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백제의 아단성을 찾고자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민을 해왔다. 그리스 아테네를 간 Alaric I(광개토태왕 추정)의 행적을 바탕으로 아테네성이 아닌가 하기도 하고, 튀르키예의 Adana province를 바탕으로 지역에 고구려성 같은 원형의 치가 많은 성모습을 보고, 이 지역이 아닌가 하기도 하고, 스코틀랜드의 Edinburg castle이 고구려의 원형 치를 가진 것을 보고 아단성 (Edin성, burg는 성이라는 뜻)이 아닌가 하기도 하였다. 단지 음가 차환의 성이름이라 생각하니, 여러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3가지 점이 이러한 추정의 지역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는 한국사에서 아단성과 관련하여,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책계왕 시기 286년 아단성을 중수하였고, 광개토태왕의 백제성 중 공취한 것중의 하나인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 장수왕 시기 476년 아단성을 중수하였다고 하는 기록과, 고구려 평안왕 말 시기 590년에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아단성 전투에서 활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은 아단성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책계왕의 기록에 아단성과 사성(蛇城, snake castle)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성과 인접한 아단성을 추정할 수 있다.
셋째는 아단성이 잡진성과 함께 광개토태왕 비문의 수묘인 성으로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아단성과 잡진성을 함께 간연 10가로 정한 기록인 것이다. 이는 아단성과 잡진성이 인접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우선 책계왕 시기의 아단성이 어디인지 본 글에서 알아 보고자 한다.
II. 본 론
아단성 (阿언덕아, 旦아침단, 城 재성)은 언덕위에 있는 성이라는 뉴앙스를 가졌지만 모든 성이 언덕위에 있을 수 있으므로, 음가차환의 한자로 판단된다. 따라서 '아단'이란 음가가 있는 성이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 신라의 전투지역이라는 것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가까이 있는 지역에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필자는 십여년의 연구 끝에, 백제는 로마제국의 역사, 고구려는 고트족, 훈족의 역사, 그리고 신라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역사로 추정하였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에 실린 다른 글들을 참고하시면 한다.
1. 백제 책계왕 아단성 중수 (286년)
阿旦城
아단성
阿 언덕 아 旦 아침 단 城 재 성
백제가 고구려에 대비하여 쌓았는데, 백제 책계왕(責稽王) 원년(286)에 이를 중수하였으며, .......
(자료 : 네이버 한자말 사전)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을 염려,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필자는 아단성阿旦城의 잘못으로 추정)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
(자료 : 책계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상기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단성은 백제 책계왕 원년 286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된다. 백제가 쌓았다는 것이고 고구려의 위협에 대항하여 쌓았다는데, 고구려와 신라 어느 나라에 대항한 것인지는 검토해보며 살펴 보자. 상기 자료에서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백제가 쌓았다 하나, 고구려와 신라가 모두 언급되는 아단성으로 보아 삼국이 가까운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아래 삼국사기를 보면, 286년이전에 백제는 고이왕 시기(234-286)에 신라와 주로 전쟁을 했다. 따라서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여 아단성을 쌓았다는 기술 보다는 신라에 대항하여 아단성을 쌓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1) 286년 삼국사기 기록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 (234-286) 본기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234)
AD 235 : 공백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236)
AD 237 : 공백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238)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9] (238)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238)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239)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240)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240)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240)
AD 241 : 공백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242)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242)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242)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243)
AD 244-245 : 2년 공백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246)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246)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247)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247)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248)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248)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249)
AD 250-254 : 5년 공백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255)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255)
AD 256 : 공백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257)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258)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259)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260)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260)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 좌평에 임명하다 (260)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261)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 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261)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261)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262)
AD 263 - 265 : 3년 공백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266)
AD 267- 268 : 2년 공백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269)
AD 270 - 271 : 2년 공백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272)
AD 273 - 277 : 5년 공백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278)
AD 279 - 282 : 4년 공백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283)
AD 284 - 285 : 2년 공백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286)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286)
(자료 : 삼국사기, 고이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Note)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 (286-298) 본기
一年冬十一月 책계왕이 즉위하다 (286)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286)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286)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287)
AD 288 - AD 298 : 11년 공백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298)
(자료 : 삼국사기, 책계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Note)
그래서 신라와 백제의 싸움터로 시작한 아단성으로 고려할 때, 신라의 동시기 삼국사기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백제와 신라 동시에 286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전에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웠는데, 백제가 주로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방어하는 차원으로 기록된다. 그중에서 신라의 봉산성과 괴곡성이 자주 언급된다. 즉 서쪽에 있는 백제가 동쪽에 있는 신라를 주로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와 신라의 접경에 위치한 아단성이 중수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일단 가능하다.
