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159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로마를 정벌한 훈족과 고트족의 일원인가?

서 론 그동안 필자는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를 위시하여, '로마제국은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등의 글에서, 로마제국, 특히 비잔틴제국은 백제이다는 주장과 로마제국과 치열한 싸움을 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는 주장을 해왔다. 그리고 '상대의 신라 (BC 57-AD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 (II), (III)'는 글들에서 이를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판단한다. 최근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는 고구려가 유럽에 진출한 훈족과 고트족이 고구려라는 것을 백제사, 로마사에서의 전쟁사를 비교하며,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역사..

고트족은 고구려이다 (1)

고구려에 대한 역사 자료는 매우 부실하다. 삼국사기 자료를 보면 어떤 때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는 우선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의 과오가 크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 신라를 더 미화하기 위해 신라에게 부끄러운 역사는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수왕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에 밀려 동아시아로 밀려 가 있어 그 전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 후당서가 전부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인 왜곡은 중국 사가들이 했을 것이고, 여기에 이차적으로 김부식이 더 왜곡했을 것이다. 삼차적으로는 일제때 삼국사기를 왜곡한 자들이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더 왜곡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광개토태..

상대 (BC 57-AD225)의 신라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II)

[2] 상대의 신라(BC57 - AD 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II) 3. 기원후 2세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지마이사금 (AD 112-13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13 : 백제 (로마)와의 화해 (2) AD 115-116 : 가야와의 전쟁 (3) AD 121-123 : 왜국과 전쟁과 강화 (4) AD 125 : 말갈과 전쟁과 백제의 지원 (5) AD 120-132 : 정변의 상황 2) 일성이사금 (AD 134-15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AD 137-142 : 말갈과 전쟁 (2) AD 138 : 북쪽의 태백산에서 제사 (3) AD 141, 149, 154 : 정변의 조짐 3) 아달라이사금 (AD 154-18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

상대의 신라(BC 57-AD225)는 파르티마 제국이다 (II)

[2] 상대의 신라(BC57 - AD 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I) 2. 석탈해 등장 이후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유리이사금 (AD 24-57)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34 : 왕권다툼과 분열된 왕국 (2) AD 36 : 낙랑과의 전쟁 (3) AD 40-42 : 맥국과의 우호관계 (4) AD 54-57 : 정변의 상황, 왕계 : 박씨 -> 석씨 2) 탈해이사금 (AD 57 - 80)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58-76 : 백제(로마)와의 전쟁 (2) AD 73 왜와의 전쟁 (3) AD 77 : 가야와의 전쟁 (4) AD 65-67 : 박씨 가문과 김씨세력의 연합 (5) AD 79-80 : 정변의 혼란 석씨왕에서 박씨왕으로 3) 파사이사금 (AD 8..

상대 (BC57-AD225)의 신라는 파르티마 제국이다 (I)

상대(BC 57-AD225)의 신라는 파르티마제국이다(I) 1. 기원 전후 초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Orodes II (BC 57-BC 37) 와 박혁거세 2) 박혁거세와 알영부인과 파르티마제국의 Orodes II와 Laodice부인 3) 신라 초기의 파르티마 - 로마의 전쟁과 신라 상황 (1) 신라 초기 시기의 로마-파르티마 전쟁 상황 (2) Carrhae 전투의 로마 패배 (3) 변한의 항복 (4) Pacorus I 의 전사와 파르티마의 정변 (5) Phraates IV(BC 37-BC2)의 집권과 금성 궁실 건축 (6) 파르티마 - 로마의 협상과 마한에의 사신 및 조문 파견 4) 동옥저의 사신과 신라 5) Phraates V의 정변과 일식현상 (BC 2, AD 1) 6) Orodes III ..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는 박혁거세의 신라이다

한무제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이어간 박혁거세의 신라라고 하면 정신이 제정신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사실로 판단된다.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들의 반성을 요하는 것이다. 보다 부드러운 제목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기를 쓴 사마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를 포함한 모두의 자성을 바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제목을 썼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 하나씩 이런 주장의 논거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본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첬다. 1) 한무제의 한나라는 페르시아 지역의 파르티마 제국이다. 우선 한나라 (전한, 후한 포함)와 파르티마 제국은 그 존재 기간이 유사하다. 그리고 Mithridates II의 내용이 한무제와 유사한 면을 보였다. 그리고 진나라..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제목 :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 그동안 필자는 고구려의 역사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로마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훈족의 유럽진출 역사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그것으로 추론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라 추론했으며, 비잔틴제국은 백제라고 추론했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는 결국 비잔틴제국을 이어 받고, 아랍역사에서 말하는 우마이야 왕조, 즉 대식국도 신라라고 추정했다. (우마이야왕조를 잇는 압바스왕조, 그리고 당과 신라의 구분, 후삼국에 이은 고려, 그리고 조선까지 계속된 연구가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 이러한 연구결과는 결국 서로마도 우리 조상들의 역사로 추정되며,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도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결국 수메르 문..

