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통

지형적 형상으로 검토한 한반도 사관의 허구성

Chung Park 2026. 1. 17. 10:08

 

I. 머리말

 

필자는 한국사가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는 단순히 '환빠'라 불리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믿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에서 나오는 여러 기록들이 동아시아에서 나올 수 있는 기록들이 아닌 것에서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서유럽에서 훈족의 역사가 있었고 5세기에 그들은 대제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독일방송에서는 그들이 동쪽의 한국에서 온 것 같다는 ZDF의 방송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때만 해도 경주의 다보탑 석가탑이 신라의 그것인양 믿고 있었고, 석굴암은 인도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그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포석정이 경주의 어느 조그만 연못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을 때는 이 조그만 곳이 그러한 역사의 현장일까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단지 호기심으로 시작한 역사의 연구는 어느 덧 10년이 넘었다. 지금은 언제 한반도로 한국사가 이동했는지 아직 모르지만, 한반도의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에는 확신이 있다. 이는 국뽕이라는 왜곡된 애국심에서도 아니고, 현재의 한반도의 대한민국의 성장이 눈부시다는 것을 부정하는 마음도 아니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느 누구에서인지 모르지만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믿고 사는 한국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역사는 지나간 역사일 뿐이다 라고 넘길 수 있지만, 필자는 그렇게 속아 살았다는 것을 알면 피가 꺼꾸로 흐르는 분노를 느낀다. 단지 필자가 의분이 강한 사람이어서 그럴까? 현재의 한반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그것이 아니라 판명된다면 경주의 관광업에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처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타국의 역새왜곡을 도와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에 용감히 맞닥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왜 한반도로 내몰린 한국사가 되었는가를 왜 한반도로 내몰린 한국인들이 되었는가를 알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그냥 모른체 하고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이 지난한 일을, 아무 보상도 없는 이 일을,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확신한다. 결국 모든 세계인들이 그 올바른 역사를 알게될 것이다.

 

 

II. 본 론

 

이번 글에서는 그동안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논하고자 한다. 먼저 지리적 형상을 바탕으로 먼저 알아 보고, 그 다음에는 비지리적 요인에 의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1. 지형적 조건의 검토

 

지형적 조건에 의한 한반도의 한국사 여부는 제일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 본다. 지형적 조건은 1만년 이상의 조건이고 5천년전부터의 역사시대에 지형이 변형되었다면 역사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는 백두산

 

필자는 그동안 여러가지 지형상의 조건을 들어 한국사의 한반도 가능성을 부정해왔다. 발해고에 의한 "동서로 천리에 걸쳐 있는 백두산(=장백산= 태백산)"은 한반도의 백두산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이 백두산이 알프스산맥에 있는 Mont Blanc (불어로 백산의 의미)이라 판단했다. (아래 자료 및 필자의 글 참조)

 

 

"∎ 太白山 今長白山也. 在吉林烏喇城東南 橫亘千里.

 

(태백산 금장백산야. 재길림오라성동남 횡긍천리)

 

태백산은 지금의 장백산이다. 길림오라성 동남쪽에 있으며 동서로 천리나 뻗쳐있다. "

[출처] 발해고渤海考 제3권 지리고地理考 [산천고금명山川古今名]|작성자 청천

 

 

"亦名白山 我國謂之白頭山 滿洲人謂之歌爾民商堅阿隣.

 

(역명백산 아국위지백두산 만주인위가이민상견아린.)