<삼국사기> 신라 미추이사금 (261 - 284) 본기
一年春一月 미추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61)
一年春三月 용이 궁 동쪽 연못에서 나타나다 (AD 261)
一年秋七月 금성 서문의 화재로 민가가 불타다 (AD 261)
二年春一月 이찬 양부를 서불한으로 삼다 (AD 262)
二年春二月 국조묘에 제사지내고 사면한 후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하다 (AD 262)
三年春二月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를 보다 (AD 263)
三年春三月 황산에 행차해 나이 많고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다 (AD 263)
AD 264 : 공백
五年秋八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AD 265)
AD 266 : 공백
七年 남당에서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묻다 (AD 267)
AD 268 - 270 : 3년 공백
十一年春二月 농사짓는 일에 해가 없도록 영을 내리다 (271)
十一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다 (271)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AD 271)
AD 272 - 274 : 3년 공백
十五年春二月 신료들이 궁실을 고쳐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다 (AD 275)
AD 276 : 공백
十七年夏四月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AD 277)
十七年冬十月 백제 군사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파진찬 정원이 이를 막다 (AD 277)
AD 278 - 279 : 2년 공백
十九年夏四月 가물고 죄수의 정상을 살피다 (AD 280)
二十年春一月 홍권을 이찬으로, 양질을 일길찬으로, 광겸을 사찬으로 삼다 (AD 281)
二十年春二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AD 281)
二十年秋九月 양산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다 (AD 281)
AD 282 : 공백
二十二年秋九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AD 283)
二十二年冬十月 백제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이 막다 (AD 283)
二十三年春二月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위로하다 (AD 284)
二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AD 284)
(자료 : 삼국사기, 미추이사금,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Note)
신라 유례이사금 (284-298) 시기 기록을 보면, 백제와 신라가 286년 화친을 했고, 그 이후 시기에 신라는 신라의 사도성과 장봉성에서 왜와 싸운 방어한 기록이 주를 이룬다. (아래 기록 참조) 그러나 왜의 공격이 일단락된 후(295년)에는 297년 옛 이서국(백제?)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쳤다 기록되었다. 이 시기 299년 로마제국의 Diocletian 황제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수도 Ctesiphon을 공격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 유례 이사금 (284-298) 본기
一年冬十月 유례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84)
二年春一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285)
二年春二月 이찬 홍권을 서불한으로 삼다 (AD 285)
三年春一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다 (AD 286)
三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286)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AD 287)
AD 288 : 공백
六年夏五月 왜병에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다 (AD 289)
七年夏五月 물난리로 월성이 무너지다 (AD 290)
八年春一月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다 (AD 291)
九年夏六月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다 (AD 292)
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292)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AD 293)
十一年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다 (AD 294)
十一年秋七月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294)
十二年 왕이 왜국을 정벌하려다 실행하지 않다 (AD 295)
AD 296 : 공백
十四年春一月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치다 (AD 297)
十五年春二月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다 (298)
十五年冬十二月 왕이 죽다 (AD 298)
(자료 :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Note)
참고로 이시기의 고구려 서천왕(270-292) 시기 기록을 보면, 주로 서쪽의 신성과 숙신의 단로성 전투가 주를 이룬다. 필자는 신성과 남소성이 이태리 북부에 있는 성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서천왕은 고구려가 요수 국경지대인 서쪽으로 진출한 나아가 서해인 대서양까지 진출한 왕으로 판단한다. (아래 필자의 글 참조)
https://blog.naver.com/lainfos/223946176184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은 이태리 북부에 있었다
I. 머리말 광개토태왕이 후연과 싸운 신성과 남소성의 싸움은 광개토태왕이 전투에서 패배한 기록으로 유...
blog.naver.com
https://blog.naver.com/lainfos/222972347128
고구려의 서해와 남해
부제 1 : 북해에 접한 한민족의 역사 부제 2 : 천리에 걸쳐 있는 백두산 부제 3 : 험한 지형에 둘러 쌓인 ...
