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고구려 26

고구려 대무신왕이 복속 받은 구다국은 어디인가?

1. 머리말 필자는 요즈음 환단고기 내용을 분석하며, 얻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그동안 필자의 한국사 추정지인 유럽이 더 확실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환단고기 편자에 고마와 해야 할 지 아닐지 난감한 감정이다. 그러나 진실을 향한 필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항복받은 구다국의 위치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2. 구다국에 대한 자료 먼저 아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구다국에 대해 알아 보자. 요약하면, 대무신왕이 서기 26년 고구려 주변에 있는 개마국을 정벌하자, 그 소식을 듣고, 이웃한 구다국이 항복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구다국은 개마국으로부터 멀지 않은 것에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 구다국 [ ..

그리스의 조르바 댄스(Zorbas Dance)는 어디서 왔을까?

1. 서 론 그리스인에게는 국민적 춤이 하나 있다. 즉 Zorbas Dance이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축제가 있을 때 이 Zorbas Dance가 꼭 등장한다. 그만큼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춤이 되었다. 어디서나 Flash Mob 할 수 있는 이러한 국민적 춤이 있는 것이 좀 부럽기도 하다. https://youtu.be/152biXG-H7g?si=iGy405UrROO1KWhV ZORBAS FLASH MOB-.mov (Birmingham City in England) 2. 그리스 조르바 댄스의 소개 그런데 이 조르바 춤은 어깨동무를 하고 원을 그려 가며 춤을 춘다. 서양에서 보기 어려운 춤 동작이다. 우리말에도 '어깨동무'라는 말은 있지만, 국악에서 어깨 동무하고 추는 춤..

고구려 - 수, 당 전쟁은 유럽에서 있었다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요서는 이 강의 서쪽 즉 프랑스지역이 된다. 따라서 중국사는 이 프랑스 지역에서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요동의 역사, 동이의 역사는 요수의 우측, 즉 론강의 우측에 있는 역사로 추정한다. 이와 관련 하여 필자는 그동안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며, 이를 증명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필자가 증명하지 못한 것이 있다. 즉 고구려와 수, 당의 큰 전쟁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요수를 건너서 공격해 온 수나라, 당나라의 공격이며, 고구려가 잘 막아낸 역사이다. 그만큼 역사를 숨기고자 하는 역사 왜곡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 이것이 그대로 들어 나면 역사왜곡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

고구려의 수나라에 대한 살수대첩의 살수는 패수인 라인강의 지류 Saar river이다

필자는 이미 라인강을 패수라 추정했다. 따라서 살수는 패수의 지류라고 밝혀진 바 라인강의 지류에서 찾아야 한다. 그동안 살수를 찾지 못해 여러 가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 요나라 역사를 찾던 중, 고려와 거란의 전쟁 기록과 신성로마제국과 슬라브족의 전쟁 기록을 보면서 우연히 Saar river 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결국 살수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의 살수에서의 전쟁 기록, 신라의 태백산에서의 제사 내용, 그리고 스위스에서 발견한 신라하의 존재 등의 연관관계를 살펴 본바, 이를 거의 확신하게 되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살수 관련 자료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블로거 방랑자 님이 잘 정리하여 놓아 이를 인용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

흑해 위 Old Great Bulgaria(632-668)는 고구려 말기 역사의 일부이다

흑해위 지역에는 AD 632년부터 불가리아가 나타난다. Old Grea Bulgaria, Kara Bulgar, Volga Bulgaria 등이 그것이다. 서양사에서는 Huns, 즉 훈족과 Bulgars, 즉 부여족을 아시아에서 온 부족으로 판단한다. 필자는 Bulgar 부족을 부여족으로 판단한다. 부여족은 가는 곳마다 부류 등 '불'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볼가강 이름도 Bulgars라는 부여족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리고 Vulga latin이란 언어를 쓰는 로마제국도 결국 부여족의 일부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가- 이름이 붙는 지역은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부여족은 백제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부여의 전통을 더 계승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도모한 지두우는 어디인가?(수정본)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역사의 무대가 유럽과 페르시아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는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도모한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필자의 상기 주장을 검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증을 위해 우선 지두우에 관한 사료를 살펴 보고, 이어 유연에 관한 자료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타타르로 판단되는 지두우와 아바르족으로 판단되는 유연의 위치를 검토하며,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의 영토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1. 지두우 1) 중국의 북적 중 하나. 아래 자료에 의하면 5세기 당시 지두우는 중국의 16개 북쪽 이민족의 하나라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이 프랑스의 론강 서부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프랑스에 있던 중국의 위치에서 북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