Port Hamilton은 과연 거문도인가?

1885년 영국 해군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려 Port Hamilton을 점령하였다가 1887년 철수 하였다. 제도권 역사에서는 이러한 Port Hamilton이 거문도라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 결과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 할 것이다. 우선 Port Hamilton 사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전제로 한다. 1. Port Hamilton은 1885년 당시 영국이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지역 가까이 있는 전략적 지역이다. 2. Port Hamilton은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 진출지역의 남쪽에 있는 부동항이어야 한다. 3. 1887년 영국 해군이 철수한 것을 보면 이후 러시아에 대한 견제의 ..

국가명에 대한 호기심 3 : -land

국가이름에 영어의 land 즉 땅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있다. 잉글랜드 (England, 영길이국) 스코틀랜드 (Scottland) 아일랜드 (Irland) 도이칠란트(Deutchland, 독일) 폴란드 (Poland) 네델란드 (Nethalland, Holand) 핀랜드 (Finland, Fin 족의 땅) 스위스 (Switzland) 아이슬랜드 (Iceland) 타일랜드 (Thailand) 뉴질랜드 (New Zealand) 항가리 (훈족의 땅) 이들도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명에 대한 호기심 2 : -stan

이슬람 종교를 가진 나라 중에 국가명이 -스탄 으로 끝나는 국가명이 많다. 투르키스탄 (터어키의 옛명칭) 쿠르디스탄 (쿠르드족이 사는 곳) 힌두스탄 (인도의 옛 명칭) 아프카니스탄 (간다라 지역이 있는 곳) 파키스탄 (인더스 문명, 모헨조다로 문명)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키메니스탄 다게스탄 (Dagestan) (코가서스산맥 우측의 카스피해 인접지역) 이들 대부분의 국가들이 초생달을 국기에 넣고 있다. 신라의 국기가 초생달 모형이다. (신라 - 나무 위키 참조) 난 신라가 아랍과 이슬람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역사적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나라 지역이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명에 대한 호기심 : -ia

나는 터어키 지역이 백제인 비잔틴제국의 역사지역으로 연구하면서 그 지역의 이름들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 시대 이전부터 오는 이름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된 것은 그 끝발음이 모두 -ia로 끝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리기아, 카파도키아, 리디아(Lydia, 터키 남부해안), 안탈리아(Antalya,터키남부해안), 갈라티아, 실리시아(Cilicia), 아프카지아(Abkhazia)..등등. (아래 지도 참조) 아마도 로마시대 이전부터 지역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ia가 통상적인 것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아직도 많은 국가명에서 이러한 형태의 이름을 본다. 특히 동부유럽, 발칸반도에서 많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몰다비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이구아수 폭포는 우리 조상들의 활동지가 아니었을까?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있는 나야가라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중의 하나가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에 있는 이구아수 폭포이다. 난 이러한 이구아수 폭포가 우리 조상들이 활동했던 곳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이 ‘큰 물’ 또는 ‘위대한 물’이란 뜻을 가졌다고 하는 ‘이구아수’란 이름의 끝이 ‘수’즉 물수자가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이미 뜻에도 물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고 Iguazu즉 이구아수의 끝자 ‘수’가 물수 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구아수 폭포는 파라나강의 지류인 이구아수 강에 있는 폭포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강이름을 물수자가 끝나는 이름으로 불렀다. 요수, 압록수, 한수, 아리수, 흑수, 박수, 살수, ..

