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코카서스지역은 여러 면에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었다. 지역에 만연한 고구려 형식의 Tower와 BC 3000년부터 있어 온 이들의 역사가 또한 필자의 관심을 끌어 왔다. 이 지역은 필자가 백제로 추정하는 로마제국과 신라로 추정하는 페르시아제국이 경합한 지역이며, 나아가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훈족, 스키타인의 역사가 있어 고구려와 접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 때 고구려 신라 벡제가 접하는 지역이라서 한강유역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한반도 가정의 역사를 참고한 것이라 이내 잘못된 판단임을 깨달았다.
또한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다툼의 요지인 Lazica war의 Lazica지역은 현재 Abkhazia 지역인데 한국어로 착각하게 하는 용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쭈꾸미 등이다.
또한 동쪽의 Dagestan지역은 줄타기와 칼춤 등 민속놀이가 우리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지역은 코카서스 Avars족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그래서 관심이 많았던 지역인데, 과거의 연구에서 언급했던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싸움터인 가잠성이 Tbilisi에 있었는가를 다시 한번 검토하게 되었다
II. 본 론
먼저 가잠성에 관한 한국사의 역사 내용을 알아 보자. 특히 필자가 이에 관심을 가진 것은 611, 618, 628년 등 약 20년에 걸쳐 신라와 백제 두나라가 가잠성을 두고 싸웠다는 것이다. 그만큼 전략적인 위치에 있는 성이라는 것이며, 두 나라의 경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이러한 치열한 전투가 있던 가잠성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음가차환의 한자명인지 알아 보고, 이에 따른 위키피디아 역사를 알아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신라는 페르시아제국 그리고 백제는 로마제국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이미 오랫동안의 글을 통해 확인된 연구 결과이다.
1. 가잠성 전투의 역사
1) 611년 백제의 가잠성 함락
“백제 무왕은 신라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 611년 10월 얘기치 않게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점령했다(가잠성 전투).” (자료 : 진평왕, 나무위키)
“같은 해(611)에 백제와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10월에 백제가 가잠성(?岑城)에 쳐들어와 100여일 간의 공방전 끝에 이를 함락시키고 현령 찬덕(讚德)은 자살하였다.” (자료: 진평왕, 위키백과)
2) 618년 신라의 가잠성 탈환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까지 후속전이 치뤄졌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잠잠해지자, 616년 무왕이 모란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평왕은 618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가잠성 전투).”
[출처] <펌> 진평왕 (579-632 재위) – 나무위키
"618년, 빼앗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邊品)을 보내 이를 탈환하였으나 전 가잠성 현령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자료 : 진평왕, 위키백과)
3) 628년 백제의 가잠성 포위공격과 신라의 방어
"628년 2월에는 가잠성을 포위공격하는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자녀들을 내다 파는 일이 벌어졌다.” (자료 : 진평왕, 위키백과)
가잠성을 놓고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하였는데, 이는 백제가 무왕이 600년 즉위하고, 602년 신라에의 공격을 시작한 후로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을 아래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본기 (600-641)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AD 600)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 산성을 공격하다 (602)
603-604 : 2년 공백
六年春二月 각산성[32]을 쌓다 (AD 605)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605)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AD 606)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AD 606)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AD 607)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607)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08)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AD 608)
609-610 : 2년 공백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11)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611)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AD 611)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611)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612)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AD 612)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612)
613-615 : 3년 공백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616)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616)
617년 : 공백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618)
619-622 : 4년 공백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AD 623)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623)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623)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6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4)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5)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626)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626)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6)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627)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627)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628)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629)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630)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AD 630)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AD 630)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본기 (579-632)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AD 602)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AD 602)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AD 603)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AD 604)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AD 604)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AD 605)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AD 605)
606-607 : 2년 공백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AD 608)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AD 608)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AD 608)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AD 609)
610년 : 공백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AD 611)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함락하다)(AD 611)
612년 : 공백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AD 613)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AD 613)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AD 613)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AD 614)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AD 614)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AD 615)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615)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AD 616)
617년 : 공백
四十年 해론이 (가잠성에서) 백제와 싸우다 죽다 (가잠성 회복)(AD 618)
619-620 : 2년 공백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1)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AD 622)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AD 622)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AD 623)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3)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AD 623)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AD 624)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AD 624)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함락)하다 (AD 624)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5)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6)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왕재성)을 공격하다 (AD 626)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AD 626)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AD 627)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AD 627)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7)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AD 628)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628)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628)
五十一年秋八月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AD 629)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29)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17] (AD 630)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AD 631)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AD 631)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AD 631)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AD 631)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AD 632)
2. 가잠성의 의미
그러면 이러한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가잠성은 한자로 무슨 의미를 가졌나? 또는 음가차환의 것인가? 아래에서 알아 보자.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잠성의 '가'는 '나무이름 가'라고 한다. Microsoft IME의 한자변환에는 나오지도 않는 한자이다. 아래 내용은 네이버의 한자 사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만큼 잘 쓰이지 않는 글자라는 것이다. 고유명사에 쓰이는 글자일 수 있다. 잠(岑)자는 봉우리잠이다. 이는 흔한 글자이다. 즉 가잠성이란 봉우리에 나무가 많은 성이란 뜻으로 읽힌다. 즉 가잠성은 주위에 나무가 많다는 것으로 보인다.