 

또한 백산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백두산이라 부르고 만주인은 가이민상견아린이라고 부른다. "

[출처] 발해고渤海考 제3권 지리고地理考 [산천고금명山川古今名]|작성자 청천

 

 

 

2) 남으로 바다에 흐르는 주변이 험한 지형인 압록수(요수)

 

압록수이며 요수인 한국사와 중국사의 경계지점은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갔으며, 당태종이 고구려 침범시 압록수의 험준한 지형 (압록곡)을 왜 이용하지 못하느냐고 고구려에게 귀뜸한 당의 관료를 해임시킨바 있다. 지금의 압록강은 남으로 흐르지도 않고 지형의 험준함도 없다. 한국사의 역사적인 압록수 요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중국의 3대강이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수라 했다. 중공의 역사가들은 이를 황하강(5464km, 3395 Miles), 양자강(6300 km, 3900 Miles), 란찬강(메콩강 상류)(4020 km or 4350km)이라 주장 한단다. 중공 만주의 요하(1345km, 836 miles)와 북한의 압록강(803km, 499 miles)과는 규모의 차이가 크다. 그런데 지금의 황하강은 양자강보다 짧다. 또한 요수의 서쪽에 있는 중국의 역사를 고려하면, 란찬강의 서쪽인 버마 등 지역이 중국의 역사가 되며 요동의 동이의 역사는 전 중국대륙을 포함한다. 이것이 중공 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이 된다.

 

필자는 황하를 프랑스의 Loire river (1006km, 625 miles)으로 추정하며, 장강은 스페인의 Ebro river (930 km, 580 miles), 그리고 압록수는 Rhone river (813km, 505 miles)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의 3대강 순서와 크기가 맞는다. 무엇보다 압록수의 푸른 강과 압록곡의 존재가 일치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그리고 근처에 백두산으로 추정되는 알프스 산맥의 Mont Blanc 산이 있다.

 

 

 

3) 동으로 바다에 이르는 약수

 

또한 필자가 환단고기에 서술된 약수의 위치를 찾아보면, 동아시아에는 없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반도사관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동해 바다 한가운데, 태평양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군 시기에 가륵단군이 BC 2177년 행실이 좋지 않은 요동태수 색정을 약수에 유배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용서하시고 그 땅에 제후로 봉하니 이가 곧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따라서 약수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는 의미를 가진다. 단군조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흉노가 출발한 지역임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러한 약수가 어디인가를 알아 보자.

 

여러 문헌과 재야 사학자분들의 자료를 보면, 약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약수는 부여와 읍루의 북쪽에 있으며, 동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 간다. 그리고 읍루는 식신, 숙신이라고도 불리는데, 매우 추운지방에 있으며, 부여의 동쪽에 있으며, 그 동쪽으로 대해와 닿아 있다. 즉 읍루는 동쪽으로 큰 바다와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음단군은 BC 1652년 서쪽으로 약수로 가서 금철과 고유를 구하여 이용했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후한서 동이전>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와 <진서 사이전>에 “읍루국 동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또한 <호위우공추지(胡渭禹贡锥指)에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고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자료 : 약수 남쪽에 자리 잡았던 부여와 읍루,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흉노의 조상인 색정의 유배지였다가 훗날 사면돼 제후로 봉해지며 봉지로 받은 약수(弱水)는 ‘단군세기’에 “5세 대음단군 10년(B.C 1652년) 기축년 단제께서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약수, 단군조선의 서쪽 감숙성을 흐르는 강,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지형적으로 약수는 오로지 스웨덴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아래 글 참조) 지형상으로도 일치하고 금철 및 고유의 지하자원 부존도 일치하며, 약수의 동쪽인 핀란드지역의 단군조선, 흉노의 역사가 있는 것도 일치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산해경 고서에 의하면 조선은 북해지우(북해의 모퉁이) 동해지내(동해의 안쪽)에 있다 했다.