광개토태왕의 흔적으로 출발하기 전에 (프롤로그)

애초에 우리 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광개토태왕의 업적에 대한 관심이었다. 광할한 서유럽의 훈족 정벌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절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여 광개토태왕이후의 고구려 역사를 살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또한 유라시아에 고구려식 치가 있는 성곽이 수없이 많이 퍼져 있다는 것이 충격을 주었다. 물론 러시아의 포멘코가 로마사 등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언급도 일부 동기가 되었다. 서양 역사학자들은 중국과 아랍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포멘코가 언급한 아시아의 어느 나라 역사를 참고하여 조작했다는 언급에서 그 아시아의 어느 나라 역사가 혹시 우리나라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 보면서, 풀타크 영웅전 등의 일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결론)

그동안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를 놓고 터어키의 Kayseri, Ankara, Constantinople을 놓고 검토해 보았다. 이제 이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을 논하고자 한다. 그동안 검토해 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Kayseri : 1) 주위에 3개의 산 (3916m, 3253m, 3756m의 화산) 이 있다. 2) 도시 북쪽에 터키 제일의 강(Kizilimark River)이 흐른다. 3)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무아위아에 의해 647년(일시적), 654년 함락되었다. 4)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 때 요새화돠었다고 한다. 5) 성곽은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졌고, 시가지를 포함한 Citadel이 있다. Ankara; 1) 구도시를 관통하는 강이 있다. (앙카라강) – S..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중C)

III. 사비성이 Constantinople일 가능성 검토 (본론 -중C) Constantinople은 서양사에서 오랫 동안 수도로서의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로마가 4두 정치에 의해 나누어져 통치될 때부터 동로마지역의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고 기술된다. 서기 3세기부터 줄곧 그러한 역할을 했다고 기술되었다. 워낙 이지역이 고대사로부터 역사가 있는 지역이므로 이해가 된다. 그러면 백제의 한성과 웅진의 천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3세기부터 수도로서의 위치를 누려 왔던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바닷가에 접해 있는 점을 고려하면 웅진과 더 관계가 깊을 것으로 판단된다. 콘스탄트노플이 사비성일까 아닌가 하는 판단은 그래서 그 의미가 많이 축소된다. 그러나 사비성의 가능성을 검토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 중B)

II. 사비성이 Ankara일 가능성에 대한 검토 Ankara가 사비성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654년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Muawiyah는 처음으로 Ankara를 합락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백제 멸망시 처음으로 함락된 것으로 아는데, 이와 일치하는 것이다. 반면 Kayseri는 647년 한번 포위되었고, 654년 카파도키아 공격시 함락된 것으로 기술된다. "In 654, the city (Ankara) was captured for the first time by the Arabs of the Rashidun Caliphate, under Muawiyah, the future founder of the Umayyad Caliphate." [출처] Ankara 2. An..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 중A)

I. 사비성이 Kayseri Castle일 가능성의 검토 문무왕의 추정되는 Muawiyah는 647년 카파도키아를 침략하여 일시적으로 Caesarea Mazada (Kayseri)를 점령했다. 654년에도 재차 카파도키아를 공격하고 Caesarea Mazada (Kayseri)를 취하였다. The Arab general (and later the first Umayyad Caliph) Muawiyah invaded Cappadocia and took Caesarea from the Byzantines temporarily in 647. [출처] Kayseri​ “In 654, Muawiyah undertook an expedition in Cappadocia while his fleet, under th..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본론 -상)

우선 우리 역사자료에서 사비성은 어떤 곳인지 사비성 자료를 아래에서 살펴 보자. “5세기 말-6세기 초에 건설되어 성왕의 천도에 의해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했다. 소부리(所夫里)라고도 불렸다.660년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대패한 백제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23일엔 문무왕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하였다.이후 신라령이 된 사비성에는 672년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0년(750년) 지명이 '부여현'으로 개칭,..” [출처] 사비성 - 나무위키 “삼국유사엔 사비를 '전백제 왕도(前百濟 王都)'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는 사실 역시 서술했다. 당시 사비엔 부산(浮山), 일산..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서론)

사비성을 논하기 앞서 필자가 이미 살펴본 아래 4개의 본 블로그 글을 먼저 읽어 보시고 이글을 접하면 보다 이해가 용이할 것으로 생각한다. 1. 백제의 백강, 기벌포, 주류성은 터어키 남부 지중해 해안에 있었다 2. 백제 부흥군의 방어 거점 임존성은 터어키의 Egirdir castle이다. 3. 백제의 방어 거점 탄현은 터어키 동남부 Cilicia 지역의 Gaziantep 지역이다. 4.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벌은 터어키의 카파도키아이다. 655년 아랍군은 Phoenix(Finike) 앞 해전에서 승리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함락 시키지는 못했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660년 기벌포 백강 써움에서 승리한 후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고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지왕이 항복했다고 했다...