371년 삼국사기 백제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리사 초략의 한성공격 (revised)

성현식님이 스카이데일리에 쓴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에서 삼국사기의 371년 평양성공격이 고구리사 초략에서는 한성공격으로 기록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평양성과 한성의 위치 추정에 고심하고 있던 필자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어 펜을 들었다. 동 기사에서는 352년 관미령 전투에서부터 언급하고 이어서 치양성 전투도 언급하고 있어, 평양성내지 한성의 전투를 분석하기 앞서 이들 지역의 전투도 같이 보고자 한다. 1. 352-369년 관미령 전투 및 이후 1) 삼국사기 기록 (352-369) 고구려 고국원왕: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2) (수정본)

부제 1: 고구려의 평양성 위치 추정의 검증 부제 2: 고구려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인가? 부제 3: 백제의 수곡성, 치양성 위치 추정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소수림왕시기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고구려의 수도, 특히 평양성의 위치를 검증하고자 한다. 이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평양성 공격과 관련되기도 하므로, 관련하여 분석하며, 수곡성, 치양성에 대한 위치 추정도 겸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전진의 부견과 많은 유사점이 있는 바, 이에 대해서도 1차적으로 검토하며, 고국원왕 시기의 분석도 겸하고자 한다. V. 소수림왕 시기 고구려와 백제, 전진 상황을 고려한 평양성 위치 추정 -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시기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372) 二年夏六月 태학을 ..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사, 로마사를 통한 고구려 수도 위치 추정 (1)

지난 번 글 발해고를 통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추정해 보았다. 론강을 압록수, 즉 요수로 판단했을 때, 발해고 자료에 나타난 중국 사서 내용을 바탕으로 거리를 계산 한 바에 의하면, 국내성은 쥬네브 정도로 나타났고, 환도성은 Bern 또는 Fribourg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평양성은 스위스의 쥬리히가 아닌가 추정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추정 결과가 고구려 역사에서 나타나는 정황과 맞는지 아니면 틀리는지를 검증하는 글이다. 국내성, 환도성은 고구려 초기 중국측과의 마찰로 인해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또한 평양성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과의 전쟁에서 언급되며, 고구려의 동천왕시기, 고국원왕 시기, 광개토태왕 시기, 장수왕 시기에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산라 진흥왕 시기와..

장수왕 (413-491) 시기의 고구려와 아틸라 포함 훈족 왕들과 오도아케르 자료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413)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414)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415)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415)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415) 416-419 : 4년 공백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420) 421-424 : 4년 공백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425)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425)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426)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427) 428-435 : 8년 공백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436)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436)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발해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위치 추정

백제의 한성 추정에 앞서,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평양성을 공격했고, 근초고왕은 평양성 남쪽에 (북)한성을 수도로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 성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여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고 신주를 세웠다 했기 때문이다. 즉 평양성의 위치가 정확하면, 한성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가 더 용이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의 위치를 추정하기 앞서, 발해고의 지리지 자료를 바탕으로 먼저 추정하고자 한다. 발해고는 1784년 정조 6년에 유득공에 의해 쓰여진 역사 지리지이다. 비록 조선 후기의 역사서라 천년 전의 고구려와 발해 시대의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만, 발해고에..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동부여는 어디인가?

그동안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동부여가 이태리 북부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확실한 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산 주위 10개국을 추정하면서 동부여의 위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부여는 북유럽의 덴마크지역으로 추정되고, 졸본부여는 론강의 지류 Jabron강 지역으로 추정되었다. 이어 비류국, 해두국, 행안국, 북옥저가 추정되었다. 특히 북옥저는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동부여는 3-4세기 연나라의 공격에 의해 북옥저 지역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

고구려 장수왕이 공격한 풍홍의 북연은 프랑스 Gaul지역에 있었다

장수왕은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공격하고 북연의 왕 풍홍을 고구려로 데려 왔다 한다. 고구려에 적대적인 후연을 광개토태왕이 멸망 시키고, 후연에 이은 북연이 생길 때에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축하사절을 보냈다 한다. 그리고 고씨가 왕에 올랐다 기록되었다. 이를 해석하면 북연은 고구려의 위성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씨의 왕이 된 것도 고구려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 시절에 동고트족 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필자는 후연의 멸망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고트족의 진출과 더불어 해석하여, 연나라가 프랑스의 Gaul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본 글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에 밀서를 보내 북위의 공격으로 위험하니 ..

