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필자는 돌궐에 서해와 북해에 접한 것을 고려하여 북유럽의 돌궐이라는 글을 썼다. (아래 참조)
https://lainfos.tistory.com/412
돌궐, 회흘은 북해 위에 있었다
그동안 필자는 흉노의 별종인 돌궐이 북유럽의 해양세력이라는 추정을 하였다. (https://lainfos.tistory.com/287 참조) 이는 실위의 좌측에 돌궐이 있고 실위의 우측에는 흑수말갈이 있다는 기록에 근거
lainfos.tistory.com
https://lostcorea.tistory.com/1688
돌궐은 북유럽의 누구인가?
I. 머리말 필자는 그동안 돌궐의 정체와 위치에 대해 계속 연구해 왔다. 지난 3개의 글, "돌궐은 북해의 Saxons족인가?", " 바이킹은 한민족과 연관이 있는가?", "바이킹의 활동지역과 한민족 연관성(
lostcorea.tistory.com
그리하여 곡튀르크가 고구려가 아닌가 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래 글 참조)
https://lainfos.tistory.com/181
Gokturk (고(高)씨 튀르크 ?)는 고구려인가?
1. 서 론 본 글에서는 'Gokturk (중공 사학자들은 돌궐이라 주장)가 고구려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페르시아가 신라라 추정했다. 그런데 7세기에 백제와 신라, 고구려와
lainfos.tistory.com
그런데 이번 글에서 고구려의 온달이 신라와 중앙아시아에서 싸운 내용을 바탕으로 곡튀르크가 고구려라는 점을 더욱 확실히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이 글을 쓴다.
II. 본 론
1. 고구려의 온달은 정말 아단성에서 전사했는가?
필자는 아단성에 대해 백제 책계왕시기, 광개토태왕 시기의 아단성이 튀르키예 남단에 있는 것을 밝혔다. (아래 글 참조)
https://lainfos.tistory.com/524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아단성은 튀르키예의 Adana province에 있었다
I. 서 론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백제의 아단성을 찾고자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민을 해왔는데, 본 글에서 그 본질을 파악하고자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지난 책계왕 시기의 아단성
lainfos.tistory.com
https://lostcorea.tistory.com/1932
백제의 책계왕이 중수한 아단성과 사성은 튀르키예 Adana province에 있었다.
I. 서 론 필자는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백제의 아단성을 찾고자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민을 해왔다. 그리스 아테네를 간 Alaric I(광개토태왕 추정)의 행적을 바탕으로 아테네성이 아닌가 하기도 하
lostcorea.tistory.com
그런데, 고구려의 온달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아단성에서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는 말들을 한국사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찾아 보니, 온달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죽은 후에 아단성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래 내용 참조) 이때가 590년이라 한다.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이서(以西)[11] 땅을 되찾지 못하면[12]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했다." (자료 : 온달, 나무위키)
그래서 필자는 590년 전후 시기의 사산왕조 신라의 기록을 살펴 보았다. 그랬더니 588-589년 사이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Gorturk, 에프탈 연합과 싸운 기록이 있었다. 심지어 곡튀르크의 카칸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Bahram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이를 파헤쳐 보니 온달의 신라 전쟁 장소로 추정된다. 기존의 튀르키예 아단성 위치와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중앙아시아로서 아단성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아차성이 아닐까 한다.
이제 온달이 싸운 590년과 비슷한 시기의 페르시아와 곡튀르크의 전쟁 내용을 살펴 보자.
2. Perso-Turkic war of 588–589
588-589년 기간 페르시아와 곡튀르크 전쟁은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Bahram Chobin 대비 곡튀르크와 에프탈 연합의 전쟁인데, 트랜스옥시아나의 호라산지역에서의 전쟁이다.