 

https://lostcorea.tistory.com/1813

 

 

약수(弱水)는 북유럽에 있었다

I. 머리말 지난 번 글에서 약수가 아시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리적 요건을 근거로 추정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면 실제 약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실질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아래

lostcorea.tistory.com

 

 

 

4) 서해에 접한 토욕혼

 

 

북위 효문제가 토욕혼 모용부연수에게 책봉한 직책에는 서해군 개국공 토욕혼왕이라는 글귀가 있다. 즉 토욕혼 즉 티베트는 서해에 접한 것이다. 이는 현재 중공의 지형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한반도의 한국사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서해가 대서양이라 판단한다. 토욕혼은 포루투갈에 있었다 판단한다. (필자의 아래 글 참조)

 

 

"아래 토욕혼의 역사 자료를 보면, 토욕혼은 북위와 남조의 양다리 외교를 하면 계속 살아 남았다가 결국 북위의 공격으로 473년 북위에 항복한다. 그후 북위의 효문제는 492년 토욕혼의 모용부연수에게 직책을 책봉한다. 즉 모용부연수는 492년 7월, 북위 효문제에 의해 "사지절 · 도독 · 서수제군사 · 정서장군 · 영호서융중랑장 · 서해군개국공 · 토욕혼왕"에 책봉되었다. " (필자의 아래 글의 일부 인용)

 

 

 

 

5) 북위와 전쟁을 한 백제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동성왕 시기 북위와 전쟁을 했다고 기술된다. 한반도의 백제는 중공땅의 북위와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이 된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북위의 역사기록은 매우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건강실록, 삼국사기 백제 본기, 자치통감, 남제서에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으며, 484년에는 북위의 승리, 488년에는 백제의 승리, 490년 백제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이는 여러 사서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즉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를 고구려와 싸운 것을 잘못 기록했다느니 하는 해석은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한반도의 백제 존치를 합리화 하기 위한 궤변이라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북위 역사에서 누락하는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은 백제가 북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盧征之, 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자료 : 백제 동성왕, 나무위키)

 

또한 아래 남제서에서 동성왕이 표문을 올린 내용을 보면, 남제와 백제는 1국 2체제이거나 매우 가까운 동맹국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남제서 동남이열전 백제에서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 등이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래에서도 이들이 언급된다. 또한 이들의 직책을 보면,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등을 언급하고 있어 동성왕 당시 백제가 이들 지역을 점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지역의 추정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랑, 성양, 조선 지역을 백제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식민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존의 한반도 역사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아래 필자의 글 일부 인용)

 

 

 

6) 조선과 한(漢)나라의 경계인 북으로 흐르는 패수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인 패수는 어디인가? 위만이 넘어 온 패수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반도 주장 사학자들은 패수를 북한의 대동강으로 주장한다. 이는 맞지 않는다.

 

아래 수경주에 의하면 패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들어간다 했다.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郦道元:470~527)이 쓴 《수경주(水經注)》제14권 패수(浿水)조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 지금의 山西省 大同)에서 역도원에게 설명하는 글 중에 패수와 고구려 수도에 관한 생생한 대화 기록이 나온다.

 

「수도는 패수 북쪽에 있고 그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옛날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를 지나간 다음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옛 《지리지》에는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城在浿水之阳,其水西流,迳故乐浪朝鲜县,即乐浪郡治,汉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县入海.」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사신 말을 요약하면, ‘패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른다. 그리고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출처] 평양성은 요양|작성자 일승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패수, 공유 글 참조)

 

 

Map of Rhine river (source : Wikipedia)

 

 

 

7) 북으로 흘러 북해에 진입한 두만강

 

 

아래 자료에 의하면 두만강은 북해로 흐른다. 중국사와 한국사에 등장하는 북해는, 재야사학자가 주장하는 몽골의 바이칼 호수가 아니라, 필자는 유럽의 North Sea (북해)로 판단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 익조가 여진 천호의 협공을 피해 알동의 백성을 거느리고 적도(赤島)를 거쳐 의주에 정착하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家産)을 배에 싣고 두만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 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부인과 함께 가양탄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 가서 바라보니, 알동(斡東)의 들에 적병이 가득히 차서 오고, 선봉 3백여명은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보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북해(北海)는 본디 조수가 없었는데, 물이 갑자기 백여보 가량이나 줄어 들어 얕아져서 건널만 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를 같이 타고 건너가고, 종자(從者)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이르니,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하였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

 

(자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 인용출처 : 대조선사연구회, 러브선, '북해는 두만강유역인가?')