백두산 주위 10국의 하나인 조나(藻那)국은 북유럽의 Jutland인가?

백두산 주위 10국의 하나로서 조나(藻那)국이 있다. 이 조나(藻那)국에 대한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다. 글자 조(藻)의 뜻풀이는 마름 조이다. 마름은 바늘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수초이다. 다른 뜻은 은화식물에 딸린 수초를 통칭한다고 한다. 즉 수초를 뜻하는 뜻이 있다. 즉 물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 만주지역에 있었던 지역 집단으로 서기 72년(태조왕 20) 2월 고구려 태조왕이 파견한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고(達賈)가 이끈 군대의 공격을 받아, 왕이 사로잡히고 병합되어 고구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나 [藻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즉 조나국은 만주지역의 한 집단으로 서기 72년 고구려 태조왕 20년, 관나부의 패자 '달고'가 이끈 군대의 ..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한 개마국은 동유럽에 있었다

부제 : 고구려의 개마대산은 Carpathian mountains에 있다. 개마국(蓋馬國)은 백두산 10개국 중의 하나이다. 개마고원, 개마대산 등 관련 언어가 많다. 아래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개마고원은 개마대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옥저가 개마대산 동쪽에 있었다고 후한서 동이전에 전한다 한다. 그리고 AD 26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개마국을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인접한 구다국이 고구려에 항복했다고 한다. 따라서 개마대산의 위치를 발견하면 개마국의 위치를 알 수 있고,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 동옥저의 위치를 알게 된다. 또한 개마국에 이웃한 구다국도 그 위치를 알게 된다. "개마국은 26년(대무신왕 9) 고구려에 복속된 소국으로, 왕의 친정을 통해 왕실의 부(部)인 계루부(桂婁..

고구려 유리왕시 황룡국은 독일 서북쪽 Cherusci에 있었다

고구려 유리왕 시기 해명태자와 관련한 황룡국도 백두산 근처 10개국의 하나라고 했다. 이제 황룡국의 위치를 추정해 보자 황룡국에 대한 국내 자료는 다음과 같다. 즉 고구려의 유리왕 시절 해명태자와 관련한 이야기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황옥이 황룡국의 여자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의 해명태자와 관련한 황룡국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서기 8년(유리왕 27) 정월에 고구려 왕태자 해명(解明)이 옛 수도인 졸본(卒本)에 거처하고 있었다. 마침 이웃 나라인 황룡국의 왕이 해명의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은 황룡국왕이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염려하여 그 사자(使者)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린 다음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하다.”라고 ..

북옥저는 스위스 북쪽 Augusta Raurica에 있었다.

부제 :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은 스위스 서쪽 Noviodunum에 있었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 즉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과 북옥저의 위치를 주정하고자 한다. 고주몽은 BC 34년 비류국을 합병한데 이어, 2년후 BC 32년 부분노 장군을 시켜 행안국을 정벌했다. 그리고 다시 4년후 BC 28년 북옥저를 부위염 장군을 통해 정벌했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필자는 최근에 프랑스에 있는 Rhone River가 압록수 즉 요수라 추정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주몽의 졸본부여의 졸본천은 Rhone river의 지류 Jabron river라 했다. 비류수가 있는 비류국은 프랑스 Vienne(Isere) 지역이라 추정했다. 특히 Vienne 시의 문장(Coat of Arms)은 (다른 도시가 주로 사자 ..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은 어디인가?