백제의 계뱩장군이 싸운 황산벌 전투는 터어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있었다.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아랍의) Muawiyah는 터어키 아나톨리아 남쪽 해안 (기벌포 추정, 본 블로그의 글, ‘백제의 백강, 기벌포, 주류성은 터어키의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었다’ 참조)을 수군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육로로는 카파도키아로 공격했다. (아래 글 참조) 따라서 카파도키아는 백제의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벌 전투로 추정된다. “In 654, Muawiyah undertook an expedition in Cappadocia while his fleet, under the command of Abu'l-Awar, advanced along the southern coast of Anatolia. Emperor Constans embarked against it with a large fleet.”..

백제의 방어요지 ‘탄현’은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남부 Cilicia지역의 Gaziantep이다

백제의 성충과 흥수가 언급한 방어요지 ‘탄현’은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남부 Cilicia지역의 Gaziantep이다.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주류성, 백강, 기벌포, 임존성 등의 위치를 비정하였다. 이글에서는 백제의 성충과 흥수가 언급한 방어 요지 ‘탄현’의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탄현은 아래 글에서 보듯이 신라로부터의 육로 침입의 주요 경로라 여겨진다. 그래서 성충이 그렇게 강조한 방어지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 이길을 통하지 않으면 육로로 신라가 백제를 경략할 수 없을 정도의 필수적인 위치가 되어야 한다. “탄현(炭峴)은 백제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구축한 요충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501년(동성왕 23) 7월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략에 대비..

백제 부훙운동의 주요 항전지의 하나인 임존성은 터어키의 Egirdir castle이다

이미 본 블로그에 올린 글, ‘백제의 백강, 기벌로, 주류성은 터어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었다’에서 주류성은 터어키의 남부 Lycia지역, Antalya province의 Alanya castle 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주류성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며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임존성은 어디인가? 1) 아래 위키글에서 보듯이 임존성은 주류성 북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 그리고 성 둘레가 매우 크며 (2450m), 외벽(석벽)과 내벽으로 나누어 있다. 3) 산아래 있으며, 성안에 7-8m깊이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4) 임존성은 백제의 수도권 방어지인 오방 가운데 서방을 관할하던 방성이다. 5) 백제 부흥군이 주류성과 임존성을 근거로 하여 사비성을 회복하려다가 실패한 후 다시 임존성으로 물러..

백제의 백강, 주류성은 터어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었다

백제 최후의 항전지 백강 (백촌강), 기벌포, 그리고 주류성 등에 대해 기존 사학계는 아직도 한반도내에서 그 위치 비정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내고 있지만, 그 지리적 특성에 맞는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비잔틴제국이 백제라는 관점에서 백제의 최후 항전지 백강, 기벌포, 그리고 주류성, 피성, 덕물도 등의 위치를 비정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백제의 최후 항전지를 비잔틴제국에서 찾는 것은 필자가 본 블로그 글, ‘로마는 백제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광개토태왕이 점령한 관미성은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다’,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 시칠리아섬과 샤르데냐섬에 있었다’,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 우마이야 왕조는 신라이다’,그리고..

사라센제국의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는 구체적 자료

지난 번 본 블로그에 올린 글, “ 대식국과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우리의 식습관인 대식에 연관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무열왕계의 신라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무슬림이란 단어가 꼭 이슬람교 신앙과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초기에는 비기독교인을 무슬림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바그다드에 가까이 있는 모슬(Mosul) 시의 사람들이라는 뜻(Mosalman)으로 무슬림이란 단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사라센제국이라 함은 백의 식국인 우마이야왕조와 흑의 식국인 아바스왕조의 두 왕조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데, 원래 사라세니란 말은 옛날의 (앗)시리아의 초원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었다고 했다. 우마이야 왕조때에는 수도가 현재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오늘은 이러한 일..

대식국과 우마이야 왕조

중국 역사서에서는 사라센제국을 대식국이라 한다고 한다. 큰 대자, 먹을 식자이다. 즉 많이 먹는 나라라는 것이다. 사라센제국의 사라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우마이야 왕조 (AD 750) (source : Wikipedia) “사라센인(Saracen)은 대체로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이다. 원래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어 Σαρακηνός에서 유래 했는데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사라킨 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아라비아 지역에 기독교가 자리잡은 이후에는 아라비아에 사는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7세기 이슬람교가 성립한 뒤부터는 사실상 이슬람교도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특히 시칠리아와 남..