가잠(椵岑)성
椵 나무 이름 가
대법원인명용
부수 木(나무목) 총 획수 13획 획순보기
1. 나무의 이름
2. 유자나무(柚子--)의 일종(一種)
3. 개 잡아매는 기구(器具)
岑 봉우리 잠, 산세 험준한 모양 음
대법원인명용
부수 山(뫼산) 총 획수 7획 획순보기
1. (봉우리 잠)
2. 봉우리, 산봉우리
3. 낭떠러지, 언덕
3. 나무가 많은 봉우리에 있는 성곽 Tbilisi의 NariKala 성곽
그런데 코카서스의 Tbilisi(in Georgia)에는 특이하게도 나무가 많은 Garden이 산봉우리 성곽 (Narikala castle) 옆에 있다. (아래 사진 참조) 위에서 살펴 본 가잠성이란 뜻과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성곽 주위에 이러한 환경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가잠성이라 이름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Tbilisi Botanical Garden and the ruins of Narikala
상기 가잠성의 한자 뜻에서 한자 '가'가 유자나무의 일종이라는 뜻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유자나무가 이곳에 있는가를 살펴 보았다. 유자나무는 영어로 citron, orange 등을 말한다. 위키피디아 자료에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AI에게 물어 보았다. 필자도 놀라운 대답을 한다. 트빌리시 식물원에 Osage orange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사진도 있다. (아래 사진 참조)

코카서스의 높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식물들의 성장이 가능한 것은 좌측의 흑해와 우측의 카스피해가 있어 지중해성 기후 같은 온난한 기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후 덕분에 이 Botanical garden에는 Bamboo 즉 대나무가 많이 있다. 따라서 죽령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다음에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가잠성의 뜻에 맞는 곳이 된다는 것만 확인하고 넘어 가자.

4. 비잔틴-사사니언 전투 (602-628)
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맞으려면, 그 주위의 역사가 신라와 백제의 다툼이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여러 분석을 통해 백제는 로마제국이고, 신라는 페르시아라고 추정했다. 따라서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비잔틴과 사사니언과의 전쟁 역사를 살펴 보자. 다행히도 상기 가잠성 전투 기간인 611, 618, 628 기간이 포함된 기간에 비잔틴과 사사니언간에 602-628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아래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백제 무왕 (600-641) 시기는 비잔틴의 Heraclius (610-641) 왕에 해당한다. 신라 진평왕 (579-632) 시기는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Hormizd IV (579-590)와 그의 아들 Khosrow II (590-628) 시기로 나뉘어 있다. 여기서는 가잠성 전투기간이 611-628기간이므로 Khosrow II 기간에 해당한다. 페르시아에서는 589-591기간이 내란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 기간의 진평왕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고 588년 기록되었다. 내란으로 죽은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 진평왕 삼국사기 기록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AD 586)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AD 587)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AD 588)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AD 589)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AD 589)
590년 : 공백
이 시기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피하고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아래 필자의 글 참조)에서 살펴 본 바가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진평왕의 삼국사기 기록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가들의 춘추필법(자랑할 만한 내용 위주로 적고 부끄러운 역사를 감춘는 식으로 역사 기술, 중국사가들의 역사기술방법)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또는 일제 시기, 일제들이 찬란한 한국사를 감추기 위해 그 중요한 편린들을 후세들이 알 수 없게 지워놓은 결과일 수 있다. 특히 공백으로 남은 시기의 것들이 이러한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일제의 역사왜곡은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역할 뿐만이 아닌 것이다.