광개토태왕은 초기 392년에 거란을 정벌했다. 이 거란이 어디인가 하는 주제는 그래서 광개토태왕의 정벌 경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광개토왕의 정벌 기록과 훈족과 고트족의 당시 기록을 대조하며, 거란의 위치를 가늠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광개토왕 본기 一年夏五月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AD 391) 二年秋七月 10개의 백제성을 빼앗다 (AD 392) 二年秋九月 거란을 정벌하다 (AD 392) 二年冬十月 백제 관미성을 빼앗다 (AD 392) (자료 : 삼국사기, 인용출처 : 광개토태왕/생애, 나무위키) "9월에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포로로 잡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전쟁포로로 사로잡아오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사실 광개토대..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후연은 어디 있었는가?

우선 후연과의 전쟁기록을 광개토태왕의 기록에서 살펴 보고, 이를 그 시대의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Alaric I의 공격경로를 살펴 보자.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에 모용성은 고구려가 신라로 지원군을 파견하는 도중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로 쳐들어왔다. 후연군은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집어 삼켰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 신라로 대다수의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라 북방으로 방어군을 파견할 수 없었던 고구려는 무력하게 땅을 내줄 수 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왜군을 몰아냈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 (updated)

광개토태왕 비문을 보면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성이름이 나온다. 특히 백제구역에서 공취한 성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수묘인제도에 나오는 수묘인 출신지 성(城)이름과 지역이름도 광개토태왕시절 이미 고구려지역이었거나 새로이 확보한 지역이름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연 숫자와 간연 숫자로 그 지역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 같다. 국연은 간연보다 중요시되는 것 같은데, 본국이란 이미지가 풍긴다. 그런데 그 지역명이나 성곽이름 중에 12 한국의 이름같은 것이 등장한다. 김덕중 씨가 펴낸 '태왕의 꿈'은 광개토태왕 석비 정해본으로 책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옛 고조선의 지역을 찾아 다니며, 고조선이 망한 지역의 고조선 유민들을 해방시키고 돌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시대에는 전쟁에 져서 나라가 망하면, 그 망한 나라 유민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로마제국을 정벌했는가?

지난 글에서 우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훈족의 을딘, 고트족의 Alaric I이 유사하다는 것을 개인적인 자료, 왕조사를 비교하며 알아 보았다. 이 글에서는 지난 글에 이어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정복 전쟁이 과연 훈족의 그것과 고트족의 그것과 유사성을 갖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필자는 이미 다음/네이버 블로그 글을 통해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라는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본 분석을 이어 간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에 대해 이해를 원한다면 필자의 다음(blog.daum.net/lainfos)/네이버(blog.naver.com/lainfos) 블로그 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은 4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로마를 정벌한 훈족과 고트족의 일원인가?

서 론 그동안 필자는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를 위시하여,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등의 글에서, 로마제국, 특히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다는 주장과 로마제국과 치열한 싸움을 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는 주장을 해왔다. 그리고 '상대의 신라 (BC 57-AD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 (II), (III)'는 글들에서 이를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판단한다.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는 고구려가 유럽에 진출한 훈족과 고트족이 고구려라는 것을 백제사, 로마사에서의 전쟁사를 비교하며,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역사..

고트족은 고구려이다 (1)

고구려에 대한 역사 자료는 매우 부실하다. 삼국사기 자료를 보면 어떤 때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는 우선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의 과오가 크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 신라를 더 미화하기 위해 신라에게 부끄러운 역사는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수왕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에 밀려 동아시아로 밀려 가 있어 그 전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 후당서가 전부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인 왜곡은 중국 사가들이 했을 것이고, 여기에 이차적으로 김부식이 더 왜곡했을 것이다. 삼차적으로는 일제때 삼국사기를 왜곡한 자들이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더 왜곡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광개토태..

광개토태왕의 흔적으로 출발하기 전에 (프롤로그)

애초에 우리 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광개토태왕의 업적에 대한 관심이었다. 광할한 서유럽의 훈족 정벌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절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여 광개토태왕이후의 고구려 역사를 살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또한 유라시아에 고구려식 치가 있는 성곽이 수없이 많이 퍼져 있다는 것이 충격을 주었다. 물론 러시아의 포멘코가 로마사 등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언급도 일부 동기가 되었다. 서양 역사학자들은 중국과 아랍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포멘코가 언급한 아시아의 어느 나라 역사를 참고하여 조작했다는 언급에서 그 아시아의 어느 나라 역사가 혹시 우리나라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 보면서, 풀타크 영웅전 등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