blog.naver.com
《삼국사기》 고구려 서천왕 본기 (270-292)
一年冬十月 서천왕이 즉위하다 (270)
二年春一月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다 (271)
二年秋七月 국상 음우가 죽다 (271)
二年秋九月 음우의 아들 상루를 국상으로 삼다 (271)
二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271)
三年夏四月 여름에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다 (272)
三年夏六月 가뭄이 들다 (272)
四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273)
四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273)
AD 274-275 : 2년 공백
七年夏四月 신성에서 흰 사슴을 잡다 (276)
七年秋八月 신성에서 돌아오다 (276)
七年秋九月 신기한 참새가 궁궐에 모이다 (276)
AD 277-279 : 3년 공백
十一年冬十月 왕의 동생 달가를 보내 숙신의 단로성을 빼앗다 (280)
AD 281-285 : 5년 공백
十七年春二月 왕의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역을 도모하다 (286)
AD 287 : 공백
十九年夏四月 신성에 행차하다 (288)
十九年秋八月 흰 사슴을 잡다 (288)
十九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288)
十九年冬十一月 신성에서 돌아오다 (288)
AD 289 - 291 : 3년 공백
二十三年 서천왕이 죽다 (292)
(자료 : 삼국사기, 서천왕,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참고Note)
즉 286년 백제의 아단성 중수는 고구려에 대한 방어차원이 아닌 신라에 대항하는 방어차원의 중수가 아닌가 추정된다. 즉 아단성은 신라의 서쪽 그리고 백제의 동쪽 국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로마사에서는 이 시기 페르시아와 치열한 전쟁을 한다. 이러한 추정을 가지고 로마사에서의 역사를 살펴 보자.
2) Diocletian (Emperor, r 284-286, 286-305(East))
이제 286년을 전후로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Diocletian황제 시기의 상황을 알아 보자.
"Diocletian's reign stabilized the empire and marks the end of the Crisis of the Third Century. He appointed fellow officer Maximian as Augustus, co-emperor, in 286. Diocletian reigned in the Eastern Empire, and Maximian reigned in the Western Empire. Diocletian delegated further on 1 March 293, appointing Galerius and Constantius as Caesars, junior co-emperors, under himself and Maximian respectively. Under this 'tetrarchy', or "rule of four", each emperor would rule over a quarter-division of the empire. Diocletian secured the empire's borders and purged it of all threats to his power.
디오클레티안의 통치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로마제국의 3세기 위기를 끝맺게 했다. 286년에는 동료인 Maximian을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로마를 통치했다. 293년에는 Galerius를 자신 감독하의 Caesars, Constantius를 Maximian하의 어린 공동황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4명이 나누어 다스리는 Tetrarchy를 이루었다. 디오클레티안은 제국의 국경을 안전하게 하고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을 모두 제거했다. (상기 내용)

Map of Tetrachy in Roman Empire (source : wikipedia)
He defeated the Sarmatians and Carpi during several campaigns between 285 and 299, the Alamanni in 288, and usurpers in Egypt between 297 and 298. Galerius, aided by Diocletian, campaigned successfully against Sassanid Persia, the empire's traditional enemy. In 299 he sacked their capital, Ctesiphon. Diocletian led the subsequent negotiations and achieved a lasting and favourable peace..............
디오클레티안 황제(재위 284-305)는 백제 책계왕 시기의 로마 황제로서, 다뉴브강 위의 Sarmatians, Capri등과 285-299 기간동안 여러 전쟁을 하여 승리했으며, Alamanni와는 288년, 이집트 반란군과는 297-298 기간동안 전쟁을 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도움을 받은 갈레리우스는, 제국의 전통적인 적인 사사니언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승전했는데, 299년에는 수도 크테시폰을 포위하여 이후 지속적이고 유리한 평화조약을 이끌었다. (상기 내용)
Conflict with Sarmatia and Persia (사르마티아와 페르시아와의 갈등)
After his acclamation, Maximian was dispatched to fight the rebel Bagaudae, insurgent peasants of Gaul. Diocletian returned to the East, progressing slowly.[66] By 2 November, he had only reached Civitas Iovia (Botivo, near Ptuj, Slovenia).[67] In the Balkans during the autumn of 285, he encountered a tribe of Sarmatians who demanded assistance. The Sarmatians requested that Diocletian either help them recover their lost lands or grant them pasturage rights within the empire. Diocletian refused and fought a battle with them, but was unable to secure a complete victory. The nomadic pressures of the European Plain remained and could not be solved by a single war; soon the Sarmatians would have to be fought again.[68]
