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통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한 사서 내용과 다른 한반도 사관과 지형

Chung Park 2026. 1. 27. 04:13

https://lostcorea.tistory.com/1934

 

지형적 형상으로 검토한 한반도 사관의 허구성

I. 머리말 필자는 한국사가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는 단순히 '환빠'라 불리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믿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광개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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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지난 글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16) 낙랑과 대방 지역

 

광개토태왕의 비문에서 대방지역에서 왜와 싸운 이야기가 나온다.

 

" 제위 14년 갑진년(403년?)에 왜가 국법을 어기고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하니 태왕은 병사를 인솔하고 석성도(石城島)에서 배를 띄워 빠르게 바다를 건너서 대방에 도착하니 왜는 도망을 치는데 구만성(句滿城)까지 뒤를 쫓아 서로 마주치니 왕은 겁을 주고 요새에 몰아 넣고 짓밟아 협살하니 왜는 궤멸, 패하였고 참살한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자료 : 태왕의 꿈, 김덕중, 덕산서원)

 

왜가 대방지역에 침범하니 광개토태왕은 석성도에서 배를 뛰워 바다를 건너 대방에 도착하니 왜가 도망치는데 구만성까지 쫓아가 참살했다는 것이다. 이에는 두가지가 눈에 띄는 언급이다. 첫째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가 석성도에서 배를 띄워 대방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둘째 대방에 왜가 침범하였는데 왜는 도망가 구만성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왜가 바다를 건너 도망갔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구만성은 대방에서 육지로 가는 지역의 성인 것 같다.

 

이러한 언급은 대방과 왜의 위치, 그리고 궁긍적으로 고구려의 위치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기존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방의 위치를 살펴 보자. 아래 그림은 낙랑의 위치에 대한 견해를 모은 것인데, 대방은 낙랑의 좌측에 있는 것으로 사서들은 말을 하니 이 지도를 가지고 논해도 될 것 같다.

 

 

낙랑의 위치에 대한 여러 견해 (자료 : 인터넷)

 

이병도의 한반도 주장을 제외하고, 그리고 요하의 동쪽을 주장하는 신채호의 주장을 제외하고, 모두 현재의 중공땅에서 요하의 좌측 (요서)에 있는 것으로 언급들을 한다. 대방은 낙랑의 좌측이니 이 지역의 좌측을 고려하면 될 것이다.

 

첫째 의문점은 왜가 이곳까지 침범한 것이냐는 것이다. 분명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대방지역까지 왜가 침입했다 하였다.

 

왜의 위치에 관한 아래 내용을 보면 왜는 대방의 동남 대해에 살고 있다 했다.

 

왜인(倭人)(주 001)은 대방군(帶方[郡]) (주 002) 동남쪽의 대해(大海) 중에 살고 있는데, (주 003)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國邑]을 이루었다. (주 004) 이전에는 100여 나라였는데, 한대(漢代)에 [이들 중에서 한의] 조정에 알현(朝見)(주 005)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주 006) 사역(使譯)(주 007)이 통하는 곳이 30개 나라이다.(주 008)

(자료 :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 중 왜, 동북아역사넷)

 

 
  • 각주 001)
  • 倭: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인이 일본인이나 그 국가를 일컬은 호칭이다. 『漢書』(권28下 「地理志下」 〈燕地條〉: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 [출처] <펌>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 중 왜 -동북아역사넷

 

 

주해로 된 내용을 보면, 한서 에는 樂浪海中有倭人, 당의 안사고는 위략에서 倭在帶方東南大海中, 그리고 후한서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이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고려할 때, 낙랑과 대방이 상기 지도처럼 중공의 발해만 지역이라 한다면, 이의 동남쪽 대해는 한반도 서해가 된다. 이 지역에 왜가 있었는가? 그리고 이런 위치는 한(韓)의 동남쪽 대해에 있다는 후한서의 말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낙랑해 가운데 왜인이 있다 했다. 그러면 낙랑이 있다하는 발해만 근처에 낙랑해가 있고 여기에 왜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국내 사학자들이 말하는 왜의 위치인가? 따라서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기 고서 내용의 위치에 의하면 낙랑과 대방은 동아시아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지형적으로 낙랑과 대방이 중공 남부에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아래 필자의 글 일부 인용)