602-628년기간 26년의 전쟁 기록이 단순할 수가 없다. 아래 기록을 보면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이 위협을 받는 전쟁이 오고 갔다. 초반(602)에는 비잔틴제국의 내란을 이유로 페르시아의 호스로 II세가 전쟁을 선포하고, 이후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Khosrow II (신라의 진평왕 추정)의 진격에 비잔틴은 한창 밀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당했다.그러나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백제 무왕 추정)는 내부개혁과 군재편, 그리고 직접 전선의 최전선에 나서는 등으로 622-626년동안 전세를 역전시켜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사사니언 페르시아 내에서는 반란이 일어 나고 이 여파로 호스로 2세는 목숨을 거둔다. 그 후 사사니언 페르시아는 비잔틴과 평화조약을 맺어 전쟁은 끝이 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와중에, 사사니언 페르시아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과 연합(626년)하고,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는 곡튀르크 (고구려로 추정)와 연합(627년)하여 전쟁을 하였다.
따라서 양국의 경계지역인 코카서스 아르메니아 지역을 넘어, 아나톨리아, 레반트지역, 에게해, 이집트, 페르시아 서부지역까지 전장터로 확대된다. 이러한 긴 전쟁의 와중에서 가잠성의 위치를 찾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긴 전쟁의 내용을 살펴 보면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상상하며, 많은 성중의 하나인 가잠성을 찾아 보도록 하자.
1) 총론적 설명
The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also called the Last Great War of Antiquity,[4][5][6][7] was fought between the Byzantine Empire and the Sasanian Empire. It was the final and most devastating conflict of the Roman–Persian wars (54 BC – AD 628). The previous war between the two powers had ended in 591 after the emperor Maurice helped the Sasanian king Khosrow II regain his throne.
602-628 비잔틴-사사니언 전쟁은 비잔틴제국과 사사니언 제국과의 고대의 마지막 큰 전쟁으로 또한 불리운다. 이는 로마-페르시아 전쟁 (BC 54-AD 628)중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황폐한 것이었다. 두 세력간의 지난 전쟁은 비잔틴제국의 모리스황제가 사사니언 왕 호스로 I세가 다시 왕위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 후로 591년 끝났다. (상기 내용)
In 602, Maurice was murdered by his political rival Phocas. Khosrow declared war, ostensibly to avenge the death of the deposed emperor Maurice. This became a decades-long conflict, the longest war in the series, and was fought throughout the Middle East, the Aegean Sea, and before the walls of Constantinople itself.
602년, 비잔틴제국의 왕 모리스가 그의 정치적 라이벌 Phocas에 의해 살해되었다. 호스로는 폐위된 모리스황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몇십년에 걸친 대결, 가장 긴 전쟁, 그리고 중동, 에게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성벽앞에 이른 전쟁이었다. (상기 내용)
비잔틴제국의 내란으로 모리스황제(r 582-602, 백제의 위덕왕 시기)가 살해되었는데, 모리스황제는 호스로2세(신라 진평왕 추정)가 왕위를 복위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 복수를 위해 호스로 2세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모리스황제의 도움을 받아 일부 할양해준 땅을 회복하고자, 비잔틴의 내란을 틈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아래 위키자료 내용 참조)
Toward the beginning of his reign, Khosrow II had good relations with the Byzantines. However, when in 602 Maurice was murdered by his General Phocas (602–610), who usurped the Roman (Byzantine) throne, Khosrow launched an offensive against Constantinople: ostensibly to avenge Maurice's death, but his aim clearly included the annexation of as much Byzantine territory as was feasible.[1] Khosrow II, along with Shahrbaraz and his other best generals, quickly captured Dara and Edessa in 604, and recaptured lost territory in the north, which made the Sasanian–Byzantine borders go back to the pre-591 frontier before Khosrow gave Maurice territory in return for military aid against Bahram Chobin. After having reclaimed lost territory, Khosrow withdrew from the battlefield and handed military operations to Shahrbaraz and Shahin Vahmanzadegan. The Sasanian armies then invaded and plundered Syria and Asia Minor, and in 608 advanced into Chalcedon.