Maximian은 황제 선언후 Gaul지역의 농민반란인 Bagaudae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디오클레티언은 동부로 서서히 돌아왔다. 285년 봄, 그는 발칸반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Sarmatians부족과 마주쳤다. 사르마티언은 디오클레티온에게 자신들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데 도와주거나 그들에게 로마제국안에서 목축하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디오클레티온은 거절하고 사르마티언과 전투를 하였는데, 완벽한 승리를 확보하진 못했다. 유럽평원의 목축인들의 압력은 계속남아 있었고, 단일 전쟁으로 해결될 수도 없었다. 사르마티언들은 곧 다시 싸워야 했다. (상기 내용)
Diocletian wintered in Nicomedia.[Note 3] There may have been a revolt in the eastern provinces at this time, as he brought settlers from Asia to populate emptied farmlands in Thrace.[70] He visited Syria Palaestina the following spring, [Note 4] His stay in the East saw diplomatic success in the conflict with Persia: in 287, Bahram II granted him precious gifts, declared open friendship with the Empire, and invited Diocletian to visit him.[73] Roman sources insist that the act was entirely voluntary.[74]
디오클레티온은 겨울에 Nicomedia(아나톨리아 서쪽 도시)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소아시아에서 트라키아지방의 빈 농토로 이주시킴으로 인해, 동부지방에서 반란이 있었던 같다. 다음해 봄에 시리아 Palestina를 방문했다. 동부에서의 그의 체류는 페르시아와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푸는데 성공하게 했다 : 287년에 Bahram II (페르시아 왕)는 디오클레티온에게 귀중한 선물을 했고, 로마제국과 우호관계를 선언했고 디오클레티온을 초청했다. 로마 자료는 이 행동이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상기 내용)

Roman-Persian Frontier in late antiquity (source : Wikipedia)
Around the same time, perhaps in 287,[75] Persia relinquished claims on Armenia and recognized Roman authority over territory to the west and south of the Tigris. The western portion of Armenia was incorporated into the empire and made a province. Tiridates III, the Arsacid claimant to the Armenian throne and a Roman client, had been disinherited and forced to take refuge in the empire after the Persian conquest of 252–53. In 287, he returned to lay claim to the eastern half of his ancestral domain and encountered no opposition.[76]
거의 동일한 시기에 아마도 287년에, 페르시아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토주장을 포기하고 티그리스강의 서쪽과 남쪽의 영토에 대한 로마제국의 권위를 인정했다. 아르메니아의 서쪽부분은 로마제국의 지방으로 포함되었다. 아르메니언 왕조 Arsacid의 왕과 로마 위성국을 주장하는 Tiridates III는, 페르시아가 정복 (252-253)한 후, 왕위를 인계받지 못하고 로마제국으로 피신했었다. 287년에 돌아와, 그의 조상들의 지역의 동쪽 반절을 주장했고 아무 반대도 없었다. (상기 내용)
Bahram II's gifts were widely recognized as symbolic of a victory in the ongoing conflict with Persia, and Diocletian was hailed as the "founder of eternal peace". The events might have represented a formal end to Carus's eastern campaign, which probably ended without an acknowledged peace.[77] At the conclusion of discussions with the Persians, Diocletian re-organized the Mesopotamian frontier and fortified the city of Circesium (Buseire, Syria) on the Euphrates.[78]
Bahram II의 선물은 페르시아와의 갈등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었고, 디오클레티온은 영구 평화의 확립자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이벤트들은 평화없이 끝난 이전의 Carus황제의 동부 원정에 끝을 맺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와의 논쟁을 맺으면서, 디오클레티언은 메소포타미아 국경을 재조정하고 유프라테스강에 있는 Circesium (Buseire, Syria)도시를 요새화했다. (상기 내용)
(source : Diocletian,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로마제국)
상기 내용에서 디오클레티온 황제시기 로마는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 서쪽과 남쪽의 영토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디오클레티온황제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국경지역에 있는 유프라테스강가의 Circesium을 요새화했다. 그래서 Circesium이 혹시나 아단성인지 알아 보기 위해 Circesium에 대해 아래에서 알아 보자.
"Circesium (Classical Syriac: ܩܪܩܣܝܢ Qerqesīn, Ancient Greek: Κιρκήσιον),[1] known in Arabic as al-Qarqisiya, was a Roman fortress city near the junction of the Euphrates and Khabur rivers, located at the empire's eastern frontier with the Sasanian Empire. Procopius calls it the "farthest fortress" (φρούριον ἔσχατον) of the Romans.[2] It was later conquered by the Muslim Arabs in the 7th century and was often a point of contention between various Muslim states due to its strategic location between Syria and Iraq. The modern town of al-Busayra corresponds with the site of Circesium.