588-589년 페르시아 튀르크 전쟁은 사사니언 제국과 에프탈과 그의 상전 곡튀르크 연합의 전쟁이다. 곡튀르크가 사사니언 제국을 침입함으로 갈등은 시작되었고, 사사니언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으며, 사사니언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아래 내용)
The Perso-Turkic War was fought during 588 and 589[2] between the Sasanian Empire and Hephthalite principalities and its lord the Göktürks. The conflict started with the invasion of the Sasanian Empire by the Göktürks and ended with a decisive Sasanian victory and the reconquest of lost lands.
이 전쟁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사니언의 호스로 1세(r 531-579, 진흥왕 추정)가 557년 곡튀르크와 연합하여 중앙아시아의 에프탈제국의 지배를 끝냈다. 그리하여 아무다리야강의 북부지역은 곡튀르크가 지배하고 남부지역은 사사니언이 지배했다. 호스로 1세와 곡튀르크의 이스타미 카칸이 협정을 맺어 아무다리야강을 국경으로 하였다.
그러나 588년 곡튀르크(서부튀르크칸국)의 Bagha 카칸이 부용국 에프탈과 함께 아무다리야강의 남쪽의 사사니언을 침범하여, Balkh에 주둔한 사사니언 병사들을 도륙하고 나아가 Talaqan, Badghis, Herat등의 도시들을 정복했다. (아래 지도 참조) (아래 내용 참조)
Background
In 557, Khosrow I (r. 531–579), the king (shah) of the Sasanian Empire, who had greatly increased the authority of his empire, decided to put an end to the Hephthalite Empire's domination over Central Asia. He thus allied with the Göktürks to defeat the Hephthalites. The campaign was successful and the region north of the Oxus went to the Göktürks whilst the south came under Sasanian rule. An agreement was established between Khosrow I and the Turkic khagan Istämi which set the Oxus as the frontier between the two empires. However, in 588,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under Bagha Qaghan, together with its Hephthalite subjects, invaded the Sasanian territories south of the Oxus, where they attacked and routed the Sasanian soldiers stationed in Balkh, and then proceeded to conquer the city along with Talaqan, Badghis, and Herat.[3]

Transoxiana 주위 지역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당연히 사사니언 페르시아에서는 전시 비상회의를 크테시폰에서 열어 Bahram Chobin (파르티언 귀족 Mihran 가문의 기병대장)을 곡튀르크 대상 전쟁 군의 지휘자로 선출하였고 호라산 지역 (아래 지도 참조)의 통치권을 주었다. 바람의 군대는 Nishapur (상기 지도 좌하쪽)에 집결했고 12000명의 선출된 병사인데, 기병, Daylamite족의 보병을 포함했다. (아래 내용)
War
An emergency council of war was held in Ctesiphon in which Bahram Chobin, a cavalry commander from the Parthian noble family of Mihran, was chosen to lead an army against the Göktürks and was given the governorship of Khorasan. Bahram's army gathered at Nishapur and consisted of 12,000 hand-picked soldiers, which included cavalry, Daylamite infantry, and war elephants.[4][5]

588년, 사사니언은 Nishapur에서 동부 호라산에 있는 곡튀르크를 부딪혀 전투가 벌어졌다. 바람(Bahram)은 보병을 중앙에 두고 기병을 이들 뒤로 배치하고 전투코끼리는 좌우에 두었다. Bahram은 100명의 팔라반 병사를 그를 따르게 하여 Bagha Qaghan의 위치에 잠복했다. Bagha 카칸은 전투를 관람하며 금왕좌위에 앉아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사사니언 전투 코끼리는 좌우 양쪽에서 튀르크의 부대를 공격하였고 사사니언 보병이 갈라져 기병이 튀르크 중앙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Bahram과 100명의 팔라반 병사는 Bagha 카칸의 위치를 공격했다. Bagha의 호위병들은 학살되고 Bahga 카칸도 살해되었다. Bagha의 아들 Yil-Tegin은 어떻게 다른 이들과 도망하여 Avaze성으로 들어갔다. 바람의 병사들은 추격하여 성을 포위하고 결국 곡튀르크가 항복하게 했다. (아래 내용)
In 588, the Sasanians set out from Nishapur to confront the Göktürks in eastern Khorasan, where they met to battle. Bahram organized his forces by placing his infantry in the center with the cavalry directly behind them and war elephants on the right and left. Bahram selected 100 Pahlavan soldiers to accompany him on an ambush at the position of Bagha Qaghan, where he was seated on a golden throne observing the battle. The battle began with the Sasanian war elephants on the right and left attacking the Turkic flanks on both sides, followed by the Sasanian infantry splitting to allow the cavalry behind them to smash into the Turkic center. Meanwhile, Bahram and the 100 Pahlavans assaulted the Bagha Qaghan's position. The Bagha's bodyguards were slaughtered, and Bagha was killed. The Bagha's son, Yil-Tegin, managed to escape along with some others to a castle named Avaze. Bahram Chobin's army pursued Yil-Tegin and besieged the castle, eventually forcing the Göktürks to surrender.[6]
589년에 사사니언은 Herat와 Balkh 도시 (상기 지도 참조)들을 수복하고 튀르크의 보화와 카칸의 금좌를 취했다. 그리고 아무다리야강(Oxus강)을 건너 Eastern Turks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개인적으로 화살로 "great Khan"을 죽였다. (아래 내용 )
Great Khan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궁금하다.