(source : Khosrow II ,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사산왕조 (488-651))
Maurice (Latin: Flavius Tiberius Mauricius; Greek: Μαυρίκιος, Mauríkios; 539 – 27 November 602) was Byzantine emperor from 582 to 602. A prominent general, Maurice fought with success against the Sasanian Empire. After he became Emperor, he brought the war with Sasanian Persia to a victorious conclusion. Under him the Empire's eastern border in the South Caucasus was vastly expanded and, for the first time in nearly two centuries, the Romans were no longer obliged to pay the Persians thousands of pounds of gold annually for peace.
Maurice campaigned extensively in the Balkans against the Avars – pushing them back across the Danube by 599. He also conducted campaigns across the Danube, the first Roman Emperor to do so in over two centuries. In the west, he established two large semi-autonomous provinces called exarchates, ruled by exarchs, or viceroys of the emperor. In Italy Maurice established the Exarchate of Italy in 584, the first real effort by the Empire to halt the advance of the Lombards. With the creation of the Exarchate of Africa in 590 he further solidified the power of Constantinople in the western Mediterranean.
His reign was troubled by financial difficulties and almost constant warfare. In 602 a dissatisfied general named Phocas usurped the throne, having Maurice and his six sons executed. This event would prove a disaster for the Empire, sparking a twenty-six year war with Sassanid Persia which would leave both empires devastated prior to the Muslim conquests.
(source : Mauri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비잔틴제국(500-717))
From 602 to 622, the Sassanians gradually conquered much of the Levant, parts of Anatolia, and—for the first time—Egypt and several islands in the Aegean Sea. The counter-attacks of the new Byzantine emperor Heraclius from 622 to 626 eventually forced the Persians onto the defensive. Allied with the Avars and Slavs, the Persians attempted to take Constantinople in 626, but were defeated. In 627, allied with Turks, Heraclius invaded the heartland of Persia. After the Battle of Nineveh (627), Iranian forces were finally broken, forcing civil war-torn Persia to seek peace.
602년부터 622년까지 사사니언은 점진적으로 레반트지역의 많은 부분, 아나톨리아의 일부 그리고 최초로 이집트와 에게해의 몇몇 섬들을 정복했다. 비잔틴제국의 헤라클리우스왕의 622-626년까지의 반격은 페르시언이 결국 방어하게 만들었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과 연합하여 페르시아는 626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627년 튀르크와 연합한 헤라클리우스왕은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침범했다. 627년 니네베 전투후, 페르시아군은 마침내 분열되어 내란에 휩싸이게 되어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상기 내용)
이 전쟁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톨리아 전지역, 레반트지역, 에게해 지역, 이집트지역, 궁극적으로 페르시아 서부까지 전장터가 되었다. 그러나 거의 비잔틴 제국의 전 영토가 전장터가 된 반면, 페르시아는 서부만이 전쟁터가 되었다. 페르시아는 수도가 서쪽에 있는 탓일 수도 있지만, 결국 전쟁의 내용은 비잔틴제국의 황폐화가 더 클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페르시아가 전쟁을 준비하고 일으킨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의 삼국사기는 백제 무왕이 즉위(600)한 후 602년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백제의 선공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무왕 전에는 혜왕 (598-599), 법왕(599-600)의 짧은 기간 재위를 보여 내란의 와중에 무왕이 집권한 것으로 보여,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가 쿠테타를 일으켜 집권했다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무왕의 출신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위키피디아는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 집안이 카파도키아의 아르메니언 출신 집안이라 하였다. 헤라클리우스의 아버지가 장군이었으며, Mauris왕 시기, 590년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반란 수장인 Bahram Chobin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아프리카 총독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후 모리스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 Phocus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헤라클리우스는 602년 임시 왕관을 쓴 후, 610년 정식으로 황제에 오른다.