 

 

17) 586년 고구려의 수도가 된 장안성

 

삼국사기 내용 중에 고구려 양원왕 시기(552)에 장안성이 언급되고, 평원왕 시기 (586년)에는 장안성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래 내용 참조)

 

《삼국사기》 고구려 양원왕 본기 (545-559)

 

一年春三月 양원왕이 즉위하다 (545)

一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545)

二年春二月 배나무가 특이한 현상을 보이다 (546)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546)

二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546)

三年秋七月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547)

三年 동위에 조공하다 (547)

四年春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도움으로 실패하다 (548)

四年秋九月 환도에서 좋은 벼이삭을 바치다 (548)

 

六年春一月 백제가 도살성을 빼앗다 (550)

六年春三月 신라에게 2성을 빼앗기다 (550)

 

七年秋九月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다 (551)

七年 신라가 10성을 빼앗다 (551)

八年 장안성을 축조하다 (552)

553년 : 공백

十年 백제 웅천성 공격에 실패하다 (554)

十年冬十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554)

十一年冬十月 호랑이가 평양에 들어오다 잡혔다 (555)

十一年冬十一月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555)

十一年 북제에 조공하다 (555)

556년 : 공백

十三年夏四月 양성을 태자로 삼다 (557)

十三年冬十月 환도성에서 반역 사건이 일어나다 (557)

558년 : 공백

十五年春三月 양원왕이 죽다. (559)

 

 

《삼국사기》 고구려 <평원왕 본기> (559-590)

 

一年 평원왕이 즉위하다 (559)

二年春二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560)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560)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560)

三年夏四月 기이한 새가 궁정에 모이다 (561)

三年夏六月 큰물이 나다 (561)

 

七年春一月 왕자 원을 태자로 삼다 (565)

 

十三年秋七月 왕이 패하에서 사냥하다 (571)

十三年秋八月 궁실 수리를 중단하다 (571)

 

二十三年春二月 많은 별이 떨어지다 (581)

二十三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581)

二十三年冬十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581)

二十三年冬十二月 수에 조공하니 수가 왕을 책봉하다 (581)

 

二十六年夏四月 수 문제가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584)

二十七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585)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586)

587-589 : 3년 공백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590)

三十二年 수 고조가 왕을 책망하다 (590)

三十二年冬十月 평원왕이 죽다 (590)

(자료 : 고구려 양원왕, 평원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상기 기록에서 양원왕 시기 551년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고 또한 이해에 신라가 10성을 빼앗았다고 기록된다. 그리고 그후 다음해에 장안성을 축조했다. 신라의 침입에 대비한 축성이 아닌가 한다. 즉 고구려가 팽창하던 시기가 아니라 신라에게 몰리던 시절에 장안성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방어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평원왕 시기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이전의 수도는 어디인가? 장수왕 시기(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처음 천도한 것이다. 즉 신라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 (413-491)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427)

 

 

고구려 양원왕 (545-559)

 

七年秋九月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다 (551)

七年 신라가 10성을 빼앗다 (551)

八年 장안성을 축조하다 (552)

 

고구려 평원왕 (559-590)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586)

 

 

백제 성왕 (523-554)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550)

551-552 : 2년 공백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553)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553)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554)

 

백제 위덕왕 (554-598)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586)

587-588 : 2년 공백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589)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589)

(자료 : 성왕, 위덕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유사한 시기에 백제의 역사에서는 553년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고 기록된다.