In 589, the Sasanians re-conquered Herat and Balkh, where Bahram captured the Turkic treasury and the Khagan's golden throne.[7][8] He then proceeded to cross the Oxus river and won a decisive victory over the Eastern Turks, personally killing a "great khan", with an arrowshot.[9][10]
Bahram은 Bukhara근처의 Baykand까지 이르렀고 죽은 카칸의 아들 Birmudha의 공격을 막아내고 Birmudha를 사로 잡아 사사니언 수도 크테시폰으로 압송했다. Birmudha는 40일후 다시 Bahram에게 보내져 튀르크 왕자는 Transoxiana로 돌려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사니언은 이제 소그디언 도시 Chach, Samarkand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사사니언 왕 Hormizd IV는 동전을 발행했다. (아래 내용)
He reached as far as Baykand, near Bukhara, and also contain an attack by the son of the deceased Khagan, Birmudha, whom Bahram had captured and sent to the Sasanian capital of Ctesiphon.[8] Birmudha was well received there, and forty days later was sent back to Bahram with the order that the Turkic prince should be sent back to Transoxiana.[8] The Sasanians now held suzerainty over the Sogdian cities of Chach and Samarkand, where the Sasanian shah, Hormizd IV, minted coins.[11]
1010년에 쓰인 Ferdowsi의 shahnameh(Book of the kings)에서는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묘사했는데, Bahram이 12000명의 병사와 함께 튀르크 Sawa 왕을 죽인 전투의 내용이다. (아래 내용)
Ferdowsi's Shahnameh (C.E. 1010) describes in legendary detail the dealings of Bahram Chobin and the Turkic "King Sawa" before and during the battle in which Bahram with his 12,000 men kills Sawa.[12]
(source : Perso-Turkic war of 588-589,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사산왕조(488-651))
상기와 같은 내용은 고구려의 온달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단지 여기서는 곡튀르크의 왕이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상기 사사니언 Bahram의 승전은 588-589년에 있었는데, 온달의 전사와 평원왕의 죽음은 590년으로 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고구려의 온달은 신라와 중앙아시아에서 싸웠으며, 곡튀르크는 고구려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3. Old Great Bulgaria의 Dulo Clan
또한 최근에 알게 된 Dulo clan이 Old Great Bulgaria의 지배층의 후손으로 Gokturk와 연관이 있다는 기록은 곡튀르크가 고구려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필자는 이미 7세기 중반의 역사만 덩그러니 가지고 있는 Old Great Bulgaria가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 시기의 고구려 역사라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645
흑해 위 Old Great Bulgaria(632-668)는 고구려 말기 역사의 일부이다
흑해위 지역에는 AD 632년부터 불가리아가 나타난다. Old Grea Bulgaria, Kara Bulgar, Volga Bulgaria 등이 그것이다. 서양사에서는 Huns, 즉 훈족과 Bulgars, 즉 부여족을 아시아에서 온 부족으로 판단한다. 필자
lostcorea.tistory.com
아래 글은 불가르의 지배왕조 Dulo가문이 튀르크의 오리진이라 한다. 이들은 훈족과 서튀르크카칸국과 연관되어 있다 한다. 특히 Dulo 가문은 Old Great Bulgaria 지배층의 후손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이들은 더 나아가 훈족의 아틸라 후손이라 한다. 가문의 우두머리는 카칸이며, 정치 지도자, 군사리더, Tengri신을 모시는 고위 승려직을 겸하였다 한다. (아래 내용 참조)
"The Dulo clan was a ruling dynasty of the Bulgars,[1] who were of Turkic origin.[2][3][4][5][6][7][8] It is generally considered that their elite[9] was related to the Huns and the Western Turkic Khaganate.[10] Particularly, it is said that the Dulo descended from the rulers of Old Great Bulgaria.[11] This state was a centralized monarchy from its inception, unlike previous Hunno-Turkic political entities, which were tribal confederations.[12]
