes)을 가리키는  아베스탄어인 Yakhsha와 유사하다. (아래 자료 참조) Meirelke river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 강의 하구에 Yaksa가 있다 했는데, 아무다리야강의 하구에 시르다리야강이 접한다. 아무다리야강은 과거에는 카스피해까지 흘렀다 하는 기록을 위키피디아에서 본 기억이 난다. 즉 Meirelke강이 아무다리야강이라면 하구에 Yaksa가 있을 수 있다. 즉 네르친스크 조약 기록과 일부 일치한다.  이 경우 이 지역 주위를 국경조약의 중심으로 추정하는 필자의 의구심과 궤를 같이 한다. 

 

"In classical antiquity, the river was known as the Ōxus in Latin and Ὦξος (Ôxos) in Greek — a clear derivative of Vakhsh, the name of the largest tributary of the river.[5] In Vedic Sanskrit, the river is also referred to as Vakṣu (वक्षु). The Brahmanda Purana refers to the river as Chaksu which means an eye.[citation neededThe Avestan texts too refer to the River as Yakhsha/Vakhsha (and Yakhsha Arta ("upper Yakhsha") referring to the Jaxartes/Syr Darya twin river to Amu Darya). In Middle Persian sources of the Sasanian period the river is known as Wehrōd[3] (lit. 'good river')."

(source : Amu Darya,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러시아-시베리아)

 

 Map of Aral sea (source : Wikipedia)

 

한편, Jaxa라는 지방에 러시아에서 망명한 폴란드인이 세운 Jaxa라는 나라가 극동지방에 있었다 한다. 이곳이 Albazin이라는 지역인데, 만주어로 Yaksa라 한단다.

 "Albazin, a village in Russia that was once named Yagsi(Yaksa in Manchu) " (source : Wikipedia)

 

아무르강의 지류인 Shilka강과 Argun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200km를 더 아무르강쪽으로 이동한 지점이 Albazin지역이라 설명된다. 이곳이 후일 Jaxa state가 세워지는 곳이라 기술된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러나 이곳은 강의 하구가 아니다. 하구는 바다로 들어가는 강의 끝부분을 일컫는다. 즉 이것도 네르친스크 조약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폴란드인이 동시베리아까지 도망왔다는 것은 신빙성이 적다. 더구나 당시 17세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무르강을  아우다리야강으로 본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우디강과 스타노보이산맥 (카스피해 근처 추정) 추정과도 연결되어 논리가 맞는다. 

 

"Albazin[edit]

In late 1650, Albazin was built as winter quarters by Yerofei Khabarov on the northernmost part of the Amur River, 200 kilometres (125 miles) downstream from the junction of the Argun and Shilka. Thereafter it was little used as the Russians concentrated on the richer grain-growing lands downriver. In 1652 the Qing dynasty drove the Russians out of the Amur region and the land was left to outlaws and adventurers.

Foundation of Jaxa[edit]

 

In 1655 Nikifor Chernigovsky, a Pole who had been exiled to Siberia after an unsuccessful attempt to run away from the Russians' custody, murdered the voivode of Ilimsk in retaliation for the rape of his daughter, and fled to the Amur where he reoccupied the ruins of Albazin and gathered a band of supporters. Chernigovsky soon gained the support of the local population, Tungusic people, for whom treatment with respect was a great change in comparison to several assaults they had endured under Russian (Cossacks) sovereignty. He built a major stronghold on the ruins of Albazin giving it the name of Jaxa.