By the end of the war, both sides had exhausted their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They were thus vulnerable to the emergence of the Islamic Rashidun Caliphate in the 630s, whose forces invaded both empires. Over the course of the rest of the 7th century, Muslim armies swiftly conquered the Levant, Mesopotamia, Persia, the Caucasus, Egypt, North Africa, and the Iberian Peninsula alongside southern parts of France after 711 AD.
전쟁이 끝나자, 양쪽 진영은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이 고갈되었다. 그들은 그래서 630년대에 양 제국을 공격한 이슬람 라시딘 칼리프에 취약하게 되었다. 7세기 나머지 기간에 걸쳐, 무슬림 군은 신속하게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코카서스, 이집트, 북아프리카, 그리고 711년이후 프랑스남부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다.
(상기 내용)
이 30년 가까운 전쟁으로 비잔틴과 사사니언 페르시아가 모두 무슬림 아랍에 의해 정복당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전쟁이 결국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왕조의 변화가 결과된 것이 아닌가 한다.
2) 사사니언 비잔틴 전쟁 (602-628)의 연대기 표
이 전쟁의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모두 열거하는 것은 너무 내용이 길어지므로, 필자가 연대표로 정리한 아래 자료를 보자
아래 연대표에서 관련내용과 관련된 왕을 다음과 같이 약자로 표시했다. 즉 비잔틴 Phocus왕 시대는 (PC), 비잔틴 Herculius왕 시대는 (HC), 그리고 사사니언 Khosrow II와 시기는 (KR)로 표시했다. 참고로 관련 기술 내용을 아래에 첨부했다.
** 603(PC) : 아바르족 슬라브족의 비잔틴 발칸반도 공격, 테살로니카 북쪽 발칸 점령
The Avars and Slavs launched numerous raids into the Balkan provinces of the Byzantine Empire, and the Sassanian Empire launched an invasion of the eastern provinces of the empire.
The Avars were able to take all land in the Balkans north of Thessalonika.
** 603 (PC) :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비잔틴 침공
After Phocas usurped and killed Maurice, the Persians invaded the empire in 603. [3]
** 604 (KR) : 사사니언의 Dara, Edessa 점령
Khosrow II, along with Shahrbaraz and his other best generals, quickly captured Dara and Edessa in 604, and recaptured lost territory in the north, which made the Sasanian–Byzantine borders go back to the pre-591 frontier before Khosrow gave Maurice territory in return for military aid against Bahram Chobin
** 606/607(KR) : 튀르크-헤프탈의 이란 중부 스파한 유린 및 사사니언의 동 호라산 반격
In ca. 606/607, Khosrow recalled Smbat IV Bagratuni from Sasanian Armenia and sent him to repel the Turko-Hephthalites, who had raided as far as Spahan in central Iran. Smbat, with the aid of a Iranian prince named Datoyean, repelled the Turko-Hephthalites from Iran, and plundered their domains in eastern Khorasan, where Smbat is said to have killed their king in single combat..
** 607 (PC) : 사사니언의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점령
By 607, the Sassanids had occupied Mesopotamia, Syria, and much of Asia Minor, as far as the Bosphorus.[6]
** 610 (PC) : 사사니언의 제노비아(시리아) 점령
By the time his reign ended in 610, the Persians had already crossed the Euphrates and taken Zenobia(city in Syria).
** 613-614(KR) : 사사니언의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점령
In 613 and 614, General Shahrbaraz besieged and captured Damascus and Jerusalem, and the True Cross was carried away in triumph.
** 614 (HC): 아바르족 슬라브족의 발칸반도 도시 함락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발칸에 침략하여 Singidunum(Belgrade), Viminacium(Kostolac), Naissus (Nis), Serdica(Sofia) 등을 포함한 비잔틴도시들을 함락했다. 614년에는 Salona룰 파괴했다.