The royal family and rulers of Old Great Bulgaria (632–668) and the first half of the First Bulgarian Empire (681–1018), in their prince lists (Nominalia of the Bulgarian khans) claimed through descent from Attila through Irnik, possibly Attila's attested son Ernak.[1][13] During the pagan period, the succession of clan leadership was based on traditions brought over to the Balkans from the Eurasian Steppe, which include the rulers' divine ancestry.[14] At the head of the clan was the Khan, who reigned as the head of state, military leader, and probably high priest of the Bulgar god, Tangra.[12] "
(source : Dulo,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Gokturk)
즉 곡튀르크가 Old Great Bulgaria 지배층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훈족의 아틸라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유럽에 진출한 훈족이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394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로마를 정벌한 훈족과 고트족의 일원인가?
서 론 그동안 필자는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를 위시하여,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등의 글에서, 로마제국, 특히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다는 주장과
lostcorea.tistory.com
온달에 대한 한국사에서의 여러 설화는 평강공주와 더불어 많은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러나 사랑의 설화로만 즐기기보다, 실제 역사적 내용을 우리는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온달에 대한 보다 깊은 고찰과 아단성 전사여부를 알아 보고자 한다.
4. 온달과 소그드인
이제까지의 에프탈에 대한 분석은 이들이 고구려(곡튀르크)나 신라(사사니언 페르시아)에 속하지 않으면서 독립적 위치를 고수하다가 557년 사사니언 호스로1세와 곡튀르크의 연합 공격으로 독립적 지위를 잃고 사사니언 페르시아나 곡튀르크에 부용국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면 이들의 전투력은 사사니언 왕 Peroz 1세를 전사시킬 정도의 강력함을 가졌으며, Kavad 1세의 망명 생활동안 군사적 지원을 할 정도였다.
우리는 온달이 소그드인 출신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의 성이 온이라 해서 그렇다 한다. 아래 사진은 소그드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스키타인들이 쓰는 Phrygian cap을 쓰고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소그드지역은 위의 Massagetae 등 스키타인 활동지역에 있다. 즉 소그드인들이 스키타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소그디언 음악인 상 (당시기) (자료 : 위키피디아)

An 8th-century Tang dynastyChinese clay figurine of a Sogdian man wearing a distinctive cap and face veil, a probable Zoroastrian priest engaging in a ritual at a fire temple, since face veils were used to avoid contaminating the holy fire with breath or saliva; Museum of Oriental Art (Turin), Italy.[197] (자료 : 위키피디아)
아래 소그드인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잠시 살펴 보자.
"A now-independent and warlike Sogdiana formed a border region insulating the Achaemenid Persians from the nomadic Scythians to the north and east.....
이제 독립적이고 전투지향적인 소그드인은 아케메니드 페르시아를 격리하는 국경지역을 형성했는데, 유목민 스키타인으로부터 북동쪽 방향이다. .. (상기 내용)
Alexander united Sogdiana with Bactria into one satrapy. The Sogdian nobleman and warlord Spitamenes (370–328 BC), allied with Scythian tribes, led an uprising against Alexander's forces. ....