Circesium은 유프라테스강과 Khabur강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 있는 요새도시로서, 사사니언 페르시아와 접한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에 위치하였다. Procopius는 로마의 가장 먼 요새라 부른다. 이 성은 후에 7세기에 무슬림 아랍에 의해 정복되었고,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자주 여러 무슬림국가들사이의 분쟁 지점이 되었다. 현재의 al-Busayra가 Circesium의 장소에 해당한다. (아래 지도 참조) (상기 내용)

Circesium in Syria (source : Wikipedia)
Etymology and location
The name Circesium or castrum Circense is of Graeco-Roman origin and translates as "the castle with the circus".[3] Qerqusion (also spelled Qarqūsyōn) and al-Qarqīsiyā (also spelled 'Qarqīsīā) are the Syriac and Arabic versions of the Latin name, respectively.[3][4] The Parthian transliteration, attested in Shapur I's inscription at the Ka'ba-ye Zartosht, is Krksyʾ.[4] The etymology of the name was known to the medieval Muslim geographer, Hamza al-Isfahani, who wrote al-Qarqīsiyā stemmed from qirqīs, the Arabicized form of "circus".[3] The ancient site was situated at the eastern bank of the Euphrates River, adjacent to the confluence of the Khabur River.[3]
Circesium이름 또는 Circense 요새는 그리스-로마에서 온 말이고, Circus (전차경주 원형경기장)를 가진 성곽이라 번역된다. Querquision과 al-Qarqisiya는 라틴이름의 시리아버전과 아랍버전이다. 파르티언어로는 Krksy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중세 무슬림 지리학자 Hamza al-Isfahani가 쓴 qirqis로부터 온 al-Qarqisiya, "circus"의 아랍어 형태로 알려졌다. 고대 장소는 유프라테스강의 동쪽 강둑, 카부르강과 만나는 곳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 (상기 내용)
History
Antiquity
A Roman military station likely existed in this location as early as 256 AD as the place is listed in King Shapur I's (r. 240–270) inscription at the Ka'ba-ye Zartosht, among towns taken from the Romans in 256 during the second Roman campaign.[4] Later, having reverted to Roman hands, Emperor Diocletian (r. 284–286) further enforced Circesium into a strongly fortified outpost on the far eastern frontier of the empire, in order to improve the defensive capabilities against the Sasanians.[3][4] Circesium was ceded to the Sasanids by Emperor Jovian (r. 363–364) in a treaty signed in 363.[5]
페르시아 왕 Shapur I(r 240-270) 시기 256년 두번째 로마원정에서 로마로부터 취한 도시 중 하나의 로마 군사도시로서 Circesium 장소가 Shapur I왕의 금석문에 나타난다. 후에 로마 영역으로 다시 돌아간 후, Diocletian 황제 (r 284-286)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제국의 동쪽 끝 국경에 있는 Circesium을 강력한 요새로 만들었다. Circesium은 Jovian 황제시 (r 363-364) 363년 조약에 의해 사사니언 페르시아에 양보되었다. (상기 내용)
In early 363, during his ill-fated Sasanian campaign, Emperor Julian (r. 361–363) moved through Circesium and crossed the Khabur River by using a pontoon bridge.[4] According to contemporary sources, the cenotaph of Emperor Gordian III (who had been killed during his own Sasanian campaign of 244), was still visible at Zaitha (which was located nearby Circesium) when Julian and his army moved through the area.[4]
363년 초기, Julian 황제 (r 361-363)의 실패한 사사니언 원정동안에, Julian 황제는 Circesium을 통과해 Pontoon 다리를 이용해 카부르강을 건넜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Julian황제와 그의 군대가 이 지역을 지날 때, Gordian III 황제 (244년 사사니언 페르시아 원정에서 죽임당함) 기념비가 Zaitha(Circesium 근처에 위치)에서 아직 보였다 한다. (상기 내용)
It was again restored to the Romans and according to the Notitia Dignitatum, Circesium was the headquarter of Legio IV Parthica until the 5th century.