 

 

 

 

8) 북해에 접한 중국

 

 

중국의 당나라 역사에서 북해가 자주 언급된다. 북해 태수, 북해절도사가 언급된다. (아래 자료 참조) 중국사를 살펴 보면, 서해, 북해가 언급되지만, 동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중국사의 동쪽에는 동이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즉 중국은 동해는 없고, 서해와 북해에 접해 있으며, 대방군을 통해 일부 남해가 있을 뿐이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즉 중국사와 한국사는 동아시아에 지형적으로 맞지 않는다.

 

"최근 당나라의 '안록산 사사명의 난'(755-763)을 연구하고 있는데, '안사의 난' 중에 당나라는 '북해절도사'를 임명한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해태수'(하란진명)도 임명된 것으로 보면 당나라가 북해에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이 해(756)에 당은 북해절도사, 상당절도사, 흥평절도사직을 설치했다. 이러한 내지절도사의 설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남양절도사, 하남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관내절도사,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경기절도사, 동기절도사, 청밀절도사, 상당절도사 등 대부분의 지방이 절도사들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며, 기존의 지방행정체계는 절도사들의 번진체계에 흡수되어 버린다."

(자료: 안록산의 난, 나무위키, 인용출처: 본 블로그, 카테고리, 당나라)

 

"곽자의와 이광필이 사사명을 몰아붙이고, 안록산이 동관 공략에 매진하는 사이 의병을 일으킨 안진경은 평원, 청하의 군진을 아우르고 병력을 모아 하북 일대의 안록산 세력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안록산이 파견한 태수인 원지태가 병력을 모아 저항했으나 당읍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패배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북해태수 하란진명 등이 안진경에게 합류하면서 안진경군은 그 규모가 더더욱 커져 하북의 대부분을 평정한다. 안진경은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평원태수직에 더해 하북채방사직이 더해진다."

(자료: 안록산의 난,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당나라)

 

혹자는 바이칼호를 북해로 본다는 주장을 하나, 당시 당나라는 그 지역까지 진출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북해절도사나, 북해 태수는 당나라 영역에 임명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회흘이란 위구르제국은 동돌궐이 망한 후 세워진 나라라 한다. 즉 북해위의 위치에 있는 나라인 것이다. 문무님은 북해 위에 나라가 또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북해가 바다가 아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필자가 추정하는 북유럽을 고려하면 북해위에 돌궐이나 회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 필자의 글 일부 인용)

 

 

 

 

9) 한수(漢水)와 한성(漢城),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의 태산한성(太山韓城)

 

한수와 한성은 한나라 한자를 쓴다. 즉 한나라의 영역이었다는 의미이다. 한반도가 한나라의 영역이었을까? 필자는 그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는 한성(漢城)에 대한 기록이 없다. 대신 태산한성(太山韓城)이란 성이름이 등장한다. 태산한성이란 한성(韓城)이 태산에 인접하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한반도 사관을 가진 사가들의 주장대로 아리수를 건넌 광개토태왕이 한강을 건너 공격했다고 하면, 한성(韓城)이 아닌 한성(漢城)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서울 근처에 태산이 있는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는 태산이 있는가 말이다. 적어도 태산이라 하면 알프스의 몽블랑산이나 히말라야산맥의 산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한성, 한수가 없고, 태산한성도 없다.

 

 

필자는 아리수가 다뉴브강이라 판단한다. 다뉴브강은 항가리어로 Donaris라 한다. Don은 강을 말한다 한다. 바로 아리수강인 것이다. 그리고 태산한성은 알프스산맥아래 있는 한민족의 성이라 판단한다. 한나라 한이 들어간 한성은 프랑스의 Clermont Ferrand이라 추정한다.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한성백제 점령, 이후 백제 무령왕 시기의 한성회복, 고구려 문자왕 시기의 한성공격 실패 등을 고려한 추정이다. 한수는 이 Clermont-Ferrand 주위의 강이 아닌가 한다.