 

 

신라 진흥왕 (540-576)

 

九年春二月 백제를 침입한 고구려를 공격하다 (AD 548)

十年 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다 (AD 549)

十一年春一月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다 (AD 550)

十一年春三月 이찬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다 (AD 550)

十二年春一月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AD 551)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AD 551)

十二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개 군을 빼앗다 (AD 551)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AD 552)

十四年春二月 황룡사를 짓다 (AD 553)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AD 553)

十四年冬十月 백제 왕의 딸을 소비로 삼다 (AD 553)

(자료 : 진흥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같은 시기인 진흥왕 시기에는 551년 고구려 10여개 군을 빼앗았다 기록되었다. 10개성이 10개군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553년 신주를 설치했다 기록된다. (상기 자료) 진평왕 시기에는 특별한 관련 언급이 없어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진평왕 (579-632)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AD 581)

582년 : 공백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AD 583)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AD 584)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AD 584)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AD 585)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AD 585)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AD 586)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자료 : 진평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진흥왕이 새로이 점령한 후 설치한 신주(新州)는 왕망의 신(新)나라의 위치, 신라(新羅)의 초기 지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는 고구려 평양성을 스위스의 쥬리히 부근으로 추정하였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559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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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연히 스위스 쥬리히 부근의 강 Sihl river가 신라하(Sylaha)로 불리는 것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 냈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신라하(新羅河)는 한자로 신라의 강이 되는 것이다.

 

https://lostcorea.tistory.com/1560

 

신라하(新羅河)와 조선하(朝鮮河) (updated)

며칠 전, 발해고 지리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는 글을 쓰는 중에, 스위스(Switzerland)의 쥬리히 (Zurich) 근처에 있는 Sihl river라는 자료를 보다가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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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평양성(平壤城)이 스위스 쥬리히라면 진흥왕 시기 고구려의 10개군을 차지한 후 설치한 신주는 이 부근이 될 것이고, 왕망이 전한을 멸망 시키고 세운 신(新)나라도 이 곳일 수 있다. 그리고 왕망이 박혁거세라면 신라의 개국지가 된다. 그래서 진흥왕은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변경하였는지 모른다.

 

https://lostcorea.tistory.com/1098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는 박혁거세의 신라이다

한무제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이어간 박혁거세의 신라라고 하면 정신이 제정신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사실로 판단된다.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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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가능성은 신주가 신라가 백제의 한성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한 지역일 수 있다. 이 지역은 중국이 있던 지역이다. 따라서 한(漢)나라(전한)를 멸망시키고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신라가 이 지역에서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신라 진흥왕의 고구려 10개군(성) 점령으로, 고구려는 평양성을 잃고, 점령했던 한성백제의 한성도 잃고,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평양성과 한성을 진흥왕이 차지 하도록 성왕이 용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장안성이 지금 중공의 시안이 될 수 있겠는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공지역의 고구려설도 이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서양사에서는 비잔틴제국의 Justinian I (백제 성왕 추정)이 이태리반도와 이태리북부 스위스 오스트리아지역을 차지하였다가 롬바르디왕국에게 많은 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아래 필자의 글 '신라는 이태리반도에 있었다' 참조) 필자는 롬바르디 왕국을 진흥왕이 새로이 점령한 또는 회복한 신라지역으로 추정한다. 아바르왕국도 연계되었을 것이다.

 

https://lostcorea.tistory.com/1690

 

신라는 이태리반도에도 있었다

I. 서론 그동안 신라의 위치에 대해 고심해왔다. 파사이사금이 있으니 페르시아 지방에 있는 것 확실하여, 그동안 페르시아 역사로 비교하며,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라는 것을 밝혔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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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고구려의 장안성을 서고트왕국의 수도였던 프랑스의 툴루즈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북위의 역사를 고려하면 다소 의문시되는 점도 있다. 너무 남쪽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황하강에 가까이 있는 장안이라면 황하로 추정되는 프랑스 Loire강에 더 가까이 있는 지역일 수도 있다.