알렉산더는 소그디아를 박트리아와 합쳐 하나의 위성국가로 하였다. 소그디언 귀족 전투사령관 Spitamenes (370-328 bc)는 스키타인부족들과 연합하여 알렉산더 군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상기 내용)
상기, 하기 내용을 보면, 역사적으로 소그디아는 스키타인이나 사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Finally Sogdia was occupied by nomads when the Sakas overran the Greco-Bactrian kingdom around 145 BC.....
마지막으로 소그디아는 사카가 기원전 145년 그리스-박트리아왕국을 유린할 때, 사카유목민에 의해 점령되었다. (상기 내용)
The subsequent Sasanian Empire of Persia conquered and incorporated Sogdia as a satrapy in 260,[54] an inscription dating to the reign of Shapur I claiming "Sogdia, to the mountains of Tashkent" as his territory, and noting that its limits formed the northeastern Sasanian borderlands with the Kushan Empire.[55] However, by the 5th century the region was captured by the rival Hephthalite Empire.[5
이어진 사사니언 제국은 소그디아를 260년에 점령하고 위성국화 하였다. Shapur I세 시기의 금석문은 주장하기를 " 소그디아, 타시켄트의 산맥까지" 그의 영토이며, 그 한계는 쿠샨제국에 접한 사사니언 북동쪽 국경에 달한다 언급한다. 그러나 5세기경, 이 지역은 라이벌인 에프탈제국에 의해 취해졌다. (상기 내용)
260년에 이미 사사니언 Shapur I세에 의해 소그디아를 위성국화 하였다. 이때는 신라의 첨해이사금-미추이사금 시기이다. 동해가 언급되는 시기이다.
...
The Hephthalites conquered the territory of Sogdiana, and incorporated it into their Empire, around 479 AD, as this is the date of the last known independent embassy of the Sogdians to China.[57][58] The Hephthalites seem to have invaded Sogdiana from the south after their victory over the Sasanians.[59]
에프탈은 소그디아나 영토를 정복하고 479년 제국에 귀속시켰다. 이때가 소그디언이 지나에게 마지막 독립적 사신을 보낸 시기이기 때문이다. 에프탈은 사시니언에 대한 승리후에 남쪽으로부터 소그디아를 침범한 것으로 보인다. (상기 내용)
공식적으로 소그디아는 에프탈에 의해 479년 귀속되어 557년까지 에프탈에 속해 있었다. 479년은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이며 557년은 신라의 진흥왕 시기이다.
The Hephthalites may have built major fortified Hippodamian cities (rectangular walls with an orthogonal network of streets) in Sogdiana, such as Bukhara and Panjikent, as they had also in Herat, continuing the city-building efforts of the Kidarites.[58] The Hephthalites probably ruled over a confederation of local rulers or governors, linked through alliance agreements. One of these vassals may have been Asbar, ruler of Vardanzi, who also minted his own coinage during the period.[60]
에프탈은 Herat에 한 것처럼 소그디아에 부하라, Panjikent 등 주요 요새도시들을 구측했다. 키다리트의 도시 구축과 같이. 에프탈은 연합과 협약 등의 형식을 통해 지역 지배자들의 연합형태로 지배하였다. 이러한 위성국의 하나로서 Vardanzi의 통치자 Asbar가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자신의 동전을 발행했다. (상기 내용)
...............
The Turks of the First Turkic Khaganate and the Sasanians under Khosrow I allied against the Hephthalites and defeated them after an eight-day battle near Qarshi, the Battle of Bukhara, perhaps in 557.[65] The Turks retained the area north of the Oxus, including all of Sogdia, while the Sasanians obtained the areas south of it. The Turks fragmented in 581, and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took over in Sogdia.