신라 하대 김헌창의 난은 지중해의 크레타섬과 터어키의 아나톨리아에서 있었다

신라 하대 (통일신라)의 강역을 살펴보는 방법의 하나로 장보고의 청해진을 살펴 보았다. (본 블로그의 글 "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참조) 이번에는 신라 하대의 김헌창의 난을 살펴 봄으로써 신라 하대의 강역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우선 김헌창의 난 (822-825)에 대해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김헌창은 무열왕, 문무왕의 후예로서 백제의 땅이었던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이라 하고 칭제하였다 한다. "신라 헌덕왕 14년(822년), 웅천주의 지방관으로 부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 김헌창이 나라 이름을 장안으로 하고 연호를 경운으로 정해 일으킨 반란이다. 나당전쟁 이후로 큰 전란이 별로 없었던 통일신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내전이었다. - 혼돈 속의 신라 왕위쟁탈..

장보고의 청해진은 지중해의 시실리섬, 사르데냐섬에 있었다

1. 장보고의 청해진 위치 연구의 의의 1) 신라와 당의 강역의 모호성 본 블로그 글,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 “로마는 백제이다”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이고 로마가 백제라고 주장한 필자는, 통일신라이후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위치를 놓고 적잖은 고민을 한 것이 사실이다. 위치상으로 보면, 백제의 비잔틴제국 대부분을 흡수한 우마이야왕조가 통일 신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존의 서양역사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이 점령한 무슬림국가라고 나온다. 신라나 당나라가 불교는 관련이 있었어도 이슬람교와는 관련이 있었다는 우리 역사기록은 접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우리 역사에서는 엄연히 다른 국가로 나오는데, 서양 역사기록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비잔틴제국과 무슬림 아랍국가인 사라센제국이..

탐라국은 인도양의 스리랑카를 포함한 타밀국이다.

탐라국은 어디인가? 지난 번 세계삼한역사학회에서 탐라국이 호주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옮겨 보았다. (본 블로그 글, '탐라국은 어디인가?' 참조) 그러나 탐라국이 황룡사 9층탑에 있는 9국의 하나라는 것을 보고 다시 심층적으로 살펴 보아야 하겠다고 느껴 그동안 이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보았다. 먼저 황룡사에 대해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시절 그 공사를 시작했는데, 계속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완공이 연기되었다.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장육존상의 재료는 서천축의 아육귝에서 왔다고 하는 점이 눈에 뛴다. 그리고 금과 철인 재료가 바다에 표류하다가 신라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목탑을 위해 백제의 아비지란 기술자를 초청했다.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 (645..

탐라국은 어디인가?

지난번 남극은 우리 조상의 땅이었는가? 에서 호주와 뉴질랜드가 남극과 연결된 대륙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보았다. 그리고 탐라국이었다는 주장을 보았다. 오늘은 탐라국에 대해 알아 보자. 우선 아래 도올 선생님의 유튜브에서 탐라국은 섬나라이며 신라의 주위 5대국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통일 신라시대 황룡사 9층탑에 인접국으로서 탐라국이 있다는 것이다. 강력한 인접국으로서 일본, 중화, 오월, 탐라 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 화면에서 탐라국의 역사를 보자 백제, 신라시대에 등장하는 탐라(탁라국), 번국으로 존재하는 국가로서 신라말기에는 정치적 난민을 받아 들이는 국가가 되었다. 상당히 큰 국가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여몽전쟁에서 고려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1402년 조선에서 제주도로 명칭이 변경되었..

남극은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나?

아래 화면에서 (2분 41초 지점) 남극에서 2014년 편두를 한 두개골 3개가 발견되었다 한다 편두는 우리 조상들의 풍습이다. 난 어렸을 때 어머님이 이러한 편두의 풍습을 이야기해준 기억이 난다. 그럼 남극에 우리 조상들이 살았을까? 다음 화면에서는 보다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부터 350년전까지 남극대륙이 지금의 3배 크기였으며, 지금의 호주, 뉴질랜드가 여기에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탐라국이였다는 이야기이다. 편두가 발견된 것을 보면 우리 조상의 발자취가 있던 곳임에 틀림없는데... 과거 아라비아인들은 신라를 묘사할 때 다섯개의 땅덩어리를 그렸다 했다. 호주나 뉴질랜드가 주인 없는 땅이었을 리 만무하다. 17세기에 지도에도 나타난 땅이다. 남미와 아프리카가 남극대륙에 연결된 땅..