 

중공사학자들은 한수를 장강(양자강)의 지류 강으로 주장하지만 (아래 지도 참조), 필자가 보기에 황허강인 Loire river의 지류강으로 추정된다.

 

https://lainfos.tistory.com/333

 

 

 

백제가 활동한 한수(漢水)지역은 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에 있었다

'의문의 한 중 일 역사'가 마지막편으로 이어집니다. X. 백제가 활동한 한수(漢水)지역은 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한수(漢水) 이북에서 백성을 징발해 쌍현성을

lainfos.tistory.com

 

 

(자료 : 한수(漢水), 위키백과)

 

 

10) 광개토태왕이 정복한 각미성(관미성)의 지형

 

광개토태왕이 정복한 각미성(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에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7군데로 동시에 공격하여 20일만에 정복하였다 하였다. (아래 자료 참조) 그런데 이러한 지형에 맞는 섬이 한반도 서해에 있는가? 그 지리적 특수성을 알고도 뻔뻔히 인천 앞바다에 있다고 반도 사관 사학자들은 말한다. 너무 파렴치하지 않는가? 일반인들도 이해 시키지 못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사기치는 자들이라 해도 변명할 수 없다. 어느 재야 사학자는 한반도에서 이러한 지형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거금을 주겠다고 내기를 거는 솔직함을 보였다. 더 나아가 이 지형에 맞는 지역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역할도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392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다.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원년

 

(자료 : 관미성, 나무위키)

 

 

필자는 오래 연구 끝에 이 지역이 영국 서쪽의 웨일즈에 있는 지역이 아닌가 판단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11) 김해는 신라와 가야 사이의 바다

 

현재 한반도 남부에 김해(金海)라는 지명이 있다. 그리고 가야의 중심지라 반도사관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김해의 해자는 바다이다. 즉 바다 지명인데 육지 지명으로 쓰고 있다. 중공의 청해(靑海)와 같은 역사적 지명 이동의 결과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이미 연구한 바 있다. 아래 글을 참조하시면, 한반도의 역사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자료 : 수로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가야/왜)

 

상기 자료가 술법을 논하는 것을 보면, 다소 현설성이 떨어진 이야기가 있으나, 탈해가 배를 타고 나가 계림의 땅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판단된다. 즉 김수로왕의 가락국과 계림의 신라는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석탈해가 다파라국 출신이라는 것과 다파라국이 고구려의 협보가 연안을 따라 도착한 구사한국과 가라해, 다파라국 이야기에서 더욱 구체화 된다. (아래 자료 참조)

 

"한단고기 고구려본기 중

 

협보가 마한의 산중에 살았는데 그를 따라서 사는 자가 수백여집이나 되었다. 여러해 동안 흉년이 들어 떠돌아 다니다가 장혁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무리를 꾀어 양식을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바다와 포구를 거쳐 조심조심 배를 저어 곧장 구사한국에 이르렀다. 이곳이 가라해 북쪽해안이다. 여기서 머문지 몇 달만에 아소산에 옮겨 살았다. 이 사람이 다파라국 시조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외에 실질적인 2인자로 추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온 유리가 왕이 되자 미움을 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마한의 구사한국 혹은 구야한국에 도달했다고 전한다.

 

구야한국은 남가라로, 전성기에는 대가라로 불렸고, (한반도) 남단뿐만 아니라 바다건너 왜 지역의 구주에 또 하나의 분국을 이루었고, 구주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한단고기에 전하길 구주에 있던 구야한국은 변진 구야국인들이 모여 산 곳으로, 구야본국인들이 직접 다스렸다고 한다. '

 

(출처 : 필자의 본 블로그 글, 금관가야는 지중해의 카르타고인가? )

 

즉 협보의 이야기, 석탈해의 이야기, 그리고 금관가야 김수로왕 이야기 모두에서 가야는 고구려, 신라로부터 바다 건너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김해는 바다를 지칭한 지명이라는 것이 역사적 자료로 증명되는 것이다. " (필자의 아래 글 중 일부 인용)