 

In the coming years, Siberian governors made several failed attempts to regain the control over Albazin; however, Chernigovsky was able to keep his position playing the Russians off against the Chinese and vice versa. From 1669, the Russian tsar received a tribute from the Jaxa country (Albazin and surrounding villages), which impacted the tsar's decision to formally acknowledge Chernigovsky as the lord of Jaxa in 1674. In communication with Chernigovsky, the Chinese government used Polish as the main language. In 1675 he raided Chinese lands with the help of the local population. This is the last recorded reference to Chernigovsky in history.[2][3] "

(source : Albazin,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러시아-시베리아)

 

Amur river map (source : Wikipedia)

 

이상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지역적 위치의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다. 17세기에 언급된 강에 대한 기록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강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그나마 우디강의 존재는 아무르강이 아무다리야강을 의미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더구나 네르친스크 조약이 라틴어로 기록되고 서명되었다는 것은 극동지방의 아무르강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당시의 루스짜르국이 극동지방까지 진출했는지 의구심이 간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검토는 다음 글 (II)에서 계속하고자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네르친스크조약 (1689년) - 나무위키

네르친스크 조약

최근 수정 시각: 2022-06-22 15:10:28
 
라틴어 : Tractatus pacis de Nipkoa
러시아어 : Нерчинский договор
만주어 : ᠨᡳᠪᠴᡠ ‍‍ᡳ ᠪᠣᠵᡳ ᠪᡳᡨᡥᡝ nibcoo-i bade bithe
중국어 : 尼布楚條約

1. 개요

1689년에 동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 루스 차르국 사이에 맺어진 국경 조약이다.

2. 배경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해 확장을 시작한 러시아는 모피무역에 주목했다. 마침 시베리아는 모피가 풍부한 곳으로 이반 4세 타타르 축출 이후 무주공산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들을 고용해 동쪽으로 파병했고, 이들이 시베리아 개척의 아버지들이었다. 결국 청나라의 영토인 아무르 강 일대까지 진출한다. 러시아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청나라는 조선 정부에 원군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나선정벌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과 교역관계를 재개하는 것이 훨씬 이득으로 판단됐다. 혼란스런 국내사정[1]이 겹쳐 러시아는 만주로의 영토 확장을 포기하고 대신 러시아의 상업 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 1689년 조약을 맺고 아무르강 이북 지역[2]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했다.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1687년 8월 러시아의 전권 대사 골로빈은 셀렌긴스키(바이칼 호 근처. 현 부랴트 공화국)에 도착해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낸다. 러시아는 셀렌긴스키에서 회담을 갖고 싶었지만 갈단 체렝(준가르 부)을 걱정한 청나라는 거부했고, 결국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3]는 골로빈에게 도착했음을 알리고 8월 19일,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기 시작한다.

이후 송고투와 골로빈은 냉병기로 간단히 무장한 채 회담장을 호위하고 있는 경호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잡담을 잠시 나눈 뒤 회담을 시작했다. 당시 골로빈의 사절은 천여 명이었으나 송고투는 예수회 선교사 출신 통역사, 만여 명의 승려 및 군사 등 엄청나게 많은 사절을 데리고 왔다.

회담 초기에는 양측의 군사적 충돌에 청나라가 레나 강을 국경으로 정할 것을 요구하여 양국의 국경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져 회담장에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풀어졌고 이내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조약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조약으로 청은 헤이룽강 북안을 확보했고 러시아는 북경과의 교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름 윈윈. 이후 당시 청나라 영토였던 외몽골과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의 국경 확정을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추가로 맺는다.