Circesium 요새는 다시 로마로 속하게되고, Notitia Dignitatum에 의하면, Circesium은 5세기까지 Ligio IV Parthica의 본부였다 한다. (상기 내용)
(source : Circesium,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시리아)
Circesium Fortress는 로마의 동쪽 끝 국경에 있는 성곽으로서, 성안에 Circus(마차경주대회용 원형경기장)가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름이 Circesium이라 한다 (상기 글 참조). 따라서 상당히 큰 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87년에는 디오클레티언 황제하에 로마령으로 되어 더욱 요새화 하였다 기록된다. 그후 페르시아와 로마와의 잦은 전투로 페르시아령이 되었다가 로마령이 되었다가, 결국 로마령으로서 5세기를 맞는다 기록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 백제의 성 중 공취한 성중에 아단성이 있다. 그러므로 상기 Circesium(시리아)이 백제 성으로서 5세기를 맞으므로 이러한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성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훈족이 카파도키아,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했으므로, Circesium성은 이러한 지역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Circesium성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아단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첫째, Circesium이란 이름은 그리스 로마시기부터 있던 이름이라 아단성과 음가차환의 성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추정되지 않는다. 둘째, 마차 경주용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면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을 수 있다. 지금도 여러 곳에 로마시대의 많은 원형 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새화된 이 장소에는 현재 아무 ruins이 없다. 셋째, 군사 요새화 되었다면 성의 잔재나 city walls이 남아 있을 만한데,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이 좀 이상하다. 그래서 필자는 Circesium이라 하는 현재의 장소 추정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3) Adana Castle (아단성) and Yilamkale Castle (snake castle,사성) in Adana Province in Turkey
아단성과 사성이 백제 책계왕 시기 언급된다. 즉 사성과 아단성이 가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의 Adana province지역에 Adana Castle(아단성)과 snake castle(사성)이라 불리는 Yilankale castle이 있다. 즉 이 지역에 아단성과 사성이라는 성이 이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Adana castle이 아단성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입증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Adana란 이름은 4천년을 이어온 그리스 로마식 어원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Etymology
The name Adana (Turkish pronunciation: [aˈda.na] ⓘ; Armenian: Ադանա; Greek: Άδανα) has been used for over four millennia.[citation needed]
One theory holds that the city name originates from an Indo-European expression a danu 'on the river', using the same Proto-Indo-European root as the Danube, Don, Dnieper and Donets.[4]
Greco-Roman legend suggests that the name of Adana originates from Adanus, the son of the Greek god Uranus, who founded the city next to the river with his brother Sarus, whose name was given to the river.[5]
It is also sometimes suggested that the name is related to the Danaoi, the name for Greeks of the Trojan War in Homer and Thucydides.[6]
(source : Adana (city),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튀르키예)
따라서 광개토태왕 시기의 이름, 아단성에 대한 음가차환의 대상으로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아래 아단성으로 추정되는 Adana castle (Anavarza castle)의 모습은 고구려의 원형 치(keep)의 모습의 잔재가 있다. 그리고 해안가의 높은 언덕위에 있다. 전형적인 고구려의 성곽 모습과 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은 북쪽의 토레스산맥과 남쪽의 지중해로 보호되어 있어, 지중해 바다로 수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아래 지도 참조). 고구려의 많은 바다에 접한 성의 모습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수군은 매우 강하고 넓은 지역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대서양의 웨일즈 해안에서부터 지중해의 동부까지 이동하려면 수군으로 이동하는 것이 빠르다. 또한 다뉴브강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용이하게 이동한다. 라인강과 론강도 수군의 신속한 이동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만약 인도양으로 진출했다면, 이집트를 지나 홍해를 지나 아프리카 남단이나 인도로 진출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Canal(운하)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고 위키자료는 말한다.

Anavarza Castle in Turkey (source : Internet)

Adana Castle 모습 (1863 그림) (자료 : 위키피디아)

Anavarza castle location in Turkey (source : Wikipedia)
아래에서 아단성으로 추정되는 Anavarza castle에 대해서 살펴 보자.
"Anavarza Castle is an ancient castle in Adana Province, Turkey.
Anavarza 성은 튀르키예 Adana 지방의 고대 성곽이다.
The castle lies to the east of Dilekkaya village of Kozan district. .... Although the vicinity of the castle is Çukurova plains (Cilicia of the antiquity) which is almost flat, there is a hill with steep slopes of about 150 metres (490 ft) high with respect to plains. The castle was built on the hill. The hill is accessible via a path from the south.
이 성은 Kozan district의 Dilekkaya마을의 동쪽에 있다...비록 이 성곽의 근처에 거의 평지인 Cukurova평원 (고대의 Cilicia)이 있지만, 이 평원에 비해 150미터의 높이의 가파른 절벽이 있는 언덕이 있다. 이 성곽은 이 언덕위에 지어졌다. 이 언덕은 남쪽으로부터 길로만 접근할 수 있다. (상기 내용)
The castle had been built[when?] to control the ancient city with the same name. The remains of the city (which is on the plains) lies between the village and the castle. The bird's flight distance between the remains and the castle is about 1 kilometre (0.62 mi). During the history the castle had switched hands and partially ruined several times (Roman Empire, Byzantine Empire, Abbasid Caliphate, Crusaders, Armenian Kingdom of Cilicia, Mamluks of Egypt etc.).