 

 

 

아래 장안에 대한 중국사에서의 자료를 잠시 보면, 신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안이 커지면서 식량보급이 어려워 강남으로부터 대운하를 거쳐 식량이 반입되었는데, 반면 낙양은 강남으로부터 식량수급이 용이하다 했다. 운하를 거치지 않고도 강남으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나 보다. (아래 자료 참조)

 

 

"진 멸망 후의 전란을 거쳐 한 왕조를 세운 유방은 파괴된 함양의 교외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고 장안으로 명명했으며, 혜제 때 성벽이 건축되었다. 장안성의 남쪽은 남두육성, 북쪽은 북두칠성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장안성의 별칭인 두성(斗城)이 탄생했다. 장안성에는 9시, 12문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미앙궁(未央宮)[2], 장락궁(長樂宮)[3], 명광궁(明光宮)[4], 북궁(北宮), 계궁(桂宮)이라는 궁전이 있었으며(《삼보황도》) 전체적인 도시의 형태는 방형이 아닌 다소 찌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후 전한, , 후한(멸망 전의 몇 년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가 수도를 두고 있었다.

 

후한의 실권자 동탁은 태위 황완·사도 양표의 반대를 내치면서 장안 천도를 강행했다.(190년)[5]

 

수 · 당 시대

 

.....

최전성기 장안의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식량문제라는 치명적인 문제도 내포하고 있었다. 관중(関中) 지역은 장안의 불어난 인구를 지탱할 식량 생산이 불가능했고 강남(江南)으로부터 대운하를 따라 대량 운송이 이루어졌으며, 조정은 이러한 문제를 식량 반입이 편이한 장소로 일시적으로 옮겨두는(낙양을 부수도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등의 대응책을 내놓았지만, 안사의 난 이후 정치적 불안정으로 대운하 관리가 차츰 곤란해지고 대운하가 통항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 장안의 식량 가격은 몹시 치솟는 결과를 가져왔고, 빈곤층 가운데 굶어 죽는 자들이 잇따랐다.

 

당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왕조를 찬탈한 주전충에 의해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진 뒤, 장안이 다시 수도가 되는 일은 없었다....

 

(자료 : 장안, 위키백과)

 

중공에서의 장안 낙양 및 황하 위치 (자료 : 인터넷)

 

 

 

이러한 식량 보급 사정을 고려하면 장안은 프랑스의 Toulouse, 낙양은 프랑스 지중해에 가까운 Narbonne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설득력있게 만든다. 프랑스에 남부에 운하가 있는데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Canal du Midi 운하이다. (아래 지도 참조). Toulouse와 Narbonne를 연결한 운하이다. 위키피디아자료는 16세기부터 있었다 하는데, Augustus시기부터 만들 계획이 있었다 하니, 그 전에 있었는지 모른다. 이집트 수에즈운하 지역도 로마시기부터 운하가 있었다 하였다.

 

 

Toulouse, Narbonne and Canal du Midi in France (source : wikipedia)

 

 

 

18) 낙양성 십리허에...

 

성주풀이 노래에 '낙양성 십리허에...' 라는 자귀가 나온다. 우리 민족의 노래에 낙양성이 언급되는 것은 우리네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암시이다.

 

https://youtu.be/JP_YvzJE-aI?si=_ON0-grsSn8JShlO

 

 

장안과 낙양은 또한 중국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지금의 중공사학자들은 장안과 낙양을 황하 아래로 주장하고 있다. (상기 지도 참조)

 

 

필자는 위에서 장안성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점과 이런 천도는 신라 진흥왕시의 공격과 관련되어 있다 주장했다. 장안과 낙양이 중국의 역사적 도시이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래 낙양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자.

 

 

"뤄양(중국어 간체자: 洛阳, 정체자: 洛陽, 병음: Luòyáng)은 허난성의 도시로, 동주후한 그리고 육조 시대옛 수도이다. 흔히 낙양이라 불린다.

 

명칭

 

원래 낙양(洛陽)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낙수(洛水)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이것은 중국의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낙양은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당나라 때는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東都)라 불렸고 송나라 때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으로 불리었다...........