제일 튀르크카칸국의 튀르크와 호스로 1세의 사사니언은 연합하여 557년 Qarshi근처의 부하라전투에서 8일 전투후 에프탈을 패배시켰다. 튀르크는 아무다리야강의 북쪽을 취하고 사사니언은 그 남쪽을 획득했다. 튀르크는 581년 분할되어 서튀르크카칸국이 소그디아를 넘겨 받았다. (상기 내용)
(source : Sogd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중앙아시아)

소그디아 위치 지도 (자료 : 위키피디아)
에프탈의 전설적인 왕 Khushnavaz왕은 484년 사사니언 왕 Peroz I왕을 전사시켰다. 소그드인 계통의 인물이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Akhshunwar (Sogdian: əxšōnδār, Middle Persian: Xašnawāz) was a ruling title used by the Hephthalite kings in the 5th and 6th-centuries.[1][2]
The title is of Eastern Iranian origin; according W.B. Henning, its original form was ʾxšʾwndʾr (axšōndār), meaning "king", "ruler." G. Widengren, however, suggests that the original form was the Sogdian ʾxšʾwnwʾr, "power bearer."[3]"
(source : Akhshuwar(Khushnavaz),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Hepthalites)
상기와 같은 소그디아 역사를 고려할 때, 곡튀르크와 연합한 에프탈이 온달과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한다.
고구려 평강공주와 온달의 이야기는 이러한 소그드지역의 세력을 고구려가 흡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야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평강공주가 어려서 울었을 때, 온달 이야기를 하며 겁을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온달의 전투력이 강했다는 소문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평강공주가 이들을 포섭하여 소그드인 세력을 고구려로 흡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상기 튀르크 카칸의 에프탈에 대한 포용정책이 소그드인 온달의 고구려 귀화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튀르크카칸이 에프탈과 함께 연합하여 사사니언 페르시아를 공격하였다가, 사사니언 페르시아의 걸출한 장군 Bahram Chobin(파르티언 가문 출신, 파르티언은 스키타인)에 의해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는, 온달이 전투에서 신라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더구나 위에서 살펴 본 자료에서 튀르크의 Great 카칸도 전사했다 기술했다. 590년 죽은 평원왕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온달은 소그드인 세력이 포함된 에프탈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즉 정황적으로 신라와 고구려가 중앙아시아 트랜스옥시아나, 호라산 지역에서 싸운 것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5. 온달이 싸운 곳은 아단성이 아니라 아차성?
상기 Perso-Turkic war자료에서 곡튀르크는 Bahram장군에 밀려 Avaze성으로 후퇴했다 기술된다. (아래 재차인용 참조) 아단성이 아니라 아차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즉 백제 책계왕 시기의 아단성과 사성,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의 아단성과 잡진성은 튀르키예 남부에 있지만 중앙아시아의 온달이 전사한 성이름은 아단성이 아니라 아차성이 아닌가 짐직된다.
The Bagha's bodyguards were slaughtered, and Bagha was killed. The Bagha's son, Yil-Tegin, managed to escape along with some others to a castle named Avaze. Bahram Chobin's army pursued Yil-Tegin and besieged the castle, eventually forcing the Göktürks to surrender.[6]
III. 마무리말
필자는 그동안 신라가 사사니언 페르시아이고 곡튀르크는 돌궐이 아니라 고구려라 추정했는데, 이를 동시에 만족 시키는 연구결과를 도출해 내어 매우 기쁜 심정이다.
또한 고구려 온달의 중앙아시아 전투는 아차성에서의 전사일 가능성이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이 시기 싸움은 중앙아시아 Transoxiana, Khorasan 지역의 전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잡진성은 튀르키예 Isauria 지역에 있었다 (1) | 2025.11.21 |
|---|---|
|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백제의 암문성은 요르단의 Amman Citadel인가? (3) | 2025.10.16 |
| 고구려 대무신왕이 복속 받은 구다국은 어디인가? (0) | 2023.11.04 |
| 그리스의 조르바 댄스(Zorbas Dance)는 어디서 왔을까? (0) | 2023.09.15 |
| 고구려 - 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 (0) | 202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