이 성곽은 같은 이름의 고대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 도시의 잔재(평원위에 있음)는 마을과 성곽사이에 있다. 그 사이는 새가 날 수 있는 거리인 약 1km이다. 역사적으로 성곽의 주인은 여러번 바뀌고 부분적으로 황폐화되었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아바시드 칼리프, 크루세이더, 실리시아의 아르메니아왕국, 이집트의 맘룩크 등) (상기 내용)
역시 훈족의 공격인 광개토태왕의 공격과 장수왕의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Archaeological evidence indicates that the majority of the fortress is of Armenian construction, including the small basilica of T’oros I (AD 1111) and the chapels. The donjon was built by the Crusaders in the 12th century.[1] Although the city was evacuated in 1274 following an earthquake[2] the castle was used by Mamluks.
고고학적 증거는 이 요새의 대부분은 아르메니아 시기 건설된 것이며, AD 1111년의 T'oros I의 작은 군사기지와 소예배당이 있다. 치 (donjon)는 12세기 크루세이더에 의해 지어졌다. 비록 이 도시는 지진으로 1274년 소개되었으나, 성곽은 맘룩크왕국에 의해 이용되었다. (상기 내용)
(source : Anavarza castle (old Adana castl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튀르키예)
성곽의 잔재에서 고구려 성곽의 모습인 치(keep, donjon)가 남아 있고, 소예배당(chapels)이 남아 있어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나오는 수묘인제가 있는 성곽의 모습을 나타낸다. 로마사에서 발견된 chapels에서 Tombs가 흔히 발견되었다.
Anavarza castle에서 가까운 Anazarbus 도시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자.
"Anazarbus, also known as Justinopolis (Ancient Greek: Ἀναζαρβός / Ίουστινούπολις, medieval Ain Zarba; modern Anavarza; Arabic: عَيْنُ زَرْبَة), was an ancient Cilician city. Under the late Roman Empire, it was the capital of Cilicia Secunda. Roman emperor Justinian I rebuilt the city in 527 after a strong earthquake hit it. It was destroyed in 1374 by the forces of the Mamluk Empire, after their conquest of Cilician Armenia.....
Justinoplois라고도 불리는 Anazarbus도시는 고대 Cilician도시이다. 로마제국 말기에, Cilicia Secunda의 수도였다. 로마황제 Justinian I는 강한 지진이후 이 도시를 527년 다시 건설했다. 1374년에는 맘룩크제국에 의해 Cilician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후 파괴되었다. (상기 내용)
로마 황제 Justinian I는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로 판단되는 훈족, 고트족의 흔적을 지우고 다시 건설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도 이러한 유사한 내용이다. 필자는 지진이나 전염병의 탓으로 패배의 핑계를 대는 로마사의 서술을 자주 보아 왔다.
On the division of Cilicia it became the chief place of the Roman province of Cilicia Secunda, with the title of Metropolis. Early in the sixth century, in the reign of Eastern Roman emperor Justin I, it was named Justinopolis or Ioustinoupolis (Ἰουστινούπολις). The city suffered from an earthquake in 526 and was rebuilt by Justinian I and renamed Justinianopolis or Ioustinianoupolis (Ἰουστινιανούπολις);[8] but the old name persisted, and when Thoros I, king of Lesser Armenia, made it his capital early in the 12th century, it was known as Anazarva.
Cilicia의 분리에서 이 도시는 Cilicia Secunda의 로마지방 수도로서 Metropolis의 타이틀을 가진다. 6세기 초에 동로마황제 Justin I의 통치시기에 Justinopolis 또는 loustinoupolis로 이름이 지어졌다. 526년 지진을 겪은 후, Justinian I에 의해 다시 건설되고 Justinopolis or loustinoupolis로 다시 이름지어졌으나, 과거 이름은 계속 존했으며, Lesser Armenia왕 Thoros I이 12세기에 이 도시를 수도로 하였으며, Anazarva로 알려졌다. (상기 내용)
.........
Anazarbus was one of a chain of Armenian fortifications stretching through Cilicia. The castle of Sis (modern Kozan, Adana) lies to the north while Tumlu Castle and Yilankale are to the south, and the fortresses of Amouda and Sarvandikar are to the east.