3. 내용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

중국(dulimbai gurun)의 황제(hūwangdi)의 성지를 받들어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대신들인 내대신 송오투(Songgotu, Сумкуту) 등과, 러시아국(Oros gurun)의 백인 황제(cagan han)의 칙명으로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사신들인 알렉세예비치 골로빈(Алексеевич Головин, Elik siyei ye wei cy Ho lo wen) 등은, 강희(康熙) 28년 7월 20일에, 닙초오(Nibcoo)에서 만났다. 이제부터 화평을 맺어 영원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자, 다음과 같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 거르비치(Gerbici, Горбица) 강의 발원지에서 스타노보이 산맥(Становой хребет)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남쪽은 청국이, 북쪽은 러시아국이 소유한다.
  • 우디(Udi, Уда) 강의 남쪽과 스타노보이 산맥의 북쪽 사이에 있는 땅은 중립지대로 삼으며, 나중에 다시 협의하여 조정하기로 한다.
  • 아무르 강에 접한 어르구너(Ergune, Аргун) 강의 북쪽 연안은 러시아가, 남쪽 연안은 청이 소유한다.
  • 머이럴커(Meirelke, Мэйрелкэ) 강 하구, 약사(Якса, Yaksa)의 땅에 있는 러시아인은 모두 퇴거하며, 그 가옥 등은 철거한다.
  • 정해진 경계를 사사로이 넘는 자가 있다면 즉시 해당국의 법에 따라 처벌한다.
  • 앞으로 경계를 넘는 사람은 통행허가증을 소지해야 한다. 허가증을 가지고 정당한 활동을 하는 외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 과거의 갈등을 모두 잊고, 앞으로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
  • 이 내용을 중국어(만주어·몽골어·한어), 라틴어, 러시아어로 비문에 새겨 경계지에 세운다.

4. 의의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사상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의 '대등-평등' 조약이다. 이전의 중국 왕조들은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주변국들을 야만족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타국과 평등한 조약을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의 만주는 한자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에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한족 관료는 참여하지 않고 만주족 관료만 참여했다.[4]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만주인 만주어문을 기준으로 노어문과 라틴어문이 작성되었다. 양국은 라틴어문에 날인했다.[5] 북경(당시 연경)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2명이 통역으로 참가했다.

 

러시아 측의 협상단과 당시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화이(華夷) 개념에 입각하지 않은 매우 생소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것도 중국인이 아니라 서양인과 협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만주어 조약문(로마자 전사) 라틴어 조약문 러시아어 조약문

5. 후일담

훗날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패배 당하자 러시아도 이때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 수용되었으며 이후 아이훈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 영토가 러시아로 넘어간다. 제2차 아편전쟁 때는 중재의 대가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를 얻어내면서 외만주를 모두 러시아가 차지하면서 중국 동해가 막혔다.

6. 기타

조약에서 청나라는 스스로를 두림바이 구룬(dulimbai gurun)이라고 칭했다. 이는 만주어로 '가운데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현재까지의 기록 중 외교 문서에서 중국의 왕조가 스스로를 '중국'으로 칭한 최초의 사례가 된다.[6]

김용의 소설 녹정기에 보면 위소보가 이 조약의 핵심 당사자로 그려져 있다. 소피아 공주와 마차 안에서 검열삭제도 나온다.

[1] 당시 러시아는 이복누이 소피아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표트르 1세를 압박해, 이반 5세가 공동 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도록 만든 상태였고, 나선정벌의 복수도 소피아가 막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네르친스크 조약 역시 소피아가 체결했다

[2] 우다강 주변은 미결정지

[3] 허서리 송고투는 강희제 치세초기 보정대신이었던 허서리 소닌의 아들이었고 자연스레 소닌의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황태자 윤잉이 형의 외손주였기에 황태자당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황장자인 윤제를 중심으로 뭉친 황장자당의 나라 밍주와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송고투는 이후 황태자 윤잉의 비행과 모반 혐의로 인해 처형당하지만, 밍주는 권력을 빼앗기면서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4] 청나라 측 대표 7인 중 혈통상 한인 출신이 있기는 있었으나, 해당 인물은 한군 출신 모후에게서 태어난 강희제가 즉위한 후 양황기 만주로 대기된 강희제의 외숙 동국강이었다. 또한 7인 중엔 몽골 혈통의 정백기 만주인도 있었다.

[5] 네르친스크 조약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와 청조는 자국어(러시아어, 만주어)문서와 함께 라틴어 문서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6] 중국이란 단어는 자체는 맹자의 저서에도 많이 나오고 훈민정음에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라고 하는 등 다른나라에도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외교 문서에서 청이 '스스로' 중국이라 불렀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자료 : 네르친스크조약,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