** 618 (KR) : 사사니언의 이집트 점령
Soon afterwards, Shahin marched through Anatolia, defeating the Byzantines numerous times; he conquered Egypt in 618. The Byzantines could offer but little resistance, as they were torn apart by internal dissensions, and pressed by the Avars and Slavs, who were invading the Empire from across the Danube River.

Campaigns from 611 to 624 through Syria, Anatolia, Armenia, and Mesopotamia (Red: Persians, Blue;Heraclius)
** 622/623(KR) : 사사니언의 동 에게해 섬 Rodes 등 점령
In 622/3, Rhodes and several other islands in the eastern Aegean fell to the Sasanians, threatening a naval assault on Constantinople.[30][31][32][33]
Such was the despair in Constantinople that Heraclius considered moving the government to Carthage in Africa.[34]
** 622(KR) : 사사니언의 에게해 점령에도 비잔틴의 건재
In 622, despite the major progress the Sasanians were making in the area of the Aegean Sea, the Byzantine Emperor Heraclius was able to take the field with a powerful force.
** 623 (HC) : 비잔틴은 아바르족과 평화 협상 마무리: 비잔틴은 보조금 및 인질 제공

Campaigns of Heraclius in 624, 625, and 627–628 through Armenia, Anatolia, and Mesopotamia
** 624 (HC) : 비잔틴의 아르메니아 전투 승리
On March 25, 624 he again left Constantinople with his wife, Martina, and his two children; after he celebrated Easter in Nicomedia on April 15, he campaigned in the Caucasus, winning a series of victories in Armenia against Khosrow and his generals Shahrbaraz, Shahin, and Shahraplakan.[29][30]
** 624(HC) : 서고트족의 비잔틴령 Cartagena(Spania수도)점령
In the same year(624) the Visigoths succeeded in recapturing Cartagena, capital of the western Byzantine province of Spania, resulting in the loss of one of the few minor provinces that had been conquered by the armies of Justinian I.[31
** 624(HC) : 비잔틴의 Adurbadagan 및 다른 도시 점령
In 624, he advanced into northern Adurbadagan, where he was welcomed by Farrukh Hormizd and his son Rostam Farrokhzad who had rebelled against Khosrow.[38] Heraclius then began sacking several cities and temples, including the Adur Gushnasp temple.

** 626(HC) ; 비잔틴의 Colchis 점령
Several years later, in 626, he(Herculius) captured Lazistan (Colchis).
** 626 (KR): 사사니언/아바르연합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 및 함락 실패
Later that same year(626), Shahrbaraz advanced on Chalcedon on the Bosphoros and attempted to capture Constantinople with the help of Iran's Avar and Slavic allies. In this siege of Constantinople in 626, the combined Sassanid, Slavic and Avar forces failed to capture the Byzantine capital city.
** 626 (HC) : 비잔틴과 곡튀르크의 연합
** 627 (HC) : 곡튀르크의 Derbent 함락, 트빌리시 포위공격
627년 비잔틴의 동맹군인 곡튀르크는 카스피언게이트를 거쳐 Derbent요새를 함락하고 이어 트빌리시 포위공격을 비잔틴과 함께 함. 시간이 길어지자 곡튀르크군은 일시 철수하고 비잔틴군은 남쪽으로 내려가 대승리를 거둠.

Derbent citadel (source : wikipedia)

Narin Qala Castle in Tbilisi, Georgia






Nari Kala Castle in Tbilisi, Georgia
** 627(HC) : 비잔틴의 니네베 전투 승리 및 호스로 II 왕 거처 Dastagird 함락
Following the Third Perso-Turkic War in 627, Heraclius defeated the Iranian army at the Battle of Nineveh and advanced towards Ctesiphon.
Khosrow II fled from his favourite residence, Dastagird (near Ctesiphon), without offering resistance. Heraclius then captured Dastagird and plundered it.
** 627 (KR) : 호스로의 Susiana로의 피신 및 이후 내란 발생
** 628 (HC) : 628년 후반, 곡튀르크군은 다시 트빌리시 공격 하여 함락시킴
** 628 : 비잔틴(Heraclius)과 사사니언(Kavad II)의 평화 협정 체결로 종전
이상의 연대표 내용을 점검할 때, 가잠성으로 추정되는 트빌리시에 대한 공격은 마지막 628년 하나만 일치한다.