 

 

 

 

12) 백제의 백강은 남북으로 흐른다

 

당나라의 군대가 신라와 협공하는 백제의 백강(백마강)의 전투기록을 보면 당나라의 소정방의 군대가 백강의 우측을 통해 올라갔다고 기록된다. 즉 백강은 남북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백마강은 서쪽으로 흐른다. 즉 한반도에 백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래의 글에서 당시 전투와 관련된 성들과 백제 부흥운동의 내용을 바탕으로 터어키 남부 지방에서의 백강을 추론했다. 백강은 지중해로 흐르는 Aksu river이며, Aksu는 백강이란 의미라 한다. (필자의 아래 글 참조)

 

 

 

 

 

 

 

Picture of Aksu River (White water) in Lycia, Antalya province, Turkey

 

 

 

13) 토함산

 

토함산은 여러 삼국사기 기록을 볼 때 화산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지금의 경주 주위에 화산이 있는가?  필자는 이태리의 폼페이가 토함산의 피해지로 판단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https://lainfos.tistory.com/431

 

토함산과 폼페이

I. 머리말 필자는 초기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지 않았나 추정한다. 박혁거세의 모습과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왕망 모습도 유사하고, 신주가 진흥왕이후 생긴 것과 더불어, 진한(秦韓)의

lainfos.tistory.com

 

 

 

14)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에 대한 아래 자료를 보자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주로 해남·완도·무안·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일대에서 성행되어왔다. 노래와 무용과 놀이가 혼합된 부녀자들의 놀이로 주로 추석날밤에 행하여지며 정월대보름날밤에 하기도 한다. 명칭은 ‘강강수월래’ 또는 한자로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로 표기하는 일도 있으나 ‘강강술래’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양조로 느리게 노래를 부를 때는 ‘강강수월래’로 길게 발음된다.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순신(李舜臣)과 관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남 우수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군에 비하여 아군의 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도록 했다.

 

바다에서 옥매산의 진영을 바라본 왜병은 이순신의 군사가 한없이 계속해서 행군하는 것으로 알고, 미리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근처의 마을 부녀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던 관행이 강강술래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강술래>의 기원은 이순신의 창안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다.

 

한자로는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라고 표기하고,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해석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 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자료: 강강술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즉 강한 강(姜)족이 물을 건너 넘어 온다는 노래이다. 임진왜란 시 이순신장군이 시켜서 불렀던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 남쪽에 강족이 있었나? 어이없는 한반도 사관이다. 필자는 강족이 스페인지역이 아닌가 한다. 장수왕이 강왕이란 시호를 북위의 효문제로부터 받은 것은 당시 고구려가 강주(姜州)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https://paulcgpark.tistory.com/78

 

강강술래의 의미 (updated)

강강술래, 강강술래, 하는 춤은 필자는 그저 하나의 전래 춤인줄 알았다. https://youtu.be/OgMENkJs16w?si=21m6xFJhxrAg9gs- [국악 MV] 강강술래 - 국립남도국악원 | 국악한마당 | KBS 방송 (KBS 전주) 그런데 얼마

paulcgpark.tistory.com

 

 

 

https://lostcorea.tistory.com/1724

 

강거(康居)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에 있지 않았을까?

제목 : 후백제의 견훤이 공격한 강주(康州)(Kangju)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지 않았을까? 강거(康居)의 강(康)은 강주(康州)와 같이 지역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은 강(康)지역, 즉 강거지역

lostcorea.tistory.com

 

 

이상으로 지리적 조건에 의한 한반도 사관의 검토를 마친다. 다음으로는 비지리적 조건에 의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에 대한 역사서와 역사관을 가진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이들 한국사의 후손들로 보인다. 다만 언제 한반도로 이주한 것인지 그것이 관건이다. 필자의 모친께서도 이사와 보니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일제 시대의 이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진정한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연구들도 진실하게 행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