 

 

역사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에 이 곳으로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말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그리고 고제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시기에 대도시로 발전하고, 황하를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이후 광무제 유수(劉秀)가 다시 외척 왕망(王莽)을 무찌르고 낙양에 수도를 두어 도시 발전에 힘을 쓴다. 그 결과 낙양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된다.

 

후한십상시의 난 끝에 정권을 잡은 동탁이 전횡을 휘두르자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상국 동탁은 이를 피해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에 을 질러 깡그리 폐허로 만들었다.[1] .....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왕윤여포에게 죽었지만 중앙 정부가 마비되면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였다.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성에 있는 (許)로 옮겼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조의 아들 문제 조비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여 새로이 황궁이 들어서고 많은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사를 와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로 부활하였다.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그러나 화려한 번영을 누리던 도중,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성은 후조(319~351), 전연(334~370), 전진(351~394), 후연(384~407), 후진(384~417) 등이 점령했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했고,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후 이곳에서 하음의 변이 일어났다.

 

북위는 534년에 분열되었고, 589년에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 양제 양광(楊廣)은 백성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아버지인 수 문제 양견(楊堅)이 수도를 장안(長安)에 두었던 것을 낙양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이는 수나라가 망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양광은 황위에 오르고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토목 공사를 시켜 낙양에 큰 대수궁을 짓고 큰 운하를 만들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낙양은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낙양은 강남의 물자들과 장안의 군사·정치와 연계되는 집적지로서 동도(東都)로도 불리며 번영을 이루었다."

 

(자료 : 낙양, 위키백과)

 

 

"우선 태화 17년(493년) 평성(平城)[3]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반대를 예상하고 (斉) 원정을 구실로 낙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여러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자료 : 북위 효문제, 위키백과)

 

 

즉 낙양은 전통적인 중국사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성주풀이에 낙양성이 언급될까? 북위, 수, 당 시대에 고구려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한반도 사관으로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고려하는 중국사지역은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지역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서고트왕국을 고구려의 일부로 판단하는 필자에게는 매우 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의 Toulouse가 장안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Narbonne지역이 냑양이라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이 지역은 사라센제국에 속하게 된다. 필자가 신라로 추정하는 사라센제국이다. 따라서 고구려, 신라의 지역이 된 낙양성이 된다.

 

 

 

19)변한지역은 발해의 영토

 

 

대조영은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하고 돌궐과 교류하였으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祚榮即並比羽之衆,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다. 제법 글을 쓸 줄 알았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자료 : 구당서, 인용출처: 고왕(발해), 나무위키)

 

 

구당서 자료에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이 모두 해북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는 부여, 옥저, 변한 등 조선해의 북쪽에 있는 나라들을 포함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지역이 과거 진국(震國)이었다는 암시이다. 그곳이 발해지역이라는 것이다. 진국(震國)은 어디인가? 중국사의 미스테리가 진국(震國)이다. 뭔가 감추려는 모습이다.

 

여하튼 부여 옥저 변한이 발해에 속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변한은 특별한 지역이다. 마한 동쪽에 진한이 있고 진한 아래에 변한이 있다 했다. 반도 사관에 의하면 변한은 한반도 남쪽의 어느 일부 지역인데, 이곳이 발해지역이라는 것이다. 발해는 신라와 니하를 두고 북남에 있다 했는데, 변한지역은 신라지역이 아니라 발해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한반도 사관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구당서 내용이다.

 

필자는 발해가 발트해지역, 유럽에서 중앙아시아, 나아가 먼 동쪽의 바다까지 지배했다니 어쩌면 동아시아까지 지배했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필자는 Gokturk가 고구려가 아닌가 판단하며, 그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아직 더 연구해 보아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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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지형적 조건을 사서 내용과 비교한 한반도 사관에 대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후에는 비지리적 요인을 보면서, 사서내용과 다른 한반도 사관의 모습을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