그러나 상기 지도의 먼저 지도에서 613년 비잔틴의 원정은 코카서스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611년 가잠성함락과 유사한 경로이다. 그러나 함락 여부는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는 헤라클리우스가 610년 왕이 된 후 바로 직후이기 때문에 더 애매한 시기의 기록이라 없을 수 있다.
618년 신라의 가잠성 회복은 사사니언 페르시아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시기이다. 613년부터 618년까지 사사니언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를 거쳐 남부의 시리아, 이집트를 경략하고 있어 충분히 페르시아가 북부지역을 회복할 시기이다. 그러나 관련 기록은 없다. 상기 지도에서도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북부지역 공격경로는 보이지 않는다. 주로 남부 경로를 통해 공격하였다. 가잠성이 트빌리시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620년의 사사니언 영토를 나타내는 아래 지도는 코카서스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호스로 II의 최전성기(620) 사사니언 페르시아 영토 (자료 : 위키피디아)

아나톨리아와 그 주위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622년이후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는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한다. 주로 북부지역의 경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아바르족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를 623년 협상으로 마무리하고, 624년부터 아르메니아지역에서 승리를 계속한다. 626년에는 6세기에 양국간에 치열한 전쟁터였던 Lazica지역인 Colchis지역을 점령한다.

한편 626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사사니언 아바르족 슬라브족의 연합공격이 있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626년 곡튀르크와의 연합으로 트블리시를 627년 포위 공격한다. 그러나 함락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가 가잠성을 방어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비잔틴의 남부 코카서스지역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는 (627년 니네베 전투 승리 포함), 628년 후반 곡튀르크가 트빌리시를 함락케 하고 주둔군을 전멸시킨다.

The Byzantine Empire in 629 after Heraclius had reconquered Syria, Palestine and Egypt from the Sassanid Empire. (source : wikipedia)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유사한 고구려의 신라 공격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다. 단지 신라 김유신이 629년 고구려의 낭비성을 쳐부수었다 삼국사기는 언급한다. 그러나 낭비성과 발음이 유사한 니네베성이 낭비성이라면 이지역이 고구려군지역이라면 튀르크가 니네베 전투에 참여했어야 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기록에는 없다.
그리고 종전이후 비잔틴과 사사니언이 맺은 평화협정에 따른 영토 지도에도 트빌리시 지역은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즉 일시적인 곡튀르크의 점령일 수 있다. 비잔틴의 연합군 카자르의 Ziebel이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암시하는지 모른다. Tong Yabghu카칸도 630년 내부 반란에 의해 사망한다.
III. 결 론
602-628년 기간동안의 사사니언 페르시아와 비잔틴의 긴 전쟁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로의 수도 공격이 있는 것처럼 롤러코스타를 탄 것처럼 치열한 전쟁을 하였다. 이는 결국 양국의 상황을 피폐하게 하여 아랍세력에 의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필자는 이 아랍세력이 신라의 신흥 귀족세력으로 진골이 왕이 되는 시기의 역사로 인식한다. 이는 차후 계속 연구될 것이다.
가잠성은 그 의미로 보았을 때, 코카서스지역의 트빌리시를 제외한 지역을 가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산봉우리에 나무가 많은 또는 유자나무가 있는 성곽이기 때문이다. 넓은 전장지역의 모든 성곽을 검토해 보는 노력도 힘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전에 가까운 시점인 627-628년 가잠성에 대한 언급과 트빌리시의 포위 공격이 있었다는 점에 우리는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신라가 가잠성을 방어했으나 이후 황폐한 나라가 되었다는 기록은 628년 일시적으로 가잠성(트빌리시)을 방어했으나, 이후 내란으로 말미암아 진평왕 (호스로II)이 죽은 상황을 암시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가잠성에 대한 검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이후 왕재성, 속함성, 모산성, 우명산성, 늑노현, 낭비성 등에 대한 연구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하나씩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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