Anazarbus는 Cilicia를 관통하는 아르메니아 요새들 체인중의 하나였다. Sis 성곽 (현대의 Kozan, Adana)은 북쪽에 있고, Tumlu성곽과 Yilankale성곽은 남쪽에 있고, Amouda성과 Sarvandikar성은 동쪽에 있다.
(source : Anazarbus,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튀르키예)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주위의 모든 성들이 고구려의 성곽 모습의 치를 가졌는데, 모두 12세기의 아르메니언 왕국의 성 또는 크루세이더 성이라 한다. 필자는 이런 설명에 대해 회의를 가진다.

Sis Castle in Kozan, Adana

Tumlu castle

Amouda castle

Sarvandikar castle

Map of Adana and Mersin Province in Turkey
아래에서는 사성이라 불리는 Yilankale에 대해서 알아 보자. 백제 책계왕 시기에 아단성과 사성을 고구려에 대비하여 중수했다고 나무위키 자료는 언급했다는 것을 앞부분에서 살펴 보았다. Yilankale의 성곽모습도 상기 네개의 성들 모양처럼 고구려의 치 모습을 가진 성모습이다.

Snake castle, Yilankale castle in Adana Province
"Yılankale (lit. 'snake castle' in Turkish)[4][5][6] is a late 12th[7]–13th century[4] Armenian[3][8][9] castle in Adana Province of Turkey. It is known in Armenian as Levonkla[10] (Լևոնկլա[2] "Levon's fortress") after its possible founder—King Leo (Levon) I the Magnificent[2][3] (r. 1198/9–1219) of the Armenian Kingdom of Cilicia. Medieval Armenian names attached to the site are Kovara and Vaner.[11]
Yilankale (터키어로 사성(뱀성))은, 튀르키예 Adana 지방에 있는, 12세기말 13세기의 아르메니언 성곽이다. 아르메니아어로 Levonkla (Levon의 요새)로 알려지는데, 실리시아 아르메니아왕국의 설립자 Leo (Levon) I the Magnificent 왕 (r 1198/9-1219)이후일 수 있다. 이 장소에 대한 중세의 아르메니아 이름은 Kovara and Vaner이다. (상기 내용)
A hill castle, Yılankale is located on a rocky hill overlooking the east bank of the Ceyhan River,[6] and the Bronze and Iron Age site of Sirkeli Höyük, six kilometers west of the town of Ceyhan.[12] The building is locally known as the home of Shahmaran, a mythical creature half woman and half snake.[13][1
언덕위의 성곽인 Yilankale은 Ceyhan 강 동쪽 강둑을 굽어보는 암석 언덕위에 위치하고, Ceyhan타운의 서쪽 6km에 있는 청동기, 철기시기의 Sirkeli Hoyuk (BC 12세기의 히타이트 돌무덤 장소)장소이다. 이 빌딩은 반절은 여인, 반절은 뱀의 형상을 한 Shahmaran의 집으로 지역적으로 알려져 있다. (상기 내용)
(source : Yilankale, wikipedia,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튀르키예)


Yilankale castle (source : Exceptional Adana)
Yilankale은 터키어로 Snake castle (사성, 뱀성)이란 뜻이라 한다. 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Shahmaran이란 반은 여인, 반은 뱀으로 된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으로 불려졌다 한다. 샤먼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뱀의 형상을 한 옷을 입은 모습이 priest, priestess로서 나타난다. 여하튼 snake castle이란 사성이라는 이름이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백제 책계왕 시기의 사성이란 이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성과 아단성을 중수한 백제 책계왕의 성들이 여기 Adana Province에 있지 않았나 하는 강력한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III. 결 론
이상으로 백제 책계왕 시기에 중수한 아단성과 사성의 위치가 튀르키예 Adana province에 있는 Adana Castle (Adanvarza castle)과 snake castle인 Yilankale 성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성곽들은 3세기 당시 삼국사기와 로마사 역사를 살펴볼 때, 고구려를 대비하여 쌓은 성들이 아니라, 신라를 대비하여 세운 성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단성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아단성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시작했는데, 아단성에 대한 언급이 백제 책계왕 시기에 언급이 되어서 이 시기의 역사를 살펴 보며, 이 글을 쓰게 되었으며, 사성이란 또 하나의 성곽이름이 이 아단성의 위치 추정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시기의 아단성 언급, 그리고 590년 고구려 온달 장군의 이야기가 있는 아단성에 대해서는 이후의 글에서 보다 자세히 연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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